#(7) 그 남자의 프로 정신
탁탁탁 걷는 하루의 뒤를, 우현은 저벅저벅 쫓아왔다.
엘리베이터 앞에 있던 사람들이 우현을 알아보고는 자기들끼리 눈짓을 했다.
아주 유명인인가 보다.
“하루 씨.”
우현은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다정한 음성으로 하루를 불렀다.
하루 씨라니.
이하루 씨도 아니고, 하루 씨라니.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화났나?”
“났죠, 당연히!”
우현을 휙 돌아본 하루는,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느끼고는 다시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해 섰다.
문이 열리자마자 하루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당연히 우현도 탔다.
퇴근 시간이라 사람이 많아서 하루와 우현은 붙어서 설 수밖에 없었다.
옆 사람과도 닿아 있는데, 우현과 닿은 쪽의 팔이 유독 신경 쓰였다.
얼른 1층에 도착해라. 1층에 도착해라.
층이 바뀌는 게 너무 더디게 느껴졌다.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흐른 후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하루도 내리려 했는데, 우현이 하루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생각지도 못한 당김에, 하루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풀썩, 그의 품에 안기듯이 쓰러졌다.
신선한 스킨 향기가 훅, 하루의 후각을 자극했다.
하루는 화들짝 놀라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내다가, 더 화들짝 놀라 얼른 손을 떼었다.
손바닥에 닿은 그의 가슴은 생각보다 훨씬 탄탄했다.
‘으아, 가슴을 만졌어!’
“왜 그렇게 화가 났지?”
엘리베이터에 둘만 남게 되자, 우현이 물었다.
“그럼 화가 안 나게 생겼어요? 회사에서는 비밀로 하자고 했잖아요, 제가! 분명히! 몇 번이나!”
“흐음. 난 그 말에 동의한 기억이 없는데.”
“했거든요.”
“아니, 난 분명 회사에서 누구를 만나 결혼할 계획이라면 비밀로 하겠다고 했지. 그 말에 하루 씨는 그럴 계획이 없다고 했고.”
아주 정확한 기억이었다.
하루는 할 말을 잃었다.
“하, 하지만요. 하지만…… 그래도요. 그래도 비밀로 할 수 있잖아요. 굳이 우리 사무실까지 찾아와서 여기저기 소문낼 필요도 없는 일이잖아요.”
“애인 관계를 여기저기 소문내고 싶은 건, 모든 연인들이 원하는 일 아닌가?”
“전혀요. 모든 연인들이 그런 걸 원하지는 않거든요.”
“그런가? 그렇다면 주의하지. 하지만 나는 아무리 계약이라도 확실하게 했으면 하거든. 회사에서 하루 씨랑 사귀는 걸 굳이 감춰야 할 이유도 모르겠고.”
“그놈의 하루 씨 타령 좀 그만할 수 없어요? 왜 이하루 씨라고 안 부르고 하루 씨, 하루 씨 그래요?”
“그거야.”
우현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하루는 경악했다.
지금 저 남자, 웃은 거 맞아?
비웃는 것도, 조롱하는 것도 아니고, 아주 제대로 된 미소를 짓고 있는 거, 내가 제대로 본 거야?
“지금 우리는 연인이니까.”
“거참…… 아주…… 뭐라고 해야 할지…… 대단한 프로 정신이십니다. 계약연애에도 프로가 있다면요.”
우현이 미소를 지은 채로, 하루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으악!”
하루는 생각지도 못한 접촉에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우현이 미간을 좁혔다.
“이 정도 성적 접촉도 안 되나?”
“이, 이게 무슨 성적 접촉이에요? 그냥 평범한 스킨십이지. 그리고 왜 갑자기 머리를 쓰다듬고 그래요?”
“이 정도는 연인 사이에 보통 아닌가?”
“그거야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는?”
“계약이잖아요.”
“계약이라고 해서 대충할 생각은 없는데. 하루 씨는 계약이라고 대충해서 넘기는 그런 성격이었나?”
우현이 자존심에 불붙이는 소리를 했다.
“아뇨. 저는 계약이라도 완전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성격이거든요.”
“그거 잘됐군.”
지하 3층입니다,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주차장이었다.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차에.”
“차도 있어요?”
“있어. 오늘은 데이트를 할 것 같아서 가지고 나왔지.”
“대단히 배려가 넘치시네요.”
“보통 아닌가?”
“물론 보통일지도 모르지만.”
당신이란 남자는 절대로 ‘보통’이 아닐 것 같았거든요. 아주 개차반일 줄 알았지.
라는 말은 물론 하지 못했다.
