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91화 (91/101)

91화. 여보 그리고 부인

“이건…….”

나는 혼인 허가서에 적혀 있는 이름을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보았다.

“아스테인 단델리온과 프레이아 푸토르의 혼인을 승낙한다.”

그 외의 문장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저 한 문장이 계속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뭉클함을 전해줬다.

속으로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여러 번 문지르기도 했다. 땀에 번질까 두려워 멈췄지만.

“왜 계속 읽고만 계십니까?”

아스테인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나는 아스테인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보면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그와 나를 위한 짧은 이별도 받아들이기 힘들 것만 같아서.

“얼른 승인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신전을 떠나지 않고 계속 신전에 머무를 겁니다.”

“잠깐만요.”

성녀의 인장을 가지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건 침실에 이어진 서재에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스테인이 내 손목을 잡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아스테인을 쳐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괜찮겠습니까?”

“뭘요?”

“고민도 없이 제 아내가 되겠다는 겁니까? 혹시 제가 황제가 되지 못한다면 프레이아 님께는 불명예가 될 겁니다.”

아스테인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길고 고운 속눈썹도 처연하게 떨렸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밀려오는 눈물을 참고 참으려다 보니 몸이 아주 살짝 떨렸다. 하지만 먼 길을 가는 사람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나는 기뻐요. 이미 청혼도 승낙했잖아요.”

애써 웃어주었다. 하지만 아스테인의 걱정스러운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나는 그의 앞으로 가 양쪽 무릎을 구부리고 앉았다. 아스테인의 양손을 잡고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니까 부인을 외롭게 혼자 신전에 두지 말고 얼른 찾으러 와야 해요.”

“프레이아 님.”

“알았죠. 여……보?”

내가 선택한 수줍은 단어에 아스테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더 부끄러운데, 왜 아스테인이 얼굴을 붉힐까?

“방금 하신 말…… 다시 해주시면 안 됩니까?”

아스테인의 부탁에 이번에는 내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쭈뼛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건, 음, 나중에 절 데리러 오실 때요. 일단 성녀의 인장을 가져올게요.”

다시 말할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

아스테인이 아무리 아쉬운 얼굴로 애타게 나를 쳐다보더라도.

서재의 책상에서 나는 바로 성녀의 인장 반지를 찾았다. 하지만 그걸 들고 가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아스테인을 보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뭔가 아쉬웠다. 역시 이제 곧 이별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피해 다니지 말걸.”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민망하다는 이유로, 미련이 생긴다는 이유로 그를 피해 다닌 내가 조금 한심하게 느껴졌다.

아스테인은 이렇게 모든 순간을 나를 위해 행동하고 있었는데……. 마지막까지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해야 했다.

“여기 있어요.”

한참이나 한숨을 쉬다가 아스테인의 곁으로 갔다.

나는 서류의 끝부분에 신전의 상징인 파랑새 문양의 인장을 찍었다.

“부부가 되었음을 증명합니다.”

부부가 신전에서 결혼할 때 사제가 해주는 말.

신부가 되어야 할 여인이 스스로의 혼인을 승인했다. 나는 인장이 찍힌 혼인 허가서 한 쌍을 빤히 쳐다봤다.

“이제 프레이아 단델리온이 되었군요.”

아스테인이 뿌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얼굴에 묘한 기쁨이 들어앉았다.

그의 말대로 성이 바뀌었다. 지긋지긋한 푸토르 가에서 벗어났다. 이번에도 나는 아스테인의 구원을 받았다.

“마음에 드네요, 새로운 성이.”

나는 작게 단델리온이라는 성을 여러 번 읊었다. 익숙했지만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이 이제 내 것이 되었다.

아스테인이 떠나고 나면 종이에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적어봐야지.

프레이아 단델리온. 아스테인의 비.

“나중에 제가 황제가 될 때 제게 황관을 씌워줄 분이 프레이아 님입니다. 그리고 프레이아 님께 황후의 관을 씌워줄 사람은 저입니다.”

“알아요.”

“그러니 혹시라도 제가 떠난 사이 다른 이에게 한눈을 팔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저는 어떠한 유혹에도 물러서지 않을 테니까요.”

“당연하죠. 제 첫 춤의 주인공인 성기사님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어요.”

“그리고 이제 저의 단 하나뿐인 반려이니 다른 이에게 잠시도 눈길을 주지 마십시오.”

피식 웃음이 났다. 가끔 아스테인이 다른 이에게 보여줬던 질투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가 해야 할 말인데.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제게 남자는 아스테인 님밖에 없는걸요.”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행복한 신부가 될 수 있게 준비해두겠습니다.”

“그런 거 필요 없어요. 그저…… 아스테인 님의 곁에 서게만 해주세요.”

