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1. 조금은 특별한 꿈 (1)
아스테인은 요즘 몸이 조금 무거웠다. 늘어난 업무만으로도 늘 피곤했다.
어쩌면 책임감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진 것일지도 몰랐다. 지켜야 할 사람이 이제는 하나가 아니니까.
“아바바바.”
옹알이가 한창때인 8개월의 황녀님은 황제의 집무실에서 아스테인과 놀고 있었다.
“아브아.”
황녀 라르엘리아는 그에게 딸랑이를 건넸다.
“흐니아.”
“흔들어 달라고?”
얼마나 영특한지 벌써 말을 하면 알아듣는 것 같았다. 라르엘리아가 고개를 끄덕여 줬다.
아스테인은 살짝 눈이 풀린 채 그녀의 앞에서 딸랑이를 흔들었다.
그러자 작은 라르엘리아가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까르르. 아뿌아.”
아스테인은 흔들던 딸랑이를 멈췄다. 그리고 귀를 손으로 긁적였다.
방금 뭐라고 한 거지?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라르엘리아, 다시 한번 말해 보지 않겠니?”
하지만 고귀한 황녀님은 볼에 바람을 넣었다.
“뿌우우우!”
그리고 작은 고사리손으로 아스테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다시 딸랑이를 흔들라는 듯이.
그럴수록 애가 타는 아스테인이 다시 소중한 황녀에게 애원했다.
“라르엘리아, 제발 다시 아빠라고 해주지 않으련?”
하지만 라르엘리아의 입에서는 그가 원하는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대신 터져 나온 것은 울음이었다.
“우, 우웅, 으아아아아앙!”
도무지 우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아직 아스테인은 아빠로서는 서툴렀다. 황제로서나 남편으로서는 누구보다도 훌륭했지만.
“라르엘리아, 뭐가 불편한 거지?”
물론 딸에게도 다정한 아빠이기는 했다. 처리해야 하는 서류들을 다 뒤로 제쳐놓고 라르엘리아부터 안았다.
배가 고픈 것일까 싶어 배를 살살 만져봤다. 하지만 조금 전 이유식을 먹은 황녀의 배는 여전히 빵빵했다.
그렇다면 역시 기저귀일까?
번쩍 높이 들고 코를 작은 소녀의 엉덩이에 가져갔다. 하지만 구수한 냄새는 없고 어린아이 특유의 분내만 났다.
“뭐가 문제지?”
아스테인이 미간을 좁히고 고민하는 사이에도 황녀는 계속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아스테인은 그저 딸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는 일만 했다.
황녀가 책상 위에 떨어진 딸랑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도 모른 채 한참이나.
아스테인은 도저히 안 돼서 마지막 수단을 동원했다. 볼을 흔들면서 입술을 모았다.
“라르엘리아, 우르르 까꿍.”
“우웅.”
하지만 울음을 그친 것은 잠시, 여전히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눈가도 빨갛게 열이 올라 있었고.
그는 황제의 체면 같은 것은 모두 벗어던지고 열심히 까꿍을 반복했다. 그러면 웃지 않을까 해서.
크리세우스가 서류뭉치를 들고 온 것도 모르고 아스테인은 멈추지 않고 딸을 달랬다.
“푸…… 푸하하하하!”
아스테인은 갑자기 들린 크리세우스의 웃음소리에 까꿍질을 멈췄다. 그리고 곧장 험악한 얼굴로 크리세우스를 노려봤다.
“노크할 줄 모르나, 로세틴 후작.”
“아, 진짜 후작이라는 소리는 좀 넣어주세요, 폐하. 아직은 오글거린단 말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후작으로 만들어줬다. 자신이 황제가 되는 일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이에게 그에 걸맞은 보답을 한 것인데…….
아스테인이 노려보자 크리세우스가 빠른 속도로 서류를 황제의 손에 넘겼다. 그는 양손을 펼친 뒤, 자신의 얼굴을 숨겼다.
“크리세우스 없다!”
그러고는 손을 펼치며 얼굴을 내밀었다.
“여기 있네!”
“까르르, 아브브브!”
라르엘리아가 아스테인의 품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 아스테인의 머리카락을 잡았다.
그걸 잡아당기며 아스테인의 머리를 통통 쳤다. 남은 한 손은 크리세우스에게 손가락질을 했고.
“제가 황녀님께 더 사랑받는 남자인 것 같지 않습니까?”
“볼일 끝났으면 나가지?”
“황후 폐하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황녀님을 울리기나 하시고, 나중에 분명 혼날 겁니다.”
크리세우스는 아스테인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라르엘리아에게 까꿍을 하는 일에 열중했다. 아스테인은 그런 크리세우스에게 웃어주는 딸이 못마땅했다.
자신을 보고서는 그렇게나 엉엉 울어놓고는.
“당장 나가. 죽고 싶지 않으면.”
아직 아이도 없는 크리세우스가 자신보다 아이를 잘 보는 것이 부러웠다. 아니 질투가 났다.
프레이아가 크리세우스를 칭찬하는 걸 볼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진심으로 크리세우스 녀석을 어딘가로 치워버리고 싶었다.