하루는 차에 대해 잘 모르지만, 우현의 차가 무척 비쌀 것 같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고급스런 검은색 승용차의 조수석 문을, 우현이 열어주었다.
“타.”
“네.”
하루는 순순히 조수석에 앉았다.
차 문까지 닫아준 후에야 우현이 운전석으로 왔다.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하는 우현을 보며, 하루는 아주 당혹스러웠다.
계약연애를 하기로 했지만, 우현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사실 둘의 계약연애가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상상을 해보지도 않았지만, 이런 식은 절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지금까지처럼 사무적으로 이하루 씨, 강우현 씨, 그리 부르며 딱딱하게 앉아 밥을 먹고 헤어지는 정도일 줄 알았는데.
이래서야 진짜 데이트를 하는 것 같다.
“이름, 불러도 되나?”
운전을 하며, 우현이 물었다.
“부르고 있잖아요.”
“하루야, 라고.”
“으아.”
“……왜 매번 반응이 그래?”
“강우현 씨랑 너무 안 어울려서요.”
“나랑 어울리는 게 어떤 건데?”
“그냥 이하루 씨, 하고 딱딱하게 부르는 거요.”
“그거야 사무적인 관계일 때지. 지금 우리는 굉장히 개인적인 관계인 것 같은데.”
“우리 지금 계약연애 하는 거거든요.”
“말했잖아. 계약이라고 해도 대충할 생각 없다고. 일주일에 두 번, 데이트를 할 때는 진짜 연인처럼 행동해줬으면 하는데. 하루 씨한테는 게 불가능한 일인가?”
“물론 가능하죠. 제 사전에 불가능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름을 불러도 되겠군.”
“네, 네. 마음대로 하세요.”
“너도 내 이름 불러.”
“에이, 어떻게 그래요? 저보다 연장자이신데.”
“그럼 오빠라고 부르든가.”
“으아!”
“제발 일일이 그런 반응 좀 보이지 마.”
“좋네요.”
“뭐가?”
“강우현 씨가 저한테 애원하는 거요. 한 번 더 해보세요. 제발이라는 말.”
당연히 화를 낼 줄 알았다.
혹은 아까처럼 한심스럽다거나 무표정하게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우현은, 연인인 강우현은 하루의 예상에서 한참을 벗어난 행동을 했다.
하루를 돌아보며 눈썹 끝을 내리고,
“제발 편하게 불러줘.”
라고 말한 것이다!
우현과는 너무너무너무너무 어울리지 않는 그 행동에, 하마터면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릴 뻔했다.
이제는 팔뚝만이 아니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오소소소소.
“저, 저, 저, 저기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우현이 원하는 계약연애를 하다 보면, 빠른 시일 내에 닭으로 변하겠다.
“저기. 강우현 씨가 하는 연애가 이런 줄은 알겠는데요. 저는 그냥 지금까지처럼 강우현 씨, 이하루 씨, 이렇게 부르는 게 좋고요.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지만 만약 연애를 한다면 그런 식으로 하고 싶었고요. 아, 내가 뭐라는 거지. 아무튼요. 우리 그냥 평소처럼 하는 게 어때요? 그게 훨씬 편하고, 저도 진심으로 연애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
“제발.”
하루가 덧붙인 ‘제발’에 우현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해야 행복할 것 같나?”
여기서 행복까지 찾아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기회인 것 같아서 하루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불러주면 아주 행복하겠어요.”
“이하루 씨가 그게 좋다면 그렇게 하지.”
호칭이 다시 이하루 씨로 바뀌어서 하루는 안도했다.
하루는 방금 전보다 편한 기분으로 조수석에 기대어, 슬쩍 우현을 돌아봤다.
운전을 하는 남자는 멋있다는 말이 있는데, 과연 그랬다.
정면을 응시하며 운전하는 우현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이 남자는 배우를 했어도 크게 성공했겠다.
“막 연예인 제의 같은 거 받아본 적 있어요?”
“응.”
“우와, 진짜요?”
“자주는 아니고.”
“연예인이나 하시지.”
“주목받는 걸 싫어해서.”
“그런 사람이 우리 사무실에 막 들어오고 그래요?”
“같은 회사 사무실에 들어가는 게 그렇게 주목받을 일인가?”
“당연하죠. 다른 부서 사람이 들어오는 건데. 그것도 소문의 강 팀장님이.”
“소문? 나에 대한 소문도 있나?”
“진짜로 몰라서 묻는 거예요?”
“아는 걸 묻는 취미는 없어.”
“네, 소문 많더라고요.”
“이하루 씨도 들은 게 있나?”
“네, 조금.”
“어떤?”
“성격이 아주아주 별로라던데요.”
“모두에게 좋아 보일 필요는 없지.”
