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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87화 (87/101)

87화. 위로해주십시오

“황후 폐하와 황녀님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유테르안이 뒤늦게 철이라도 든 걸까?

큰누님이라는 호칭 대신, 황후 폐하라는 호칭을 쓰는 그가 조금 낯설어 보였다.

심지어 내게 이렇게 깍듯이 존대하다니.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황제 폐하는 살려줄 수 없는 겁니까?”

“그건 신께서 이미 정한 일이라 제가 관여할 수 없군요.”

유테르안은 내 대답을 듣고 순순히 물러났다.

그것이 영 불안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아스테인 님은 어디 있죠?”

“황제 폐하께서 급히 찾으시어 그리로 갔습니다.”

제정신이 아닌 이가 불렀다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가 아는 황제는 죽어가면서도 아스테인을 괴롭힐 궁리를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만 돌아가겠어요. 황후 폐하께서 아직 몸이 성치 않으니 귀찮게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요.”

나는 다급히 복도 끝에 있는 성기사들을 불렀다.

“아스테인 님에게 가요.”

아스테인에게 가려는 나를 유테르안이 붙잡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이상하게도 날 내버려 뒀다.

* * *

유테르안은 성기사들과 함께 떠나는 프레이아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그의 손은 어느새 주먹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손등에는 핏줄이 잔뜩 솟아 있었다.

“유테르안. 우리가 들은 게 도대체…….”

“제가 몇 번이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 여자에게 신성력 같은 것은 없으니 사과하지 말라고요.”

유테르안이 조금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후작은 아들이 버릇없이 구는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허탈했다.

“정말로 가짜였다니……. 신성력도 없는 가짜에게 우리가 이런 수모를 겪었다고?”

후작의 목소리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렸다.

“당장 신전의 대사제에게 고하고 프레이아를 마녀로 공표해야겠구나.”

“신전에 있는 놈은 철저히 그 여자의 편입니다.”

“이미 파문된 이들은 힘을 쓰지 못할 텐데…….”

“카르텔로에게 마녀의 존재를 알려주기만 해도 알아서 할 겁니다.”

유테르안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서서히 떠올랐다. 그리고 차가움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그의 눈이 갑자기 빛났다.

“아버지, 예전에 황제가 제게 시켰던 일을 기억합니까?”

“뭘 말이냐?”

“이 상황에서 그걸 터트리면 어찌 될지 재밌겠네요.”

푸토르 후작은 아들의 눈에서 조금은 무서운 집념을 발견했다.

이대로 두어도 괜찮을까?

“마침 세르펜스 대공이 불씨를 퍼트려 놨으니, 부채질을 잘하면 우리가 당한 수모를 그대로 갚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유테르안, 비록 신이 저 아이에게 신성력을 주지는 않았지만 아끼는 것 같은데…….”

후작은 신의 벌이 두려운지 조금 저어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유테르안이 자신의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정말로 아꼈다면 제대로 신성력을 줬겠죠.”

“그건 그렇다만…….”

“그리고 죽은 고모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유테르안이 피식 웃었다. 조금은 거만한 태도였다.

이미 신을 이겨봤다는 믿음에서 온 오만함.

후작은 아들이 살짝 무섭게 느껴질 정도였다.

“신은 성녀를 보호해주지 않는걸요. 심지어 천벌을 내리지도 않았죠.”

아들이 어떤 일을 저지른 것인지 어렴풋이 예상되었다. 그건 분명 끔찍한 짓이었다.

황후인 카렌시아마저 위태롭게 만들 만큼 끔찍한 짓.

“흐음. 그런데 뒷이야기를 듣지 못해서 아쉽군요.”

그들은 날개이지만 신성력이 없다는 소리까지밖에 듣지 못했다.

황후의 기사들이 살짝 열린 문 앞에 있는 그들을 발견하고 문을 닫아 버린 바람에.

