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얼른 하나가 되고 싶습니다
아스테인이 조금 이상했다.
가끔 둘만 있을 때면 이렇게 적극적일 때가 있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급했던 적은 없었다.
머리카락 속에 들어온 손은 평소보다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내 턱을 붙잡은 손길도 빨랐다.
특히 그의 입술은 너무 저돌적이라 내게 숨을 쉴 틈을 줄 시간이 없어 보였다.
이미 닿아 있는데도 더 닿길 바라는 마음.
그게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쌌다.
그러자 그가 내게 더 다가왔다. 내 몸은 점점 그에게 밀려 의자 위에 거의 드러누울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나를 일으킬 생각이 없었다. 더 다급하게, 더 간절하게, 더 애절하게 내 숨결을 삼킬 뿐.
“……하아, 프레이아 님.”
그와 함께 할 때면 언제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런데 방금, 내 이름을 부르자 심장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속도를 냈다.
머릿속을 헤매던 손가락이 스르륵 내 목을 스치자 소름이 돋았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아스테인의 벗은 몸이 떠올랐다. 온몸이 뜨거워질 만큼.
아스테인의 키스도 키스였지만, 머릿속에 자리 잡은 이상한 망상들이 나를 정신 차리지 못하게 했다.
부끄러웠다. 그런데 이 행복하고 야릇한 느낌 속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곧, 신전에 도착하게 되면 또 우리는 남남처럼 떨어져 앉아야겠지.
“프레이아 님.”
아니나 다를까 아스테인이 내게서 떨어졌다.
그는 마차 의자에 눕혀진 나를 일으켜 예쁘게 앉혀주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주고, 옷의 주름을 바로잡아주었다.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왜 내 입꼬리는 계속 내려가고 시무룩해질까?
“죄송합니다. 오늘 제가 계속 참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황궁에서의 일은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저 때문에 또 안 좋은 소문이 돌면 마음이 불편해질 텐데……. 죄송합니다.”
아스테인이 거듭 사과했다.
나는 머리카락을 정리하던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얌전히 그 손을 내 뺨에 가져갔다.
“한 번만 더 죄송하다고 하면, 저 화낼 거예요.”
그 말에 아스테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뭘까? 내가 실수라도 한 걸까?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도 내게 행복하지 않다고 말했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저기…… 아스테인 님. 저한테 할 말 없으세요?”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나눈 키스가 이별의 키스였다거나……. 그런 불길한 상상.
그래, 이상해. 너무 모든 것이 술술 잘 풀리잖아. 이럴 리가 없는데…….
“있습니다.”
아스테인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떨렸다. 턱을 만지는 그의 손도 분주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뭔……데요?”
“이런 곳에서, 이런 상황에서 말씀드리는 것이 너무 죄송합니다만…….”
“사과 같은 거 하지 말랬죠?”
나도 모르게 조금 거칠게 말했다. 긴장한 탓이었다.
그러자 턱을 만지던 아스테인의 손이 멈췄다. 눈도 커다래졌다.
그러자 심장이 조금 덜컹했다. 내가 짜증 내는 모습에 실망하지는 않았을까?
“그게…… 아까 행복하지 않다고 하셨잖아요. 그것과 관련된 거라면 빨리 듣고 싶어요. 사과하지 않아도 되니까.”
조금은 주눅이 들어서 말했다.
아스테인은 이런 나를 바라보다가 손을 옮겼다. 그는 허리춤에 매어두었던 주머니를 꺼냈다.
내가 그에게 선물했던 주머니였다.
주머니에는 요즘 계속 도톰한 무언가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아스테인은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프레이아 님.”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며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아스테인의 손에는 작은 상자가 쥐어져 있었다.
푸른색 벨벳으로 만든 보석 상자.
그걸 열자 커다란 보석이 달린 반지가 들어 있었다.
푸른색 사파이어는 장미 모양으로 세공되어 있었다. 장미 안에는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었고.
“아스테인…… 님?”
나는 이 보석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원래 이건 폭우 이후 복구를 도와준 한 영지에서 영주가 감사의 인사로 주었던 보석의 원석이었다.
“사파이어의 원석을 받자마자 느꼈습니다. 이건 프레이아 님께 어울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때 바로 세공을 맡긴 거예요?”
“네. 그리고 대신전에 도착한 날, 완성된 반지를 받았습니다.”
“그렇군요.”
성녀가 되고 성녀복을 벗어 던졌다. 하지만 장신구는 최대한 하지 않았다.
사치라는 걸 잘 모르기도 했고, 그런 이미지까지는 아직 거부감이 있어서.
그래서 반지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는데…….
“끼워 드려도 되겠습니까?”
마차에서 내리기 전까지는 끼고 있어도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오른손을 자연스럽게 내밀었다.
