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그의 여신, 나의 기사
불쾌한 서찰에 우뚝 섰다. 그러자 나를 따라 나오던 셀레미온의 걸음도 멈췄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날 푸토르 가문에서 파양하겠다네?”
이미 나는 법적으로 아스테인의 부인이었다. 푸토르 가문에 속하든지 말든지 상관없었다. 가주의 허락도 필요 없었고.
그러니 날 파양하는 일은 내게 아무런 부담이 없었다.
“네? 뒤늦게 왜요? 게다가 후작님은 이미 돌아가셨는데 누가요?”
“글쎄? 유테르안이 또 이상한 일을 벌이려나 봐.”
예르테르 대공의 재판은 조금 더디게 진행되었다. 그의 대공비가 남편의 구명을 위해 작은 분쟁을 일으킨 탓이었다. 물론 그 분쟁은 가볍게 제압되었고, 관련자들도 모두 붙잡혔다.
하지만 그 덕분에 유테르안의 처분도 미뤄졌다.
“네? 지금 그분은 지하 감옥에 있잖아요. 아직 가문의 승계를 황제 폐하께 인정받지도 못했는데요.”
“그러게나 말이야. 아스테인 님이 황제가 되고 나면 서쪽의 사막에 있는 탑에 유폐될 예정이었는데…….”
남작가로 강등한 건 임시 조치였다. 다른 귀족들에게 보내는 경고이기도 했다.
아스테인은 황후 폐하와 황녀님을 위해 더 나은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잠시 봐주고 있는 것인데 그 틈을 이용해 또 뭔가 이상한 짓을 꾸미는 것일지도.
“으, 징글징글해. 왜 그렇게 끈질기대요?”
“글쎄?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나 봐. 어쨌든 후작의 유언이라니까, 뭐…….”
혈서로 썼다는 유언장에 있던 내용일 수도.
어쨌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냥 신경 쓰지 않는 게 좋겠어요. 좋은 날에 재를 뿌리는 것도 아니고, 왜 저런대?”
“응. 그럴 거야. 난 괜찮으니까 너도 신경 쓰지 마.”
나는 셀레미온과 함께 대관식을 위해 꾸며놓은 접견실로 향했다.
그곳은 신전의 입구까지 연결된 모든 문을 열어두었다. 새 황제가 늠름하게 내 앞으로 올 수 있도록.
나는 그곳의 중앙으로 갔다. 그리고 신전의 입구에서부터 연결된 통로를 보았다.
새로운 황제의 상징인 은색과 보라색으로 꾸며진 휘장. 그리고 온실에서 정성 들여 가꾼 푸른 장미. 바깥과는 달리 바닥에 깔린 푸른 양탄자.
곧 아스테인이 그를 위해 꾸며놓은 이 길 위를 걸어올 것이다. 당당하고도 늠름하게.
아스테인은 아직 걸어 오지도 않았는데, 내가 다 긴장이 되었다.
“프레이아.”
긴장을 풀기 위해 심호흡을 하는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자 카렌시아가 있었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주변에 이미 귀빈들이 구경을 온 것도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황후 폐하.”
“왜 네가 더 긴장하고 그래?”
“티가 났어요?”
카렌시아가 조금 귀엽다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자 약간 긴장이 풀렸다.
나도 카렌시아를 향해 웃어주었다.
“그런데 폐하, 혹시 후작의 유언장을 보셨어요?”
“응……. 봤어. 새 황제 폐하께서 내게 보여줬었어.”
“거기에 절 파양하라는 내용도 있었어요?”
내 질문에 카렌시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눈에 힘이 들어간 것이 기억을 되살리는 것 같았다.
“……아니, 그런 내용은 없었어.”
“그럼 유테르안은 왜 절 파양한 거죠?”
“걔가? 무슨 자격…… 아, 가주가 죽었을 때 가문을 이끌 자격은 어쨌거나 후계자에게 있으니까…….”
안타깝게도 우리 둘은 유테르안의 목적을 파악하지 못했다.
