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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85화 (85/101)

85화. 마녀라 불려도 괜찮아

다음 날 아침, 나는 카렌시아를 위해서 편지를 썼다. 그녀가 그것을 읽어줄지는 미지수였다.

셀레미온은 옆에서 잉크를 채워줬다.

“황후 폐하도 너무하시네요. 아가씨가 지금까지 그분의 아이를 살리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셀레미온은 입을 조금 삐죽였다. 그녀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았다.

“아이가 아버지 없이 혼자 태어나야 하잖아. 걱정되시겠지.”

“황제 폐하가 황후 폐하의 불륜을 의심한다면서요? 게다가 미치기까지 했다는데…….”

“크리세우스 님께 들었어?”

셀레미온이 잉크병을 쏟을 뻔했다. 그녀는 뺨을 살짝 긁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는 덤이었고.

“그게…… 네.”

“네게 뭐든 이제 이야기하나 보구나. 하긴, 성년이 되자마자 청혼할 만큼 네게 진심인 사람이니까 널 믿겠지.”

셀레미온의 얼굴이 화르르 불타올랐다.

조금 귀여웠다. 셀레미온이 가끔 나를 놀린 이유가 뭔지 알 것도 같았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반응은 뭔가 속을 간질간질하게 했다.

같이 설레는 기분이랄까?

“아무튼 셀레미온. 황후 폐하께서 내게 화낸 거로 서운해하지는 마.”

“왜요? 너무하잖아요. 다 본인을 위해서 내린 결정인데요.”

“그건 내 생각이잖아. 어쨌든 아이의 아버지를 포기하자고 했으니까……. 내가 잘못한 거고 서운하게 한 게 맞아.”

“그럼 황제를 살려주실 거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신성력을 쓰게 될 수도 있는걸…….”

“아…… 맞다. 데아 님이 남긴 마지막 신성력이요?”

셀레미온은 내가 어떤 상황인지 예전보다 조금 더 이해하고 있었다.

“응. 그걸 황제에게 쓰고 싶지는 않아.”

나는 색이 옅어진 사파이어 팔찌를 꺼내 봤다. 그리고 회귀 전의 상황들을 떠올렸다.

그러자 내게 남은 힘을 누구에게 써야 할지는 명확해졌다.

“아스테인 님을 위해 쓸 거야.”

“그래요. 저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셀레미온이 맞장구를 쳐줘서 조금 마음이 놓였다. 내가 이기적인 사람은 아닌 것만 같아서.

그런 한편으로는 카렌시아에게 다시 미안한 마음이 쌓였다.

그래서 더 온 마음을 담아서 카렌시아에게 편지를 썼다. 마음을 풀길 바라며.

“이거, 황후 폐하에게 보내라고 성기사님께 전해줄래?”

“알겠어요. 다녀올게요.”

셀레미온이 씩씩한 얼굴로 나갔다.

그걸 지켜보던 나는 어깨를 잠시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그러자 한숨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어렵네.”

마음이 여러모로 편하지 않았다. 애써 괜찮은 척하고 있을 뿐.

그래도 참아야 했다.

나는 아스테인의 실 팔찌를 손으로 살살 쓰다듬었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어.”

괜히 복잡하게 생각할수록 마음만 심란할 뿐이었다.

조금 기다리자 셀레미온이 돌아왔다.

“아가씨, 전해드리고 왔어요!”

“그래, 그럼 이제 신전에 나가볼까?”

“예쁘게 꾸며드릴게요.”

셀레미온은 나를 꾸미는 데 평소보다 시간을 많이 투자했다.

“왜 이렇게 신경 쓰는 거야?”

“여기는 대신전이잖아요. 귀족들을 많이 만나야 하니까, 제대로 갖춰야죠. 언제 대공님을 노리는 여자들이 나타날지도 모르고.”

“황제 폐하가 쓰러져서 당분간은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렇네요! 잘됐어요!”

셀레미온은 그래도 계속 나를 치장하는 일에 공을 쏟았다.

“음, 손가락이 허전하네요.”

