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어둠 뒤에 찾아온 광명
구름이 걷히고 고개를 내밀었던 태양은 그대로 사라졌다. 어둠이 찾아오자 공포 탓인지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다들 움직임마저 멎었다.
내 외침 뒤로는 흐느낌만이 들릴 정도였다. 예르테르 대공의 기사들 중 일부는 무기를 바닥에 떨어트리고 주저앉아 기도를 올렸다.
기사들의 신을 향한 믿음은 여전히 마음속에 머물러 있었다.
“놔요!”
가벼운 저항에 내 머리를 잡은 기사의 손이 떨어졌다.
나는 조금 뻐근한 느낌을 숨겼다. 대신 당당하게 가슴을 내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공포에 질린 대공의 얼굴이 보였다.
“이, 이게…… 무슨……! 태양이 사라지다니!”
“성녀를 건드린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겠나요?”
태양이 있던 자리에는 반지 같은 빛만 남았다. 태양은 새카만 암흑 속에 자신을 숨겼다. 더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분명 낮인데도 새벽 같은 어둠에 당황한 것은 날 둘러싼 이들만이 아니었다.
싸우는 소리에 겁에 질려 숨어 있던 마을 사람들도 하나둘 집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울먹이며 외쳤다.
“세상에, 신께서 화나셨어!”
“선대 성녀가 죽고, 황제도 죽더니……. 폭우도 그렇고 신께서 분명 우리에게 벌을 주시는 거야!”
“아니 도대체가……. 태양이 사라지는 건, 뭔가 잘못됐다는 거 아냐? 제국이 멸망하는 거야?”
불안한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뚫고 단단한 목소리가 삐져나왔다.
“신의 분노를 알아채고 제국민을 하나라도 살리려 애쓴 성녀님을 마녀로 몰아간 자들에게 내려지는 벌이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장난기 가득한 블루 로즈의 수장이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곳곳에서 동조하는 외침이 들렸다.
“성녀님은 신의 뜻을 거스르고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 신성력을 쏟아부었다. 그로 인해 무지개가 뜨고 신성력을 잃으신 것이다!”
“그런데도 그분을 마녀로 몰다니! 이 어리석은 인간들아!”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건 아마도 블루 로즈의 목소리일 것이다. 그들은 내가 은밀히 전달한 일을 실수 없이 외쳐주고 있었다.
“그래놓고 성녀님을 버리려 하니 신께서 화가 날 수밖에!”
분위기는 완전히 내게로 넘어왔다.
“맞아, 우리가 성녀님의 진심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해했어.”
“우리가 잘못했어.”
말로만 떠도는 소문보다는 눈으로 직접 보는 쪽이 더 확실했다.
“그럴 리가 없다! 이건 마녀가 저지른 짓이다! 마녀가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해…….”
푸토르 후작은 이런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반발했다. 하지만 이런 게 먹힐 리가 없었다.
특히 그가 진짜 성녀라며 데려온 이가 있으니…….
“저 여자가 진짜 성녀라면서요? 잘됐네요. 당장 신성력으로 하늘을 되돌려보세요. 그게 가능하면 마녀인 날 화형해도 좋아요.”
당당한 나의 태도에 당황한 것은 후작과 예르테르 대공이었다.
그러자 성기사들이 발악하며 외쳤다.
“감히 성녀님을 마녀라고 모욕했으니 얼른 진짜 성녀임을 증명하시오!”
“그게 아니면 사칭한 죄로 당신들을 모두 죽일 테니!”
그 말에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웅성댔다. 그들은 성기사들만큼이나 화가 났다.
“뭐라고? 성녀님을 죽이려고 했다고?”
“감히 성녀님을 마녀라고 몰다니! 말이 돼?”
조금 허탈하기는 했다.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말에 휩쓸려 다니는지가 보여서.
저들 중에도 분명 내게 마녀라며 손가락질을 한 사람들이 있겠지?
