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의 은밀한 하루-2화 (2/119)

#(2) 망했다!

그야말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하루는 멍하니 우현의 뒷모습을 쫓아 시선을 옮겼다.

“왜? 저 사람이 왜?”

나희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 저 사람이 왜요?”

당황하는 바람에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희가 웃었다.

“뭐야, 왜 그렇게 놀라? 노래 안 부르는데도 삑사리나는 건 처음 듣네.”

“아, 흠흠.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응? 뭐가? 강 팀장님 가리켰잖아.”

“예엑?”

또 삑사리가 났다.

“아하하하. 왜 그래, 하 대리? 강 팀장님이 두 달 동안 네 번이나 여자한테 차인 사람이라도 돼?”

딱 맞췄다.

역시 나희는 눈치가 빠르다.

하지만 하루는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어쨌든 우현은 고객님(물론 ‘홀로서기’에 돈을 지불하는 건 여자 쪽이지만)이고, 고객의 사생활을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닐 수는 없었다.

꿀꺽-

하루는 마른침을 삼키며, 이 사태를 어떻게 매끄럽게 넘겨야 할지 고민했다.

“아, 아뇨. 진짜 잘생긴 분이 지나가셔서 깜짝 놀라가지고요.”

“흐응, 그래?”

나희는 믿는 건지 마는 건지, 눈을 가늘게 뜨고 하루를 응시했다.

하루는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왜, 왜, 왜요?”

“저런 타입 좋아해?”

“저런 타입이요? 어떤 타입이요?”

“강 팀장님 말이야. 우리 지금 강 팀장님 얘기하고 있잖아.”

“아, 그러니까…… 전 그 강 팀장님이 누군지를 모르겠는데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루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방금 하 대리가 가리킨 사람 말이야. 그 사람이 강 팀장님이야. 아, 하 대리는 처음 보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어떡해!’

하루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 네. 전 이 회사 온 지 1년밖에 안 돼서…… 강 팀장님,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그런 경우가 있다.

두 사람이 같은 대화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다른 주제를 놓고 대화하고 있는 경우.

하루는 지금 나희가 말하는 ‘강 팀장님’이, 우현이 아닌 다른 사람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강우현. 이름도 괜찮지?”

망했다.

‘망했어! 난 망했어!’

하루는 뛰어나가 하늘을 보며 외치고 싶었다.

“그…… 강우현… 아, 그러니까 강 팀장님이 어느 부서예요?”

“식품생산본부일걸. 우리 회사에선 유명해.”

이번엔 조금 안심했다.

식품생산본부는 하루의 개발지원본부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하루는 식품생산본부의 담당 전무 얼굴조차 몰랐다.

그러니 식품생산본부의 강우현 팀장이 개발지원본부의 일개 대리 따위를 알 리는 절대 없었다.

‘그렇다면 난 얼른 이직을 준비하자. 그래, 오늘부터 이력서를 쓰는 거야.’

혼란에 빠진 하루의 머릿속에는 이 회사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래도 관둬. 강 팀장님은 안 돼.”

나희는 하루가 말이 없는 걸 다른 의미로 오해한 듯 말했다.

“아, 여자친구가 있으시…….”

거기까지 말하고 하루는 입을 다물었다.

‘아니, 있을 리가 없지. 어제, 바로 내 손으로 이별시켰으니까!’

“아니, 아니. 여자친구가 문제가 아니라…… 개차반이야.”

“개차반…이요?”

“응, 아까 하 대리가 말한 개차반 말이야. 딱 저 남자 두고 하는 말이야. 소문이 자자해.”

“아…… 그래요?”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강 팀장님이 팀장 된 다음부터, 식품생산본부에서 사표 쓰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을걸. 울면서 뛰쳐나가는 직원도 여럿 있대.”

“헐…….”

“그러니까 관둬. 나쁜 남자는 만나는 거 아냐.”

“네, 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외로우면 내가 한 명…… 아, 본부장님 차다. 얼른 들어가자.”

막 본부장의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나희가 황급히 일어났고, 하루도 남은 커피를 들고 일어섰다.

이번에는 나희의 팔짱을 끼지 않고, 나희의 뒤쪽에 숨는 듯한 자세로 걸어가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우현은 아까 안으로 들어갔지만, 어쩌면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다행히 사무실에 들어갈 때까지 우현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하루의 가슴 위에 놓인 ‘강우현’이라는 바윗돌은, 퇴근을 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

“으하하하하하!”

하루의 이야기를 들은 도경이 호쾌하게 웃었다.

도경은 덩치가 큰 만큼 웃음소리도 커서, 고깃집 안의 사람들이 전부 이쪽을 돌아봤다.

하지만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아마 그것도 도경의 덩치 때문일 것이다.

한 때 태권도 선수로 활약하며 올림픽 금메달까지 딴 도경은, 경호업체 일을 하면서 더욱 더 우락부락한 근육질이 되었다.

