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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100화 (100/101)

epilogue 2. 조금은 특별한 꿈 (2)

늦은 밤, 손에 무언가를 쥔 프레이아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사라질 듯이 위태로워 보였다.

“아스테인 경, 이제 돌아가도 좋아요. 잠시 혼자 있고 싶군요.”

“성녀님!”

성기사 아스테인이 프레이아의 앞으로 가 무릎을 꿇었다.

“성녀님께서 명한다면 저는 누구든 성녀님의 길을 가로막는 이를 제거해 드릴 수 있습니다.”

성기사 아스테인은 고개를 숙이고 외치느라 프레이아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녀가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고, 그를 정말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원하신다면 어디든 모셔다드릴 수도 있고, 무엇이든 이루어 드릴 수 있으니 말만 하십시오. 그 정도의 능력은 있습니다.”

프레이아는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옷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그녀는 성기사 아스테인의 어깨 위에 양손을 올렸다.

“아니요. 나는 여기서 지금과 같은 성녀로 있을 거예요.”

“성녀님…….”

성기사 아스테인은 프레이아의 눈에 맺혔다가 억지로 삼킨 눈물의 흔적을 발견했다.

하지만 프레이아는 애써 웃고 있었기에 성기사 아스테인은 내색할 수 없었다.

“그러니 경도 지금처럼 내 곁에 항상 있어 주세요.”

쫓아 오지 말 것을 명하고 사라진 프레이아의 옷에서 작은 약병이 소리 없이 떨어졌다. 성기사 아스테인은 그것을 주웠다.

“이건…… 크리세우스가 말한 독이 틀림없군.”

약병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성기사 아스테인의 강한 손힘을 견디지 못한 약병이 깨졌다.

파편이 튀면서 성기사 아스테인의 손에 상처를 냈고, 약병의 독은 성기사 아스테인을 노렸다. 그건 그도 내성이 없는 독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프레이아가 죽느니 자신이 죽는 것이 나았으니까.

그때 어디선가 파랑새가 날아와 성기사 아스테인의 손 위에 내려앉았다. 그 새는 황제 아스테인이 만난 황금색 눈을 한 파랑새였다.

“이래서야 소중한 여인을 지킬 수 있겠어?”

파랑새는 황제 아스테인이 아는 익숙한 목소리를 내었다. 여신 데아의 목소리였다.

“데아…… 님?”

성기사 아스테인도 황제 아스테인처럼 여신 데아를 알아본 것 같았다.

“신성력도 없는 네 소중한 성녀 말이야.”

성기사 아스테인이 여신의 말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분에게 신성력이 없으니 벌을 주실 겁니까? 그분은 신성력이 없어도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애썼습니다! 비록 거짓으로 신전에 들어오셨지만 누구보다 진짜 성녀다운 모습으로…….”

그때 갑자기 파랑새가 날아올랐다. 파랑새는 정원의 나뭇가지 위에 앉았다.

“알아. 그러니까 네가 그렇게 목을 매겠지. 네 운명까지 거부한 채.”

뭔가 혼을 내는 것 같기도 하고, 대견스럽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

“그래서 말인데. 우리 내기할까?”

“뭘 말입니까?”

“네가 끝까지 저 아이를 버리지 않고 지켜낸다면 아니, 둘 다 살아남으면 말이야. 나는 네게 기적을 선사하지.”

“기적이요?”

“그래, 네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소리야.”

성기사 아스테인은 여신과의 내기에 응했다.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그는 프레이아를 신전에서 빼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성기사 아스테인은 내기에서 졌다. 진짜 성녀가 나타나 프레이아를 잃었으니까. 마녀로 몰린 프레이아가 자신을 위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막지 못했으니까.

황제 아스테인은 기억하지 못하는 회귀 전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

“아스테인, 안 돼!”

자신의 죽음에 오열하는 프레이아도, 마지막 순간까지도 고백하지 못한 자신도. 애절하고도 슬픈 장면이었다.

저 슬픈 기억을 간직했을 프레이아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아스테인은 먹먹한 마음에 잠시 말을 잊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행복한 기억을 많이 채워, 다시는 그때의 일을 떠올리지 못하게 해야겠다는 다짐만을 할 뿐.

“제가 내기에서 졌었군요.”

환영이 사라질 무렵, 황제 아스테인은 머리 위의 파랑새에게 말을 걸었다.

“글쎄다. 네가 이긴 거 아니니?”

데아가 피식 웃으면서 답했다.

아스테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신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제가 이긴 게 맞겠군요. 다시 돌아온 삶에서는 제가 끝내 프레이아를 지켜냈으니 말입니다.”

데아는 예쁜 파랑새 소리를 내면서 지저귀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아스테인에게 향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 파랑새가 신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원래도 파랑새와 친밀도가 높은 황제 부부라, 그저 파랑새가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긴 거로 해줄게.”

“그러셔야죠. 제 아내가 데아 님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보상을 하나도 해주지 않으셨죠.”