“파양됐어도 우리는 여전히 자매인 거지?”
“그럼요! 당연하죠.”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피는 나누지 못했어도 우리에게는 같은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었다.
카렌시아는 앞으로 언제까지나 내 가족이 될 것이었다.
“언제 황궁을 떠나시는 거예요?”
“오늘 밤에 나갈 거야. 미리 준비는 끝내놨지. 황제 폐하가 많이 배려해주셔서 힘들지는 않았어.”
나는 고개를 끄덕여줬다. 다행히 카렌시아는 밝아 보였다. 마음의 짐을 많이 떨쳐낸 듯이.
“황궁 밖으로 나가면 어디로 가요?”
“일단은 후작가? 유테르안이 감옥에 있으니, 내가 가서 후작가도 수습해야지. 남작으로 강등되어서 정리해야 할 일도 많으니까.”
안쓰러운 마음에 카렌시아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녀도 내 손을 맞잡으며 웃었다.
괜찮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눈빛에 나는 격려의 의미로 눈을 빙그레 휘어주었다.
“우애 깊은 두 자매께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파미르 공작이 성녀님과 황후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파미르 공작은 예전보다 조금 근심이 늘어난 듯 보였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언제나처럼 다정한 아버지 같은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지난번에 아스테인 님을 위해 군사를 빌려주셨다고 들었어요.”
“그때의 은혜를 갚을 수 있어 다행입니다.”
“공녀는 괜찮은가요?”
파미르 공녀의 이야기를 꺼내자 공작이 쓸쓸하게 웃었다.
“많이 좋아지긴 했습니다.”
“나중에 레무스 님께서 공녀의 상태가 좋아지면 그녀의 유폐를 풀어줄 거예요.”
그는 끝까지 신전을 지키기로 했다. 짝사랑의 실패가 영향을 준 것 같았다.
어쨌든 성녀가 사라진 신전의 총책임자는 이제 대사제 레무스가 될 예정이다.
“그 소후작, 아니 이제는 남작인가요? 그자가 없어지지 않는 한은 조금 불안정할 것 같습니다.”
공작이 걱정스레 말을 꺼냈다. 그는 잠시 눈을 찡그리며 카렌시아의 눈치를 봤다.
카렌시아 역시 뭔가 찜찜한 얼굴이었다. 조금 전까지 밝았던 카렌시아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사실, 그가 감옥에 갇히기 전에 제 딸아이를 찾아왔다더군요.”
“네?”
“뭔가 마법적인 부분을 물었다고 합니다. 공간을 단축하는 방법이라고 하더군요.”
그가 마력을 지닌 사람은 아니니까, 별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역시 찝찝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건 카렌시아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파미르 공작. 내 동생이 당신 딸에게도 실수한 것 같군요.”
“그건 제 딸이 자초한 일이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곧 정신을 차릴 겁니다.”
우리는 오순도순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우리의 다정한 모습에 문제가 있었을까?
어째서인지 다른 귀족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조금은 따갑게 느껴졌다.
예전에 황실 연회에서 내가 도도하게 군 탓일까? 아니면…….
“네가 새 황제 폐하와 연인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나 봐.”
“허허, 참, 그랬지요? 그러면 이제 성녀가 아니라 황후 폐하라고 불러드려야 합니까?”
나와 그 사이의 소문을 카렌시아가 대놓고 확정지어 버렸다. 황궁에 머무는 동안 우리가 계속 부부처럼 지낸 것을 이젠 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에는 성녀의 연인이 황제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하지만 이제는 황제의 연인이 성녀라는 사실에 다들 기뻐하고 찬양했다.
어쩌면 제국이 가장 번성할 기회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어, 다들 그게 못마땅한가 보네요.”
공작과 카렌시아의 발언 이후 날 보는 시선들이 급격히 차가워졌다.
“어머, 황제 폐하를 사위로 삼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가 봐?”