“아까 예르테르 대공이 기사들을 이끌고 가는 걸 봤어.”
“진짜 성녀를 데려왔다던데?”
원망의 화살은 빠르게 대공을 향해 겨누어졌다.
“설마 황제가 되려고 성녀님을 죽이려고 한 거야? 성녀님은 단델리온 대공과 사이가 가까웠잖아.”
“마녀라는 소문도 그럼 저자가……?”
나는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지금이 말을 거들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뭐 해? 네가 진짜 성녀라면 얼른 태양을 되돌려봐.”
검은 머리의 여자가 부들부들 떨었다. 자존심이 상하기라도 한 걸까? 그녀는 손을 뻗었다. 그러자 손 위에 밝은 빛의 구체가 모였다.
“그걸로 세상을 전부 밝힐 수 있어? 아니, 그딴 걸 신성력이라고 쓰는 거야?”
푸른 날개도 없이 쓰는 신성력이라니. 내가 비웃어주자 여자가 발끈했다.
그녀는 내게 빛나는 구체를 던졌다. 하지만 그 구체는 푸른 빛을 가진 투명한 방패에 가로막혔다. 푸른 빛은 어둠에 사로잡힌 주변을 밝혔다.
하지만 내 눈에는 다른 빛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나만의 기사님, 아스테인의 등만 보였다.
“마법을 쓰는 성녀는 없다.”
그의 침착한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놓였다. 긴장으로 빳빳해진 어깨가 살짝 풀렸다.
곧바로 크리세우스가 외쳤다.
“황후 폐하의 명령이다. 성녀님을 해치려고 한 자들을 모두 잡아들여. 예르테르 대공과 푸토르 후작도 마찬가지야!”
황실 근위대가 나타나자 후작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큰딸에게서도 버림받을 줄은 몰랐나 보다.
“나와 성녀님이 곁에 있으니 모든 기사는 정의롭지 못한 자를 처단하라!”
아스테인의 목소리에 성기사들도 힘을 냈다. 아스테인이 나를 가로막고 있기에, 나는 마음 편히 내 뒤에 주저앉은 대사제에게로 향했다.
“괜찮아요, 레무스 님?”
“저는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우리가 생각한 대로 되어 다행이군요.”
나는 그의 어깨에 박힌 화살 주변에 흐르는 피를 손수건으로 꾹 눌렀다.
“나 때문에……. 미안해요. 혼자 나올 걸 그랬어요.”
“아닙니다. 성녀님과 데아 님께서 말한 현상이 일어나는지 저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회귀 전에도 있었던 현상이었다.
그때의 나는 선대 성녀님께서 물려주신 신성력을 다 소진했었다. 신성력이 없던 나는 차마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했다.
그래서 기도방에 갇혀 밤낮으로 식음도 전폐하고 기도를 올렸었다. 제발 신성력을 달라고.
[너 따위가 성녀라고 앉아 있으니 여신께서 화가 나 태양을 잠시 숨긴 거잖아!]
유테르안은 이 일로 나를 참 많이 모욕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이 일이 정확히 언제, 어느 시간에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태양이 사라지는 일이 달 때문이라니……. 데아 님의 힘은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레무스는 조금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벌리고 하늘을 바라봤다.
내가 백발 사제에게 들은 말을 단서로 옛 자료들을 뒤진 레무스는 태양이 사라지는 것에 일정한 규칙성이 있다는 것을 찾아냈다. 그리고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예측해냈다.
“조금 후면 다시 태양이 나타날 겁니다. 그때가 기회일 것 같군요. 진정한 이 세상의 빛이 드러났음을 보일 기회 말입니다.”
레무스가 아스테인의 등을 지그시 쳐다봤다.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그의 등은 오늘따라 더 넓어 보였다. 그의 뒷모습도 좋았지만 얼른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가 너무 그리웠다.
“아스테인 님이 금방 끝낼 거예요.”
