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끝내 용서받지 못할 자
아스테인의 옆에서 나는 활짝 웃고 있었다.
그가 신전에 도착했을 때부터 심장이 벅차올랐다. 그가 나만의 기사인 걸 온 천하에 드러내기 위해 무릎을 꿇었을 때는 심장이 요동쳤다. 마지막에 그의 머리에 황관을 씌웠을 때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처음으로 성녀가 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신의 허락을 받고 자리에서 물러나는 성녀 프레이아 푸토르를 황후로 책봉할 것이다.”
아스테인이 자신의 반려로 나를 지목할 때까지도 나는 하늘 위에 동동 떠 있었다. 역시 그는 끝까지 나를 선택해주었다.
당연한 일이어도 설레는 맘을 감출 수 없었다. 마치 공개적인 장소에서 청혼받은 기분이 들었기에.
“죄송합니다만 폐하. 성도 없는 평민이 황후가 된 사례는 없었습니다.”
“……?”
하지만 들떠 있던 기분은 귀족들의 발언에 급격히 가라앉았다.
어쩌면 이미 예상한 일일 수도 있었다. 그의 곁에 서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빈민가 출신의 나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내가 오늘 푸토르 가에서 파양된 일을 들먹일 줄 몰랐다. 유테르안이 마지막으로 노린 일이 이것이었을까?
아스테인과 내가 이어지는 것만이라도 막겠다고?
“파양되었기에 이제 성이 없다?”
아스테인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서늘해졌다. 하지만 귀족들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네, 그렇습니다. 듣자 하니 원래 성녀님은 빈민가의 고아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핏줄이 더러운 사창가 여인의 것일지 누가……?”
“닥쳐라.”
아스테인이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귀족들은 그의 허리에 꽂혀 있는 글라디우스를 보며 움찔했다.
하지만 아스테인의 손이 닿은 곳은 주머니였다. 내가 선물한 양가죽 주머니. 아스테인은 거기서 꼬깃꼬깃 접힌 종이를 꺼냈다.
낯이 익었다. 무엇인지 겉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내가 매일매일 쓰다듬던 거니까.
“자, 다들 읽어보도록 하지.”
“혼인…… 허가서……?”
“그래, 프레이아 님의 성은 이미 단델리온으로 바뀐 지 오래다.”
아스테인의 선언에 귀족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신들의 계획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서로 얼굴을 마주 보기까지 했다.
“이미 내 가문의 여인이고, 내 반려인데, 무엇이 문제라는 거지?”
아스테인이 가볍게 웃으면서 대답하자 우리 사이를 반대하던 귀족이 입이 살짝 벌어졌다.
하지만 제일 앞에서 이 일을 주도하던 늙은 귀족은 잽싸게 입을 움직였다.
“황후를 정하는 일을 혼자 마음대로 결정하시다니요?”
“뭐가 마음대로라는 거지? 선대 황후 폐하의 허락을 받은 일인데?”
아스테인의 말에 카렌시아가 화답했다.
“선 황제를 대리하여 내가 인장을 찍었는데, 무슨 문제라도?”
그녀는 안심하라는 듯, 내게 찡긋 윙크까지 해줬다. 하지만 뭔가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아스테인과 카렌시아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유테르안이 뭔가 또 다른 꼼수를 숨겨놓았을까 불안한 탓은 더 아니었다.
“그런…….”
“하나밖에 없는 황후 자리를 바라는 그대들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그대들의 딸에게는 기회가 없을 것 같군요.”
카렌시아의 말에 귀족들이 어쩔 수 없이 한발 물러서는 척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평생 성녀 교육만 받은 이가 어찌 막중한 황후의 업무를 수행한단 말입니까?”
“그러게나 말입니다. 황실 예법도 모를 것이며, 궁내부를 이끌 교육도 받지 못했을 텐데요.”
“황후가 황제의 총애만으로 맡을 수 있는 자리랍니까? 사랑만으로 황후를 내세웠다가는 황실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다른 핑계를 대서라도 나를 끌어내리고 싶구나.