오늘 그는 왜 딸을 가진 아빠들이 딸의 주변 남자들을 극도로 경계하는지를 깨달았다.
딸이 쳐다보고 웃어주는 남자는 다 싫다. 그게 설령 딸과 나이 차이가 있는 그저 삼촌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황녀님. 황녀님이 이렇게 좋아하는 저를 황녀님의 아버지는 못 잡아먹어서 난리랍니다. 얼른 커서 아버지를 혼내…… 으악!”
크리세우스의 귀는 오늘도 아스테인의 차지가 되었다. 반항하는 크리세우스의 귀를 잡고도 아스테인은 안전하게 황녀를 안았다.
하지만 라르엘리아는 큰 비명에 다시 눈물이 그렁해졌다.
아스테인은 다급히 크리세우스를 밖으로 내보내고 문을 잠갔다. 그러고는 황녀를 책상 위에 앉혔다.
그는 속상한 마음에 얼굴을 양손에 묻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 미소는 사라지고 없었다.
“아빠 없다!”
크리세우스가 한 것처럼 손을 치우고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사라진 미소를 되찾으며.
“아빠 여기 있네.”
자존심은 상했지만, 딸이 기뻐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자존심은 묻어도 됐다.
“우헤헤, 아뿌아.”
그러자 그가 듣고 싶었던 소리가 라르엘리아에게서 나왔다.
“아빠빠빠빠.”
물론 라르엘리아의 의도는 아빠가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매일 이 소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딸이 더는 자라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은 덤이었고.
“아쁘아, 푸우우우!”
하지만 황제의 일을 하면서 활발한 딸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유식도 챙겨야 하고, 기저귀도 갈아줘야 하고. 낮잠도 재워야 하고. 물론 유모에게 맡길 수 있었다. 하지만 모처럼 딸과 단둘이 지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황제로 살면서 이런 기회는 자주 오지 않을 테니까.
그날 밤, 빈민가 시찰을 끝내고 황후가 돌아올 때까지도 아스테인의 육아는 이어졌다.
“아이를 책임지고 키운다는 건, 힘든 일이군.”
그나마 황제이기에 덜 힘들다고 생각했다. 일반 평민이나 빈민가의 사람들은 도와줄 사람이 없으니까.
그들은 생계를 책임져가며 아이까지 키워야 하니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끙차!”
넓은 책상 위를 마음껏 기어 다니는 딸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그걸 보는 아스테인도 조금 지치기는 했지만, 세상의 모든 기쁨을 가진 기분이었고.
“안 돼. 그러다가 떨어지면 다쳐요.”
아스테인의 다정한 소리에 라르엘리아가 인상을 팍 썼다. 철퍼덕, 책상에 주저앉은 채 볼에 바람을 넣고. 이대로 두면 곧 울지도 몰랐다.
어찌 달래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아스테인이 기다리던 사람이 돌아왔다.
아스테인의 구원자이자 그의 옆에 설 수 있는 단 하나의 사람.
“부인, 왔습니까?”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는 황후라는 호칭보다 부인이라는 호칭이 역시 좋았다.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죠?”
프레이아의 달콤한 목소리는 그래도 아스테인의 짜증을 살짝 누그러트려 주었다.
“마마마.”
그리고 딸은 당연하게도 자신의 엄마를 향해 팔을 뻗었다. 온종일 고생한 사람은 딸의 선택이 야속할 뿐.
“라르엘리아, 아빠랑 잘 놀았니?”
“우우.”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긍정의 소리로 들렸다. 그나마 아스테인은 안심이 됐다.
혹시라도 아니라고 할까 봐 솔직히 무서웠다.
“그런데…… 한나절 사이에 왜 이렇게 핼쑥해졌어요?”
프레이아가 아스테인의 뺨을 만졌다. 아스테인은 그 손길에 잠시 얼굴을 기댔다.
“딸을 보는 게 그렇게 힘들었어요?”
“내가 너무 서툰 것 같습니다. 좋은 부모가 되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더군요. 위험한 일을 할 때 혼을 내면 아이가 주눅들 것 같고, 그렇다고 마냥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고.”
프레이아는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예전의 일이 떠오른 것이다.
“흐음,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고민했던 건 나였는데, 지금은 당신이 더 많이 고민하네요.”
아스테인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프레이아가 안쓰러운 남편의 뺨을 계속 어루만지자, 갑자기 라르엘리아가 양팔을 들었다.
“아뿌!”
꼬마 요정은 자신도 손을 뻗어 아스테인의 뺨을 만졌다. 엄마가 하는 것처럼 살살 볼을 비벼주는 촉감이 말랑말랑했다.
그게 오늘 아스테인의 정신없던 하루를 보상해줬다. 아스테인은 딸의 작은 손에 기대 눈을 감았다.
“그렇게 아이를 키우는 게 힘들면, 우리 둘째는 포기해요?”
하지만 곧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당신 닮은 둘째 말이에요. 나는 얼른 둘째가 갖고 싶단 말이에요.”
푸른 머리에 노란색 눈, 딱 자신을 닮은 라르엘리아도 좋았다. 하지만 프레이아는 아스테인의 분신도 갖고 싶었다.
