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83화 (83/101)

83화. 어두운 그림자 (2)

아스테인도 내가 듣고 있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우리는 둘 다 말을 하지 않고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무슨 소리야? 성녀님께서 신의 말씀을 미리 전해 사람들을 구했잖아.”

“그래. 그런데 생각을 해봐. 진짜 성녀고 사람들을 걱정했다면 신성력을 써서 폭우를 멎게 했어야 하는 거 아냐?”

“그건…… 그렇지.”

“그게 전부 성기사 때문이라더군. 단델리온 대공이 성기사가 됐다잖아.”

아스테인의 이름까지 거론됐다.

힘을 주고 있는 아스테인의 주먹 위에 내 손을 덮었다.

“괜찮아요. 이 정도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잖아요.”

아스테인의 보라색 눈이 평소와 달리 조금 붉어졌다. 단단히 화난 듯했다.

하지만 내가 손을 토닥이자 그는 억지로 분을 삭이고 바깥의 이야기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뭐야, 또 그 성기사와 성녀님이 연인이라는 헛소문을 믿는 거야? 그것보다는 황제가 미쳤다는 소문이 더 믿음직한데?”

“연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성녀님이 그 대공을 황제로 만들려고 한다더군. 그래서 일부러 폭우를 막지 않았대.”

“뭐? 그럴 이유가 뭐가 있어서?”

“폭우의 피해를 대공이 수습하게 해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 주려 했다는군. 지금의 황제를 내치고 그자를 황제로 만들려고 말이야.”

듣고 있던 내 손에도 살짝 힘이 들어갔다.

전혀 거짓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직 그런 목적만은 아니었다.

“단지 그런 게 아닌데……. 어차피 신의 뜻을 신성력으로 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스테인을 달래려던 내가 더 상처를 받고 말았다.

“알고 있습니다. 프레이아 님께서 사람들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을요.”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스테인도 마찬가지였다.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만 한 일은 아니었다. 그게 아니어도 그는 사람들을 도왔을 것이다.

그런 그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다는 건가?”

“일단 그 염문설처럼 성기사에게 마음을 뺏겼다는 말이 있어. 또는 푸토르 후작가에 원한이 있는 성녀가 황후를 미워해서 함께 몰아내려 한다는 말도 있고.”

“정말인가? 그럼 그건 성녀가 아니라 마녀나 할 짓이 아닌가?”

여기까지 들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녀라는 말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대로 아스테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들을 가치가 없는 이야기네요.”

“지금은 저렇게 이야기하겠지만, 나중에는 소문이 더 이상하게 부풀려질지 모릅니다.”

“당연히 그렇겠죠. 그래도 상관없어요. 사실인데요, 뭐.”

눈가가 저절로 휘어졌다. 헛웃음이 나왔다.

남을 도와주고 이상한 소리를 듣는 것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회귀 전에도 그랬어요. 신성력을 쓸 수 없는 가짜 성녀였지만,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은 진짜 못지않았는걸요.”

헛웃음에 쓴맛이 올라왔다.

가끔은 회의감이 들 때도 있었다. 내가 뭐라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았을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바라는 건 오직 아스테인과 나의 행복인데.

“그때도 남을 도왔던 행동이 마녀라는 증거로 쓰였는데요, 뭘.”

조금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대가 없이 베푼 선의가 악의로 돌아오는 것은 여전히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가슴 곳곳을 얼음송곳으로 쑤시는 느낌이 들었다.

“프레이아 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아스테인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 손을 끌어당겼다.

나는 그의 가슴에 폭 안겼다. 아스테인의 팔이 내 어깨를 감쌌다.

분노로 뜨거워진 아스테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리고 그 뜨거운 마음은 나를 찌르던 얼음송곳을 녹였다.

그의 품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제가 못난 놈이라 결국 프레이아 님을 힘들게 만드는군요.”

아스테인의 목소리가 심장 깊은 곳까지 울렸다.

“제가 더 잘난 놈이었으면 이런 수모를 겪지 않았을 텐데요.”