셀레미온은 뭔가 아쉬운지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대공님께서 뭐 준 거 없어요?”

“응? 딱히 없는데?”

“흐음, 이상하네.”

영문을 몰라 셀레미온을 쳐다보자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리고 다급히 치장을 마무리 지었다.

“자, 다 됐어요. 신의 무지개를 부른 성녀님답게 멋지네요!”

셀레미온이 살짝 주먹까지 쥐면서 뿌듯해했다.

나는 웃으면서 방을 나섰다.

셀레미온과 함께 간 곳은 신전의 정원이었다.

기도하러 온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성녀의 일과였다.

물론, 모든 사람을 일일이 만나주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푸토르 후작가의 사람이라면.

“성녀님을 뵈러 왔다.”

후작의 목소리를 참 오랜만에 들었다.

파미르 공녀의 일 이후에도 내게 사죄의 편지는 꾸준히 썼지만 찾아오지는 않았는데.

나는 눈을 잠시 찌푸렸다.

“아가씨, 후작님이 어쩐 일일까요?”

“글쎄, 그냥 우리가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예전의 성기사들은 몰라도 지금의 그들은 후작을 확실히 막아줄 것이다.

아스테인이 그들을 그렇게 가르쳤다.

“푸토르 가문의 사람은 성녀님을 뵐 자격이 없습니다. 돌아가십시오.”

“신의 말씀을 따르는 성녀님이 이렇게나 매정한 사람이었습니까? 이 아비가 매일같이 사죄의 편지를 쓰는데도 받아주지 않을 만큼요!”

후작은 신도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외쳤다.

조금 화난 목소리였다.

“아니, 나는 미워할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황후 폐하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분에게까지 이리도 매정하게 굽니까?”

후작은 나를 발견하고 목소리를 키웠다.

“황후 폐하께 받은 은혜를 이렇게 원수로 갚는 것이 신의 뜻입니까? 그러고도 성녀라고 말하는 겁니까?”

“푸토르 후작! 성녀님을 지금까지 괴롭힌 죄로 자숙 중인 사람이 또 이럽니까? 성녀님께서 불호령을 내리기 전에 돌아가십시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세요! 이 기회에 단델리온 대공을 황제로 만들 거라고!”

후작이 만드는 소란에 사람들이 조금씩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란, 이런 가십거리를 역시 좋아하는구나. 그들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신전 입구의 후작과 나를 번갈아 가며 보고 있었다.

“후작! 한 번만 더 성녀님께 모욕적인 소리를 한다면…….”

“그게 아니면 유테르안의 말처럼 신성력이 없어서 그러는 겁니까? 나는 그래도 성녀님을 믿고 녀석을 말렸는데, 어찌 나와 황후 폐하께 이럴 수 있습니까?”

“아니, 보자 보자 하니까 뭐라는 거야?”

“내가 아무리 미워도 황후 폐하께 복수를 하는 것은 성녀답지 못합니다.”

“다들 끌어내!”

성기사들은 후작을 질질 끌고 신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사이에도 후작은 내게 원망을 쏟아 냈다.

어제의 카렌시아처럼.

“두고 보십시오. 곧 태어날 황후 폐하의 아이가 장성해 황제가 되면 신전을 가만두지 않을 테니!”

역시 내게 지금까지 보냈던 사과의 편지는 다 거짓이었다. 그걸 확인하자 입에 쓴맛이 올라왔다.

“아가씨…….”

“괜찮아. 어릴 때도 듣던 악담들인데 뭐.”

“후작님은 진짜 너무해요. 황후 폐하만 자식인가? 파미르 공작님은 입양한 딸도 딸이라고 챙기던데…….”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어.”

차라리 당장이라도 파양해주길 원했다.

무덤덤한 얼굴로 서 있으려고 했다. 하지만 얼굴은 차갑게 굳어만 갔다.

괜찮은 척이 잘 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어. 그러니까 평정심을 잃으면 안 돼.

다행히 마음의 안정을 찾아줄 사람이 곁에 왔다.