아스테인이 라르엘리아라면 끔벅 넘어가는 것을 보니 더 그랬다. 그녀도 아스테인 못지않게 팔불출이 될 자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스테인의 반응은 기대와 달랐다.
“나는 싫습니다.”
“왜요?”
프레이아가 조금 서운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임신 기간에는 입덧으로 고생했고, 출산 때도 푸토르 후작보다 난산이었지 않습니까?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나는 다시는 당신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아스테인이 경악하며 말했다. 그때의 일을 다시 겪고 싶지는 않다고 늘 말하기는 했다. 게다가 늘 자신을 탓했다. 아이가 생긴 것은 공동의 책임인데, 고통은 프레이아만 받는다며.
“원래 첫 출산은 힘든 거라고 했어요. 두 번째는 그때만큼 힘들지 않을 거라고요.”
“그걸 어떻게 장담합니까? 더 힘들 수도 있습니다. 정말로 위험할 수도 있고요.”
완강한 아스테인의 모습에 프레이아의 볼이 살짝 부풀었다. 그러자 라르엘리아도 엄마를 따라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집어넣었다.
“아뿌우우우! 마마마, 냐냐!”
뭐라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아스테인을 혼내는 것이었다.
“봐요! 라르엘리아도 동생이 갖고 싶다잖아요!”
“우우.”
라르엘리아는 엄마의 장단에 맞춘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스테인은 물러날 수가 없었다.
“안 됩니다.”
“데아 님께서 날 그리 아끼셨는데, 설마 그렇게 쉽게 데려가기야 하겠어요?”
아무리 설득해도 아스테인의 입에서 허락의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소중한 여인이 고통받는 것은 한 번으로 족했으니까.
“너무해. 라르엘리아, 가자. 오늘은 엄마랑 둘이서만 자는 거야.”
아스테인은 자신을 두고 돌아서는 모녀를 다급히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진짜 화난 얼굴의 프레이아는 마침 들어오던 크리세우스까지 밀어버리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황후 폐하께서 왜 저러세요? 두 분 싸우셨어요?”
“하아…… 내가 실수했어.”
아스테인은 크리세우스에게 모든 것을 설명했다.
크리세우스는 다행히도 진지하게 아스테인의 고민을 들어줬다. 물론 아스테인의 편은 아니었다.
“폐하도, 황후 폐하도 어떤 심정인 줄은 알겠네요.”
“그냥 그러자고 하고 아이를 갖지 않게 조심하는 편이 나았으려나?”
“에이, 그러면 티가 나죠. 그리고 그랬다가 들키면 더 혼날걸요?”
크리세우스의 말이 옳았다.
“그런데 폐하는 우리 작고 소중한 부인보다도 겁쟁이네요.”
아스테인은 오글거리는 소리에 한쪽 눈썹을 꿈틀댔다.
“부모는 말입니다. 자신의 자식을 위해서라면 강해지는 법이라고 했거든요? 황후 폐하도 마찬가지일걸요?”
“강해진다고 해서 데아 님이 정한 목숨을 바꿀 수는 없는 거잖아.”
“그럼 신전에 가서 빌든가요. 신의 성물을 가진 분이 신께 당당하게 이야기도 못 해요?”
하지만 데아는 그 이후로 나타난 적이 없는 것을. 그럼에도 아스테인은 조금 구미가 당겼다.
그래도 자신이라면 신과 만날 확률이 조금이라도 높지 않을까?
“좋은 생각이군. 대신전의 대사제를 만나야겠어.”
“그 임자 있는 여자한테 고백했던 미친놈 말고 남부 신전의 멀쩡한 놈을 만나라고요!”
* * *
다음 날, 아내와 딸이 없는 밤을 보낸 아스테인은 어제보다 더 지친 얼굴로 대신전으로 갔다.
그곳에는 성녀와 관련된 것들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성기사들도 성녀가 아닌 신전을 지키는 사람들이 되었다.
누구나 자유롭게 기도를 하고 자신의 바람을 이루는 곳.
아스테인은 신도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대사제를 기다리며 옛 추억을 더듬었다.
“라일락 나무의 잎이 이렇게 물들었을 때 내가 청혼을 했던가?”
볼품없는 청혼이었지만, 프레이아는 기꺼이 그것을 받아줬었다. 서로에 대한 확신은 있지만, 미래에 대한 확신은 없었는데도.
그는 라일락 나무에 손을 대었다. 프레이아가 좋아하던 그 나무에.
그런 그의 머리 위로 갑자기 새가 한 마리 날아들었다. 그건 여신 데아의 상징이라 불리는 파랑새였다. 특히 황금색 눈을 한 신비로운 파랑새.
“데아 님?”
그때 갑자기 그의 눈앞에 이상한 환영이 펼쳐졌다. 거기에는 그와 프레이아가 있었다.
불편한 성녀복을 입고 우울한 얼굴을 한 프레이아와 더 근심 어린 얼굴로 그녀의 뒤를 따르는 성기사 아스테인이.
그건 분명 말로만 듣던 회귀 전의 모습이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