내 말을 들은 걸까? 아스테인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한 놈도 놓쳐서는 안 된다!”
레무스의 상처에서 흐르던 피가 점점 멎었다. 화살이 깊이 박혔지만, 다행히 급소는 피한 것 같았다.
지혈을 끝내갈 때가 되자, 주변 상황도 정리됐다. 진짜 성녀인 척한 여자는 크리세우스의 손에 무릎이 꿇렸다. 후작과 예르테르 대공은 성난 성기사들의 손에 짓눌렸다.
나는 곧바로 하늘을 바라봤다. 완벽한 반지 모양이 됐던 태양이 자신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었다. 하늘을 덮었던 어둠도 조금 걷혔다.
“아스테인 님!”
나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곁으로 갔다. 아스테인의 다정한 얼굴이 나를 돌아봤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얼굴은 빛나 보였다.
“글라디우스, 그걸 하늘 높이 들어 올려요!”
갑작스러운 요구에도 아스테인은 의문을 제시하지 않고 바로 검을 뽑았다. 그가 검을 뽑아 들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신께서는 내게서 신성력을 거둬가신 대신, 하늘에서 빛을 내렸다. 아스테인 단델리온, 그가 제국을 빛낼 것이라고!”
신기하게도 그 순간, 파랑새 한 마리가 내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내 말이 정말로 신의 말이 맞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조금씩 자신의 모습을 되찾아가던 태양이 글라디우스의 위에 올라섰다. 성검은 태양을 머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온 세상을 밝히기라도 할 듯이, 어둠으로 덮인 거리에 빛을 반사했다. 밝은 희망의 빛을.
“신께서 보낸 새로운 황제께 예를 갖추세요.”
성기사들도, 예르테르 대공의 기사들도, 그리고 거리의 사람들도 모두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제국의 빛을 향해.
“제국의 새로운 주인,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거리의 사람들이 아스테인을 향해 외쳤다. 그리고 그 울림은 온 제국으로 뻗어 나갔다.
누가 뭐라 해도 황제는 이제 아스테인이었다.
* * *
“프레이아! 큰일 날 뻔했다며! 하늘은, 하늘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황궁으로 옮겨가자 카렌시아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그녀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저는 다치지 않았어요.”
“다치지 않았다니요. 지금은 괜찮지만 분명 내일이 되면 어깨와 목에 통증이 올 겁니다.”
아스테인이 조금은 울컥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화난 것 같지만 그 속의 다정함은 내 입술을 가만두지 않았다.
“아프면, 아스테인 님이 간호해 주시겠죠.”
내가 조금은 뻔뻔한 얼굴로 말하자 카렌시아가 곁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래. 웃는 것 보니까 괜찮은 것 같네. 그래서 밖의 일을 어떻게 됐어?”
“성녀에게 위해를 가한 죄로 예르테르 대공과 후작을 붙잡아 지하 감옥에 가뒀어요.”
나와 아스테인은 밖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조리 이야기했다. 모든 것을 듣고 있던 카렌시아의 얼굴이 잠깐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녀는 금방 얼굴에서 그늘을 지웠다.
“그래, 이번만큼은 아버지도 죄를 벗을 수 없을 거야. 가짜 성녀라니……. 푸토르 후작가가 이렇게 무너지는 건가…….”
그래도 조금은 슬픈 눈이었다. 어쨌든 낳아주신 부모니까.
“차라리 잘 됐어. 이렇게 되는 편이 우리 순한 황녀를 위해서도 잘된 일이야.”
그녀는 요람에서 얌전히 입을 오물거리는 사랑스러운 황녀를 보며 의지를 다졌다.
“참, 프레이아. 황제 폐하의 장례는 네가 주도해 줄 거지?”
“어…… 그게……. 세상 사람들이 이제 제게 신성력이 없는 걸 알게 됐어요. 축복을 내려줄 수도 없고…….”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네가 했으면 좋겠어. 아니, 해야 해. 네가 신전의 마지막 성녀니까, 대공에게 황관을 씌워줘야지.”