“아니에요. 아스테인 님 탓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이상한 거예요.”

신성력을 안 쓰면 안 쓴다고 난리고, 쓰면 더 내놓으라고 난리고.

뭐든 색안경을 끼고 내 행동을 하나하나 감시하고.

조금은 지쳤다.

“힘들면 그만두셔도 됩니다. 지금이라도 데아 님의 뜻을 모두에게 밝히고 신전에서 나가도 됩니다. 저는 황제가 되지 않아도 되니까요.”

나는 아스테인의 품에서 고개를 흔들었다.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울음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아스테인은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손을 들었다. 굳은살로 거칠지만 내게는 부드러운 손이 내 등을 차분히 쓰다듬었다.

그는 아무것도 권하지 않았고,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려줬다.

“아스테인 님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신전을 지킬 거예요.”

울음을 그친 나는 그의 품에서 살짝 떨어졌다.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싫어요. 내가 왜 데아 님의 뜻을 받아들였는데요?”

내가 고집스레 말하자 그가 다시 등을 쓸어내렸다.

그 손길이 따스하고도 뜨거웠다. 계속 그의 손이 내 몸에 닿아 있길 바랄 만큼.

“예감이 좋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세르펜스 대공의 짓일까요? 황제는 제정신이 아니라면서요.”

“둘이 만나기는 했다더군요.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슬쩍 부아가 치밀었다.

계획한 일이 꼬인 것도 짜증이 났다. 계획대로 됐다면 아스테인은 영웅이 되어 있어야 했다.

마녀와 놀아난 사람이 아니라.

“세르펜스 대공이 신의 열매를 빼돌리려던 것은 어찌 됐어요?”

내 질문에 아스테인이 시원하게 웃었다.

“비슷한 열매를 남부 왕국에서 구해 곧 판매를 시작한다고 하더군요.”

못마땅한 얼굴로 아스테인을 쳐다봤다.

세르펜스 대공이 그걸 이용해 사업을 시작하면 당연히 리라가 애써 일구고 있는 일에 훼방이 될 테니까.

하지만 아스테인의 경쾌한 웃음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물론, 블루 로즈는 남부 왕국에도 있죠.”

뭔가 있구나. 나는 아스테인을 따라 즐겁게 입술을 끌어올렸다.

* * *

며칠 뒤, 초승달이 서쪽 하늘에 잠시 나타났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저녁 하늘은 금방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는 아스테인이 타고 있는 말의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저기예요?”

“네, 맞습니다.”

우리는 로브를 깊게 눌러쓰고 루크데린 골목의 한쪽 구석에 숨어 있었다.

아스테인이 가리킨 곳에는 화려한 상점이 하나 있었다. 여러 가지 고급 향유를 파는 곳이었다.

유리로 된 장식장 안에는 여러 상품이 놓여 있었다.

푸른 빛이 도는 유리병 속에 든 열매가 유달리 눈에 띄었다.

“하필 푸른색이네요. 날 모욕하면서도 내 이미지는 필요했나 봐요?”

나는 불만스럽게 아스테인에게 물었다.

세르펜스 대공의 행동이 하나하나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쩜 이렇게도 사람 속을 긁는 재주가 있는지 모르겠다.

돈 냄새를 맡는 재주까지 기가 막히게 좋았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아스테인 님과 같은 피를 나누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네요. 아스테인 님은 이렇게 바른 사람인데 세르펜스 대공은 왜 저렇게 욕심만 많은지…….”

내가 투덜거리자 아스테인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제가 바르게 자란 건 전부 프레이아 님 덕분입니다.”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아스테인이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이상하게도 그 말에 솜털이 솟아 간질간질했다.

“제가 뭘 했다고…….”

“아마 그때 저를 위로해주지 않았다면, 저도 제스티안이나 황제 폐하처럼 악의로만 똘똘 뭉친 사람이 됐을지 모릅니다.”

아스테인의 숨결이 은은하게 내 몸을 감쌌다.

