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그것조차 저였으면 합니다
후작의 외침이 신전의 벽을 타고 곳곳으로 번졌다.
신전을 방문한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신전 입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내게도 전해졌다.
“성녀님, 푸토르 후작이 도와달라며 애원하는데 어찌할까요?”
성기사 중 하나가 내게 와서 보고했다.
“황궁에서 공식적인 요청은 없었나요?”
도저히 후작을 믿을 수가 없어서 물었다.
“네. 아직 없습니다.”
어째서지? 카렌시아는 아직도 날 원망하는 걸까? 아니면 후작의 거짓말?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다급히 크리세우스를 찾았다.
“황후 폐하가 조산 기미가 있다는데 사실인가요?”
크리세우스는 내 시선을 피했다. 그걸로 충분히 답이 되었다.
“당장 황궁으로 갈 준비를 해주세요.”
“꼭 가야 합니까?”
크리세우스가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조금 슬픈 눈으로 크리세우스를 바라봤다.
“내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에요. 게다가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조카나 다름없는걸요.”
“내게도 조카다.”
아스테인도 내게 힘을 실어줬다. 크리세우스가 살짝 실눈을 떴다.
“하아…….”
“나와 프레이아 님을 믿어라. 절대 네가 생각하는 위험한 일은 없을 거다.”
“네, 그래요. 두 분을 끝까지 믿기로 했으니까 어쩔 수 없죠. 어쨌든 황제는 곧 죽을 테니까 뭐, 제가 양보하죠.”
크리세우스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하지만 더는 비꼬는 소리 같은 것을 내지 않았다.
“황제가 간호하려는 황후를 발로 찼다고 합니다.”
“뭐라고요?”
“그래서 그 충격으로 진통이 시작된 것 같답니다.”
카렌시아는 이제 8개월로 접어든 참이었다.
이대로 아이가 태어난다면 살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힘들게 바꿨다고 생각한 미래가 제자리를 찾으려 했다. 그건 안 될 일이었다.
이런 것도 바꾸지 못하면서, 어떻게 아스테인과 나의 미래를 바꾼다는 거지?
“당장 구하러 가야 해요.”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는 쪽이 아무리 봐도 나을 것…….”
“크리세우스 님!”
“에잇! 진짜, 아가씨도 우리 주군도 사람이 너무 정의로워서 탈이라니까. 마차는 이미 준비해 놨어요. 호위들도 다 준비되어 있고요.”
크리세우스는 툴툴대면서도 모든 준비를 끝내두었다.
그의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고마워요.”
“이렇게까지 도와드렸는데, 제 소원을 이루어주지 못하면 화낼 겁니다.”
나는 크리세우스를 향해 빙그레 웃어주었다.
그리고 아스테인과 함께 다급히 마차로 향했다. 후작은 내가 다른 입구로 빠져나간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내가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신전 앞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었으니까.
“후작에게는 알리지 않을 생각입니까?”
아스테인이 걱정스레 물었다.
“어차피 황후 폐하의 아이를 구해도 제게 고마워하지 않을 사람인걸요.”
“다급한 상황에서는 신성력을 쓰실 거지요?”
나는 순간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사실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마음이 급한 것에 비해, 이성적인 판단은 아직이었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신성력이라 아끼고 싶었어요.”
“프레이아 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쓰십시오.”
“아스테인 님이 황위에 도전하는 동안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절 위해 아껴두신 겁니까? 황후 폐하께서 그렇게 간절히 원하는데도 거절할 만큼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힘을 카렌시아의 아이를 위해 써도 되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아스테인이 어떻게 생각할지 살짝 무서웠다. 서운해하면 어쩌지 싶었다.
“아직 망설이시는 겁니까?”
“어쩌면 무사히 태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데아 님께서 이미 그 아이의 수명을 정한 거라면 어쩌지? 신성력을 써서 구할 수 있을까? 아니, 신성력을 써버렸다가 나중에 아스테인이 위험해지기라도 한다면?
온갖 근심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프레이아 님.”
그때 걱정을 밀어내는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만약에 황후 폐하의 아이가 위태롭다면, 주저하지 말고 신성력을 쓰십시오.”
“……하지만 그랬다가 나중에 아스테인 님이 위험해지기라도 한다면 어떡해요?”
“혹시 기억하십니까? 저는 프레이아 님을 위해서라도 절대 죽지 않겠다고 약속해 드린 것을요.”
아스테인이 오른손을 가지고 갔다.
그리고 그때 그날처럼 내 손등에 가만히 입술을 올려놓았다.
서서히 움직이는 아스테인의 입술 끝에는 오직 나를 향한 마음이 가득했다.
“프레이아 님이 저로 인해 후회할 선택을 하는 것이 싫습니다. 아니, 누군가에게 죄책감을 느껴야만 한다면, 그것조차 저였으면 좋겠습니다.”
아스테인의 입술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의 달콤한 눈빛이 닿았다.
