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3. 조금은 특별한 꿈 (3)
시녀들이 데리고 나온 아기들은 둘 다 아스테인의 은발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아직 눈을 뜨지 않아 눈동자 색은 알 수 없지만, 얼굴에서 한 사람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분신이라고 할 만큼 아빠를 닮은 잘생긴 아들들.
시녀들은 황제를 닮은 아이의 모습에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자신의 주인도 대단히 만족하고 있으니 황제도 기뻐하겠지.
하지만 아스테인은 두 황자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곧장 침대로 향했다.
거기에는 프레이아가 지친 채로 늘어져 있었다.
“프레이아!”
아스테인은 프레이아의 이름을 불렀다.
“폐하, 우리 아들들, 잘생겼죠? 당신을 쏙 빼닮았어요.”
“프레이아, 프레이아.”
“보람이 있네요. 당신의 분신이라니.”
아스테인은 프레이아의 손을 잡고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미안, 미안합니다.”
프레이아는 그걸 보고 눈을 찡그렸다. 그리고 힘없는 손을 뻗어 아스테인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나는 지금 행복한데, 당신은 슬퍼하기예요?”
“내가 다시 아이를 갖자고 한다면, 그때는 황제의 자리를 내놓겠습니다.”
조금은 아이처럼 구는 아스테인의 모습에 프레이아는 웃음이 터졌다. 아직 웃을 힘이 없는데…….
그러다 그녀는 우연히 아스테인의 손을 봤다.
“아스테인! 당신 손! 왜 그래요?”
쉬어야 하는 프레이아가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출산한 직후라 아직 관절이 성하지 않을 텐데도 그녀는 아픈 것도 모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예요? 왜 다친 거야?”
멍이 들 정도로 벌게진 주먹에선 약간의 피도 났다. 하지만 아스테인은 그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아프지 않습니다.”
“의사는 어딨어요?”
프레이아의 부름에 아스테인은 억지로 치료받았다.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프레이아가 한숨을 쉬었다.
“데아 님이 왜 내게 자식 복이 많다고 했는지 알겠네요. 딸 하나에 아들 셋, 그래서 그런 말을 하신 게 틀림없어요.”
“아들이 셋이라고요?”
“네, 당신 포함이요.”
아스테인은 멋쩍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붕대가 감긴 자신의 손만 봤다.
프레이아는 그런 아스테인을 보며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조금 걱정이 됐다.
“우리 쌍둥이들 예뻤어요? 안 예뻤어요?”
“…….”
아스테인은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않았으니까.
“당신, 정말 괜찮은 거죠? 우리 애들, 나 때문에 미워하거나 그럴 거 아니죠?”
“당연히 아닙니다. 그저, 내게는 아이들보다 당신이 우선이라는 걸 깨달아서 그런 겁니다.”
“아이들이 나중에 자라서 알게 되면 속상해할 거예요.”
프레이아의 타박에 아스테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곧, 황제다운 늠름한 모습으로 프레이아를 방긋 웃게 만들었다.
“그 녀석들도 자라서 당신 같은 예쁜 아내를 만나면 나랑 같은 소리를 할 겁니다.”
혹시 아이들을 미워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프레이아를 사랑하는 만큼, 프레이아가 사랑하는 아이들도 예뻐해 줄 테니까.
프레이아는 만족한 얼굴로 그에게 손짓했다.
“나 수고했다고 키스해줘요.”
힘없는 프레이아를 대신해 아스테인이 열심히 혼자 움직이며 입술을 탐했다.
주변의 시녀와 하녀들은 뒤처리하다 말고, 얼굴을 붉히며 방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이러다 금방 넷째가 태어나실 것 같지 않아?”
“이번에는 황후 폐하를 닮은 황녀 쌍둥이였으면 좋겠어.”
하지만, 아스테인은 옛 단델리온 대공성에 남아 있는 약초학책을 뒤져 효과 좋은 약을 만들어냈다.
자신의 몸에 부담은 없지만, 자녀 계획에는 효과적인 약. 프레이아가 다시는 출산의 고통에 힘겨워하지 않으면서도, 서로 충분히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약을.