내가 성녀일 때는 언제나 납작 엎드려서 내게 바라는 것을 읊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그들에게 그저 황후 자리를 놓고 싸우는 경쟁자일 뿐이었다.
“내가 황궁을 드나들며 새 황후 폐하를 가르칠 겁니다.”
카렌시아는 끝까지 그들을 설득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들이 끝내 나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못마땅함으로 나를 계속 위아래로 훑는 눈. 그걸 보자 왜 내 속이 불편한지 깨달았다.
“나는 분명 출신도 모르는 빈민가 출신이 맞아요. 그런 내가 황후가 되는 것은 두고두고 황실의 흠이 되겠죠. 심지어 나는 신성력을 잃어 성녀의 자리에서 내려왔으니까요.”
그들을 설득하는 것은 두 사람이 아닌 내 몫이었다. 두 사람의 뒤에 숨어 있고 싶지 않았다.
내가 직접 저들을 설득하고, 저들의 손에 추대받고 싶었다.
“하지만 신성력이 없어도 기적을 일으킨 사람이 나예요.”
신성력이 없는 평민 고아를 업신여기는 귀족들을 돌아봤다.
“폭우를 예상하고 피해를 줄이려고 애썼고, 약초학으로 가난한 이들도 언제든지 치료받을 수 있게 했고요.”
사람들은 언제나 똑같았다. 높은 곳에 있던 사람이 바닥으로 내려올수록 더 잔인하게 업신여겼다. 굽신댔던 과거를 보상받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또한 황제의 자질을 갖춘 아스테인 님이 제 자리를 찾을 수 있게 한 것도 나랍니다.”
곁에 있던 아스테인이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그걸 외면하고 귀족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신의 날개였던, 신의 파랑새였던 내가 부모를 모른다는 이유로, 친정이 없다는 이유로 황후가 되지 못할 만큼 자격이 없는 건가요?”
모두의 만족을 얻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 내가 아스테인의 곁에 서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리고 싶었다.
그의 곁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걸 모두의 가슴에 새기고 싶었다.
“아니에요! 성녀님이 아니면 누가 황후를 해요?”
그때 뒤쪽에서 쏟아지는 소리가 있었다.
“그러게요! 봉사한답시고 와서 우리를 쓰레기 취급하던 여자 귀족들보다야 우리 성녀님이 황후에 어울려요!”
“가장 낮은 곳을 돌볼 줄 아는 사람이 황후죠!”
“우리 잘생긴 성기사님이 지키는 여신은 우리 성녀님밖에 없다고요!”
“사랑하는 사람끼리 결혼하게 내버려 둬요!”
빈민가의 아이들이었다. 나와 아스테인의 초청으로 당당하게 신전에 들어와 있던 아이들.
아스테인이 퇴장할 때 뿌릴 꽃바구니를 들고 있던 아이들이 우르르 나섰다. 꽃바구니를 귀족들의 얼굴에 던지기라도 할 듯이 씩씩대며.
그러자 다른 곳에서 또 다른 외침이 들렸다.
“가난한 어린 사제들이 꿈을 펼칠 수 있게 후원해주신 것도 성녀님이세요!”
“성녀님의 약초학 지식은 우리 교수들보다도 나을 만큼 현명한 분입니다.”
“신전의 마지막 성녀가 황후가 되면 제국의 큰 복이 아닌가?”
“성녀님이 황후가 되시면 제국에 계속해서 기적이 올 것 같지 않아요?”
분명 내 눈앞의 귀족들은 유테르안의 부추김을 받았을 것이다. 결혼을 할 수 없는 성녀가 황후가 된다는 것에 거부감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나의 진심을, 사람들의 지지를 외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저는 자애롭고 현명한 프레이아 님이 황후가 되는 것을 지지합니다. 세상 그 어느 귀족 영애가 이분과 경쟁할 수 있겠습니까?”
파미르 공작, 그가 카렌시아의 옆에서 나를 지지했다. 내 앞에서 인자한 미소를 지은 그는 다른 귀족들을 서늘하게 바라보았다.