“신의 뜻 때문에 지금까지 어쩔 수 없이 참아왔습니다. 하지만 프레이아 님의 마음속에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들어갈 틈 같은 건, 조금도 남겨두고 싶지 않습니다.”
마지막 말을 유달리 또박또박 말했다. 그리고 시선을 내 눈에서 떼지 않았다.
이건 혹시 날 향한 집착일까? 아니면 내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려 하얀 거짓말을 하는 걸까?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었다.
아스테인은 언제나 내게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을 테니까.
나는 그대로 아스테인을 껴안았다.
“아스테인 님.”
“네, 말씀하십시오.”
“아스테인 님.”
나는 그저 그의 이름을 반복해서 불렀다.
그의 이름을 마음껏 부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걱정거리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해도 아스테인은 날 지지해 줄 거니까.
“왜 계속 이름만 부르십니까?”
“당신이 내 편이라는 게 너무 좋아서요.”
아스테인이 웃는 소리가 맑게 들렸다.
그게 너무 좋아 아스테인의 뺨에 키스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마차가 속도를 늦췄다. 아마도 황후궁 앞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아쉬움을 삼키며 아스테인에게서 떨어지는 순간.
갑자기 마차의 문이 벌컥 열렸다.
“가짜 누님!”
유테르안이었다.
“푸토르 소후작, 떨어지시오!”
“이게 무슨 무례란 말이오!”
유테르안은 무기가 없는 성기사들을 몸으로 밀어내며 마차의 문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쪽으로 황후궁의 하인과 하녀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대부분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을 만큼 바빴지만, 한둘은 우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이 성기사와 노닥거릴 시간입니까?”
유테르안의 말에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 번 더 우리에게 향했다.
다행히도 나와 아스테인은 떨어져 있었다.
“소후작,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말싸움할 시간 없습니다.”
유테르안은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그리고 막무가내로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얼른 큰누님과 우리의 조카를 살려야 한단 말입니다.”
유테르안이 팔을 뻗어 내 손을 낚아채려고 했다.
“떨어져라.”
아스테인이 나를 보호하며 유테르안을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자 유테르안이 울부짖듯이 외쳤다.
“시간이 없다고! 황후 폐하가 정말로 위험해지길 바라는 거야?!”
이런 유테르안의 모습이 조금은 낯설었다.
그는 늘 카렌시아에게 철없이 응석을 부려왔다. 황후가 된 이후에도 큰누님이라 부르는 등, 안하무인일 정도로.
하지만 역시 피는 진한 것일까?
카렌시아를 잃는 것은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내가 당장 황후 폐하께 가길 바란다면 비켜요.”
이런 내 말에 순순히 물러날 만큼.
유테르안이 물러나자 아스테인이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유테르안은 주먹을 쥐고 눈에 힘을 준 채 지켜봤다.
하지만 더는 시비를 걸지 않았다.
“얼른 가요.”
황후의 침실에는 미처 준비하지 못한 산실이 차려졌다.
하지만 들려야 할 것이 들리지 않았다.
“양수가 터졌다고 하지 않았나요? 왜 조용하죠?”
나는 유테르안을 쳐다보며 물었다.
“진통을 견디지 못해 황후 폐하께서 기절했답니다.”
“뭐라고요?”
큰일이었다. 산모가 힘을 주지 못하면 어떤 일이 생길지…….
나는 아스테인과 유테르안을 남겨두고 바로 안으로 뛰어들었다. 더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내 손에는 데아 님의 팔찌가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아스테인의 당부를 떠올렸다.
“고마워요, 아스테인 님.”
* * *
한참 후, 나는 카렌시아의 손을 잡고 있었다.
다행히 그녀는 아기가 엄마를 찾아 우렁차게 우는 모습을 보고 잠이 들었다.
“성녀님, 황녀님께서도 유모의 젖을 먹고 잠이 드셨다고 합니다.”
“숨은 잘 쉬나요?”
“네. 열 달을 채운 아이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누구보다도 건강하다고 하네요.”
“황후 폐하를 빼닮아 너무 예쁜 것 같아요.”
“그러게요.”
시녀들의 얼굴이 잔뜩 상기 되어 있었다. 뒤처리를 돕는 하녀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한마음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렌시아가 처하게 된 상황을 이해하는 시녀장의 얼굴은 어두웠다.
“황후 폐하는 언제 깨어나실까요?”
내게 걱정스레 묻는 시녀장에게 나는 밝게 웃어주었다.
“폐하의 건강에는 이상이 없으니까, 곧 깨어날 거랍니다.”
내 목소리를 들은 걸까?
카렌시아의 손이 꿈틀댔다. 속눈썹도 흔들렸다.
곧,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황후 폐하!”
“프레……이아? 내 아기는?”
“황녀님은 잠들었대요.”
“황후 폐하를 닮아 얌전히 잠드셨어요.”
