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밤하늘 아래에서도
“세르펜스 대공, 오랜만이에요.”
카렌시아가 부푼 배를 붙잡고 천천히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황후의 등장에 사람들이 일제히 양쪽으로 길을 열었다.
“성녀님, 뵙기 힘들군요.”
카렌시아가 나만 보이도록 눈을 찡긋했다. 나는 그녀의 뒤편에 늘어선 이들을 유심히 살폈다.
기사들이 입고 있는 망토의 색을 확인했다. 그러자 입가에 미소가 흘러나왔다.
“미안해요. 바로 황궁으로 가려고 했는데, 급한 일이 생겼어요.”
“괜찮아요. 내가 직접 성녀님을 만나러 왔으니까요.”
카렌시아가 사람들 앞에서 공손하고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세르펜스를 보는 눈에는 다정함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대공, 내가 밖에서 들은 이야기가 뭐죠? 악마의 열매? 어제 내게 선물한 것이 이건가요?”
“그것이…….”
“대공의 말만 믿고 고아원에 보내겠다고 대량 주문까지 했더니……. 날 망신시킬 작정이었군요?”
황후의 지적에 대공은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처럼 혀를 뱀처럼 굴렸다.
“저도 남부 왕국의 상단에 속았지 뭡니까. 왕녀와의 불미스러운 일로 저를 골탕 먹이려고 이런 일을 저지른 모양입니다.”
얼굴이 참으로 두꺼웠다.
나와 아스테인은 그걸 모른 척 그냥 들어주고 있었다.
“그건 대공이 알아서 할 일이고, 나는 내 명예를 찾아야겠어요. 당장 환불하겠어요. 그런데 그사이 이미 피해자가 있는 건 아니겠죠?”
그럴 일은 없었다. 대공에게 망신을 줄 생각이 있긴 했지만, 죄 없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으니.
그래서 블루 로즈가 은밀히 움직였다. 낮에 그걸 구입한 사람들을 찾아가 신의 열매로 바꾼 것이다.
“만약 있다면 그 역시 대공이 모두 책임져야 할 겁니다.”
카렌시아의 위엄 있는 행동에 대공은 반발하지 못했다.
“그러니 당장 서류에 서명하세요.”
그는 굴욕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배상 조항이 담긴 서류에 서명했다.
나와 아스테인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던 것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지금은 황제에게 잘 보여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일까?
역시 만만한 건 내 쪽이었는지 세르펜스 대공이 괜한 시비를 걸어왔다.
“그런데…… 성녀님. 실 팔찌가 참 곱군요. 제 형님의 머리 색과 같습니다?”
그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내 손으로 향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아스테인의 손으로 향했다.
“소후작의 말이 맞았군요. 형님의 손목에는 성녀님의 머리와 같은 색의 실 팔찌가 있다더니요.”
아스테인은 대공의 시비에 손을 들었다. 그러자 사람들 속에서 손을 든 남자들이 나왔다.
“저도 실 팔찌 있습니다!”
“대공성의 기사들은 다 받았는데요?”
“우리 성녀님이 저희의 무운을 빌면서 모두에게 선물했다고요.”
아스테인의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일반 사람들처럼 위장하고 섞여 나와 아스테인을 호위하고 있었다.
“소문을 못 들으셨나 봐. 이번 폭우에 성기사들과 함께 사람들을 도운 대공령의 기사들 손목에 전부 실 팔찌가 있었는데 말이야.”
아스테인의 기사들은 휘파람까지 불며 놀려댔다.
그러자 대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공. 밑도 끝도 없는 일로 사람을 모함하려 하지 마세요.”
카렌시아가 얼굴을 굳힌 채 그에게 경고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닌데?
“하긴, 당신 같은 사람이라면 죄 없는 이를 모함하려 하겠군요. 본인이 지은 죄는 뒤로 밀어 두고 말이에요.”
카렌시아의 목소리가 더 차가워졌다.
유쾌하고 발랄했던 여인에게서는 위엄이 넘쳤다.
“무슨 말씀입니까?”
“제스티안 세르펜스 대공. 당신에게 황제를 암살하려 한 죄를 묻겠어요.”
카렌시아의 말이 끝나자 밖에서 기사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리고 들리는 비명과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
아스테인은 나를 등 뒤로 세웠다. 아스테인의 기사들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감쌌다.
그사이 카렌시아가 데리고 온 황제의 친위대가 가게를 점령했다. 대공의 호위도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대공은 친위대의 손에 무릎 꿇고 앉아야 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폐하가 드시는 술에 독을 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왔다.”
카렌시아는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면서 대공에게 외쳤다.
“그 술은 궁내부의 엄격한 독극물 검사를 통과하고 납품된 것입니다. 어찌 제게 죄를 뒤집어씌웁니까?”
“남대륙의 흑주술로 독을 숨겼잖아요.”
이번에는 내가 나섰다.
내 말과 동시에 아스테인이 아이기스와 작은 술병을 꺼냈다.
아이기스의 날개를 펼치고 술병을 그 위로 던지자 튕겨 나갔다. 하지만 가게에 있던 다른 향유 병은 그대로 아이기스를 통과했다.
