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어둠이 우리를 감싸더라도
날카로운 창과 검 끝은 여전히 나를 향했다. 나를 겨눈 기사들의 눈에는 자긍심이 느껴졌다. 마녀를 죽이고 진짜 성녀를 내세운다는 자부심이겠지?
하지만 그런 어리석은 감정은 부숴주는 게 맞았다.
“성녀 검증을 누가 이런 식으로 하죠?”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물었다. 하지만 상대는 뻔뻔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예르테르 대공은 특유의 여우 같은 미소를 흘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이 신성력이 아니라면 우리 앞에서 그 증거를 네 신성력으로 보여주면 되는 것 아닌가? 네가 진짜 성녀라면 그 정도는 별일 아니겠지.”
“내가 가짜라고 해서 저 여자가 진짜가 될 일은 없을 텐데요?”
“흐음, 본인이 스스로 가짜임을 인정하는 건가?”
“대공의 귀는 듣고 싶은 것만 듣나 보군요.”
하나하나 일일이 말대꾸를 해주자 여우 같은 대공의 얼굴에 본성이 드러났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누가 봐도 흥분한 얼굴이었다.
그러자 옆에서 박쥐 한 마리가 나에게 이빨을 드러냈다.
“네가 황후 폐하께 신성력이 없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다.”
“…….”
그날 쥐새끼처럼 엿들었구나. 조심했어야 했는데.
“이제 귀도 먹으셨나 보네요. 그날 제가 산달을 채우지도 못한 황녀 전하를 구하기 위해 신성력을 썼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나요?”
“그래, 똑똑히 들었다. 그게 마지막 신성력이라며?”
“네. 데아 님께서 내게 허락한 마지막 신성력이에요.”
“대사제 앞에서 진실을 고했구나! 네가 더는 신성력을 쓰지 못하는 가짜 성녀라는 사실을 말이다!”
기회를 잡았다고 믿는 후작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내 귀에는 그저 하찮은 찍찍 소리로 들렸다.
그는 레무스를 쳐다보며 이겼다는 듯이 외쳤다.
“이 가짜를 당장 신전에서 내쳐야 합니다. 스스로 마녀임을 고백했으니까요.”
예르테르 대공도 조금 기쁜 얼굴을 했다.
성기사들의 검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성기사들의 검은 금방 사기를 되찾고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대사제의 맑고 차분한 목소리 덕분이었다.
“성녀님은 신전에서 엄중한 성녀 검증을 통과한 분입니다. 가짜였다면 신께서 신전의 문을 열어주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 그건! 선대 성녀의 신성력을 훔쳐 썼기에 가능한 겁니다.”
“후작께서는 다른 이의 신성력을 얻어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압니까?”
레무스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후작은 레무스의 예리한 질문에 몸을 흠칫 떨었다.
나는 그런 후작을 노려봤다.
“그건…….”
“내가 답하죠. 예비 성녀 시절, 신성력을 전혀 쓰지 못할 때 후작이 신전에 들어가 가짜 성녀가 되라며 강요한 방법이거든요.”
이번에 무기가 살짝 내려간 쪽은 예르테르 대공의 기사들이었다. 저들은 진심으로 정의로운 일을 한다고 믿고 온 것 같았다.
“그건……!”
“부정하지 못하겠죠. 그건 지하 감옥에 갇힌 집사 베이트만이 증언해 줄 거예요.”
“이것이 사실로 드러나면 푸토르 후작가는 파문을 면치 못할 겁니다.”
레무스의 사나운 대답에 후작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그 꼴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때 예르테르 대공이 끼어들었다.
“아, 그건 후작이 알아서 해결할 문제고…….”
원하는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자 그의 얼굴은 잔뜩 불만스럽게 일그러졌다.
“어쨌든 중요한 건, 지금 신전을 지키는 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가 아닌가?”
“그, 그렇습니다. 저와 유테르안이 똑똑히 들었습니다. 이제 프레이아는 신성력을 쓸 수 없으니 성녀의 자격을 잃었습니다.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이쪽이 이제 신전의 주인입니다.”
검은 머리의 여자는 대화가 길어지자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분명 아까 그것은 마법이었다. 신전으로 데려가기만 하면, 바로 가짜임이 드러날 텐데 무슨 생각으로 진짜라 우기는 걸까?
마법으로는 성스러운 샘물을 움직이지도 못할 텐데…….
“억울하게 지하 감옥에 갇힌 대사제 카르텔로가 감별할 수 있습니다. 그자는 일반 사제 시절 마녀와 성녀를 구별하는 법을 공부했던 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내 곁에 카르텔로를 보냈던 이유가 이거구나. 끄집어내는 걸 거부하지 못하게.
“그럴 필요 없습니다. 비록 신성력을 이제 쓸 수 없다 하여도 프레이아 님이 성녀라는 사실은 남부 신전의 사람들과 제가 보증하니까요.”
레무스가 흔들림 없이 한 글자씩 또박또박 대답했다. 내게는 믿음직한 지원군이었다.