시녀장의 말에 카렌시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
“딸이구나……. 차라리 잘된 건가……?”
눈을 감은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은 가라앉았다.
“폐하…….”
카렌시아의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황자였으면 내 아이는 꼼짝없이 단델리온 대공에게 죽었겠지?”
“폐하! 그분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에요!”
“나도 알아. 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두지 않을 테니까…….”
카렌시아가 눈을 떴다. 그리고 나를 한참이나 조용히 쳐다봤다.
“프레이아만 남고 다들 나가 있어.”
“예, 폐하.”
사람들이 나가고 나자 카렌시아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도와드릴게요.”
카렌시아는 내가 그녀를 부축하는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침대에 기대앉은 그녀는 한참이나 나를 빤히 쳐다봤다.
“황후 폐하…….”
내가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그녀를 불렀다.
그러자 카렌시아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황제 폐하의 목숨은 구해주지 않으면서 왜 나랑 내 아이는 구해준 거야?”
그녀가 직설적으로 물어왔다.
검은 눈동자에는 그날의 절망이나 원망이 들어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분은 구하고 싶지 않았어요.”
“왜? 단델리온 대공의 적이라서?”
아니라고 대답하지는 않았다. 대신 또 다른 이유를 꺼냈다.
“나는 내게 주어진 마지막 힘을 아스테인 님께 쓰려고 했어요.”
“무슨 뜻이야?”
카렌시아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나는 그녀에게 이제 하얀 돌덩이가 되고 만 사파이어 팔찌를 내밀었다.
“데아 님의 선물이었어요. 가짜인 제가 진짜가 될 수 있게 해준 신성력이요.”
카렌시아에게 말해도 될지 살짝 겁이 나긴 했다.
하지만 나는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것이 그녀를 설득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네가 가짜 성녀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데아 님의 날개이긴 하지만, 신성력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게 맞는 소리겠죠?”
나는 카렌시아에게 회귀 전의 일과 회귀 후의 일을 모두 말해줬다.
데아 님이 내게 무엇을 바랐는지, 내가 무얼 해야 하는지도 전부.
“황후 폐하의 아이는 그때와 다르게 꼭 살리고 싶었어요. 아스테인 님의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말려도요.”
나는 고개를 살짝 젖혔다. 안 그러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건 카렌시아도 마찬가지였다.
“폐하께 끝까지 신성력을 쓸 수 없다고 한 게 나 때문이야? 임신 중에 계속 위태로웠으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그건 아니었으니까.
“나는 끊임없이 나란 존재를 의심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어요. 사랑받고 싶어서 아무리 애써도 그분은 한 번도 날 따스하게 봐준 적이 없는걸요. 그저 혹시라도 잘못 주워온 가짜 성녀일까 봐 늘 전전긍긍하며 날 봤죠.”
눈이 다시 화끈해졌다. 하지만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단호하게 말해야 했다.
“황녀님에게 그런 삶을 살게 하고 싶진 않았어요.”
카렌시아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래서 황제를 돕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하지만 너는…….”
“아스테인 님은 수하들의 반대에도 황녀님을 살려야 한다고 했어요. 설령 황자가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죄 없는 아이가 죽어서는 안 된다고요.”
아스테인의 말을 전하자 카렌시아가 눈을 깜박였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오늘 올 때, 자신은 괜찮으니까 폐하나 아이가 위험해지면 언제든지 남은 신성력을 쓰라고 했어요.”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카렌시아가 내 품에 안겼다. 그리고 오열했다. 나를 끌어안고 미안하다는 소리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괜찮아요. 당연한 원망이었는걸요.”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한참을 토닥인 후에야 카렌시아의 울먹이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울음을 그친 카렌시아가 내게 물었다.
“황녀니까 황위 다툼에 치일 일은 줄었으니…….”
제국은 여자가 가문이나 제국을 잇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황제 폐하의 사후에, 내가 인장 반지를 단델리온 대공에게 넘겨주면 되겠니?”
“예르테르 대공이 비록 철없는 호색한인 척하고 있지만, 그는 발톱을 숨긴 자예요.”
“그래, 그러니 내가 황제의 인장 반지를 잘 지킬게. 은혜를 갚기 위해서도, 우리 황녀를 지키기 위해서도.”
카렌시아의 약속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금은 길게 자매의 정을 나누었다.
“대공이 잘해줘?”
나는 얼굴을 붉히는 것으로 답했다.
“다행이다.”
그리고 나를 끌어 안아주는 카렌시아의 품에서 남은 오해를 풀었다.
카렌시아는 한참이나 내 연애담을 들어주었다. 정말 친언니 같은 눈으로.
“몸조리 잘해야 해요.”
“응. 그럴게.”
“황제 폐하를 조심하고요.”
몇 번이고 여러 가지를 당부한 다음 그녀의 방에서 나갔다.
그런데 입구에는 아스테인이 아닌 유테르안과 후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둘 다 묘한 눈을 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