고아 출신의 가짜 성녀가 황제의 옆에 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짧은 시간 동안 찾아온 불안한 마음을 아스테인이 내게 나누어준 혼인 허가서가 달래줬다.

나는 이걸 몇 번이고 손으로 쓰다듬었다. 하염없이…….

“그렇게 좋습니까?”

“반려라는 존재가 정말로 생겼네요. 제게는 절대 생길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서류 속의 반려자 말고 저를 봐주십시오.”

아스테인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눈에 들어온 것은 아스테인의 슬픈 얼굴이었다. 애틋한 얼굴이 내게 다가왔다.

그의 이마가 내 이마에 닿았다. 그의 양손도 내 뺨에 닿았다.

코와 입술까지 밀착한 그는 한동안 말없이 그냥 그렇게 눈을 살며시 감고 있었다. 기도라도 하듯이.

“……아스테인 님?”

“금방 데리러 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부인.”

그의 따스한 입술이 내 것을 완전히 감쌌다.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그가 내 숨결을 삼키고 있었다. 행복한 설렘 속에서도 눈가가 뜨거워졌다.

역시 잠시라도 헤어지기 싫어.

아스테인의 부드러운 입술이 또르르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쳐 갔다. 그는 내 몸도, 마음도 가져갔다. 자신의 흔적을 내 온몸에 새기기 위해.

다음 날 새벽, 그가 떠날 때까지.

* * *

아스테인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에는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스테인이 세르펜스 대공의 뒷수습을 하는 동안, 예르테르 대공이 군사를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노골적으로.

“곧, 제국에 피바람이 불겠군요.”

나와 신전의 업무를 보고 있던 레무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렇겠죠.”

“어쩌실 생각입니까? 황위를 두고 전쟁이 일어난다면요.”

“신전은 정치적인 문제에 끼어들지 않는 게 원칙이니까요.”

“……진심이십니까? 단델리온 대공, 그분을 지지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레무스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해할 수 없다는 눈이었다.

“제가 그분을 지지하면…… 지금까지의 소문이 사실이 되잖아요.”

남자에게 한눈을 파느라 재해를 막는 것조차 잊은 마녀. 그런 마녀에게 선택받아 타락할 뻔한 성기사.

그건 아스테인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애써 그를 신전에서 내보낸 의미가 없었다.

“겨우 그와 나 사이의 관계가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고 있는걸요.”

아스테인이 신전을 나간 뒤, 그는 한 번도 신전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 흔한 서찰도 없었다.

카렌시아를 보좌하며 황실을 챙기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대신 성녀님의 소문이 더 악질적으로 퍼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괜찮아요. 어차피 진실은 더럽힐수록 빛나는 법이잖아요.”

애써 웃는 모습에 레무스가 안타까운 눈을 했다.

“그래도 단델리온 대공이 가장 황제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더군요. 신전에서 도움을 줄 수 없어 안타까울 만큼 말입니다.”

“레무스 님이 그렇게 보셨다면, 제국의 귀족들도, 제국민들도 다 그렇게 보지 않을까요?”

날 향한 칭찬도 아닌데 내 어깨가 슬쩍 올라갔다.

“하긴 그렇겠군요. 우리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혹시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이에요.”

“성녀님 대신 저와 남부 신전이 나서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레무스의 고마운 말에 눈을 빙그레 휘었다.

이건 내 도움이 아니었다. 아스테인이 스스로 얻은 신뢰와 지지였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십니까?”

“그럼요. 난 괜찮아요. 그것보다 레무스 님은 괜찮은가요? 당신의 형이…….”

카르텔로와 베이트만은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들은 신성모독의 죄로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상관없습니다. 죄를 지은 자는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죠.”

“당신의 명예도 땅에 떨어질 텐데요?”

“사제에게 명예란 신을 향한 마음이 사라졌을 때만 떨어지는 것입니다.”

덤덤하게 말하는 레무스의 모습이 조금 신기했다. 그리고 미안하기도 했다.

나 때문에 가족과 척을 져야 하니까.

“그런데 성녀님. 이걸 잠시 확인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가 서류 더미에서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넸다.

“남부 신전에서 올라온 보고서입니다.”

나는 그가 건넨 서류를 읽다가 눈을 찌푸렸다.

“진짜 성녀라고 나서는 이가 나타나 폭우 피해지역에 기적을 선물했다?”

조금 헛웃음이 나왔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걸까?

나는 다시 서류를 찬찬히 읽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류에 고개를 박고 있자, 레무스가 조심스레 질문을 해왔다.

“어떻게 할까요?”

“후작이 그 아이를 데리러 가지 않았나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허탈한 웃음을 지어주었다. 그러자 레무스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아아…….”