* * *
어느덧 열 번의 사계절이 지나갔다.
황궁 정원에는 황후와 황제가 심은 라일락 나무가 어느새 훌쩍 자라 꽃망울을 터트렸다. 나무만큼이나 아이들의 성장 속도도 빨랐다.
“덤벼, 이 애송이들아.”
“칫! 가만 안 둬! 덤비자!”
“좋아, 간다!”
라일락꽃이 활짝 핀 정원에 모인 세 남매는 목검을 들고 서로를 향해 달려갔다. 그런 아이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날 만큼.
하지만 쌍둥이 남자아이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누나인 라르엘리아가 라트리온과 르헤이안을 무릎 꿇린 탓이다.
아버지만큼이나 현란한 검 솜씨로.
“에이, 재미없어. 맨날 지기만 하고.”
쌍둥이 중에서도 동생인 르헤이안이 목검을 툭 바닥에 던졌다. 씩씩대는 모습에 라르엘리아가 눈을 찡그렸다.
“그러면 더 연습해서 날 이기면 되는 거 아냐?”
라트리온은 동생이 던진 목검을 주웠다.
“솔직히 생긴 건 어마마마면서 힘이며 머리며 감각이며 아바마마의 좋은 건 누님이 다 가져갔지 않습니까.”
라트리온이 피식 웃으면서 검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직진 못 하면 다 때려치우는 르헤이안과 달리 기다릴 줄 아는 아이였다. 돌아갈 줄도 알고.
“뭐, 그렇긴 하지.”
라르엘리아가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고개를 살짝 들었다. 화려한 머리카락 너머로 환한 햇살이 쏟아졌다. 마치 그녀가 주인공이라도 되듯이.
“재수 없어.”
“르헤이안. 너 그러다가 어마마마께 혼난다.”
아니나 다를까 건방진 꼬마의 투정은 프레이아의 눈에 띄고 말았다.
“르헤이안, 뭘 하고 있었니?”
“이크!”
르헤이안은 형이 들고 있던 검을 뺏었다.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제법 멋졌다.
“검술 훈련 중이었어요, 어마마마.”
“이런, 다들 왜 이 꼴이야? 오늘 일정을 잊은 거야?”
프레이아는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세 남매를 보고 살짝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뭘 한 거람?
“오늘도 검술 연습을 했니?”
“네. 당연히 오늘도 제가 이겼어요.”
으쓱대는 라르엘리아의 모습에 르헤이안이 잔뜩 골을 냈다.
“칫, 무식하게 힘만 세 가지고.”
“뭐? 너 말 다 했어? 이 실력도 없는 똥강아지가!”
“아바마마한테 특별 지도를 받으니까 더 잘하는 거 아냐! 나도 받으면 잘 한다고!”
르헤이안이 잔뜩 흥분했다. 프레이아의 앞인 것도 잊은 모양이었다. 얼굴이 빨개지는 것도 모르고 소리를 질러댔다.
라트리온은 그런 제 쌍둥이 동생을 슬쩍 외면했다.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는 듯이, 황궁 정원의 푸른 장미를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다들 그만.”
차가운 목소리에 세 남매의 움직임이 모두 일시 정지됐다. 그리고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프레이아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오늘 가족 초상화를 그리는 날 아니었니? 다들 단정하게 준비하고 있으라고 했는데, 그새를 못 참고 이러고 싸우고 있었어?”
“싸운 건 아닙니다. 어마마마.”
라트리온이 슬쩍 끼어들었다. 하지만 엄마의 얼굴을 보고 다시 입을 쑥 집어넣었다.
과거 온화함의 대명사라는 성녀 출신이 맞나 싶은 무서운 얼굴이었다.
“맞아요, 어마마마. 다 같이 실력을 쌓으려고 검술 대련을 한 거예요. 정정당당하게 제가 이겼는데 르헤이안이 인정을 못 하고 일방적으로 시비를 걸기는 했지만…….”