“성녀로서의 몸가짐을 갖추지 못하고 옷차림부터 신의 가르침을 벗어난 여자요.”
“신께서는 성녀의 옷차림을 규정지은 일이 없음을 남부 신전의 사제들이 규명했습니다.”
레무스가 가볍게 반박했다.
“신성력을 쓰지 못해 마녀들이나 좋아하는 약초를 써서…….”
“그래서 성녀 소리를 듣게 됐다고 기뻐한 건 누구죠?”
내 반박에 후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자 예르테르 대공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나는 그늘을 만든 하늘을 올려다봤다. 커다란 구름 하나가 태양을 가렸다. 하지만 하늘은 구름만으로 어두워진 것이 아니었다.
잘됐어. 이들은 하늘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거야.
“어쨌든 결론은 성녀가 아니라는 것 아닌가? 세상 사람들의 평가처럼 마녀일 수도 있고. 그러니 신성력을 잃은 것이겠지.”
이미 결론을 내리고 온 자에게는 어떤 변명도 필요 없었다.
“어쨌든 황제 폐하의 마지막 가는 길을 신성력이 없는 가짜가 주도하게 둘 수는 없지. 심지어 내 형제를 둘이나 죽인 것이나 다름없는 여자인 것을.”
대공은 말을 끝내자마자 턱을 살짝 움직였다.
그러자 검은 머리 여자의 손에 다시 푸른 빛이 일렁였다. 그리고 근처 지붕에서 푸른 빛이 감도는 화살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성기사들은 일제히 검을 들어 그 화살을 튕겨냈다. 화려한 푸른 빛에는 당연하게도 성스러운 기운이 없었다.
물론, 특별한 능력도 없어 보였다. 그저 환영 마법이었다. 다행히 성기사들은 그걸 눈치챈 것 같았다.
“우리 성녀님이 힘을 쓸 때와는 전혀 다르잖아!”
“그냥 삿된 마법인 것 같다! 무조건 우리 성녀님을 지켜!”
수는 적지만 아스테인과 크리세우스에게 잘 훈련된 성기사들은 나를 위해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다.
“대공, 프레이아를 당장 죽여서는 안 됩니다. 대공께서 사람들 앞에서 마녀라는 사실을 증명해내고, 어리석은 단델리온 대공에게 망신을 주어야지요.”
후작이 예르테르 대공을 부추겼다. 대공은 바로 반응했다.
“옆에 있는 대사제는 죽여도 되지만, 성녀는 혹시 모르니 죽여서는 안 돼! 잡아서 제대로 검증을 할 것이다!”
나를 인질로 삼아 아스테인을 괴롭힐 심산이구나.
나는 황제, 세르펜스 대공에게 빌붙었던 것으로 모자라 이제 예르테르 대공에게 들러붙은 박쥐 같은 인간을 노려보았다.
“내 몸에 위해를 가하면 데아 님께서 그대들의 광명을 빼앗을 것이다!”
배에 힘을 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후작과 대공이 나를 보고 비웃었다.
“신의 선택도 받지 못한 가짜 주제에 감히 신의 이름을 담다니!”
“저 여자를 잡지 못하면 어차피 너희는 적의 손에 죽는다! 제대로 싸워!”
대공의 협박이 반쯤 섞인 독려에 대공의 기사들이 힘을 냈다.
아무리 성기사들이 강하다고는 해도, 역시 무리인 걸까?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데…….
분명 구원의 빛이 내게 올 텐데…….
“으윽!”
그때 지붕에서 날아온 활 하나가 레무스의 어깨에 꽂혔다.
“레무스 님! 내 뒤로 와요!”
일단 나는 죽일 수 없을 테니까, 내가 나를 믿어주는 대사제를 보호해야 했다. 피를 흘리는 레무스를 억지로 내 뒤로 보낸 뒤, 나는 사람들을 향해 다시 소리를 질렀다.
“당장 멈춰! 정말로 신의 벌을 받고 싶은 거야?”
“신의 벌은 무슨, 당장 저 여자를 잡아!”
적은 수의 성기사들이 모두 나를 지키기에는 틈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우악스러운 손길에 내 머리카락이 잡혔다.
“잡았다!”
강하게 잡아당기는 힘에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하지만 나는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험하게 다뤄도 좋아! 다만 죽이지만 말아. 모든 게 끝난 뒤 넘겨달라는 녀석이 있으니 말이야.”
대공이 지칭하는 게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렇기에 더 무너질 수 없었다. 하지만 힘없는 나는 속절없이 거친 손길에 끌려갔다.
“성녀님!”
“하하하!”
성기사들의 당황한 외침 속에 대공의 웃음이 들렸다. 그리고 대공이 승리를 확신함과 동시에 구름이 걷혔다.
하지만 태양은 세상을 환하게 비추지 못했다.
한낮에 태양이 떴는데도 저녁이 된 것 같은 어스름.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눈앞에는 어둠이 찾아왔다.
어둠은 모든 것을 삼켰다.
* * *
“대공, 폐하의 장례가 끝나는 대로 귀족 회의를 소집할 거예요.”