“프레이아 님.”

아스테인을 보는 순간 울컥,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나는 조금 화끈해진 눈을 달랜 뒤, 아스테인을 향해 웃어줬다.

“오셨어요? 성기사들을 훈련하느라 바쁘다고 들었는데…….”

아스테인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말하지 않아도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그에게 달려가 안길 수도, 그가 나를 안아줄 수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우리는 말없이 그렇게 사람들 속에서 한참이나 서로를 바라만 봤다.

* * *

후작이 떠들어댄 탓에 황제가 쓰러졌다는 소문이 온 제국에 퍼졌다.

당연히 세르펜스 대공의 반란죄도 함께였다.

그런 소란 속에서 나는 소중한 사람들과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애써 태연한 척하며…….

“제스티안의 참수 일이 정해졌답니다.”

“언제래요?”

“열흘 후랍니다.”

내게 소식을 전해주는 아스테인의 얼굴이 조금 씁쓸해 보였다.

나는 말없이 아스테인의 손을 잡고 토닥여줬다.

“가끔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나 싶어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아스테인의 눈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의 속눈썹이 만든 그늘이 오늘따라 더 짙고 깊어 보였다.

“다 자업자득이죠, 뭐.”

함께 있던 크리세우스가 식은 차를 훌쩍이며 조금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선황제가 그리 혼냈는데도 서로 죽여달라고 난리잖아요.”

“크리세우스 님도 참! 은근 눈치가 없다니까!”

셀레미온이 그를 타박했다. 그러자 크리세우스가 억울하다는 듯이 양손을 올렸다.

“왜요?”

“아무리 미워도 피를 나눈 형제잖아요!”

“우리 주군을 죽이려고 애쓰던 놈들이 무슨 형제라고.”

크리세우스는 끝까지 오기를 부렸다.

“그런데 황제가 쓰러진 지금이 기회 아닌가요?”

크리세우스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황제가 마침 실정도 했고, 스스로 이미지도 깎아 먹어줘서…….”

“지금 그를 밀어낸다면 제국민들은 오히려 황제를 동정하지 않을까요? 특히 황후 폐하의 아이에게 동정 여론이 몰릴 거예요.”

“쳇, 황후가 인장을 순순히 넘겨주면 되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네요.”

크리세우스의 말투에 약간의 불만이 배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황궁으로 쳐들어가고 싶은 기색이었다.

“일단은 조금 더 대화를 나누려고요. 그분이라면 분명히 올바른 판단을 할 거예요.”

크리세우스가 가늘게 눈을 떴다. 살짝 눈동자를 굴리는 것이 뭔가 있었다.

“크리세우스 님? 혹시 뭔가 숨기는 게 있나요?”

“황후가 푸토르 후작과 만난 사실은 아시죠?”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랬으니 후작이 내게 찾아와 온갖 하소연과 악담을 퍼부었겠지.

“그리고 후작이 요즘 다시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도 알고 계세요?”

“한동안 사교계에 나서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네. 그랬는데 활발하게 움직인답니다. 그리고 제일 적극적으로 만나는 사람이 누군지는 아세요?”

크리세우스의 얼굴에는 카렌시아와 후작을 향한 불신이 가득했다.

“예르테르 대공. 주군의 마지막 라이벌과 열심히 친분을 쌓는답니다. 지난번에는 황제에게 버림받을까 봐 세르펜스 대공이랑도 열심히 친분을 쌓더니, 웃기지 않아요?”

어쩌면 후작은 황제가 아프다는 사실을 벌써 알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자기 살길을 찾고 있었겠지.

“황후가 딸을 낳으면 황위 계승권을 갖지 못할 테니 벌써 황족들에게 줄을 대는 거잖아요.”

그 와중에도 자존심 때문에 절대 아스테인에게는 의존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철없이 산다고 소문난 예르테르 대공을 찾아간 것이겠지.

“끝이 아니네요. 아직.”

“네, 게다가 두 분의 소문도 끝없이…… 윽.”

