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우리 그거 합시다.
이 안타까운 사태를 어이해야 할꼬.
하루는 어두운 표정으로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아 있었다.
하루의 앞에는 우현이 팔짱을 낀 거만한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아 하루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사자를 앞에 둔 토끼가 이런 기분일까?
하루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지, 표정은 괜찮은지, 입술은 잘 닫고 있는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우현이 어떤 눈빛인지 알고 싶지만 눈을 들 수도 없어서, 가만히 테이블 위의 커피잔만 응시하고 있었다.
모두가 행복하게 대화를 나누는 이 커피숍에서, 하루와 우현이 앉은 자리만이 무거운 침묵에 감싸여 있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하지? 내가 먼저 말을 꺼내야 하나? 무슨 말을 하지? 죄송하다고 싹싹 빌까? 그래, 내가 뭐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니, 아니지. 아까 그 여자가 저 남자한테는 천재일우의 만남이었을지도 모르는데. 도경이라면 천재일우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지? 아니, 만화에서 본 적 있으려나?’
하루는 너무 혼란스러워서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그때, 우현이 입을 열었다.
아주 낮은 음성이었지만 하루는 알아듣고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하지만 차마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는 없어, 시선은 여전히 아래에 고정한 채였다.
“나한테 할 말 없나?”
우현은 아예 반말을 사용하기로 결정한 듯했지만, 하루는 그에 대해 불만을 가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하루는 일단 사과를 하기로 했다.
“정말 죄송해요. 장소를 착각하는 바람에 큰 실례를 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흐음.”
차라리 화라도 내주면 좋으련만.
의미를 알 수 없는 ‘흐음.’ 이후로는 아무 말도 없으니 더 초조해졌다.
이별전문가로 일한 지 2년.
이런 실수를 저지른 건 처음이라 대응 방법도 생각해놓지 않았다.
누가 알았겠는가.
장소와 사람을 착각해서, 잘 사귀고 있는 커플을 깨지게 만드는 일이 벌어질 줄이야.
“어떤 말로 사과를 드리든 마음에 안 드실 줄 압니다. 용서받기 힘든 잘못을 저질렀어요. 뭐든 말씀만 하시면 보상해드리겠습니다. 여자분을 만나서 해명하고 사과해야 한다면 그렇게 할게요. 무릎이라도 꿇을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말했는데도 우현은 대답이 없었다.
하루는 잠시 입을 다물고 ‘보상의 범위’에 대해 고민했다.
‘돈을 달라고 하면 얼마까지 보상해줘야 할까? 보험 같은 걸 들지 않아서 회삿돈으로 전부 갚아야 할 텐데, 우리 회사에 돈이 얼마나 있지?’
물론 없다.
버는 돈은 한 달마다 하루와 낙성이 나눠 가졌다.
‘낙성 선배랑 나랑 돈을 모아야 하겠지? 차라리 무릎을 꿇는 거라면 좋을 텐데.’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드디어 우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든 말씀만 하면 보상해주겠다고?”
“네? 아, 네. 아, 그런데…….”
“그런데?”
“목숨을 내놓으라든가, 누구를 죽여 달라든가, 그런 건 좀…….”
“그런 건 좀?”
“곤란해요.”
“곤란하다라……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건가?”
하루는 이 남자가 지금 날 놀리는 건가 싶어서 고개를 들었다.
우현은 웃음기 하나 없는 조각 같은 얼굴로 하루를 응시하고 있었다.
‘으아, 무서워!’
이글이글 타는 눈빛보다 잠잠하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가 더 무서웠다.
하루는 얼른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죄송해요. 그런 건 불가능합니다.”
“그렇군.”
우현이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누구 죽이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 설마 내가 목숨을 내놓길 원하는 거야?’
“그렇다면.”
하루의 생각을 끊고, 우현이 말했다.
“……지.”
마침 옆자리 사람들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우현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네?”
“그쪽이 나랑 사귀자고.”
생각지도 못한 말에 하루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농담인가 싶었지만 우현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감정이 없었다.
‘잘못 들은 건가?’
하루는 멍하니 우현의 얼굴을 살펴봤다.
앞머리를 살짝 넘긴 헤어스타일이 잘 어울리는 반듯한 이마와 짙고 가지런한 눈썹, 쌍꺼풀이 없지만 크고 가로로 긴 눈과 조각한 듯 말끔한 콧날, 굳게 다물린 붉은 입술.
다시 한번 생각하는 거지만 얼굴은 진짜 비현실적이게 끝내준다.
이런 남자가 굳이 이 와중에 사귀자는 말을 꺼낼 리 없으니, 잘못 들은 것이리라.
성격이 아무리 개차반이라도 이 얼굴이면 연애할 사람을 구하는 게 어렵진 않을 테니까.
그래서 하루는 애써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었다.
“죄송하지만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겠어요?”