“괜히 어울리지 않는 자리를 욕심내어 자식들을 망가트리지 말게, 나처럼.”
조금은 자조적인 반성이었다. 하지만 파미르 공녀의 일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경고이기도 했다.
공작의 말에도 귀족들은 대답을 망설였다.
그런데 그 순간, 어디선가 다시 파랑새들이 날아왔다. 파랑새들은 내가 황후가 되는 것을 반대한 귀족들만 쫓아다니며 머리를 쪼아댔다.
파랑새는 신의 상징이기에 그들은 새를 쫓아내지도 못하고 속절없이 당했다.
결국 피를 보고서야 귀족들이 뒤로 물러났다.
“……인정……하겠습니다.”
새들은 그 말이 떨어지자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아마도 데아 님께서 내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인 것 같았다.
조각상에 있던 그분의 눈이 황금색으로 반짝인 걸 본 건 나뿐이겠지?
덕분에 아스테인의 얼굴이 겨우 풀렸다. 그는 겨우 웃음을 되찾았다. 너무나도 사랑스럽게도.
그리고 그 이후의 일은 물 흐르듯이 진행됐다.
“프레이아 단델리온, 나의 반려에게 모든 영광을.”
살짝 무릎을 굽힌 내 머리 위에 아스테인이 황후의 관을 씌워줬다.
“결혼식은 나중에 성대하게 다시 열겠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나는 지금의 상황만으로 만족했지만, 아스테인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더없이 완벽한 결혼을 원합니다.”
그는 언제나 내가 우선인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 * *
대관식까지 끝낸 나에게는 아직 숙제가 남아 있었다. 유테르안, 그를 처리해야 했다.
원래 아스테인은 카렌시아를 위해 그의 목숨만큼은 살려 탑에 유폐하는 것을 선택했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 그의 생각이 많이 바뀐 것 같았다.
“반성은커녕 여전히 프레이아 님을 괴롭히다니, 이제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겠군요. 당장 목을 끊어놓겠습니다.”
나는 그런 아스테인을 잠시 만류했다. 유테르안에게 받아야 하는 게 있었으니까.
“잠시만요. 그가 내게 잘못을 비는 모습이 보고 싶어요.”
후작은 내게 거짓된 사과라도 끊임없이 했다. 하지만 유테르안은 아니었다. 끝까지 반성 같은 것을 하지 않았다.
“사과 대신 봉변만 당할 수도 있습니다.”
“상관없어요. 나도 용서 같은 걸 할 생각이 없는 걸요. 단지 그가 이젠 깨달았으면 해서요. 그가 아무리 발악해도 나는 아스테인 님의 반려라는 걸요.”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있었다.
“카렌시아, 무슨 일인가요?”
후작가로 돌아갔던 그녀가 다시 황궁을 찾아왔다. 카렌시아의 얼굴이 조금은 어두워 보였다. 서류 뭉치 같은 것을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이 조금은 떨렸다.
“여기 이걸 봐주세요.”
카렌시아가 건넨 것은 편지였다. 유테르안과 파미르 공녀가 주고받은 편지.
『마법 스크롤로 액체 한 방울 정도는 신전을 뚫어 공간이동 시킬 수 있어요. 그 액체에 주술이나 마법이 걸려 있지 않다면요.』
“그리고 이거……”
『당신, 모두 날 위해서 그런 거죠? 비록 보지는 못했지만, 날 예비 성녀로 뽑지 않은 자의 비참한 죽음이라니……. 묵은 체증이 날아가는 기분이네요.』
“설마…….”
“유테르안이 고모님을 죽인 게 틀림없어요.”
나와 아스테인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는 찰나, 옆에서 카렌시아가 침통한 목소리로 외쳤다.
“제 동생을 참수해 주세요.”
* * *
나는 아스테인과 함께 지하 감옥으로 내려갔다. 내려가기 전 최대한 치장에 공을 들였다.
아스테인의 청혼 반지를 왼손 약지에 꼈고, 어울리지 않지만 은색 실 팔찌도 왼손 손목에 단단히 매어두었다.