아스테인이 조금 따지고 들었다. 사실 아스테인은 신에게 나름 불만이 많았다.

신전으로 억지로 끌고 갔을 때부터, 신이 원망스러웠다. 신만 아니었어도 프레이아는 덜 힘들었을 것이다.

“많이 건방져졌네. 뭐, 어차피 너희가 워낙에 잘해서 소원을 하나 들어줄까 하고 왔으니까, 봐줄게.”

데아는 유쾌한 목소리로 아스테인을 용서했다. 날개를 퍼덕여가며 그의 머리 위에서 한 바퀴 춤도 추고.

이번에는 아스테인이 피식하고 웃었다. 어쨌든 승자는 자신이니까.

“그래, 어떤 소원을 빌고 싶어?”

“그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뭔데?”

“제 아내와 저 중에서 누구의 명줄이 더 깁니까?”

약간은 불안한 목소리였다. 그는 지금 악한 자들이나 건방진 귀족을 누를 때의 강한 황제가 아니었다.

소중한 아내를 먼저 잃을까 봐 겁먹은 사내였다.

“아무래도 건강한 네가 더 길지?”

“얼마나 더 깁니까?”

“한 10년 정도?”

데아의 대답을 들은 아스테인의 고민은 끝났다. 그는 망설임 없이 여신에게 자신의 소원을 꺼냈다.

“제가 죽기로 되어 있는 그때, 한날한시에 아내와 함께 하늘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 말에 다시 파랑새가 포르르 그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다시 한번 지저귀는 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그래, 그 소원을 빌 것 같았어. 약속이니까 들어주지.”

아스테인이 빙그레 웃었다.

이걸로 그의 고민은 모두 해결되었다. 그리고 마음 상한 자신의 아내도 달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당장 그녀에게 달려가야지.

“참, 너희 부부 말이야. 자식 복은 타고났으니까 열심히 노력해도 좋을 거야.”

데아의 덕담이 참으로 알찬 느낌이었다.

* * *

그날 저녁, 아스테인은 프레이아의 방으로 찾아갔다. 요람에는 그들의 어여쁜 황녀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라르엘리아는 잠들었습니까?”

“네.”

아직 프레이아의 목소리는 약간 쌀쌀맞았다. 아스테인을 돌아보지도 않았고.

부부 싸움이 처음이었던 그는 이런 상황을 어찌 풀어야 할지 조금 난감하기는 했다. 연애 시절에도 한 번도 싸우지 않았던 그들이니까.

“프레이아. 이거, 받아주겠습니까?”

그는 가지고 온 선물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건 둘의 결혼식 때 사용한 부케와 같은 모양의 꽃다발이었다.

다행히도 프레이아는 약간 샐쭉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걸 얌전히 받았다.

“어제 화내서 미안해요.”

그리고 그에게 사과도 해줬다.

“아닙니다. 내 잘못입니다. 당신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아니에요, 아스테인. 당신이야말로 날 걱정해서 그런 건데……. 내 생각만 했어요. 미안해요, 여보.”

가끔 들려주는 감질나는 여보 소리에 아스테인의 입꼬리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 모습을 보는 프레이아도 빙그레 웃었다.

“우리 둘째는…….”

“당신 분신이 갖고 싶기는 하지만, 당신이 싫다면 어쩔 수 없죠. 라르엘리아만 잘 키워요.”

아스테인은 자신의 말을 막아버린 아내의 모습에 눈을 깜박였다.

뭐가 잘못된 거지?

“부인?”

“나는 괜찮아요. 당신이 싫은 건 안 할래요.”

잊고 있었다. 둘은 서로를 너무나도 많이 배려하는 사이였다. 약간의 의견충돌이 있을지라도 결국에는 서로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는 그런 사이.

아스테인은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이것 역시 자신의 실수였다. 프레이아가 마음을 쓰지 않게 했었어야 하는데.

“낮에 신전에 다녀왔습니다.”

“신전에요? 레무스 님은 잘 지내던가요? 신전은 여전히 잘 돌아가고요?”

프레이아는 되도록 신전에 가지 않으려고 했다. 혹시 그녀의 등장에 사람들이 다시 성녀라는 존재를 바라게 되지 않을까 해서.

“다들 스스로 기도하고, 고민은 사제들과 나누며 해결책을 찾아가고 있더군요.”

“다행이다. 걱정한 것보다도 더 잘 돌아가고 있네요.”

프레이아의 만족한 얼굴과는 달리 아스테인은 여전히 심각했다. 프레이아가 정말로 더는 아이를 원치 않는 것은 아닌가 해서.

“제가 신전에서 어떤 기도를 하고 왔는지는 궁금하지 않습니까?”

“당신이 기도를요?”

이번에는 프레이아가 눈을 끔벅였다. 믿을 수 없다는 눈이었다.