“아바마마가 누님을 편애해서 누님에게만 검술을 가르쳐주시니까 당연히 누님이 이기죠!”
르헤이안이 다시 소리를 꽥 질렀다.
당연하게도 프레이아의 인상이 굳어졌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감이 오질 않았다.
분명 모두에게 골고루 사랑을 나누어줬는데…….
“내가 뭘 어쨌다는 거지?”
그때 아스테인이 걸어왔다. 그는 오늘 초상화 때문인지 정복 차림에 망토까지 걸치고 있었다. 그것도 특별히 푸른 망토를.
“아바마마, 얘들이 저만 아바마마께 검술을 배워서 잘한다고 억지를 부리잖아요. 저만 편애하는 거라고.”
아스테인의 얼굴이 아주 살짝 움찔했다.
프레이아는 그런 아스테인을 조금 한심하게 봤다.
그가 쌍둥이들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뿐인 딸인 데다가 프레이아를 쏙 빼닮은 라르엘리아를 아주 찔끔 더 예뻐했다.
핑계는 어린 시절의 프레이아를 보는 것 같아 좋다였지만……. 누가 딸바보 아니랄까 봐.
그래서 티 내지 말라고 혼냈었고, 아스테인도 그런 점에서 많이 노력했다. 그는 프레이아가 낳은 소중한 아이들을 다 사랑했으니까.
“내 수업을 듣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지?”
하지만 이건 그 문제와는 달랐다. 편애가 문제가 아니었다.
아스테인은 다정한 아빠였지만, 엄격한 선생님이기도 했으니까.
“목검으로 더미 치기 바른 자세로 연속 300번이요.”
“그래, 하지만 너희는 아직 그걸 해내지 못했잖아. 라르엘리아는 그걸 하기 위해 한 달간 손에 물집이 잡히도록 노력했는데, 너희는 아니잖아?”
아스테인은 특유의 침착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눈은 라르엘리아를 칭찬하고 있었고.
“그래서 오늘부터 내게 검을 배울 준비가 된 거니? 더미 치기 연속 300번 할 수 있겠어?”
“저는 검술보다는 약초학이나 연금술 같은 게 좋아요. 마법도 잘 개발하면 일상생활을 더 윤택하게 할 것 같아서 연구가 나을 것 같아요. 힘쓰는 일에 시간 낭비 안 하겠습니다.”
라트리온은 똑 부러지게 자신의 목표를 이야기했다.
“저는…….”
“르헤이안, 너는? 네가 제일 내게 검을 배우고 싶어 하지 않았니?”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르헤이안은 욕심에 비해 끈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레이아는 다른 질문을 했다.
“르헤이안? 라트리온은 미래에 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하고, 라르엘리아는 아바마마를 이어서 황제가 되는 게 꿈이라는데……. 너는 어때?”
“나도 황제가 되고 싶어요…….”
아스테인과 프레이아는 순간 눈을 마주쳤다. 황실의 주인으로서 제일 난감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아스테인이 겪었던 비극의 원인이기도 했고.
황위 다툼이 일어나게 될까? 아이들에게도?
그나마 아스테인은 어머니의 존재라도 달랐지만, 이들은 모두 친남매인데…….
“원래 제국은 남자만 황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다고 했잖아요. 그 법을 바꾼 것도 누님을 편애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당연히 우리 형제의 것이었는데…….”
“라르엘리아를 위해서였다면 그냥 성별에 상관없이 첫째에게 황위를 물려준다고 했었겠지.”
아스테인의 얼굴도 살짝 굳었다. 그도 프레이아처럼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 것 같았다.
“바뀐 내용은, 황녀나 황자 중에서 가장 황제의 자질이 큰 사람에게 황위를 물려주겠다 아니었니?”
“하지만 사람들이…….”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가 무슨 상관이지? 그리고 네가 라르엘리아를 뛰어넘을 노력을 했다면 그런 불평을 할 이유가 없을 텐데?”
아스테인의 말에 르헤이안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조금은 자존심이 상한 얼굴이었지만, 반박할 것이 전혀 없었다.