“머리가 무겁지 않습니까?”
“오늘 하루 하는 건데요, 뭘.”
황후의 관도 머리 위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대관식 날이 아니면 굳이 쓰지도 않는 무거운 것을 꼭 유테르안에게 보여줘야 했다.
그걸 본 유테르안의 반응은 역시 예상한 그대로였다.
“성도 없는 하찮은 여자가 어째서…….”
“황후와 죄인 중에서 누가 하찮은지는 묻지 않아도 알 텐데?”
쇠창살이 가로막지 않았다면, 아스테인이 당장 그의 멱살을 손에 쥐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스테인은 나와 깍지 끼고 있는 손을 보란 듯이 올렸다. 유테르안은 아스테인이 내 손등 위에 진득하게 키스하는 모습을 노려봤다.
“떨어져! 내 여자에게 감히 손대지 말라고!”
감옥 한쪽에 힘없이 앉아 있던 유테르안이 눈을 번뜩이며 쇠창살 쪽으로 달려왔다. 그 모습이 조금 섬뜩할 정도였다. 검은 눈동자가 붉어 보일 정도로.
“보다시피 프레이아 님은 이제 나의 황후다. 너 같은 죄인이 넘볼 수 없는,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
아스테인의 목소리에 빈정거림은 없었다. 그저 진실을 읊는 덤덤한 목소리인데도 유테르안의 발작은 더 심해졌다.
쇠창살 너머로 손을 뻗어 나를 낚아채려 했다.
“그 더러운 손 치워요.”
내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아스테인이 유테르안의 손을 밀어냈다.
“내가! 내가 고아원에서 처음 봤을 때 널 구했잖아! 그 더러운 곳에서 널 데려오자고 처음에 이야기한 게 나라고! 널 구원한 게 나였단 말이야!”
기억도 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 사람이 저지른 일이라고는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 내게 일어났으니까.
그래서 확실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날 구원한 건 당신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아스테인 님이야.”
날 돌아보는 아스테인의 눈에 애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유테르안의 눈에는 증오만이 넘쳤다.
“당신이 내 날개를 꺾으려 할 때, 아스테인 님은 내게 나는 법을 알려줬어. 당신이 날 가두려고 할 때 자유롭게 날게 해준 것도 아스테인 님이고.”
나는 하나하나 그의 잘못을 콕 집어 이야기해줬다. 어릴 때 내 손의 인형을 뺏은 것, 기도실을 엉망으로 만든 것, 내게 존경의 의미로 꽃을 가져다준 어린 하인을 내쫓은 일까지.
“네가 나만 봤어도 그렇게 하지 않았어. 계속 다른 곳에 한눈을 파니까…….”
“난 단 한 번도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었어요.”
“나는 너만…….”
“그래서 성녀님도 죽였어요?”
내 물음에 유테르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걸 부정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반성의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끝까지 변하지 않는 비뚤어진 남자가 끔찍하게 싫었다.
“혹시 당신이 내게 했던 일을 사랑이라고 착각하지는 말아요. 그건 그냥 미친 집착일 뿐이니까.”
이번만큼은 그도 죄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젠 홀가분하게 떠나자. 나는 먼저 계단으로 올라간 아스테인의 손을 잡으려 했다.
“꺄악!”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끌어당기는 느낌이 났다. 하지만 유테르안은 내게 손을 댈 수 없는 위치였다.
이 느낌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이건 흑마법이었다.
내 몸이 갑자기 유테르안의 손에 의해 공중으로 끌려갔다. 그 순간 깨달았다. 후작도 이렇게 죽였구나.
내 옆에는 공간을 넘어온 유테르안의 숨결이 느껴졌다. 끈적하고도 끔찍한 더운 숨결이.
“프레이아!”
아스테인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유테르안이 내 목을 움켜쥐었다.
“가짜 누이를 살리고 싶으면 너부터 죽어.”
“그녀의 몸에 멍이라도 들면 네 영혼조차 베어 버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