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의 은밀한 하루-3화 (3/119)

#(3) 나야, 이 여자야?

망하다.

[동사] 1. 개인, 가정, 단체 따위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끝장이 나다.

하루가 휴대폰으로 쓸데없는 단어를 검색하는 이유는, 잠시라도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딴짓을 해도 현실을 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망했다.

‘아니, 아니지.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건 없어.’

하루는 버스의 다음 정류장 안내 음성을 들으며 생각했다.

‘그 사람이 내 이름을 아는 것도 아니잖아. 운이 좋으면 정년퇴직할 때까지 한 회사 사람이라는 걸 들키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내가 회사에서 튀는 짓만 안 하면 되지. 어차피 난 그렇게 눈에 띄는 것도 아니고. 우리 부서가 식품생산 쪽이랑 협업할 일도 없고.’

어둡던 앞날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래, 앞으로 회사에서 조금만 더 조심하면 돼. 문제될 건 하나도 없어.’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하루가 씩 웃는 모습에, 옆에 서 있던 여자가 슬쩍 몸을 피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소위 대기업이라 하는 ‘세정’으로 이직한 지 이제 1년.

대기업은 40대에 들어서면 퇴직 리스트에 오른다고 하는데, 그 때까지 꽉꽉 채워서 다닐 계획이었다.

퇴근 시간이 조금 지났는데도 강남 거리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길이 조금 막히는 바람에 약속 시간을 조금 넘겨 강남에 도착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철을 탔을 텐데.

우현과 이별할 때 늦는 건 처음이라, 우현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됐다.

화내지 않을까?

뭐라고 하면 어쩌지?

지난번 일이 아니라면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았을 텐데.

-그럼 신경 꺼.

비릿한 미소와 함께 날린, 그의 마지막 한 마디가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었다.

게다가 나희가 평가하길, 우현의 성격은 그야말로 ‘개차반’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개차반의 정확한 뜻이 뭐지?’

휴대폰을 꺼내 단어 검색을 해보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는 하루의 눈에, 우현의 모습이 들어왔다.

우현은 언제나처럼 강남역 6번 출구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기분 탓일까?

약간은 쌀쌀한 11월의 바람을 맞으며 혼자 서 있는 그의 모습이 조금 쓸쓸해 보였다.

문득 저 남자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자기가 차이기 위해 나왔다는 건 알고 있으려나? 항상 강남역 6번 출구인데, 원래 여자들이랑 데이트할 때 여기서 만나나?’

데이트라니.

우현이 누군가와 데이트하는 모습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우현을 차는 여자들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우현은 여자들에게도 ‘개차반’인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두 달 새에, 벌써 다섯 번이나 차이지.

‘그렇게 차이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야.’

그 때, 고개를 돌린 우현과 눈이 마주쳤다.

+++

낙성은 한 여자에게 보내는 이별의 편지를 정성껏 작성하다가 허리를 폈다.

남자 쪽에서 들어오는 이별 의뢰 중 가장 많은 것이 손으로 직접 쓴 편지였다.

본인이 직접 써서 전달해도 될 텐데,

“제가 글씨를 잘 못 써서요.”

라거나,

“글을 못 써서.”

라는 이유로 의뢰가 들어오곤 했다.

다행히 낙성은 글도, 글씨도 잘 쓰는 편이었다.

단정하고 깨끗한 글씨로, 당신과 함께한 좋았던 나날들과 당신이 내게 해준 많은 것들에 대한 고마움, 그러나 헤어져야만 하는 슬픈 현실에 대해 써내려가는 것도 이제는 기계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의뢰인은 편지에 반드시 들어갔으면 하는 것들을 적어줬고, 그것들만 적당하게 버무려 넣으면 되는 일이었다.

‘배가 불러서 그런가, 되게 졸리네. 잠 좀 깨야 할 텐데.’

지금 쓰는 편지는 ‘당신과 헤어져야 하는 슬프고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부분만 남아 있었는데, 그 부분이 가장 힘들었다.

최대한 아름답고 그럴 싸 하게 꾸며내야만 했다.

이렇게 졸린 상태에선 그게 힘들다.

잠이 좀 깰 때까지 쉴 생각으로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창을 확인하다가, 하루에게 보낸 메시지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는

‘알겠지? 강남역 6번 출구 앞, 8시까지다! 난 널 믿는다.’

였다.

뭔가 잘못됐다.

‘뭐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낙성은 얼른 컴퓨터 앞에 앉아 메일함을 열었다.

