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의 은밀한 하루-6화 (6/119)

#(6) 성적 접촉은 아찔하게.

그저 ‘성적 접촉’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뿐이었다.

계약사항에 나와 있는 ‘필요한 경우 성적 접촉은 손잡기, 이마에 입맞춤 정도로 제한을 둔다.’라는 조항.

거기서 ‘성적 접촉’이란 표현을 쓰면 그야말로 몸을 파는 것이 되는 것만 같아서 그저 완화된 표현을 사용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짙은 눈썹 아래에 자리 잡은 그의 깊은 눈동자에 은밀한 빛이 감돌았다.

그 오묘한 빛이 하루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섹시하다, 라는 표현은 이럴 때에 사용하는 건가 보다.

이런 와중에도 그 조각 같은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색기에, 하루는 아찔해졌다.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그의 잘생긴 얼굴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숨결이 닿을 것만 같아, 하루는 숨을 멈췄다.

부딪친 시선이 버거워, 눈도 질끈 감았다.

그러자 다른 감각이 예민해졌다.

닿은 것도 아닌데 닿은 것처럼 피부가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이마가 따뜻해졌다.

그의 숨결이 이마 위에 머무르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어떤 광경일지 상상이 됐다.

바보 같은 모습으로 눈을 질끈 감고 뻣뻣하게 앉아 있는 자신과 여유롭게 허리를 굽히고 하루의 이마 위에서 입술을 멈춘 우현.

우현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놀리는 표정일 거야.’

라고, 하루는 생각했다.

‘분명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겠지.’

그러자 울컥, 기분이 나빠졌다.

‘왜 나만 이렇게 긴장해야 해?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서 하루는 눈을 떴다.

번쩍 뜬 시야로 훅 들어오는 그의 얼굴이, 하루를 더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놀리거나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아주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

일생일대의 대사건, 혹은 선택을 앞에 둔 것 같은, 그런 신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뭐, 뭐, 뭐, 뭐예요? 왜, 왜, 왜 그러고 있어요?”

침착하게 대응하려고 했는데 벌벌 떨리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제야 우현은 정신을 차린 것처럼 천천히 허리를 펴고 똑바로 서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아, 혹시 진짜로 원했나?”

“뭐, 뭐, 뭘요?”

“접촉.”

우현이 검지로 자신의 이마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쩜 저 몸짓도 저리 영화 같은지.

잘생겨서 좋겠네!

“전혀요. 전혀 원하지 않았거든요. 이렇게 원하지 않아도 되나, 살짝은 원해야 하는 거 아냐, 싶을 정도로 원하지 않았어요.”

하루가 바락 주장했다.

기분 탓일까?

우현이 빙긋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주 짧은 순간이라서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 기분 탓이겠지. 저 남자가 그렇게 다정한 미소를 지을 리는 없으니까.

“그렇군.”

담백하게 대꾸한 우현은 다시 그의 자리로 돌아갔다.

우현이 멀어진 후에야 하루는 침착을 되찾고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향기가 바로 곁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마에 느껴지던 간질간질한 숨결도 생생했다.

이마로 슬쩍 손을 올리다가, 그가 이쪽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얼른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를 똑바로 볼 수가 없어서 시선을 계약서로 고정시켰다.

계약서를 열심히 읽는 척했지만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성적 접촉. 성적 접촉. 성적 접촉.

그 단어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우현의 말대로였다.

이마의 뽀뽀도 충분히 성적 접촉이 될 수 있다.

그것도 엄청 야하게 느껴지는, 아주 은밀하고 간질거리는 성적 접촉.

‘우와, 진짜 깜짝 놀랐네.’

입술이 닿지도 않아도 이 정도인데, 닿았으면 심장이 터졌을지도 모르겠다.

‘저 남자는 진짜 위험해. 성격이 저래도 여자들이 꼬이는 이유가 있었어.’

“그래서.”

우현의 나직한 음성이 총소리처럼 들려와서, 하루는 하마터면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넥?”

뛰어오르진 않았지만 삑사리는 났다.

저 남자 때문에 삑사리 나는 게 정말 여러 번이다.

“어땠지?”

“전혀요. 하나도 좋지 않았어요.”

“아니, 감상 말고. 성적 접촉으로 느껴지는지 안 느껴지는지를 묻는 건데.”

“아…….”

하루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좋아요. 성적 접촉이라는 표현, 허용하죠.”

짐짓 사무적으로 말하는 하루의 모습에 우현이 피식 웃었지만, 하루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있어서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럼 계약서에 문제는 없겠지?”

“네, 뭐. 없네요.”

“그럼 사인하지.”

“사인, 그래요. 사인해야죠.”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펜이 없네요.”

“지장 찍어.”

그렇게 말하며, 우현이 뭔가를 휙 밀어 보냈다.

인주였다.

준비성 좋은 남자 같으니라고.

하루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아주 천천히 인주 뚜껑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계약하는 걸 최대한 미루고 싶어서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사실은 없었다.

뭘 묻지? 뭘 물어봐야 이 계약을 안 할 수 있을까?