“뭐 상관없죠. 진실을 알게 된 이상, 모든 걸 다 동원해서라도 가짜에게 우리의 무서움을 보여야죠.”

그 점은 후작도 동의했다.

황제는 죽어가고, 황후는 딸을 낳은 상황에서 뭔가 대책을 세워야 했다.

“그것보다는 황녀도 황위를 이을 수 있게 제국법을 바꾸는 게 급해. 황제 폐하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걸 설득해야 한다.”

“그냥 예르테르 대공을 황제로 세우고 공작이 되는 편이 낫지 않아요?”

어린 황녀보다는 예르테르 대공이 황제가 되는 편이 나았다. 그래야 대공이 정적을 죽일 테니.

“하지만…….”

“괜히 무리해서 어린 황녀님을 내세웠다가 황위를 빼앗기면 오히려 외가인 우리 집안을 없애려 할 겁니다.”

“그런가……?”

유테르안은 속을 숨기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그의 머릿속에 정해진 목표는 단 하나였다.

죽은 어머니가 자신보다도 예뻐한 사람. 집안사람 모두의 관심을 받던 꼬질꼬질한 여자아이.

그게 얄미워 밟을수록 더 반듯하게 일어서던 고귀한 여인.

프레이아를 괴롭힐 방법을 찾아야 한다.

“역시 그 건방진 대공부터 죽이는 편이 낫겠네요.”

“예르테르 대공과 의논해보마.”

후작이 다급히 자리를 떴다. 그러자 유테르안이 뒤에서 활짝 웃었다.

“그래야 내 파랑새가 행복에 겨워 딴 놈을 보고 웃는 일 같은 것이 없겠죠.”

유테르안의 비틀린 욕망이 활짝 꽃피었다.

이번만큼은 예쁜 파랑새를 제 손 위에 올려놓고 깃털을 하나씩 다 뽑아낼 것이다. 다시는 제게서 도망가지 못하도록.

* * *

아스테인은 황제의 침궁으로 왔다.

황제는 이제 팔다리가 모두 침대에 묶여 있었다. 제국을 호령하는 사람이 아닌 그저 병든 사람이 되어.

“부르셨습니까, 폐하.”

그는 볼품없는 황제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한결같은 반듯한 모습으로.

그러자 눈을 감고 자는 듯했던 황제가 작은 신음을 흘렸다.

“내 꼴이 보기 좋으냐?”

미쳤다는 소문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한창 술을 먹을 때의 뭉개지는 발음이 아니었다.

“폐하.”

“속이 시원하겠구나. 곧 내가 죽는다니. 하아, 이게 아바마마가 말씀하셨던 저주인가?”

황제는 조금 허탈한 목소리를 냈다.

[너희가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고 죽이려 한다면, 내가 죽어서도 너희들에게 벌을 주러 올 것이다.]

아스테인도 선황제의 유언을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의 황제가 이런 꼴이 된 것이 선황제의 저주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더 적극적으로 술을 드시지 못하게 해야 했는데 늦었군요.”

아스테인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는 그것이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단지 이 일로 프레이아가 또 하나의 죄책감을 지게 되는 것이 싫었을 뿐.

그러자 황제가 흥 하는 소리를 냈다.

“내가 죽길 바랐던 것은 아니고?”

“그 정도의 힌트를 드리면 스스로 찾아낼 줄 알았습니다.”

“그것도 결국에는 내 탓이라는 소리군.”

아스테인이라고 황제에게 반감이 없을 리가 없었다. 어린 시절 그가 받은 대부분의 고통은 황제에게서 비롯되었으니.

심지어 프레이아와 갈라놓으려 애쓰던 모습은 잊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너는 내가 죽으니 통쾌하겠구나.”

아스테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긴, 원래는 네 자리인 것을 내가 차지하고 있으니 죽길 얼마나 바랐을까?”

말을 마친 황제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웃음은 점점 커졌다.