“신입도 쫓아내고.”
“본인이 적응 못 해서 나간 거야.”
“소리도 막 지르고.”
“평범하게 얘기했더니 못 알아듣는 것 같아서.”
“늘 대단한 이유가 있으시군요.”
“이유 없는 행동은 하지 않지.”
“그래요. 장하시네요.”
자신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이 많다는 데도 우현은 전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래, 그런 성격이니까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거겠지.
“그나저나 약속 시간은 몇 시지?”
“8시에 강남역 6번, 아니 8번 출구요.”
“저녁 먹을 시간은 있겠군.”
“아뇨, 저녁은 끝내고 먹어요. 저, 화장도 좀 하고 그래야 하거든요.”
“화장도 해?”
“당연하죠. 이별을 고하러 나가는 마당이니 이왕이면 곱게 하고 나가야죠.”
“화장 안 해도 고운데.”
하루는 자기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네?”
“화장 안 해도 곱다고.”
“……아, 네.”
계약연애를 ‘제대로’ 해내기 위해 하는 말인가 보다.
그래, 우현은 프로 정신을 가지고 계약연애를 하는 사람이니까 이런 언행에 익숙해지도록 하자.
하루는 매번 놀라지 않기로 다짐했다.
하루는 휴대폰을 꺼내 낙성에게 약속시간과 장소가 틀림없는지 묻는 메시지를 보냈다.
[응. 강남역 8번 출구 8시. 확실하다.]
이번에는 확실한가 보다.
우현과의 일이 하루에게는 트라우마가 되었다.
두 번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퇴근 시간 강남에 차를 타고 가보는 건 처음이었다.
길이 어마어마하게 막혔다.
간신히 강남에 도착했을 때는, 약속까지 4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근처 커피숍에 들어가 커피를 한 잔 시켜놓고, 하루는 화장실에 들어가 화장을 했다.
처음에는 일이 있는 날에 입기 위해 여성스럽고 단정한 원피스도 사뒀었는데, 2년쯤 지난 지금은 화장 정도로만 예의를 갖추게 되었다.
쭉 초심을 유지하기란 힘든 법이다.
20분 정도 걸려 화장을 끝내고 나오자, 커피숍 중간 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우현이 보였다.
당연히 이 커피숍 안에서도 우현의 외모는 월등해서, 커피숍 안의 사람들이 다들 우현을 흘긋흘긋 쳐다보고 있었다.
바로 옆에 있을 때보다 멀리 떨어져서 보니, 그가 얼마나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저런 남자가 얼마나 성격이 개차반이기에 허구한 날 차이는 거지?’
계약연애를 시작한 지 몇 시간 되진 않았지만, 우현은 하루의 예상보다 평범했다.
물론 생각지도 못한 성격으로 하루를 당혹스럽게 만들기는 해도, ‘개차반이다!’라는 생각이 들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오늘은 처음이라 그렇겠지. 이제 곧 본색을 드러낼 거야. 긴장을 풀지 말자.’
하루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우현이 앉아 있는 곳으로 향했지만, 다음 순간 우현이 던진 말에는 너무 놀라 심장이 뚝 떨어지다 못해, 두근두근 뛰고 말았다.
“와, 진짜 이쁘다.”
사실 예쁘다는 말은 심심치 않게 들어왔다.
그러나 방금 우현에게 들은 말은 뭐랄까.
예상치 못한 순간에 들어서?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뭐야, 저 표정…….’
우현의 만면에 번진 달콤한 미소.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야?’
진짜로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연인을 보는 듯한 다정한 눈빛.
‘저런 건 반칙이야!’
조금은 허스키해서 더욱 달착지근하게 들리는 목소리.
‘반칙이라고!’
그 때문에 게임도 아닌데 반칙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장이 두근, 두근, 두근, 두근.
하루는 주먹을 꾹 쥐고 침을 꼴깍 삼킨 후에야 진정할 수 있었다.
이건 전부 저 남자가 계약연애의 프로라서다.
기억하자, 프로정신!
잊지 말자, 프로정신!
“그럼요, 내가 좀 예쁘죠.”
정신을 차린 하루는 도도한 척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자, 어서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라고!
그러나 이번에도 우현은 하루의 예상을 벗어난 반응을 보였다.
“좀이 아니야. 정말 예뻐.”
우현이 앞에 서 있는 하루의 손가락 끝을 살짝 잡고 고개를 들어, 하루와 눈을 지그시 마주치며 덧붙였다.
“이렇게 근사한 여자가 내 애인이라니, 우쭐해지네.”
그 다정한 눈빛을 마주하며, 하루는 생각했다.
잊지 좀 말라니까, 이하루! 이 남자의 프로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