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후작의 비참한 최후
“여기, 아버지가 새 황제 폐하를 죽이고 예르테르 대공을 옹립하려 한 증거입니다!”
아스테인도, 나도, 카렌시아도 얼굴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 제 부모를 버리다니.
“거기에 가짜 성녀를 데리고 온 과정, 또 거짓된 소문을 퍼트린 증거도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후작도 박쥐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했지만, 유테르안은 더했다. 패륜도 아니고 어떻게 부모를 버릴 수 있을까?
“유테르안, 너……!”
“동조한 귀족들의 명단도 여기 있으니 새 황제가 등극하면 황권을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겁니다!”
후작은 알고 있었을까? 이렇게 아들이 자신을 버릴 거라는 걸?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알아?”
“황후 폐하! 아버지의 죄는 너무나도 큽니다. 하지만 황후 폐하와 황녀님을 궁 밖에서 지지할 가문은 푸토르 후작가가 유일하지 않습니까?”
“그걸 알면서도 그런 짓을 저질렀나?”
아스테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유테르안은 아스테인의 호통에 잠시 이를 뿌드득 갈았다. 하지만 곧 그는 고개를 바닥에 박으며 공손한 태도로 답했다.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철이 없었습니다. 누구보다 누이들을 아끼고 지켜야 하는 차기 가주면서, 오만방자하게 굴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황후 폐하, 그리고 성녀님.”
공손한 말투에서 느껴지는 진정성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지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내뱉는 언제 뒤집힐지 모를 나뭇잎일 뿐.
무게가 없는 사과를 받아들일 사람은 여기에 없었다.
“증거를 확인하겠다. 하지만 성녀님을 숨어서 호위하던 기사들을 유인해 후작의 일을 도운 정황이 있기에, 용서할 수는 없다.”
아스테인이 크리세우스를 불렀다. 유테르안은 그대로 붙들려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
나는 끌려가는 유테르안의 뒷모습을 조금 넋을 잃고 바라봤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억울했던 마음이 풀리는 것도 같고, 여전히 분하기도 하고.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회귀 전의 그도, 지금의 그도, 내게는 너무나도 깊이 그어진 상처였기에.
“하아…….”
그때 뒤에서 카렌시아의 깊은 한숨이 들렸다.
그녀는 잠깐 고개를 젖히며 생각에 잠겼다. 억지로 눈물을 삼키는 것처럼 보였다.
“황후 폐하…….”
“대공, 증거부터 확인해 줄 수 있나요?”
“소후작을 살리고 싶으십니까?”
“그의 말에 허점이 있다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철저하게 밝혀 주세요. 그리고 죄를 지은 만큼 대가를 치르게 해줘요. 푸토르 가의 대가 끊어진다고 하더라도…….”
말을 내뱉는 카렌시아의 목소리에 진한 고통이 스며 있었다.
얼마나 힘이 들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젖어 있는 눈동자와 조금은 흐트러진 호흡이 그녀의 심정을 대신 말해줬다.
“증거에 따라 공정하게 처리할 것이니 심려 놓으십시오.”
“그래요, 폐하. 심려 놓으세요. 아스테인 님이 얼마나 공명정대한 사람인데요. 분명 소후작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벌을 받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게 말했지만 나도 카렌시아도 얼굴에 웃음기는 없었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
카렌시아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나는 어떻게 더 위로를 해줘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남편도 죽고 친정 가문도 잃게 될 카렌시아가 그저 안타까울 뿐.
“으아아앙!”
그때 요람 안에서 잠을 자던 황녀님이 칭얼댔다. 아기를 안고 토닥이는 카렌시아의 모습에 기운이 없었다.
자신을 지켜줄 울타리를 모두 잃은 엄마는 딸을 달래려 애썼다.
“울지 마, 아가. 앞으로 이 엄마가 널 지켜줄 테니까. 네게 해를 끼친다면 가족도 필요 없단다.”
황녀님을 토닥이는 손과 눈에 조금씩 의지가 깃들었다.
카렌시아는 역시 강인한 엄마였다.
* * *
푸토르 후작은 퀴퀴한 지하 감옥의 환경에 얼굴을 굳혔다. 귀족들을 감금하기 위한 감옥도 있는데, 어째서 그가 갇힌 곳은 이런 곳일까?
감옥의 한쪽에는 이전 죄수가 남긴 말라붙은 배설물과 그걸 노리는 더러운 파리와 바퀴벌레가 있었다. 천장에는 커다란 거미가 지금도 열심히 거미줄을 치고 있었고.
하다못해 예르테르 대공의 기사들도 자신이 있는 곳보다 나은 방에 나뉘어 들어갔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후작인데……. 이봐 간수! 방 배정이 잘못됐지 않은가? 귀족들을 수용하는 감옥이 아니잖아!”
감옥의 쇠창살을 잡고 후작이 외쳤다. 그가 한참을 발악하자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간수가 나타났다.
후작은 불경스러운 모습에 인상을 잔뜩 구겼다.
“왜 불렀소?”
누가 봐도 평민으로 보이는 간수의 말투도 후작의 속을 긁었다.