크리세우스의 입이 저절로 막혔다.

그는 아스테인이 노려보자 약간 식은땀까지 흘렸다. 그리고 억지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설마 후작이 말했던 게 퍼진 건 아니죠?”

“음, 저는 이만, 소문을 잠재우러, 아니, 일 하나 똑바로 못 하는 애들을 쥐잡듯이 잡으러 나가보겠습니다.”

크리세우스가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다.

셀레미온도 영문을 모르고 크리세우스의 손에 끌려나갔다.

그러자 아스테인과 나만 남았다.

나는 눈을 끔뻑이며 아스테인을 쳐다봤다.

“아스테인 님?”

“모르시는 편이 나은 소문도 있습니다.”

“우리 둘이 연인이라는 소문보다 더 심각한 거예요?”

아스테인의 눈가에 깔린 그림자가 다시 짙어졌다.

내게 미안해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사실대로 말해주세요.”

“지난번에 들었던 것보다 심각해졌습니다. 프레이아 님이 폭우를 만든 마녀라고 한답니다.”

“아…….”

소문이란 작은 물방울도 큰 파도로 만드는 법이었다.

회귀 전에 마녀라는 소문이 내게 어떤 결말을 가져다줬는지가 떠올랐다. 그러자 다시 얼음송곳에 찔린 기분이 되었다.

“죄송합니다. 제 탓입니다.”

“그게 왜 아스테인 님의 탓이에요?”

사람들의 입과 호기심은 쉽게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블루 로즈라고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폭우가 그친 뒤, 제스티안이 황제를 만났답니다. 그리고 바로 후작을 찾았더군요.”

“그때 내 사생활을 꼬치꼬치 캐물었겠네요.”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소후작이 온갖 소리를 했을 거고요.”

“네,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온갖 추문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퍼트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건 이미 전에도 있던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게 더 심각하게 부풀려지고 있는 걸까?

나는 아스테인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그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제가 나중에 프레이아 님을 모셔오기 위해 소문의 끈을 놓지 말라고 했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아스테인이 조금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황제가 되면 당장 사람들이 제게 황후를 들여야 한다며 또 여자들을 들이밀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요?”

“그래서…….”

갑자기 아스테인의 귀가 붉어졌다.

영문을 몰라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아스테인이 손으로 턱을 잠깐 쓸었다.

눈에 힘을 주자 아스테인이 한숨을 쉬었다.

“그때 프레이아 님과 제가 연인이라는 소문을 제국 전체에 다시 퍼트릴 생각이었습니다. 누구도 제 짝으로 다른 여인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뇌리에 심으려고요.”

마녀라는 소리에 찢어지던 가슴이 아스테인의 붉은 귀에 잘 봉합됐다.

조금은 귀여운 아스테인의 모습에 웃음이 터지려고 했다.

웃으면 아스테인이 민망해할 것 같아 입을 막고 뒤로 돌아서야 할 정도였다.

“프레이아 님.”

조금은 날 책망하는 듯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겨우 웃음을 삼키고 돌아섰다.

나의 사랑스러운 연인은 여전히 귀를 붉히고 있었다.

“아스테인 님은 잘못한 게 전혀 없네요.”

나는 눈가에 웃음을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

“그런 것 때문이라면……. 마녀라고 불려도 상관없어요.”

아스테인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진심으로 괜찮을 것 같았다.

“소문이야 블루 로즈가 힘써서 막아주겠죠. 그것보다는 황후 폐하가 계속 제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 문제네요.”

“아무래도 힘에 겨울 겁니다. 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폐하를 간호한다더군요.”

하지만 황제는 계속 미친 사람처럼 군다고 했다.

“8개월째라 좀 더 조심해야 할 텐데요. 황제가 발작하다가 황후 폐하께 위해라도 가할까 봐 걱정이에요.”

이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며칠 후 후작이 다시 찾아왔다. 다급한 목소리로 내게 애원하며.

“프레이아, 아니 성녀님! 제발 도와주십시오! 황후 폐하의 양수가 갑자기 터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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