“아하하하하! 그래도 네 손에 죽을 일은 없을 테니 너는 내게 복수를 못 하는 건가?”

유쾌하다는 듯이 웃어대는 황제의 모습에 아스테인은 더욱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황제의 광기 가득한 웃음도 그쳤다.

그는 묶여 있는 자신이 갑자기 싫어졌는지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어찌나 단단히 묶였는지 꼼짝도 못 했다.

“내가 황제인데! 감히 누가 나를 묶어! 누가 뭐래도 나는 죽기 전까지 황제란 말이다!”

아스테인은 발악하며 얼굴이 일그러지는 황제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승리감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어째서 사람이 이렇게 초라해질 수 있는 걸까 하는 생각만 들었다.

“황후가 아무리 인장 반지를 빼돌렸다 해도 황제인 내 말을 들어야지! 시종장! 어디 있어?”

“파미르 공작을 비롯한 귀족들이 동의한 일입니다.”

“누구 마음대로!”

“다시 인장 반지를 되찾고 싶으면 몸과 정신부터 추스르십시오.”

독이 누적되어서 황제가 이리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술에 있던 주술 탓도 아니었다.

이건 미움의 결과였다. 또 하나뿐인 반려를 의심한 탓이었다.

회귀 전에 급사한 것도 이 탓이었겠지.

“너! 황후가 그리도 갖고 싶었어? 어? 그래서 일부러 독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한 거야?”

“황후 폐하와 황녀님은 제가 끝까지 책임지고 보살피겠습니다.”

“네 이놈! 인정하는 거냐? 네가 내 아내를 탐냈다는 것을?”

황제가 죽기 전에 그래도 마지막 화해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고 왔다.

하지만 역시나 그런 기대는 버리는 편이 나았다.

“제게 여인은 단 한 분뿐입니다. 연모하는 이를 믿지 못해 버림받는 것이 폐하께는 가장 큰 불행이겠군요.”

아스테인의 비꼼에 황제가 더 크게 발악했다. 그러자 침대가 들썩였다.

“저는 제가 원하는 여인이 바라는 대로 살 겁니다. 제국의 가장 아래쪽에 있는 사람부터 하나하나, 다 챙겨가면서요.”

“이놈이 드디어 반역을 입에 담는구나! 밖에 누구 없어? 아스테인을 반역죄로 처넣어! 여기 역심을 품은 이가 있다!”

하지만 누구도 미친 황제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가 악을 쓰면 쓸수록 미쳤다는 확신만 줄 뿐.

황제는 힘이 빠지는지 쉰 목소리를 냈다.

아스테인은 점점 얌전해지는 황제를 조금은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를, 제 어머니를, 그리고 제 사랑하는 여인을 괴롭힌 죗값은 아쉽지만 제 손으로 거두지는 못할 수도 있겠군요. 대신 신께 받을 겁니다.”

황제가 다시 눈을 부릅떴다. 그걸 보고 아스테인은 차갑게 입꼬리를 올렸다.

“신께서 가장 아끼는 여인과 그 연인을 괴롭힌 죄 말입니다.”

아스테인의 푸른 망토가 펄럭였다.

황제를 등진 그는 프레이아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대로 그는 문으로 걸어갔다.

“아스테인! 네 이놈! 돌아와! 돌아오라고!”

뒤에서는 황제가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고 발광을 했다. 아스테인에게는 그것이 그저 시끄러운 바람 소리로만 들렸다.

이대로 황제는 가족에게도 버림받은 채, 쓸쓸히 죽어갈 것이다.

가장 비참하고 외롭게…….

그러니 속이 시원해야 하는데, 어째서 이렇게 쓰라린 걸까?

아스테인은 당장 자신의 파랑새를 만나고 싶었다.

프레이아는 신의 파랑새가 아니라 자신만의 파랑새였다. 그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는 작고 소중한 새.