“내가 누군지 몰라서 이런 곳에 가둔 것이냐? 나는 황후 폐하의 아버지이자 성녀님의 양부이다.”
“아, 그러셨소?”
간수는 피식 웃으면서 육포를 다시 질겅질겅 씹어댔다.
“귀족들을 수감하는 방은 따로 있다고 들었다.”
“얼마 전까지 황족도 당신이 쓰고 있던 방을 썼는데 모르셨소?”
이 감옥의 전 주인이 누구인지를 깨달은 후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자 간수가 낄낄댔다.
“이제 본인의 운명을 눈치채셨나?”
“내가 비록 예르테르 대공과 힘을 합치긴 했지만, 그건 신전을 위해서……. 가짜 성녀를 몰아내려 한 것이다. 그러니…….”
“난 그런 거 모르오. 그냥 위에서 지시가 내려온 대로 죄수들을 관리할 뿐이니까. 아, 그런데 그 방은 늘 사형수만 가둔다오.”
간수는 낄낄대며 다시 어두운 계단으로 사라졌다.
후작은 그걸 지켜보다가 넋을 놓았다. 그리고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되새겼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무엇을 잘못한 건지 떠오르지 않았다. 프레이아가 가짜라는 사실을, 더는 성녀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진실을 밝히려 했을 뿐이다.
“신전을 위해서, 제국을 위해서 움직인 거라고. 가짜 성녀를 밝히려고 한 게 왜 사형이야? 간수! 나는 억울하다! 황후 폐하를, 황후 폐하를 모셔와다오!”
그는 몇 번이고 감옥의 쇠창살을 치고 발악하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목이 쉴 만큼 소리를 지르자, 계단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봐! 황후 폐하를 불러 다오! 나는 억울하단 말이다!”
“뭐라는 거야? 이 미친 인간이?”
그건 단델리온 대공이 데리고 다니는 건방진 기사의 목소리였다.
못마땅했지만 그라도 붙잡아야 했다. 그래야 황후를 만날 기회가 있을 테니까.
“나는 오로지 신전과 제국을 위해 신성력을 잃은 성녀를 세상에 밝히려고 한 것뿐이다. 황후 폐하라면 내 마음을 이해해…….”
“당신이 우리 주군을 죽이려고 공모한 정황을 네놈의 아들이 우리에게 빠짐없이 다 밝혔어.”
“뭐라고?”
“게다가 가짜 성녀를 데려온 주제에 성녀님을 입에 담다니, 너무 뻔뻔한 거 아냐? 그 증거도 네 아들이 갖다 줬는데?”
크리세우스는 후작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쇠창살 너머의 기사는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낄낄댔다.
“유테르안이 그랬다고?”
후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아들이 제게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프레이아를 갖지 못해 상심한 유테르안이 결국 같이 죽자고 포기한 걸까?
“왜? 아들이라도 살리고 싶어? 그래도 아버지라고 배신한 아들이라도 지키고 싶은가 보네?”
“그게 무슨 소리지?”
“그건 아들에게 직접 들으면 될 것 같은데?”
크리세우스의 손짓에 기사들이 죄인을 끌고 왔다. 하지만 죄인의 모습은 아주 멀쩡했다.
“옆방에 집어넣어. 서로 얼굴을 보면서 반성하고 있도록.”
크리세우스는 빙그레 웃으면서 자리를 떴다.
후작은 자신이 갇힌 곳보다 훨씬 위생적이고 깔끔한 곳에 있는 유테르안을 노려봤다. 이건 유테르안은 같은 죄를 짓고도 살아남을 거라는 뜻일까?
기사들이 모두 사라진 뒤, 후작은 유테르안을 향해 소리쳤다.
“이게…… 이게 무슨 소리냐? 엄밀히 따지면 네가…….”
“후작가의 대를 끊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유테르안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도 없었다.
“너! 설마 일부러 날 부추긴 거냐? 후작의 작위가 탐나서?”
유테르안에게 휘말렸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몰락한 가문의 작위 따위가 뭐가 그리 탐나서요? 게다가 결국 일을 저질렀다가 실패한 아버지가 잘못이죠.”
“그러면 도대체가…….”
“글쎄요. 마지막으로 괴롭힐 기회를 얻기 위해서랄까?”
후작의 눈에 광기 어린 아들의 모습이 보였다. 단지 살아남으려고, 후작위가 탐나서 저지른 일이 아니었다.
[고모님을 죽였습니다.]
[뭐라고? 지금 상황에서 프레이아가 성녀가 되면 어쩌려고!]
[성녀가 되기 전에 그놈과 도망가게 둘 수는 없으니까요. 붙어먹어도 안 되고.]
[유테르안!]
[그리고 프레이아를 그놈에게 넘긴 고모님을 용서할 수 없잖아요?]
그때 눈치챘어야 했다. 유테르안이 미쳤다는 사실을. 계속 프레이아에게 집착하는 유테르안을 믿지 말아야 했다.
자신이라도 흔들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차라리 신성력이 없던 시절에 프레이아를 파양하고 다시 고아원에 버렸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네가 이렇게 미치지 않았을 것을!”