“그게…….”

“질질 끌지 말고 빨리 말해.”

우현은 가차 없었다.

“아니, 그게요. 그게. 아, 맞다. 이런 경우도 있잖아요.”

“어떤 경우?”

“강우현 씨한테 갑자기 운명 같은 사랑이 나타나는 경우!”

“…….”

“저랑 계약 기간 도중에 강우현 씨한테 운명 같은 여자가 나타나는 거예요. 그런 경우, 계약은 파기겠죠?”

“그렇겠지.”

“그런데 이건 강우현 씨가 계약을 어긴 거니까 저한테 충분한 위자료를 지불해주시나요? 예를 들자면, 한…… 1억 정도?”

일부러 크게 불렀다.

이런 부담을 주면 계약을 안 할 가능성도 있으니까.

그러나 우현은 우습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고작 1억이야? 좀 더 크게 불러봐.”

“……그래요, 돈 많으셔서 좋겠습니다. 우리 회사 팀장 월급이 그렇게까지 많나요?”

“벌써 내 애인 행세하는 건가?”

“제가요? 갑자기? 언제요?”

“내 사적인 부분에 대해 시시콜콜 알고 싶어 하잖아.”

“아, 이게 그렇게 되는구나. 그럼 취소.”

하루가 두 팔을 들어 엑스(X) 모양을 만들며 말했다.

“그럼 같은 경우, 이하루 씨도 애인이 생겨서 계약을 파기하게 되면 나한테 1억을 지불하는 건가?”

“아, 그럼요. 물론이죠.”

하루는 고민할 것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하루 씨도 돈이 많나 보군. 우리 회사 대리 월급이 그렇게까지 많나?”

“저기요. 제가 한 질문 따라 하지 좀 마실래요? 창의력 되게 없으시네.”

우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기에, 하루는 자기가 너무 나댄 것 같다고 후회하며 덧붙였다.

“저한테는 애인이 생길 리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제 쪽에서 계약을 파기할 일은 없으니 걱정 마시고, 저한테 줄 위자료 1억이나 잘 준비해두세요. 악착같이 받아낼 테니까.”

“왜 그렇게 애인 생길 리가 없다고 확신하지?”

“저는 사랑 안 하거든요. 연애도 안 하고, 더불어 결혼도 안 해요.”

확신에 찬 하루의 말에 우현이 미간을 좁혔다.

“이유는?”

“한 남자에게 잡혀 살기엔, 내 매력이 너무 넘쳐서?”

“…….”

“아, 그렇게 한심하다는 표정 짓기 없어요.”

“그럼 이럴 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지?”

“납득한다는 표정이요.”

“납득이 안 되면?”

“그럼 그냥 무표정하게 계시죠?”

“그러지.”

우현이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표정이 없을 때의 우현은 정말로 CG로 만들어낸 인물처럼 보였다.

현실성 없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계약, 할 수밖에 없는 거겠지.’

하루는 인주에 엄지를 꾹 눌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우현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서명을 해야 하는 부분에 지장을 다 찍고 나서 우현에게 넘겼더니, 우현은 우아하게 도장을 꺼내 서명을 끝내고 계약서 한 부와 휴대용 물티슈 하나를 하루에게 넘겼다.

이런 배려를!

하루는 속으로 감탄하며 물티슈를 꺼내 손가락에 묻은 인주를 닦아냈다.

“그럼 가지.”

하루가 인주를 다 닦자마자 우현이 일어났다.

“오늘은 데이트가 있을 테니 시간을 비워두도록 해.”

“네에…… 아니, 아니. 저기, 오늘은 제가 일이 있는데요.”

어제 못한 홀로서기의 일을 오늘 해야 했다.

“일? 아, 그 일 말하는 건가?”

“네, 오늘 제가 이별 예정이라서요.”

“그 이별, 길지 않으면 같이 가지.”

“강우현 씨가 갈 자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

“멀찌감치 떨어져서 지켜볼 거야. 애인이 딴 남자 만나는데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

“아하하하. 로맨틱하셔라.”

우현과는 어울리지 않는 발언에 하루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일어났다.

“아참, 강우현 씨. 물론 제가 회사에서 사내연애를 할 예정은 없지만요. 우리 연애는 비밀로 했으면 좋겠어요.”

“왜?”

“그게…… 소란의 중심이 되는 게 싫거든요.”

“왜?”

“호기심 참 많으신 분이네. 그냥 싫어요.”

“왜?”

“제 존재를 몰랐던 사람들까지 절 알게 되면, 반할 테니까요. 저한테!”

“…….”

“또 그렇게 한심스럽단 표정 지으시네요.”

“아, 실례.”

우현이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하루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하여간 그렇게 아시고요. 오늘 이 만남에 대해서는, 제 실력이 너무나 출중하며 식품에서 절 스카우트하고 싶어 했지만 제가 아주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얘기해둘게요.”

“이럴 때도 무표정해야 하나?”

“네.”

“그러지.”