한때는 아스테인이 성심이 깊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저 자신을 따라 신전에 들어가기 위해 그는 신을 향한 신심이 깊은 성기사인 척했었다.

“믿기지 않습니까?”

“아니요. 그게 아니라……. 뭘 빌었어요? 우리 라르엘리아를 위해서 기도했어요?”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그의 말에 프레이아가 고민에 빠졌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그녀의 고운 머리카락이 뺨을 스쳤다.

어째서 그 모습조차 여전히 아름다울까?

“그럼 뭐예요?”

“당신과 한날한시에 세상을 떠나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회귀 전에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 순간도 언제나 함께였으면 좋겠다.

그때는 아픈 죽음이었지만, 이번에는 행복한 마무리가 되길…….

“좋아요. 나도 그러고 싶어요. 당신을 혼자 남겨두고 가는 것도 싫고, 당신을 먼저 보내는 것도 싫어요. 라르엘리아는 부모를 동시에 떠나보내는 게 슬플 수도 있겠지만…….”

“데아 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네? 그분을 만났어요?”

아스테인은 환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내가 당신보다 10년은 더 살 운명이었다더군요.”

프레이아가 잠시 눈을 찌푸렸다. 황실의 지난 비극이 일찍 죽은 첫 번째 황후 탓이라 생각했기에 먼저 죽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수명을 늘렸으니……. 아이를 낳다가 위험해지는 일은 없을 거 같습니다.”

프레이아가 눈을 깜박였다. 무슨 소리냐는 듯이 쳐다보자 아스테인이 귀를 붉혔다.

“둘째, 갖고 싶으면 얼마든지 만들자는 소립니다. 데아 님께서 우리에게 자식 복이 많을 거라고 하시더군요.”

“아…….”

프레이아의 얼굴도 붉어졌다. 둘은 여전히 수줍음이 많았다.

이미 많은 밤을 함께 지새우고, 서로의 속살을 다 본 사이인데도.

“그, 그럼 오늘 밤부터…….”

프레이아가 살짝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며 이야기했다. 아스테인은 부끄러워하는 아내를 보며 은밀한 미소를 지었다.

“라르엘리아의 곁을 지킬 유모부터 불러야겠군요.”

평소에는 부부와 함께 자지만, 오늘은 유모가 곁에서 돌봐야 할 것 같다. 아스테인은 설렁줄을 당겨놓고는 프레이아를 번쩍 안았다.

그가 당당하게 방문을 열고 나가자 마침 유모가 문 앞에 있었다.

“오늘은 자네가 황녀를 돌보게.”

부부의 끈적한 모습에도 유모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프레이아만 얼굴을 아스테인의 가슴에 파묻을 뿐이었다.

황궁에는 방이 여러 개 있었다. 그리고 방음이 잘되는 방은 더 많았다.

아스테인은 그중 가장 가까운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다급하고도 충실하게, 그렇게 다시 욕망을 채웠다. 다가올 새 생명의 탄생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땀을 흘렸고.

* * *

어느덧 1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프레이아가 문득문득 우울해하는 겨울이었다.

아스테인은 초조함에 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신이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자식 복이 많다더니, 이게 무슨 날벼락일까?

[도대체 어떤 녀석이길래 이번에는 이리도 잘 먹습니까?]

[그러게요. 먹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큰일이에요.]

임신한 동안 한밤중에도, 새벽에도, 프레이아는 먹을 것을 찾았다. 그것도 어떨 때는 신 것, 어떨 때는 단 것, 어떨 때는 고기, 어떨 때는 과일.

너무나도 다양해 입맛을 맞추기 힘들 정도였다. 물론, 아스테인은 그 모든 것을 찾아다가 프레이아에게 바쳤지만.

“그저 잘 먹어서 배가 더 나온 거라고 하지 않았어!”

산파로 들어간 시녀와 달리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남자 의사에게 아스테인은 화풀이를 했다.

“죄송합니다. 설마, 쌍둥이일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이미 남자아이 하나는 첫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아이가 하나 더 있었고, 그 아이는 문제가 생겼는지 쉽게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안에서 프레이아는 고통에 겨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내가 그때 다시 아이를 가지자고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스테인은 주먹을 쥐고 벽을 쳤다. 그의 손은 멍이 들려는지 검붉게 변했다.

황제의 분노에 겁난 의사는 옆에서 덜덜 떨기만 했다. 언제나 인자하던 황제가 저리도 무섭게 화를 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황후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분명 그도 목숨을 잃을 것이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지?”

아스테인의 초조함이 극에 달할 때 즈음, 안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황후 폐하, 안 돼요! 정신을 놓으면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힘을 내셔야 해요!”

그리고 들린 자지러지는 비명에 아스테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곧이어 들린 우렁찬 울음.

잠시 후, 방문이 열리고 셀레미온과 다른 시녀가 두 명의 황자를 나란히 안고 밖으로 나왔다.

“황제 폐하, 감축드립니다! 두 분 다 황자 전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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