오늘 들어온 이별 의뢰 메일을 클릭했다.

[그 남자는 진짜 쓰레기예요.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도 않아.

최대한 모멸감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할 수 있다면 뺨이라도 때려주고 싶어.]

상대를 욕하는 긴 글.

그리고 가장 아래에 적힌 한 줄.

[오늘 강남역 8번 출구 앞에서 8시에 만나자고 해뒀어요. 거기서 이별 부탁드려요.]

“헉!”

낙성은 벌떡 일어나 벽시계를 확인했다.

시계는 8시 10분을 알리고 있었다.

“8번. 8번 출구였어!”

6번 출구가 아니었다.

“이거 큰일 났네.”

이별당하는 상대를 위해 약속시간 엄수는 기본적인 예의였다.

늦게 등장해서 이별을 고한다면, 차이는 사람 입장에서는 더 불쾌할 것이다.

낙성은 6번 출구에 가서 서 있을 하루에게, 황급히 전화를 걸었다.

+++

기분 탓일까?

하루를 발견한 우현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마치 못 볼 사람을 본 것처럼.

‘기분 탓이겠지. 저 사람이 우리 회사 사람이라는 걸 알게 돼서, 내가 너무 예민해진 거야.’

하루는 마음을 다잡고 우현을 향해 걸어갔다.

가방 속에 넣어둔 휴대폰이 진동했지만 무시했다.

이별의 시간이다.

이 시간에는 오롯이 상대에게 집중해야만 한다.

그게 이별 당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다.

두 달에 다섯 번 차이는 남자라도 예의를 누릴 자격이 있다.

우현의 앞에 멈춘 하루는 고개를 바짝 들어 우현과 눈을 맞췄다.

이제 와서 깨달은 건데, 우현의 눈은 무척이나 깊고 까맸다.

새까만 눈동자가 가만히 하루를 응시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민우리 님을 대신해서 이별하러 나왔습니다.”

하루가 담담하게 서두를 열며 고개를 숙였다.

그 때문에 우현의 눈이 흥미롭다는 듯 빛나는 걸 보지 못했다.

“너랑 사귀면서 단 한 순간도 행복한 적이 없어.”

하루는 시선을 땅에 둔 채로 말했다.

“지옥 그 자체였어. 너는 술만 마시면 개가 되고, 술을 마시지 않을 때는 제멋대로였지. 그걸 받아주는 게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는지, 넌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 있니? 없겠지. 있다면 그런 짓 안 했을 테니까.”

거기까지 말하고 하루는 고개를 들었다.

끝마무리를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우현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우현이 웃음을 참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지? 차이는 게 그렇게 재미있나? 그래서 두 달 새에 다섯 번이나 차일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이 사람, 변태인가?’

당황했지만 할 말은 해야만 했다.

하루는 얼른 표정을 갈무리하고 말했다.

“그래서 너랑 헤어지려고. 우리, 헤어져. 두 번 다시는 보지 말자. 길에서라도 마주치지 말자. 안녕.”

말을 끝내자마자 휙 돌아섰다.

이번에는 우현을 걱정해주는 말 따위 해주지 않기로 했다.

얼른 돌아가자.

저 남자의 눈앞에서 사라지자.

그러나.

하루의 앞을 막아선 사람이 있었다.

막아섰다기보다는 상대가 하루의 바로 뒤에 서 있어서, 돌아서자마자 몸이 부딪칠 뻔했다.

하루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여자를 쳐다봤다.

긴 머리가 잘 어울리는, 세련되고 화려한 분위기의 여자였다.

여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하루와 우현을 번갈아 쳐다봤고, 하루는 여자의 기세에 밀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뭐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여자가 입을 열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여자도 하루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다.

“오빠.”

여자의 눈이 우현에게로 향했다.

“양다리였어?”

하루도 휙 고개를 돌려 우현을 쳐다봤다.

당황한 두 여자와 달리, 우현의 표정은 덤덤했다.

우현은 무표정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글쎄는 무슨 글쎄야? 이 여자가 지금 오빠한테 헤어지자고 하잖아!”

여자가 하루의 어깨를 툭 밀며 말했다.

“그러게.”

이번에도 우현은 딴 사람의 일이라는 듯 중얼거렸다.

하루는 어리둥절했다.

누구든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고, 가방 속의 휴대폰은 계속 진동하고 있었다.