카렌시아가 조금은 날카롭게 반응하려는 순간, 신전 입구에서 환호성이 울렸다.
커다란 나팔소리가 곧이어 이어졌다. 그리고 들린 것은 여러 마리의 말발굽 소리. 가장 선봉에는 새 황제의 든든한 기사, 크리세우스가 있었다. 그가 제국의 깃발을 들고 자랑스러운 얼굴로 신전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뒤이어 말에서 내린 것은…….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남자. 아스테인이었다. 그가 황제의 관을 받기 위해, 말에서 내렸다.
너무나도 눈부신 후광을 등에 업고.
* * *
아스테인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했다.
첫걸음마를 뗄 때보다, 황제였던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뭔가를 요구할 때보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을 때보다도.
그는 떨리는 가슴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그건 그가 황제가 되기 직전이라서가 아니었다.
“황제 폐하께서 도착하셨다!”
“와아아아!!”
그를 향한 함성도 그의 귀에는 그저 스쳐 가는 바람으로 들렸다.
그는 말에서 내린 뒤 신전 입구에 섰다. 그리고 반대편 끝에 서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미 고백도 했고, 사랑도 나누었고, 할 것은 다 했는데……. 어째서 처음 만난 연인처럼 이렇게 가슴이 뜨거운지 알 수 없었다.
그와 프레이아는 서로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이곳에는 오직 단둘만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한참이나, 눈앞에 서로가 있으면서도 서로를 그리워하며.
“황제는 신의 앞으로 와 신께 인사를 올리세요.”
자신의 연인은 오늘도 자랑스러운 성녀의 모습을 하고 눈앞에 서 있었다. 얼핏 보면 단정하고 정숙한 여인처럼 보였다.
어찌 되었든 아직은 성녀라서 그런 것일까?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성녀복을 벗어던지면 어떻게 바뀌는지를. 누구보다도 뜨겁고, 열정적이고, 사랑스러운 연인이 되었다.
그것도 밤이면 더욱더.
대관식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그녀의 손을 낚아채 침실로 데려가고 싶었다.
얼핏 그는 성기사의 망토를 잘 벗어 던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아직도 그는 그녀의 뒤에만 있어야 했을 것이다.
“신께서 황제와 제국을 위해 축복을 내려주셨답니다.”
신성력이 없는 그녀였지만,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는 어느 성녀의 축복보다도 힘있게 들렸다. 심지어 그녀의 말에 따라 신비한 일도 벌어졌다.
신전 곳곳에 파랑새들이 날아든 것이다.
그리고 아스테인과 프레이아의 주변을 파랑새들이 춤을 추듯 맴돌았다.
“신의 정령이다!”
“역시 신께서 내려주신 황제 폐하였어!”
“성녀님도 마찬가지야! 제국을 위해 신께서 축복을 내리셨다.”
프레이아는 작은 파랑새들을 신기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자신만 바라봐도 부족할 시간에 왜 하필 저런 새에게 한눈을 팔까?
새에게도 질투하는 자신이 조금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마지막은 사람들에게 성녀로 기억될 수 있으니까 괜찮은 걸까?
그녀가 행복하다면야……. 잠시 한눈을 파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신께서 새 황제를 맞이해 제국의 평화와 풍요를 약속했다.”
프레이아는 어느새 품위 넘치는 성녀의 얼굴을 했다. 자신을 위해 외쳐주는 빨갛고 작은 입술이 오늘따라 더 예뻐 보였다.
셀레미온이 평소보다 공을 많이 들인 걸까?
“황제께서는 신께 맹세하세요.”
“신께 나의 신의와 정의와 열정을 바칩니다. 나, 아스테인 단델리온은 자신만을 위한 황제가 아닌, 모든 이를 위한 황제가 될 것을 맹세합니다.”
정해진 순서대로 주절주절 말하는 동안, 아스테인의 눈길은 프레이아를 떠나지 않았다. 신의 조각상을 봐야 하는데도 그의 눈에는 오직 한 여자만 보였다.