“아스테인 님!”

황제의 침궁 문을 나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그의 반려가 될 사람이었다.

프레이아가 어찌 알고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녀의 눈이 불안함에 일렁였다.

“황제에게 해코지를 당한 거 아니에요? 걱정돼 달려왔어요.”

토파즈보다 더 맑은, 황금보다 더 빛나는 눈동자. 거기에는 오로지 아스테인의 얼굴만이 담겨 있었다.

그녀를 불안하게 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게 왜 이렇게 커다란 위로가 되는 걸까?

“프레이아 님.”

아스테인은 프레이아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사람들이 그런 아스테인에게 이상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전혀 상관없었다.

그녀처럼 그의 눈에도 프레이아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까.

“위로해주십시오.”

그는 프레이아를 끌어당겨 그의 품에 가두었다.

프레이아는 작은 팔을 버둥거렸다. 그의 품에서 빠져나가려는 듯이.

그럴수록 그는 프레이아를 더 가뒀다.

이제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래도 되지 않을까?

“아스테인 님, 황제 폐하와 무슨 일 있었어요?”

자신을 걱정하며 지저귀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네. 있었습니다.”

“마음이 불편하신 거예요?”

“네.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제가 토닥여 드리면 덜 힘드시겠어요?”

“네, 많이 위로해주십시오.”

애교 가득한 투정에 프레이아의 손이 아스테인의 등으로 올라왔다.

토닥토닥 두드려 주는 작은 손길은 아스테인의 마음속에 있던 어두운 기운을 몰아냈다.

“늘 듬직하던 성기사님이 이럴 때도 있네요.”

황궁 사람들을 의식한 듯, 프레이아가 말을 꺼냈다.

그것이 심술이 나 조금 더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언제까지 이렇게 숨기고 참아야만 할까?

회귀 전에는 자신이 절제라는 걸 했다고? 이렇게 사랑스러운 프레이아를 눈앞에 두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하하, 그러게나 말입니다. 우리 성기사들 중에서 제일 강한 분이 약한 모습이라니요.”

성기사들도 걱정이 되는지 프레이아와 말을 맞췄다.

“아스테인 님. 이제 볼일이 끝났으면 우리 돌아가요. 황후 폐하의 일에 관해 할 이야기가 많아요.”

프레이아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맑았다. 그리고 행복해하는 듯했고.

뒤늦게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그는 프레이아를 감싼 팔을 풀었다.

그의 눈에 이제야 당황한 프레이아와 황궁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 즉시, 아스테인은 누구보다 정중한 태도로 허리를 숙였다.

“황제 폐하와의 일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실수했습니다.”

주변 사람에게 들으라는 듯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닙니다. 제 실수로 성녀님의 명예가 땅으로 떨어질 뻔했습니다.”

몇 번이고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그러자 황궁 사람들의 눈이 동정으로 바뀌었다. 다행히 그들은 황제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불쌍한 대공을 기억하고 있었다.

프레이아는 사람들의 시선을 확인한 뒤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만 신전으로 돌아갈까요?”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프레이아는 황후와의 일을 들려주었다.

며칠간 그녀를 맴돌던 우울했던 기운이 사라진 것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오랜만에 보여주는 밝은 미소는 사랑스러웠다.

아스테인은 프레이아가 계속해서 재잘대는 것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정말 잘된 거 있죠.”

“기쁘십니까?”

“네, 너무 기뻐요. 황후 폐하와 화해한 것도 좋고, 아스테인 님께 도움이 된 것도 너무 행복해요.”

“저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말에 놀라 커다래진 눈을 독점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왜요? 황제와 무슨 일 있었어요?”

하지만 그럴수록 아스테인의 욕심은 한없이 커졌다.

정말 한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는 최근 몇 번이고 억누른 말을 떠올렸다.

아스테인은 결국 충동적으로 프레이아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조금은 이성을 상실한 것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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