“그래, 믿기지 않겠지. 나 같은 남자가 그쪽 같은 여자에게 사귀자고 말하는 게. 하지만 제대로 들은 거 맞아. 뭐든 보상해줄 거라면, 그쪽이 나랑 사귀자고.”
재수 없어!
하루는 경악했다.
‘무슨 말을 저렇게 오만방자하게 하지? 저러니까 허구한 날 차이지!’
하지만 그 기분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잘못을 한 건 이쪽이니까.
“죄송하지만 고객님.”
“말씀만 하시면 뭐든 보상하겠다면서? 지금 내 제안은 이하루 씨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도, 누구를 죽여달라는 것도 아닌데 거절할 생각은 아니겠지?”
하루는 너무 혼란스러워서, 우현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준 적 없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물론, 물론 사귀어 드릴 수 있지요. 그러나 고객님. 남녀 간의 사귐이라는 것은 역시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게 우선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고객님께 딱 맞는 여성분을 찾아 소개를 시켜드리는 것은 어떨까요?”
“나는 딱히 마음은 필요 없고. 최대한 안정적으로 오랫동안 사귈 사람이 필요한데, 이왕이면 나한테 약점이 잡힌 이하루 씨가 내 이상에 딱 걸맞은 것 같군.”
약점을 잡았다는 걸 이렇게 잘 이용하다니.
‘이런 머리 좋은 개차반 같으니.’
하루는 할 말을 잃고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저는 아무래도 누군가와 연애를 할 생각도 없고, 누구를 사랑하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요. 고객님의 사막 같은 마음에 단비가 되어줄 여성분과 연애를 하시는 게 훨씬…….”
“300만 원.”
우현이 하루의 말을 끊었다.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 그를 응시했다.
우현이 손을 들더니 손가락을 브이 자 모양으로 두 개 펼쳤다.
“일주일에 두 번 데이트에 월 300만 원. 1년 계약직. 약점을 잡았는데도 이 정도 후한 조건까지 제안하면, 이하루 씨가 거절할 이유는 없지 않나?”
하루는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돌아가면 오히려 머릿속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저 사람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내가 이름을 알려준 적이 있던가?’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은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죄송하지만 고객님. 저는 제 자신을 돈에 팔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제 나름대로의 삶의 철학이 있어서요.”
왜일까.
지금껏 무표정하던 우현에게 언뜻 표정이 떠오른 듯 보였다.
마치 아주 재미있어하는 듯한 표정.
그러나 그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이번엔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려는 걸까?
하루는 가슴이 죄여오는 기분으로 우현의 입술을 응시했다.
하루의 예상과 달리 그다음에 나온 말은 아주 ‘말이 되는’ 말이었고, 하루의 발목에 족쇄를 채우는 강력한 말이었다.
“세정 주식회사 본사의 개발지원본부 이하루 대리.”
덜컥-!
하루의 몸이 저절로 움직여 의자가 덜그럭거리며 뒤로 빠졌다.
하루의 눈이 당혹감으로 휘둥그레 커지고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하루의 심장이 떨어져 나갈 만큼 충격적인 말을 꺼낸 우현은 무심히 하루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사측에서는 이하루 대리가 투잡으로 이별전문가 같은 일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이별을 고하고 다닌다는 걸 알고 있나? 내가 알기로 우리 회사는 품위유지를 무척 신경 쓰고, 투잡은 인정하지 않는 걸로 아는데.”
큰 회사라서 안 마주치긴 뭘 안 마주쳐!
큰 회사라서 서로 모르긴 뭘 몰라!
아주 제대로 마주치고, 아주 제대로 알고 있구만!
하루는 속으로 누구인지 모를 사람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며 우현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우현은 검지로 자신의 입술 근처를 가리켰다.
“이래봬도 회사에서 꽤나 발언권이 있는 편이거든. 나도 모르게 개발지원본부의 이하루 대리가 투잡을 한다고 말을 흘릴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이하루 대리에게도 지금 나한테 벌어진 것만큼 안타까운 사태가 벌어지겠지.”
그럼 네놈이 입을 꽉 다물고 있으면 되잖아!
라는 말은 물론 하지 못했다.
하루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허벅지 위에서 꼭 잡았다.
정신을 차리자.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일단 정신을 차리고, 이 사태를 아주 우아하게 처리할 방안을 연구해보자.
하루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 하루 인생에서 가장 평온한 표정으로 우현과 눈을 맞추고 물었다.
“아까 그, 월 300만 원 제안. 아직도 유효한가요?”
+++
우현의 동생인 재현은 싱글싱글 웃으며 짜증내는 희정을 보고 있었다.
“넌 지금 웃음이 나와?”
아니나 다를까.
희정이 빽 소리를 쳤다.
“그럼 울까?”
“아, 됐어. 진짜 짜증나 죽겠네. 대체 왜 연락을 안 하는 거야? 그래, 강우현이 원래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잡는 건 알아. 그런데 난 그런 여자가 아니잖아. 적어도 나한테는 그러면 안 되잖아.”