하루는 도경을 만날 때마다,

‘저 팔뚝. 저렇게 부풀다가는 언젠가 뻥 터지지 않을까?’

라는 걱정을 하곤 했다.

지금도 도경의 팔뚝을 보며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도경이 삼겹살을 집은 젓가락으로 하루를 가리키며 말했다.

“넌 망했어.”

“그래, 나 망한 거 알아. 잘 아니까.”

하루는 젓가락으로 도경의 젓가락을 옆으로 치우며 덧붙였다.

“제발 삼겹살 낀 젓가락으로 날 가리키지는 말아줄래? 굉장히 모멸감 느껴지거든.”

도경이 다시 삼겹살 낀 젓가락의 방향을 하루 쪽으로 틀었다.

“그러라고 한 거야.”

“네가 아니어도 아주 많이 느끼고 있으니까, 좀 치우라고. 우리, 아름다운 삼겹살은 그냥 먹는 데만 쓰자? 응?”

“아하하하하. 망했어, 이하루. 넌 망했어.”

“하아.”

내가 왜 고민 상담의 상대로 도경을 선택했을까?

이유는 있었다.

하루가 이런 고민을 털어놓을 만한 친구는 딱 세 명이었는데, 그 중 두 명은 일 때문에 무척 바빴다.

차선책으로 고른 게 도경이었는데, 그냥 집에 가서 잠이나 잘 걸 그랬다.

“그런데 그렇게 잘생겼냐?”

도경이 하루를 경멸하던 용도로 쓰던 삼겹살을 입에 넣으며 물었다.

“응, 끝내줘.”

“나보다?”

하루는 슬쩍 눈을 들어 도경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랑 비교할 상황이 아냐.”

“야, 뭐야. 나도 인기 많아.”

이건 허세가 아니라 진짜였다.

한창 선수로 활동할 때, 도경은 ‘훈남 태권도 선수’로 유명해서 팬클럽까지 생겼다.

그 팬클럽은 여전히 운영 중이었는데, 하루는 그 팬클럽 회원들을 볼 때마다

‘다들 인정이 넘치는구나. 아주 박애주의자들이야.’

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하여간 네 하잘 것 없는 외모는 갖다 붙일 게 못돼. 난 지금까지 그렇게 잘생긴 남자는 처음 봤어.”

“그럼 사귀어.”

“도경아. 제발 대화의 맥락 좀 읽고 말을 해줄래?”

“잘생겼다며? 그럼 사귀어. 얼마나 딱딱 맥락이 맞아 떨어지냐?”

“아니, 난 지금 회사를 이직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고!”

“대체 왜?”

“말했잖아! 내가 그 사람을 네 번이나 찼다니까!”

“이열. 능력자네.”

말을 말자.

하루는 그냥 고기나 먹기로 했다.

그래, 난 여기에 고기를 먹으러 온 거다.

대화를 하러 온 게 아냐.

“너네 회사 엄청 크지 않냐?”

도경이 물었다.

“응, 엄청 크지.”

“그 사람 네 사무실이랑 멀리 떨어져서 마주칠 일 없다며?”

“응. 그런데…….”

이별전문업체의 일로 만난 사람을 회사에서 보게 될 거란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세상 좁잖아. 그 남자랑 이런 식으로 같은 회사일 줄도 몰랐는데 같은 회사고. 그럼 또 어디서 어떻게 마주칠지, 어떻게 알겠어? 재수 없으면 내일이라도 회사에서 마주칠 수 있는 거지.”

“언제나 긍정적인 우리 하루가 염세적이 되셨네.”

“헉!”

하루가 깜짝 놀라 도경을 쳐다봤다.

도경이 얼른 자신의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네가 염세적이라는 단어도 알아? 그거,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쓴 거야?”

“하하하하하. 어제 만화 보는데, 거기에 나온 단어야. 좀 있어 보였지?”

“됐다. 우리 그냥 서로 행복하게 고기나 먹자.”

하루는 다시 젓가락을 움직였다.

상추에 삼겹살을 야무지게 싸서 몇 점이나 먹었을까.

도경이 또 입을 열었다.

“이직하지 마.”

“할 거야.”

“힘들게 들어간 회사잖아.”

도경의 다정한 음성에 울컥 눈물이 나올 뻔 했다.

“그래, 맞아. 힘들게 들어간 회사지. 엄청 힘들었어.”

“그러니까 이직하지 마. 뽕을 뽑고 탈퇴해야지.”

“퇴사겠지.”

“아무튼. 네가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아니, 사람을 죽이는 건 진짜 큰일인 거고. 우리 회사, 부업 안 된단 말이야.”

“뭐, 그 사람이랑 마주치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그야 그렇지만.”

“만약 마주치면, 그 다음 일은 그 때 가서 생각해. 지금은 그냥 현재를 살아.”

하루는 고개를 들어 도경을 응시했다.