“이 술은 황후 폐하가 궁내부에서 가져온 거랍니다.”
황제의 상태가 나빠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준비했다.
카렌시아의 불륜을 의심했다는 소리는 나에게도 충격이 컸다. 툭 하면 흥분하고, 사람을 의심하고, 혼잣말까지 하고.
누가 봐도 황제는 미친 것 같았다.
“죄가 없다고 생각하면 결백을 증명해 내세요.”
카렌시아의 차가운 말이 가게 안을 덮었다.
* * *
아스테인과 나는 카렌시아를 따라 황궁으로 갔다.
“프레이아, 이제 어떡하지?”
카렌시아의 눈이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밖에서 강한 척했던 것과는 달리 속은 한없이 약했다. 출산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불안할 것이다.
“폐하는 어떻게 됐어요?”
“침궁에 가둬뒀어. 계속 미친 듯이 발작해서 어쩔 수 없이 묶어서 약을 먹이고 재웠어.”
카렌시아는 초조한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나중에 깨어나면 어쩌지? 분명히 내게 화를 낼 거야.”
카렌시아가 겁을 먹은 이유는 이거였다.
지금은 제정신이 아니지만, 정신을 차린다면 반역으로 몰 수도 있는 일이었다.
“신성력으로 당장 낫게 하면 내게 덜 화낼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몸이 망가진 것은 낫게 하겠지만, 마음에 자란 의심은 신성력으로 해결이 안 돼요.”
“아아……. 하긴, 예전에도 그런 의심을 가끔 했으니까 독과는 관계없는 거겠지?”
예전에 신전에서 카렌시아를 만났을 때도 그런 걱정을 한 적이 있었다.
그게 지금은 독에 의한 광증으로 깊어진 모양이었다. 그러니 신성력으로 고쳐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신성력이 사람의 마음까지 고치는 건 아니니까. 그저 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었다.
“도움이 되지 못해서 죄송해요.”
게다가 황제를 향한 반감이 작용하기도 했다.
어린 아스테인을 괴롭혀 왔던 것. 크리세우스의 부모를 죽인 것. 그걸로도 모자라 지금도 아스테인을 잡아먹지 못해 난리였으니까.
어쩔 수 없이 카렌시아에게는 죄책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아…… 아니야.”
그런데 말과 달리 카렌시아의 목소리가 조금 차가웠다.
“일단은 의사에게 보여봐요. 차라리 차분히 몸을 치료하면서 곁에서 지극정성으로 돌보다 보면 마음도 나을지 모르잖아요.”
작은 희망이라도 카렌시아에게 주고 싶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 * *
“죽여주십시오. 사실 이미 황제 폐하께서는 몸에 이상이 있으셨습니다.”
잠시 후 황후궁으로 찾아온 의사는 카렌시아를 만나자마자 무릎부터 꿇었다. 카렌시아의 얼굴에서 핏기와 함께 희망이 사라졌다.
“무슨 소리지?”
“두 달 전부터 이미 간에 무리가 있어 술을 드시면 안 된다고 경고를 했습니다만…….”
“그래서? 어떻게 됐다는 거야?”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을 때, 이미 장기가 너무 망가져서 손을 쓰기 힘들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었을지도 몰랐다.
데아 님이 정해둔 운명의 길.
그리고 그것을 조금 앞당긴 것은 황제 자신이었다.
“일단은 최선을 다해 치료해 보겠지만, 석 달을 넘기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무너지는 카렌시아를 아스테인이 부축해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는 절망밖에 없었다.
“프, 프레이아. 도, 도와줘.”
내 다리를 붙잡는 카렌시아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가득했다.
“폐하.”
“미쳐 있어도 되니까, 제발, 제발 폐하의 목숨이라도 살려줘. 매일 날 의심해도 좋고, 원망해도 좋고, 그래서 죽이려 들어도 좋으니까, 그러니까……!”
“그건 절대 안 돼요!”
나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자 카렌시아가 조금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째서? 내 아이가 아버지도 없이 태어나길 원해? 아니면 소문처럼 대공을 황제로 만들려고? 그래서 그가 죽길 바라는 거야?”
카렌시아의 말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게 전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으니까.
“네가 그러고도 성녀야? 사사로운 감정으로 사람을 구해주지도 않으면서?”
카렌시아의 눈에 눈물이 가득 맺혔다.
하지만 그녀는 그걸 떨구지 않고 그대로 나를 쳐다봤다. 서운함을 가득 담은 채.
“혹시 내가 푸토르 가의 장녀라서 그래? 내 사과가 부족했어? 어릴 때 네 어려움을 몰랐던 날 원망하는 거야?”
나를 향해 쏟아지는 비난과 원망의 말들. 그걸 묵묵히 받아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카렌시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홑몸이었다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닐 것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을 만큼…….
“황후 폐하, 진정하십시오.”
그런 나를 위해 아스테인이 카렌시아 앞에 나섰다.
하지만 이미 흥분한 카렌시아는 아스테인의 멱살을 잡았다. 체면이고, 위엄이고, 남아 있지 않았다.