“아니요. 왼손 말입니다.”
“아무 곳에나 껴도…….”
“청혼 반지를 오른손에 끼지는 않지요.”
아스테인이 조금은 부끄러운 듯, 그리고 서운한 듯 말했다.
하지만 나만큼 수줍은 티를 내지는 않았다.
나는 아스테인의 청혼이라는 소리에 온몸에 열이 올랐다.
“분위기 있는 곳에서, 제대로 청혼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계속 사건이 일어나고 프레이아 님도 힘들어하셔서 차마 못 했습니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의 내 모습을 그려보지 못한 탓이었다. 회귀 전에도 겪어보지 못한 순간이었으니까.
가끔 농담처럼 그가 입에 담을 때조차도 상상하는 게 힘들었다.
“그런데 왜 지금…….”
“말할 기회는 있었지만, 프레이아 님이 다른 생각을 하느라 바빠 제 청혼이 묻히는 게 싫었습니다.”
조금은 황당한 이유에 눈을 크게 떴다.
“오직 제 청혼만 머릿속에 가득 차길 바랐습니다.”
이쪽이 더 알아듣기 좋았다.
“하지만 아직 일이 정리되지 않았는데…….”
“알고 있습니다. 아직 프레이아 님은 성녀이고, 저는 일개 성기사니까요.”
아스테인은 마차 안에서 살짝 무릎을 꿇었다.
“황제가 죽고 모든 것이 정리된 후에 청혼하면 더 화려하게 할 수 있다는 건 압니다.”
“그런 걸 바란 적 없어요.”
“하지만 더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스테인의 보라색 눈이 짙어졌다.
평소의 봄날 같은 색이 아니었다. 진한 욕망이 가득한 뜨거운 여름 같은 색.
“사람들 앞에서 프레이아 님을 안는 것조차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싫었습니다.”
내가 성녀라서 그랬다. 아마 그냥 보통의 연인이었다면 당당할 수 있었겠지.
“내 여자인데도 말입니다.”
아스테인의 말에 심장이 예정된 평범한 뜀박질을 거부했다. 마구 요동치며 달리는 심장은 얼굴까지 빨갛게 만들었다.
“그러니 제대로 제 것이라는 인장을 찍어야겠습니다.”
내가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게다가 난 이미 아스테인의 것인데.
내 마음을 모르는 아스테인의 손이 내 왼손을 잡았다. 마치 춤이라도 청할 것같이 그의 한쪽 무릎이 꿇려져 있었다.
“저는 프레이아 님을 위해 제 옆자리를 항상 비워두었습니다. 그러니 제 반려가 되어 주지 않겠습니까?”
아스테인의 목소리가 따뜻하게 퍼졌다.
이런 걸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스테인이 준비해온 반지를 내 왼손 약지에 끼워주었다.
그리고 다시 가볍게 키스를 해왔다. 입술을 뗀 그의 눈은 다시 짙어져 있었다.
“볼품없는 청혼이라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제게는 최고의 청혼인걸요.”
나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행복을 가득 담아 답했다.
아스테인의 손도 반지 낀 내 손을 지분거렸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프레이아 님을 가지려 제가 사고를 칠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이미 저는 아스테인 님의 것이 아니었나요?”
그러자 그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마음 말고요. 마음은 진작에 제가 가졌지요.”
“네? 그럼 뭘 가져요?”
그가 말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가 내 귓가에 뜨겁게 속삭인 말 때문에.
“몸도 얼른 하나가 되고 싶습니다. 하루라도 빨리요.”
* * *
카렌시아가 출산하고 열흘 뒤, 세르펜스 대공의 처형 날이 되었다.
죄목은 당연히도 황제 시해죄. 선황제의 유언을 따르지 않은 3황자도 선황제의 저주를 맞닥트렸다.
그는 죄인이 타는 마차를 타고 루크데린 거리의 중앙 광장으로 끌려갔다.
“저 나쁜 놈! 내 재산을 빼앗아 갈 때 알아봤어!”
“저놈이 푼돈을 가지고 우리를 얼마나 협박했는지 몰라!”
“잘 죽는다, 이놈아!”
길에서는 하나같이 세르펜스 대공을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을 들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당연하게도 돌은 대공을 향해 날아갔다.
“쓰레기가 쓰레기를 죽이려다 먼저 죽네!”
간간이 황제를 향한 비난도 섞여 있었다.
“프레이아 님, 별로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닐 텐데, 꼭 보셔야겠습니까?”
아스테인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우리는 군중 속에 섞여 세르펜스 대공이 끌려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핑계로 밖에 나오고 싶었는걸요.”
가발과 로브로 정체를 숨기고 외출한 김에 아스테인이 준 반지를 꼈다.
“데이트 신청입니까?”
“네, 미래의 제 반려랑 시간을 더 보내고 싶어서요.”