“그 말도 어제 만화에서 본 거?”

도경이 씩 웃었다.

“어떻게 알았어?”

“…….”

+++

이러니저러니 해도 도경은 하루의 혼란스런 정신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도경의 말대로 우현과 마주친 후에 생각하면 될 일이다.

마주친다 해도, 우현이 하루의 부업에 대해 사측에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지 않을 가능성도 높았다.

‘그래, 생각해 보면 그렇게 크게 걱정할 일도 아니었어.’

우현과 한 회사를 다닌다는 걸 알게 된 지 열흘 남짓 지났지만, 그 이후로 우현을 마주친 적은 없었다.

하루 종일 같은 부서 사람들이랑 인사를 못 할 때도 많은 회사이니, 타부서 사람들과는 마주칠 일이 적은 게 당연했다.

열흘쯤 지나니 하루도 안정을 되찾아서, 이제는 우현의 존재를 잊고 평소처럼 생활하고 있었다.

퇴근하면 회사 일이 바쁘지 않을 때 만들려고 구상해둔 앱을 개발하고, 이별전문가 일이 들어오면 그 일을 하느라 바쁜 나날이었다.

그러던 때에 낙성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하루이틀사흘나흘. 일이다.]

“저기요, 낙성대 선배. 그거 재미없으니까 제발 좀 안 하면 안 돼요?”

[그래? 난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데. 날 낙성대입구 어쩌고 하는 것보다는 훨씬 고급스럽지.]

“이 선배가 서울대에 밀리더니 고급을 모르시네.”

[늘 말하는 거지만 낙성대는 대학이 아니란다, 아가야. 하여간 일이다.]

“네, 어떤 건데요? 옵션 있어요?”

[대면하고.]

“아, 대면하고 말하는 게 제일 힘든데.”

[지난번에 거북이 천 마리보다는 낫지 않아?]

“윽, 그건 말도 하지 마세요. 괜히 부정 탈라.”

몇 달 전, 이별 상대에게 거북이 천 마리를 접어서 유리병에 넣어 전달해달라는 의뢰를 받았었다.

처음 사귀었을 때 거북이 천 마리를 받았는데, 사귀는 동안 미안한 게 많아서 그 마음이라도 돌려주고 싶다나?

그렇게 미안하면 직접 이별 통보를 하지, 라는 생각은 안 하기로 했다.

이별의 방식과 예의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기 때문이다.

[하여간. 오늘 오후 8시. 강남역 6번 출구 앞이야.]

약속 장소를 듣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동안 바삐 보내느라 새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강우현!

“저기, 혹시 그…… 차이는 분 이름이…….”

[이름을 불러줄 것도 없다. 그 새끼로 족하다. 고객님이 그렇게 말해달라더라.]

“…….”

설마하는 생각이 확신으로 굳어졌다.

[말해달라는 내용은 메시지로 보내놓을게.]

“저기요, 선배. 저…… 오늘 야근할 것 같아요.”

하루는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물론 우현과 그 이후로 회사에서 마주친 적이 없긴 하지만, 부업 일로 만나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얼굴 각인은 이쯤에서 그만.

이대로 안 만나다 보면, 언젠가 우현의 머릿속에서도 하루의 얼굴이 희미해질 것이다.

그러면 회사에서 마주치더라도 몰라보고 지나칠지도 모른다.

하루는 그런 희망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래? 그럼 약속을 내일로 미뤄야겠네.]

“저, 내일도.”

[그럼 언제 되는데?]

“평생 안 될 것 같은데요.”

[하루이틀사흘나흘. 너, 지금 나랑 장난 하냐?]

낙성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장난은 지금 선배가 절 부르는, 그런 걸 장난이라고 하는 거고요. 저 말고 딴 사람 보내요.”

[야, 딴 사람 누굴 보내? 그래봐야 우리 회사 직원, 너랑 나뿐인데!]

그랬다.

낙성이 그 이름도 찬란하게 창업한 ‘홀로서기’의 직원은 사장인 낙성과 직원인 하루, 둘 뿐이었다.

여자와 이별할 때는 낙성이, 남자와 이별할 때는 하루가.

그렇게 둘만 있으면 된다는 게 낙성의 설명이었고, 지금껏 그게 문제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물론 거북이 천 마리 접을 땐 더 많은 인력을 간절히 원했지만.)

직원이 둘뿐이라는 게 이런 식으로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선배가 여장이라도 하고 나가는 건 어때요? 요새 인터넷에 보면 여자보다 예쁘게 화장하는 남자들 많던데.”

[시끄럽고. 오늘 8시 강남역 6번 출구야. 끊는다.]

띠링-

휴대폰 종료음이 이렇게나 심장을 철렁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

하루는 끊긴 휴대폰을 귀에 댄 채 굳어버렸다.

도경의 목소리가 하루의 귓가에 울렸다.

-이하루. 넌 망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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