“그러게는 무슨 그러게야? 왜 남의 일처럼 그래? 오빠, 지금 나한테 양다리 걸린 거라고.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여자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강남역에서 나오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이쪽을 돌아봤다.

“딱히 할 말은 없는데.”

우현이 무심히 말했다.

여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콧등을 찡그리더니, 또 다시 하루의 어깨를 탁 밀었다.

“나야, 이 여자야?”

‘아니, 난 좀 빼주지.’

하루는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몸을 피할 수는 없었다.

우현은 하루를 한 번, 여자를 한 번 보더니 말했다.

“보다시피 그 여자한테는 방금 차여서.”

“그럼 나야?”

“네가 원한다면.”

우현의 목소리에는 감정이라곤 하나도 담겨 있지 않아서, 당사자가 아닌 하루조차도 심장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 당사자인 여자 입장에서는 더했으리라.

여자의 크게 뜬 눈에 눈물이 고이는가 싶더니 금방 사라졌다.

여자는 붉어진 눈으로 우현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 오빠가 나한테 아무 감정 없는 줄은 알고 있었어. 그래도 돈 많고 잘생겨서 사귀어준 건데, 됐어. 내가 이 꼴 보고도 사귀어야 할 만큼 부족한 년도 아니고. 헤어져, 우리. 나야말로 길에서라도 안 마주쳤으면 좋겠네.”

말을 마친 여자는 더 이상 미련 없다는 듯 길가로 걸어가, 마침 앞에 서 있던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하루는 방금 일어난 모든 일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얼어붙어 있었다.

오히려 당사자인 우현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하루를 보고 있었다.

하루는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떤 말이 이 상황에 어울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이런 상황에 어울릴 만한 말이 뭐가 있겠어?’

하루는 그냥 도망치고 싶었다.

‘그래, 어차피 내 문제도 아니잖아. 동시에 같은 곳에서 약속을 잡은 저 남자가 잘못한 거지!’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우현은 이런 상황인데도 뭔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하루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하루는 저 남자가 재미있어하는 이유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아!’

일단 무슨 말이든 하자.

그러면 얼어붙은 몸뚱이도 움직이겠지.

하루는 간신히 입술을 벌렸다.

“양다리……였어요?”

아까 그 여자의 질문에 그랬던 것처럼 글쎄, 라고 대답할 줄 알았다.

하지만 우현은 다른 대답을 했다.

“아니. 난 양다리는 안 걸쳐.”

“그럼 이건 대체 어떻게……?”

“일단.”

우현이 턱으로 하루의 가방을 가리켰다.

“그 전화나 받아보지? 아까부터 여기까지 들릴 정도로 울리던데.”

“아……!”

가방 속 휴대폰은 여전히 진동하고 있었다.

하루는 굳은 몸을 힘겹게 움직여 가방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너무 긴장해서인지 가방은 자꾸만 닫히고, 깊이 넣어둔 휴대폰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 때,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현이 하루의 가방끈을 잡아준 것이다.

하루는 눈을 크게 뜨고 우현을 돌아봤다.

우현은 됐으니까 얼른 휴대폰이나 찾으라는 듯 턱으로 가방을 가리켰다.

우현이 잡아준 덕에 가방 안을 뒤지기가 수월해졌다.

하루는 휴대폰을 꺼냈다.

[낙성대입구]

낙성에게서 온 전화였다.

‘아니, 이 선배는 일하는 중이라는 거 알면서.’

하루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우현에게서 등을 돌리고 전화를 받았다.

“왜요?”

[장소를 틀렸어!]

낙성이 빽 외쳤다.

“예?”

[장소 말이야, 장소! 강남역 6번 출구가 아니라 8번 출구였어! 내가 잘못 보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방금 전 벌어진 진흙탕 싸움의 원인을 단숨에 이해했다.

우현이 전에 없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던 이유도.

우현에게는 잘못이 하나도 없었다.

이건 약속장소를 잘못 알려준 낙성과 잘못 찾아온 하루의 잘못이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바로 등에 꽂히는 우현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루는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휴대폰 너머로 낙성이 뭐라 말했지만 그걸 듣고 있을 여유도 없었다.

하루는 뻣뻣한 몸을 간신히 움직여 우현을 돌아봤다.

하루의 가방을 들고 있던 우현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지난번에 봤을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경멸이 가득한 미소였다.

숨도 제대로 못 쉬는 하루를 향해 우현이 차갑게 말했다.

“이 안타까운 사태에 대해, 우리, 얘기 좀 해봐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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