아스테인의 유일한 여신, 그가 충성해야 하는 유일한 여인, 그리고 가장 사랑스러운 연인.
그는 온갖 절차에 따라 형식적으로 대답을 했다. 대충 상황에 끌려가는 그와 달리, 프레이아는 모든 일에 하나하나 정성을 다했다.
그래서인지 아스테인에게 대관식은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그냥 바로 황제의 관을 쓰면 되는데…….
그리고 그의 손으로 바로 눈앞의 여인에게 황후의 관을 씌우면 끝나는 일인데.
“아스테인 단델리온을 황제로 임명합니다.”
드디어 프레이아의 마지막 말이 떨어졌다.
대사제가 커다란 황제의 관을 가지고 앞으로 나왔다. 어렸을 때는 꼭 갖고 싶었던 물건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프레이아 님의 손으로 황관을 쓸 수 있어 다행입니다.”
다른 이의 손으로 황관을 받았다면 지금의 성취감은 없었을 것 같았다.
오직 그의 여신이 씌워주는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다.
“축하드려요.”
금과 은으로 만든 화려한 황관이 그녀의 손끝에 쥐어졌다. 아스테인은 자신보다 작은 프레이아를 위해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뒤에서 작은 탄성이 쏟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의 황제들은 머리만 아주 살짝 숙였었다.
황제가 유일하게 무릎을 꿇은 여인. 프레이아는 그런 아스테인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꿈틀댔다.
아스테인은 그런 프레이아의 마음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프레이아 님이 행복하다면 저도 행복합니다.”
그가 작게 읊조리는 말에 자신의 파랑새가 살짝 울컥했는지 눈가가 붉어졌다.
황관을 아스테인의 머리 위에 얹은 프레이아는 먹먹한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새로운 황제를 경배하라!”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신전에 모인 모든 사람이 무릎을 꿇었다. 길가에 서 있던 사람들까지도.
“황제 폐하 만세!”
그렇게 그는 프레이아가 바라던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가 황제가 되었으니, 바로 그의 곁에 그녀의 여인을 세워야 했다. 아스테인은 사람들의 함성이 잦아들자 그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제국의 새 황제로서 황실의 안정을 도모하려고 한다.”
프레이아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눈치채고 얼굴을 살짝 붉혔다. 기쁨과 설렘이 가득한 얼굴에 아스테인도 덩달아 다시 심장이 뛰었다.
얼른 사람들 앞에서 프레이아를 황후로 만들고 그녀를 자신의 옆에 당당하게 세우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나의 반려를 발표하고자 한다.”
카렌시아와 파미르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지지에 아스테인은 은밀한 미소를 지은 뒤, 다시 소리쳤다.
“신의 허락을 받고 자리에서 물러나는 성녀 프레이아 푸토르를 황후로 책봉할 것이다.”
카렌시아가 잘게 손뼉을 쳤다. 신전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백성들도 모두가 환호했다. 안쪽에 있던 프레이아와 아스테인의 초대를 받은 빈민가 아이들은 제자리에서 동동 뛰며 기쁨을 표현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안쪽에 있던 귀족 일부는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스테인은 이상한 기류에 그들을 돌아봤다.
“무슨 일이지? 내 결정에 잘못된 것이 있나?”
“죄송합니다만 폐하. 성도 없는 평민이 황후가 된 사례는 없었습니다.”
“……?”
아스테인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그들을 노려보자 귀족들이 잠시 움찔했다. 하지만 그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프레이아 또래의 결혼하지 않은 딸을 둔 백작이었다.
“성녀님이 푸토르 가에서 파양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그분은 귀족이 아니라 출신도 모르는 빈민가 출신의 평민일 뿐입니다.”
아스테인은 자신이 황제가 되자마자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귀족들의 모습을 질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파양되었기에 이제 성이 없다?”
아스테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의 눈에는 약간의 살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감히 프레이아의 성을 모르고 함부로 내뱉다니. 아스테인은 늙은 백작을 어찌 요리할지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