희정은 2시간 전부터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희정이 우현에게 고백할 거라고 큰마음 먹고 말한 게 몇 달 전의 일이었다.
재현은 그때부터 이런 결과가 나올 거라고 예상했다.
우현은 결코 지나간 여자에게 연락을 하는 법이 없었다.
“넌 오빠한테 뭐 들은 거 없어? 내 얘기는 안 해?”
“응, 뭐. 알잖아. 형이 나 별로 안 좋아하는 거.”
“그래, 안 좋아할 만도 하지. 허구한 날 실실 쪼개는데 좋겠어?”
“말이 심하네. 두 시간이나 네 한탄 들어주고 있는데.”
“들어주기만 하면 뭐해? 위로도 해주고 그래야지.”
“어구, 어구, 딱해라.”
재현이 눈썹을 늘어뜨리고 달래는 말투를 사용하자, 희정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됐다, 그냥 하지 마라.”
“마음 풀어. 우리 형 그런 게 한두 번이야? 우리 형은 할아버지 눈에 들기 위해선 뭐든 하는 사람이잖아.”
실제로 그랬다.
우현과 재현의 할아버지인 강 회장은 이상하게도 우현에게만 ‘재산을 물려받고 싶으면 연애를 해라.’라는 조건을 달았다.
아마도 우현이 어릴 때부터 타인과의 관계에서 마음을 꽉 닫고 있기 때문에, 결혼도 하지 않을까 봐 걱정이 되어서 붙인 조건일 것이다.
재현이 아는 우현의 성격이라면
‘재산 따윈 됐소. 난 내가 알아서 살겠소.’
라며 박차고 나갈 텐데, 의외로 우현은 고분고분하게 강 회장의 말을 따라 사랑도 없는 연애를 해왔다.
우현의 외모를 보고 접근하는 여자들은 많기에 연애의 시작은 어렵지 않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우현은 사귀는 상대에게 예의상의 친절과 다정함도 보여주지 않았고, 여자들은 늘 질려서 우현을 떠났다.
재현이 알기론, 우현이 가장 길게 연애를 한 게 반년이었다.
그조차도 마지막 두 달은 거의 만나질 않았으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4개월이라고 봐야겠다.
-힘이 필요해.
언젠가 모처럼 우현과 술을 마셨을 때, 왜 그렇게 의미 없는 연애를 하냐는 재현의 질문에 우현은 그렇게 대답했다.
-힘? 지금도 힘은 있잖아.
-아니, 내 힘. 내가 힘이 필요해.
술기운을 빌려 대답을 들으려고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우현은 더 이상 말해주지 않았다.
‘대체 왜 힘이 필요한 거지? 뭘 하고 싶어서?’
재현은 아직도 더 밀어붙여서 그 대답을 듣지 못한 게 아쉬웠다.
“어떡하지? 우현이 오빠가 진짜로 연락 한 번 안 하면?”
희정이 재현의 옷을 잡아끌며 묻는 통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럼 네가 해봐?”
“야,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그래? 꼴도 보기 싫다고 업체 통해서 이별했는데, 이제 와서 잡으면 더 없어 보일 거 아냐.”
“업체? 심부름업체?”
“아니, 그 비슷한 건데. 이별전문업체래.”
“이별전문업체? 별게 다 있네.”
“아, 지금 그게 문제야? 네가 오빠한테 넌지시 물어봐. 지금 누구 사귀는 사람 있는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응?”
“뭐, 얼굴 보게 되면 한 번 물어볼게.”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답해주지 않으면 계속 들러붙을 것 같기에 적당히 대꾸하며, 재현은 생각했다.
‘그나저나 이별전문업체라니. 그게 대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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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그럼. 그렇게 계약하죠. 내일 계약서 작성되면 알려주세요.”
도도한 척 말하는 하루를, 우현은 아주 즐거운 기분으로 지켜봤다.
물론 우현의 얼굴에 즐거움이 드러난 건 아니지만.
“그러지.”
“그럼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아, 계약이랑은 상관없이, 오늘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태에 대해서는 정말 사과드립니다. 1년 이내에 저를 차고 싶은 기분이 드신다면, 대한민국 이별전문업체 1위 홀로서기를 이용해주세요. 그럼 이만.”
하루는 끝까지 도도하게 말하고 일어섰다.
우현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나가는 하루의 뒷모습을 슬쩍 돌아봤다.
우아한 척하느라 너무 긴장했던 건지, 하루는 커피숍을 나가기 전에 삐긋 했다.
얼른 자세를 바로 하고, 누가 봤을까 두리번거리는 하루의 모습에 웃음이 나올 뻔했다.
우현은 하루를 볼 때면 항상 그랬다.
우현은 손에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회사에서 우연히 하루를 봤을 때부터 연결고리를 만들 방법을 찾았는데, 이런 식으로 기회가 올 줄은 몰랐다.
약간 과하게 밀어붙인 건가 싶었지만, 결과적으로 원하던 것을 끌어냈으니 다행이다.
우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