“파양……. 파양이라…….”
유테르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건 그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고 욕망이었다.
자신이 가질 수 없다면 그놈도 가져서는 안 된다.
좋은 생각이 났다. 그러려면 이번에는 아버지부터 치워야 했다.
* * *
예르테르 대공을 만나고 온 아스테인은 조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푸토르 소후작이 내민 증거를 동생은 인정했다. 프레이아를 납치하여 인질로 이용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
그것이 떳떳한 일은 아니기에 가짜 성녀를 내세웠다. 성녀의 지지를 받는다는 사실로 다른 귀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의외로 깔끔하게 인정하는군.”
“여우 새끼가 반역을 인정했어요?”
마침 크리세우스도 지하 감옥에서 돌아왔다.
“반역은 아니지. 아직 나는 황제가 아니니까.”
“그래도 형제끼리 살육을 벌이지 말라던 선대 황제 폐하의 명을 어겼잖아요.”
“그것도 엄밀히 따지면 실행 전에 막힌 거라…….”
크리세우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신의 주군이 가끔 마음에 들지 않는 순간이 지금 같을 때였다.
선하고 정의로운 사람.
“그래서 불씨가 될 수도 있는데 살려둘 겁니까?”
약간은 불만을 섞어 물었다. 그러자 주군의 눈이 조금 서늘해졌다.
“아니. 당연히 죽여야지.”
“정말입니까?”
“당연한 일이지. 감히 프레이아 님을 마녀로 몰아 마음고생을 시킨 것으로 모자라 오늘 그분을 납치하려고 했다. 머리를 억지로 잡아끌던 것을 네가 봤다면 그런 소리를 하지 못할 거다.”
물론 크리세우스도 봤다. 아마 셀레미온에게 누군가 그런 식으로 상처를 입혔다면 그도 아스테인과 같은 반응을 보였겠지.
하지만 크리세우스는 내색하지 않았다. 주인의 대답에 충분히 만족하니까.
“후작과 소후작은?”
“서로 책임을 미루고 있습니다. 후작은 오징어 놈이 지시한 일이라고 우기네요.”
“증거는?”
“일단 대화뿐이라……. 대질을 해서 어떡해서든지 그 자식이 연관됐다는 걸 밝히겠습니다.”
그때 그들의 방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다급한 소리의 주인공은 황실 근위대장이었다.
“무슨 일이지?”
“큰일 났습니다. 푸토르 후작이 목을 매달았습니다!”
“도대체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아스테인과 크리세우스는 당장 지하 감옥으로 뛰어갔다. 그곳에서 그들이 만난 것은 싸늘한 몸이 된 후작이었다. 그 맞은편 방에서는 유테르안이 오열하고 있었다.
“흐으윽, 아버지! 황후 폐하께 누가 되지 않겠다고 이러다니요! 안 됩니다! 황녀 전하는 누가 지킵니까? 가문의 명예는 어찌 회복하고요!”
누가 봐도 후작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테르안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후작은 목을 맸으니까.
“이런. 어쩌죠, 주군?”
크리세우스가 짧게 탄식했다.
“후작의 증언 없이 둘의 연관성을 밝힐 수는 없는 건가?”
“일단 예르테르 대공과 저놈이 접촉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전부 저놈이 뒤에서 조작은 했겠지만요.”
아스테인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후작이 재판하기도 전에 자살해서 죄를 묻기도 힘들어졌네요.”
“……어쩔 수 없지. 일단 최대한 증거를 뒤져서 찾아내도록.”
아스테인은 크리세우스에게 일의 뒤처리를 맡기고 돌아섰다. 생각할수록 짜증이 났다.
황후 앞에서 유테르안이 죄를 짓지 않으면 살려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절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그가 연루되었을 거라는 확신도 있었다.
최소한 그를 이곳 하인델, 아니 제국 밖으로 추방할 명분은 찾으려 했는데.
“운이 좋군.”
아니면 교활하거나.
아스테인은 이걸 어찌 수습할지 고민하며 자신의 침실로 돌아갔다. 쉬고 싶었다.
하지만 그전에 할 일이 있었다. 자신의 소중한 연인, 아니 부인을 만나러 가고 싶었다.
“붙들어두길 잘했군.”
고맙게도 황후가 아스테인의 속을 눈치채고 나서준 덕분에 프레이아의 발을 잡아두었다. 그리고 당분간은 같이 황궁에 있어도 될 것 같았다.
아스테인은 침대 옆 서랍을 열어 향수병을 꺼내 들었다. 오랜만에 그녀를 봤으니 그도 한껏 치장하고 싶었다.
그가 향수를 뿌리려는 찰나, 방에 딸린 욕실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시녀들의 수발을 받으며 나타난 프레이아가 있었다.
젖은 머리에, 얇은 슈미즈 차림으로.
“아, 아스테인 님?”
“프레이아 님이 어째서 여기에……?”
향수가 그의 손목이 아닌 방에 향기를 흩뿌렸다.
“어…… 라일락 향?”
이런, 프레이아가 그의 체향의 비밀을 알아버렸다. 그녀의 부드러운 눈이 평소와 달리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