“당신도 잘됐다고 생각하는 거죠? 당신을 괴롭히던 황제가, 능력도 없고 무능하기만 했던 황제가 죽는다니까 행복하죠? 내가 이러라고 프레이아를 후작가에서 빼내어 준 게 아닌데! 어떻게 둘이서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카렌시아는 한참을 오열했다.
그리고 더는 원망의 말을 쏟아 내지 않고 그저 흐느끼기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그녀가 울음을 그칠 때 즈음.
내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돌아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카렌시아의 목소리에 체념만이 남았다.
* * *
초승달도 지고 밤하늘에는 어둠만이 가득했다.
그래도 어두운 밤하늘 속에는 작은 별들이 반짝이며 존재를 밝혔다.
그리고 내 마음의 별도 곁에서 빛나고 있었다.
“신성력을 써서라도 황제를 살리는 게 맞았을까요?”
죄책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아스테인에게 물었다.
성스러운 샘의 물은 아스테인의 대답을 기다리듯,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저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겁니까?”
아스테인의 답이 조금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그도 괴로운 걸까?
나는 쪼그리고 앉은 채, 샘물에 손을 담갔다. 어느새 가을이 다가온 탓인지 물이 제법 차가웠다.
손을 물속에서 살랑살랑 흔들었다. 흔들리는 마음이라도 차갑게 식길 바라며.
“아스테인 님만을 위한 건 아니었어요. 크리세우스 님도, 황후 폐하도,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결과가 뭔지 생각했는걸요.”
“그 선택에 본인은 없습니까?”
“네?”
아스테인의 물음에 나는 손을 움직이는 것을 멈췄다.
그러자 손끝을 타고 차가운 기운이 머리까지 올라왔다.
“왜 프레이아 님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지 않았냐고 묻는 겁니다. 황후 폐하를 돕지 못해서 속상한 거 아닙니까?”
차가운 기운 때문에 조금은 머리가 쨍하고 울렸다.
“이번에 황제를 살렸다가 그가 예정된 죽음을 맞지 않을까 걱정하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한 쪽으로 선택하십시오. 크리세우스도 제가 설득을…….”
아스테인이 더 말하기 전에 내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허리에 양팔을 두르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나를 위해서 선택한 거예요. 저는 아스테인 님이 힘든 게 제일 싫은걸요?”
그의 가슴 위에서 얼굴을 살짝 비볐다. 그러자 아스테인의 심장이 조금 빨리 뛰었다.
두근두근. 그 소리가 내게 남은 죄책감을 덮어주었다.
내가 신전으로 돌아온 이유.
가짜면서 진짜가 되려고 한 이유.
그 모든 것은 오직, 나의 소중한 기사님을 위해서였으니까.
“황후 폐하도 지금은 인정하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이해해 주실 거예요. 황제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 한, 저는 그를 구해줄 수 없어요.”
아이에게 아버지가 필요하지만, 이대로면 없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아내를 의심하는 남편은 아이도 미워할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내게 사랑을 주지 않을 아버지에게 미련을 갖는 게 더 힘들었다.
“그러니까 난 괜찮아요. 그러니 아스테인 님도 죄책감을 떨쳐요.”
사람을 구할 수 있는데도 구하지 않은 죄는 내가 받을 테니까.
고개를 살짝 들고 아스테인을 쳐다봤다. 신전 건물에서 나온 불빛이 아스테인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불빛은 그의 기운 없는 얼굴을 그대로 보여줬다. 아스테인도 나만큼이나 괴로운 것 같았다.
하긴, 그도 오늘 형제를 한꺼번에 둘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피는 반밖에 나누지 않았고, 사이도 나빴지만.
“위로해드리러 왔는데 오히려 제가 받는군요.”
아스테인이 내 뺨을 어루만졌다.
그는 잠시 샘의 입구를 쳐다봤다. 거기에는 크리세우스와 셀레미온이 지키고 있었다.
시선을 돌린 그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의 시선 끝에는 내가 준 주머니가 도톰한 상태로 매달려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드는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아마도 또다시 우리의 소문이 번지는 것 때문에 망설이는 것 같았다.
“저…… 아직 위로가 부족한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이 내가 아스테인을 보챘다.
긴 여행을 하는 동안 사람들 속에서 눈치를 보느라 손을 잡는 것도 힘들었다. 그래서 더 간절히 아스테인에게 닿길 바랐다.
“신께 몇 번이고 용서를 빌어야겠군요.”
오늘은 달이 빨리 져서 다행이었다.
아무리 데아 님이라도 이 어두운 신전에서 우리를 보지 못할 테니.
하지만 나와 아스테인은 똑똑히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보이지 않더라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따스한 손은 내 머리를 감싸고 있었고, 뜨거운 입술은 내 것을 덮고 있었으니까.
서늘해진 가을바람마저 데울 듯한 뜨거운 숨결은 끊임없이 내 입 안으로 들어왔다.
어쩌면 서로에게 남았을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어내려 더 간절했을지도.
우리는 서로가 아프지 않을 때까지 서로를 탐했다.
먹구름이 별빛마저 가리는 것도 모르고.
그렇게 한참 동안 서로만을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