카렌시아와 아스테인은 황제의 집무실에서 마주했다.
황제의 자리에 앉아 있는 카렌시아의 얼굴에는 슬픔이 없었다. 오히려 책상 옆 요람에서 잠든 귀여운 황녀를 보며 행복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때, 당신의 즉위를 공식적으로 선포할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예르테르 대공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서, 제대로 될지 모르겠네요. 생각보다 군사 수가 만만치 않은 것 같던데요?”
“파미르 공작가에서 사병을 보내주어 제 기사들과 합류했습니다.”
“아, 프레이아가 공녀를 용서한 덕분이랬죠?”
프레이아의 이름을 들은 아스테인의 눈동자가 살짝 흐려졌다. 그리운 걸까?
“그렇게 애틋한 눈을 하지 않아도 돼요. 곧 만날 거잖아요.”
카렌시아의 말에 아스테인의 얼굴이 조금 발그레해졌다. 카렌시아는 그런 아스테인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 놀리는 재미가 있다니까. 연인끼리 닮아서 어째요?”
“사랑하면 닮는 것 아니었습니까?”
“흐음. 부러워 죽겠네. 나도 이렇게 사랑받고 살았다고 착각했는데…….”
“……죄송합니다.”
카렌시아는 아스테인의 사과에 다시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프레이아를 어떻게 데려올 생각이에요?”
“마녀라는 누명부터 벗겨야지요. 신성력은 없지만 누구보다 제국민을 위하던 사람이니 오해만 벗으면 사랑받는 황후가 될 겁니다.”
“사람들이 헛소문이라는 걸 믿을까요?”
아스테인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프레이아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기에 믿음에서 나온 웃음이었다.
“신께서 내린 무지개와 광명을 저와 프레이아 님이 함께 받았으니, 그걸 이용하면 어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뭐, 황제가 그렇다는데 어쩌겠어요. 소문이라는 건 솔직히 한때니까…….”
그건 아스테인도 동의하는 바였다. 시간이 지나면 오해는 풀릴 일이었다.
특히 프레이아처럼 진심으로 사람들을 위하는 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신이 그녀를 버리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 말이에요. 나 다른 부탁이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여자도 가문이나 제국을 이어받을 수 있게 해줘요.”
아스테인은 카렌시아의 요구에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그러자 카렌시아가 손을 흔들었다.
“아니, 나중에 황위 계승권을 가지고 싸우려고 하는 게 아니라…….”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프레이아 님을 닮은 예쁜 딸이 태어난다면 저도 그렇게 해주고 싶으니까요.”
카렌시아는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봐왔던 대공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그저 무뚝뚝하고 우직하기만 한 남자인 줄 알았는데…….
“황제가 되면 귀족들과 의논해서 최대한 힘써보겠습니다.”
“고마워요…….”
“주군! 큰일 났어요!”
그때 갑자기 집무실 안으로 크리세우스가 뛰어들었다. 그의 눈은 대단히 초조하게 흔들렸다.
“무슨 일이지?”
“그게 아가씨가 말입니다!”
“프레이아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
황궁에서 황후를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던 크리세우스가 살짝 눈을 찡그렸다. 하지만 억지로 말을 이었다.
“예르테르 대공이 푸토르 후작과 함께 군사들을 이용해 그분을 억류 중이라고 합니다!”
“뭐라고? 성기사들은? 대공령의 기사들은? 프레이아 님이 오늘만큼은 꼭 곁에 있으라고 했다면서!”
아스테인은 신전에 혼자 남은 프레이아를 절대 그냥 두지 않았다. 레프렌스에게 기사들을 내어주고 은밀히 계속 호위하게 했다.
게다가 프레이아가 은밀히 부탁한 일도 있었기에 블루 로즈가 밀착 경호를 하고 있었다.
“그게 그 오…… 아니, 소후작이 중간에 아가씨의 마차를 뒤쫓는 듯하면서 애들을 유인해 버려서…….”
아스테인은 크리세우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집무실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로세틴 경, 황실 근위대도 내어줄 테니 함께 데려가요!”
“프레이아 님을 구하고 그분이 계획한 일을 실행하는 데 주군의 기사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황실이 프레이아와 대공의 편이라는 것을 그자에게 똑똑히 보여주는 편이 나을 텐데? 내 아버지에게 보여주는 경고이기도 하고.”
크리세우스는 입을 잠깐 다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황실 근위대를 이끌고 프레이아가 고립된 곳으로 간 크리세우스는 살의가 넘치는 자신의 주인을 만났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 있는 프레이아도 볼 수 있었다.
“감히……!”
하지만 크리세우스는 아스테인의 모습을 잠깐 눈앞에서 잃어야 했다. 갑작스럽게 세상에 찾아온 어둠 탓에.
어둠에 당황한 기사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검이 부딪히면 만들던 쇳소리도 그쳤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맑고 차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날 건드리면 신이 화낸다고 했지? 성녀를 건드려서 데아 님이 세상의 빛을 빼앗아 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