조금은 낯뜨거운 소리도 스스럼없이 내뱉을 수 있는 경지가 되었다.
나는 아스테인에게 팔짱을 끼고 그를 쳐다봤다.
“기분 좋군요.”
누군가는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 우리는 행복한 결말을 앞두고 있었다.
그 차이가 생긴 이유는 단순했다. 누가 더 밑바닥의 사람을 인간답게 대우했는가.
아스테인은 황권에 도전하는 사람 중에서 가장 제국민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세르펜스 대공이 형장에 도착한 후, 준비된 단상에 카렌시아가 등장했다.
“황후 폐하가 직접 나오셨네요.”
아직 몸조리를 더 해야 하는데…….
황녀의 탄생으로 몸을 추슬러야 하는데도 기꺼이 나왔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제스티안 세르펜스.”
카렌시아의 목소리가 광장에 퍼지자 광장에는 순식간에 적막이 퍼졌다.
“당신은 황궁에 납품하는 술에 독을 넣고 그걸 흑주술로 가렸다. 인정하는가?”
세르펜스 대공은 이미 고문을 많이 당한 탓인지 입을 움직이지 못했다.
“인정하지 못해도 증거가 차고 넘치니 할 말이 없겠지.”
카렌시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런데도 광장 전체를 울리는 힘이 있었다.
그녀는 세르펜스 대공이 저지른 다른 죄까지 하나하나 다 읊었다.
고리대금, 인신매매, 갈취에 사기까지. 돈이 권력이라 믿은 자의 행동은 추악했다.
“……그러니 황족으로서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를 물어 참수하겠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세르펜스 대공의 목이 단두대에 올려졌다.
“역시 보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아스테인이 내 머리를 그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덕분에 나는 끔찍한 광경은 보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단두대의 줄을 끊는 도끼질 소리. 무거운 것이 떨어지며 만든 마찰음과 끔찍한 비명.
아스테인이 내 귀를 막아주었는데도 소리는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끝났지만 정리될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리십시오.”
아스테인의 다정한 배려가 그의 가슴을 타고 건너왔다.
곧 사람들의 함성이 광장을 완벽하게 채웠다. 대공이 사람들에게 미움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사람들의 소리가 잦아들자, 카렌시아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세르펜스 대공의 재산은 황실이 몰수한다. 그리고 이 재산은 대공에게 피해를 본 제국민들을 위해 쓰는 것이 좋겠다고 단델리온 대공이 건의했기에, 그에게 관리를 맡기겠다.”
카렌시아는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사람들은 카렌시아의 결정을 환영했다.
“단델리온 대공이라면 믿을 수 있지.”
“그래, 폭우로 인한 피해도 발 벗고 나섰다면서.”
“황제도 외면한 것을 단델리온 대공이 개인 재산을 털어가며 사람들을 도왔다던데?”
“나도 단델리온 대공령으로 이주할까?”
드디어 노력한 일들이 빛을 보고 있었다.
아스테인을 향한 칭찬에 내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가 칭찬을 듣는 기분이었다.
아스테인을 향한 칭송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황제 폐하가 아프댔지? 그럼 역시 차기 황제는 단델리온 대공인가?”
원하는 반응까지 나왔다. 뿌듯함이 심장 안을 가득 채웠다.
여전히 내가 마녀라는 소리는 종종 들리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양호했다.
이대로 순조롭게 모든 것이 끝나면 좋겠다. 소망을 가득 담고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만졌다.
손으로 쓰다듬을수록 반지의 푸른 장미는 더 예쁘게 반짝였다.
“돌아갈까요?”
광장의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 여론 파악도 끝냈으니 돌아갈 때가 되었다.
내가 손을 내밀자 아스테인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몰래 나오길 잘했군요.”
아스테인을 몰래 수행하는 그의 기사들에게만 알렸다. 성기사들은 내가 신전 밖으로 나간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야 아스테인과의 시간을 즐길 수 있으니.
신전이 보이기 전, 마지막 골목에서 잠시 멈췄다. 나는 반지를 손에서 뺀 뒤,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새로운 성물이라고 할 걸 그랬어요.”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왔다.
“곧, 당당하게 끼고 다닐 날이 올 겁니다.”
아스테인의 말에 기운을 얻었다.
이제 가발을 벗고 자연스럽게 신전으로 돌아갈 준비도 끝냈다. 하지만 우리는 선뜻 신전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성녀님을 뵈러 왔다.”
선대 성녀님의 손에 파문된 대사제, 카르텔로.
도대체 무슨 낯짝으로 신전을 찾아온 걸까? 분명히 푸토르 후작과 관련된 거겠지?
아스테인을 바라보자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믿음직한 모습을 확인한 나는 욕심 많은 전 사제를 향해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