선황제의 장례는 새 황제의 대관식과 연결되는 법이니까.
아스테인은 혼인 허가서를 쓸 때 했던 말을 기억할까? 나는 아스테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는 말없이 여전히 날 걱정스러운 눈으로 살피고만 있었다.
“네 남편의 황관을 씌워줄 수 있다는 거,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까? 안 그래요, 대공?”
남편이라는 단어에 나도 모르게 살짝 고개가 내려갔다. 아스테인의 눈은 오롯이 나를 향했고.
“싫으면 내가 대공에게 황관을 씌워주고.”
“저는 프레이아 님이 제 머리 위에 황관을 올려주길 바랍니다.”
아스테인은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그때와 같은 답일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심장이 일렁였다.
너무 기쁘고 벅차서. 정말로 해냈다는 보람이 느껴져서일지도.
“봐, 그렇지?”
“그러면 그 일만 맡을게요. 이제 신전은 기도와 연구의 장으로만 쓰일 거라서요.”
“사람들이 받아들일 것 같아?”
“아마도요?”
“당분간은 사람들이 불안해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불안감은 황실에서 메워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스테인의 말에 카렌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절차를 의논해 볼까요?”
우리는 한참이나 앞으로의 진행 상황을 의논했다. 대부분은 예법으로 정해져 있는 일이어서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검소한 아스테인 덕분에 뺄 허례허식이 많아서 문제였지.
“흠, 너무 간소한 거 아니에요?”
“아직 폭우 피해의 복구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제게 쓸 예산을 그리로 돌리는 편이 좋겠습니다.”
“제국민들은 행복하겠네요. 이런 성군을 황제로 두다니.”
이제 남은 것은 죄인들의 처분이었다.
이 부분에서는 나도 아스테인도 조금 전처럼 단호할 수 없었다. 어쨌든 카렌시아의 아버지가 저지른 일이니까.
카렌시아는 무덤덤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예르테르 대공은 죽이는 편이 나을 거예요. 당신의 미래를 위해서도.”
“그럴 생각입니다.”
아스테인이 조금 으르렁대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아직도 분이 덜 풀린 것 같았다.
“그리고 푸토르 후작은…….”
카렌시아의 목소리가 조금은 잦아들었다. 공허한 얼굴에는 망설임이 느껴졌다.
역시나 바로 답을 하기 힘든 문제였다. 어쨌든 내게도 날 키운 아버지니까.
“힘드시면 그냥 신전에서 파문하는 것으로 끝내요. 신전에서 마지막으로 파문당했다는 불명예가 남을 테니까요.”
“아니야, 그렇게 끝낼 수는 없어. 예전에 황실 연회 때도 대공을 죽이기 위해 인테르에 의뢰했었다며? 죽이진 않더라도 확실하게 처리해야 해.”
카렌시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주먹을 쥔 그녀는 결심을 끝내고 나와 아스테인에게 눈을 맞춰왔다.
“일단 아버지의 작위부터 박탈하는 게 좋겠어요.”
그리고 그녀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문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성녀님을 죽이려고 한 놈이 무슨 자격으로 뻔뻔하게 찾아온 거야?”
“귀족도 아닌 천한 기사가 왜 황궁에서 설치는 거지?”
“웃기고 있네!”
크리세우스와 유테르안. 둘이 문 앞에서 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누님! 제발 말 좀 들어주십시오!”
“아, 진짜. 뻔뻔하고 끈질긴 놈이네! 그만 꺼져! 황후 폐하도 널 버렸으니까!”
크리세우스가 완력을 썼는지 우당탕하는 소리가 안쪽까지 들렸다. 그러자 카렌시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모습에 아스테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문을 열고 밖의 상황을 확인했다.
그러자 갑자기 유테르안이 아스테인 앞으로 기어 왔다. 세상에서 가장 가련하고 비굴한 얼굴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