모든 면에서 조금만 힘들면 쉽게 포기하는 자신이 라르엘리아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으니까.
“죄송……해요.”
“죄송할 게 뭐가 있는지 모르겠구나. 물론 네가 노력해서 라르엘리아와 경쟁한다면 공정하게 봐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아스테인이 한쪽 무릎을 꿇고 르헤이안과 눈을 맞췄다.
“라르엘리아를 편애한다고 느끼게 했다면, 그건 내가 잘못한 거겠지. 내가 사과하마.”
황제의 사과가 어떤 의미인지는 아이들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르헤이안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대로 아스테인의 품에 안길 만큼.
“으아아앙, 진짜 잘못했어요!”
프레이아는 그 모습을 웃으면서 지켜봤다. 그리고 남편에게 슬쩍 한마디를 던졌다.
“르헤이안이 눈물을 많이 흘리는 건 분명 당신을 닮아서일 거예요.”
아스테인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자, 이제 얼른 씻고, 초상화를 그리러 가볼까?”
아스테인이 르헤이안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아, 오늘 애들 머리도 단정하게 자르고, 드디어 실 팔찌도 만들어 두려고 했는데 늦어서 안 되겠네요.”
삼 남매는 모두 머리가 길었고, 하나같이 예쁘게 땋아져 있었다.
이건 오로지 프레이아의 욕심이었다.
황궁에서 여장한 아스테인의 초상화를 발견한 직후부터 일어난 일이었다. 차마 여장까지는 시키지 못했지만…….
“어마마마, 정말로 실 팔찌를 만들어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선물하면 사랑이 이루어져요?”
“그럼. 이 엄마랑 아빠를 보면 알잖아.”
두 사람이 나란히 손을 내밀었다. 이제 조금 많이 낡긴 했지만, 여전히 푸른색과 은색의 실 팔찌는 그들의 양손에서 그들의 사랑을 이어주고 있었다.
“와, 진짜 신기하다.”
“대신 신중하게 결정해야 해. 나중에 어른이 되어 정말 인연이라고 생각하는 단 한 사람에게만 줄 수 있는 거니까.”
삼 남매는 하나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실 팔찌를 관찰했다. 아직은 어려서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인연이 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들의 부모 같은 삶은 살고 싶었다.
“초상화 그리기 전에 이거부터 하면 안 돼요?”
“안 돼. 씻고 다시 단장하려면 한참 걸리잖아. 초상화만으로도 시간이 오래 걸려.”
아이들은 아쉬운지 입이 툭 튀어나왔다.
“화가는 내일 불러도 되니까, 원할 때 하게 해주는 게 어떻습니까?”
그때 아스테인이 프레이아에게 권했다. 그의 다정한 말투에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프레이아가 뒤집지 못하게.
“와아! 아바마마 최고!”
프레이아는 이럴 때는 팔불출 아빠가 되는 아스테인을 살짝 흘겨보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이렇게나 행복해하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길로 남자아이들은 열심히 기른 머리카락을 단정히 잘랐다. 라르엘리아는 빗질을 하면서 모아둔 머리카락을 가져왔다.
“자, 이렇게 만들면 되는 거야.”
아이들은 부모의 도움으로 밤새 실 팔찌를 만들어냈다. 비록 어린아이라 사랑보다는 다른 꿈을 그리며 팔찌를 만들었지만.
다음 날부터 그리기 시작한 초상화 속의 다섯 가족은 모두 나란히 실 팔찌를 하고 있었다.
검술의 달인인 제국 최초의 여자 황제.
제국 최초로 백마법으로 마법을 부흥시킨 마탑주.
제국 역사상 가장 은밀하고 충실한 황제의 비밀 조직, 블루 로즈의 수장까지.
미래에 제국의 역사가 될 자들이 모두 한 초상화에 있었다.
“행복하십니까?”
“네, 저는 행복해요.”
그리고 그들을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는 다정한 부부까지.
프레이아와 아스테인은 어릴 적 그들의 약속을 완벽하게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