하루는 무표정하게 서 있는 우현을 한 번 째려보고는 콧등을 찌푸리며 계약서를 탁탁 접어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럼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우현을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여 우아하게 인사하고는 휙 돌아서서 회의실을 나갔다.

우현은 무표정하게 하루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탁-

회의실 문이 닫히자, 우현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우현은 도로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손에 턱을 괴고 하루의 지장이 찍힌 계약서를 내려다봤다.

한동안 그 계약서를 내려다보던 우현의 입술이 벌어지며,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귀여워 죽겠네, 진짜.”

+++

하루의 예상대로, 사무실에 돌아가자마자 난리가 났다.

“뭐야? 무슨 일이었어?”

“그 인간이 뭐래?”

“어떻게 아는 사이야? 둘이 원래 아는 사이였어?”

“식품 강 팀장님, 소문은 들었는데 진짜 잘생겼더라고요. 혹시 둘이 사귀는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잖아. 우리 하 대리가 뭐가 부족해서 그런 남자를 사귀겠어?”

“진짜 잘생겼던데.”

“남자는 얼굴이 다가 아냐. 재윤 씨, 식품 강 팀장 소문 몰라?”

“아니, 뭐. 성격 안 좋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그 정도로 생기면 성격쯤이야, 뭐.”

“그 얼굴로 덮어지는 성격이 아냐. 게다가…… 하 대리, 괜찮은 거야?”

나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식품 강 팀장 때문에 회사를 관둔 직원이 여럿 된다고 했다.

개발지원본부 직원들로서는, 이렇게 바쁜 시기에 경력 있는 하루가 그만둘까 봐 불안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하루는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우아하게 미소를 지었다.

“뭔 소리 들었구나? 그런 거지?”

“우리 하 대리, 울 것 같네. 애써 웃을 거 없어.”

딱히 우아한 미소로 보이지는 않았나 보다.

“괜찮아요. 무슨 말을 들은 건 아니고요. 절 스카우트하고 싶다고…….”

“응? 스카우트?”

최 본부장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제가 일 잘한다는 소문을 들었다면서요. 절 식품으로 꼭 스카우트를 하고 싶다고 찾아오신 거더라고요. 어휴, 이놈의 인기.”

그러자 하루 주위에 모여 있던 직원들은 아까 하루가

“한 남자에게 잡혀 살기엔, 내 매력이 너무 넘쳐서?”

라고 말했을 때 우현이 지었던, 딱 그 표정을 지었다.

“저기요. 다들 그런 표정 좀 짓지 말아주실래요?”

“아니, 뭐…… 아하하하. 그렇지. 우리 하 대리, 능력 대단하지.”

최 본부장이 누가 봐도 거짓말이라는 말투로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진짜야?”

“진짜예요, 본부장님.”

“그래서…… 가겠다고 했어?”

“아뇨. 제가 식품에 가서 뭘 하겠어요? 아는 것도 없는데.”

“그렇지? 아니, 강 팀장, 그 사람은 왜 여기서 일 잘하고 있는 우리 하 대리를 쥐고 흔들려고 야단이야? 그렇게 사람이 필요하면 신입들한테 친절하게 좀 대하든가 하면 될 거 아냐! 우리 하 대리 데리고 가서 얼마나 부려먹으려고! 내가 강 팀장한테는 아주 단단히 말해둘게!”

물론 최 본부장이 우현에게 단단히 말해두지 못하리라는 걸, 하루를 비롯한 모든 직원들이 알고 있었다.

직원들은 하루가 한 변명을 믿을 수 없지만, 그래도 믿으려고 노력하는 눈치였다.

하루는 자리로 돌아와 모니터를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각자에게 애인이 생긴 경우 계약 파기를 하고 위자료 1억을 지불하기로 했다.

물론 하루는 계약 파기를 해서 1억을 지불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강우현 씨는 계약 파기를 하게 될 거야. 물론 내가 1억이 탐나서 이러는 게 아냐. 돈 때문에 나 자신을 팔아야 하는, 이 계약을 끝내고 싶어서 이러는 거지!’

아까 계약 파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을 때, 하루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었다.

우현에게 운명의 여자를 만나게 해주자!

아주 인내심 많고 성격 좋고 착하고 예쁜 여자.

우현이 첫눈에 반할 만큼 괜찮은 여자.

‘그런 여자를 찾아보자.’

업무 시간 내내, 하루는 그런 여자를 어디서 어떻게 찾을지 고민하면서 보냈다.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 어느덧 퇴근 시간이 되었다.

오늘은 홀로서기 업무가 있기 때문에, 하루는 서둘러 퇴근할 준비를 했다.

그때, 개발지원본부 문이 벌컥 열렸다.

하루는 짐을 챙기느라 누가 들어왔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술렁-

사무실 안이 소란스러워져서 고개를 든 하루는, 파티션 너머로 보이는 우현의 모습에 숨을 삼켰다.

저 인간이 또 왜!

우현은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루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런웨이를 걷듯 하루의 자리까지 걸어온 우현은, 자신을 노려보는 하루를 향해 말했다.

“하루 씨, 같이 퇴근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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