레무스의 탄식을 들은 나는 긴 한숨을 쉬었다.

“어디까지 하는지 지켜보죠.”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레무스의 눈에 비친 내 미소가 조금은 서늘했다. 자비라고는 없는 듯이.

“알겠습니다.”

“황제가 죽고 당분간은 제국이 암울하겠네요. 밤이 된 것처럼…….”

문득 남부 신전에서 만났던 백발 사제의 말이 떠올랐다. 분명 그건 데아 님의 전언이었다.

[태양이 사라지고 암흑이 찾아올 것 같군요.]

[암흑 뒤에 찾아오는 빛은 더 찬란하게 빛나는 법이죠.]

문득 고개를 돌려 창밖에 떠 있는 태양을 봤다. 그게 그저 비유였을까?

그러자 흐릿하게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레무스 님, 혹시 하늘의 움직임에 관해서 잘 아세요?”

“별의 움직임 말입니까?”

“아뇨, 태양의 움직임 말이에요.”

나의 질문에 레무스의 눈이 반짝였다.

* * *

아스테인이 떠나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늘에 달조차 떠오르지 않던 날 밤, 황궁의 성 꼭대기에 걸려 있던 제국의 깃발이 내려갔다.

황제의 죽음에 제국은 침묵에 빠졌다. 홀로 남은 황후와 황녀를 향한 안타까움 때문에. 그리고 앞으로의 혼란한 미래를 향한 불안함으로.

다음 날, 카렌시아의 연락을 받은 나는 바로 황궁으로 향했다.

“성녀님, 하인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군요.”

장례를 돕기 위해 같이 황궁으로 가고 있던 레무스가 마차 밖을 내다보고는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렇네요. 사람들이 길에 없어요.”

장례 때문에 심각한 분위기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도 인적이 너무 드물었다.

“가을이 깊어진 탓일까요? 낮인데도 평소보다 어둡게 느껴지네요.”

“사람들도 곧 다가올 어둠을 본능적으로 눈치챈 것 아닐까요?”

나는 대답하는 대신 주변을 다시 훑었다.

하인델을 지키는 경비대가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이 어려 있었다.

언제 전쟁이 일어나도 문제없을 분위기였다.

그래도 나는 두렵지 않았다. 저기 황궁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 사람 때문에.

“오랜만에 단델리온 경, 아니 대공을 만나니 성녀님께서도 기쁘겠군요.”

레무스가 내 마음을 눈치채고 물었다. 나는 눈동자를 슬쩍 다른 곳으로 옮겼다.

“뭐…….”

내가 뭐라 핑계를 대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마차가 덜컹 멈췄다. 아직 황궁에 도착하려면 멀었는데…….

“무슨 일이죠?”

“신전을 더럽힌 마녀는 황제의 장례를 치를 자격이 없다.”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나와 레무스의 얼굴이 굳었다.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아니에요. 같이 나가요.”

마차 문을 연 나와 레무스는 마차를 둘러싼 성기사 너머에 있는 사람들을 확인하고 눈을 찌푸렸다.

“당신은 예르테르 대공?”

“처음 뵙습니다. 성녀님, 아니 마녀라고 불러야 하나?”

여우같이 생긴 남자가 교활한 얼굴로 웃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 가진 여자와 푸토르 후작이 함께였다.

“성녀님은 대사제인 나와 남부 신전의 지지를 받는 분입니다. 감히 마녀라는 말로 제국의 대공이 모욕할 사람이 아닙니다.”

“글쎄? 이 여자의 손에 쫓겨난 사제와 대사제의 형이라는 사람도 이 여자가 마녀라고 인정했다던데?”

대공의 불경한 말에 성난 성기사들이 검에 손을 댔다.

그 순간, 험상궂은 얼굴의 기사들이 우리를 감쌌다. 그 수는 성기사의 세 배가 넘었다. 그들은 일제히 창과 검을 뽑았다.

그들의 무기에 햇빛이 반사됐다. 하지만 눈이 그다지 부시지 않았다. 하늘의 태양이 일하지 않는 듯이.

“게다가 진짜 성녀님께서 그대가 마녀임을 증명하셨는데?”

예르테르 대공의 말이 떨어지자 검은 머리의 여자가 앞으로 나섰다.

“선대 성녀를 죽이고 신성력을 빼앗아 성녀 행세를 한 마녀, 당신의 죄를 묻겠어요.”

여자의 손에서 푸른 빛이 일렁이더니 파랑새의 환영이 떠올랐다.

지켜보던 성기사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하지만 나는 그걸 묵묵히, 그리고 침착하게 바라봤다. 평소보다 밝지 않은 하늘과 그와 반대로 밝은 척하는 파랑새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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