조금은 서늘해진 가을바람이 잠시 우리를 훑고 지나갔다.

나는 아스테인과 함께 숨을 잠시 가다듬었다.

그리고 가게 안을 노려보았다. 아스테인이 가져다준 정보대로 대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과한 욕심을 부리는 자에게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려줄 시간이 된 것 같네요.”

나는 그를 보며 가을바람보다 더 서늘하게 웃었다.

아스테인과 나를 괴롭히는 대가가 무엇인지 알게 해주려는 듯이.

아스테인과 나는 말에서 내렸다.

로브를 벗자 평소보다 화려한 드레스가 드러났다. 아스테인도 마찬가지로 고급스러운 비단으로 된 정장을 갖춰 입고 있었다.

“강도단을 잡으러 갈 때의 기분이 나네요.”

아스테인과 나는 웃으면서 손님들로 가득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우리를 맞이한 것은 가게 점원 중 하나였다.

대공은 어느새 안쪽으로 이동했는지 보이질 않았다.

“이곳에 신의 열매라 불리는 특별한 목욕제가 있다던데…….”

평소보다 목소리 톤을 높여서 말했다.

“이겁니다.”

나는 푸른 유리병에 든 열매를 슬쩍 노려봤다. 아스테인이 말한 그대로였다.

내가 찾아준 열매와 겉모습이 똑같은 열매였다.

“꺼내서 보고 향을 맡고 싶군.”

점원이 꺼내주었다. 나는 그것을 코에 대고 향을 확인했다.

“이거, 확인해 주겠어요?”

그리고 아스테인에게 넘겼다. 그러자 아스테인이 작은 열매를 손에 쥐고 힘을 주었다.

그러자 열매가 으스러졌다. 아스테인의 손바닥이 펼쳐지자 열매의 씨앗 모양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그걸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용법을 알 수 있을까? 영지로 돌아가기 전에 대량으로 구입하고 싶거든.”

“물론입니다. 가능합니다.”

점원은 신난 얼굴로 커다란 백금으로 된 세숫대야를 가져왔다. 그는 뜨거운 김이 나는 물을 부은 뒤, 열매를 잔뜩 들이부었다.

그런 뒤 막대로 물을 젓자 거품이 부글부글 피어났다.

이 신비로운 광경에 가게에 있던 손님들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신께서 내려주신 열매입니다. 모든 어두운 기운을 몰아내어 질병을 예방하게 해주는 건강한 열매지요. 피부도 매끈하고 윤기 있게 만들어준답니다. 고급 향유 못지않지요.”

신의 이름을 들먹이는 소리에 내 눈꼬리가 살짝 파르르 떨렸다.

“흐으음. 평민가에서도 신의 열매라는 것을 판다던데, 둘 중 어느 것이 진짜지?”

일부러 떠봤다.

그러자 점원의 동작이 아까보다 커졌다. 부유해 보이는 귀족에게 어떻게 해서든 하나라도 더 팔고 싶은 모양이었다.

“당연히 저희 것이죠. 혹시 단델리온이라는 성기사를 아십니까?”

“아, 그 유명한 성기사님?”

“네. 그분이 제 주인님의 형입니다. 성녀님의 최측근이시죠.”

점원은 전혀 자신이 말하는 상대가 나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아…… 그렇군.”

점원이 말을 할수록 내 눈은 가늘어졌다. 목소리도 가라앉았다.

“그런데 이 거품이 정말 피부에 좋은지 확인은 했나?”

“물론입니다.”

“그래? 그럼 직접 손을 담가보겠나?”

점원이 잠깐 눈을 깜박였다. 그는 조금 곤란한 얼굴을 했다.

머뭇머뭇 대답하지 못하는 걸 보고 내가 피식 웃었다.

“아, 그건 곤란해? 왜? 피부가 망가질까 무서워?”

“무슨 말씀입니까? 하하하.”

점원이 소매를 걷었다. 그는 침까지 삼켰다.

부작용을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살짝 손까지 떨었다. 그러면서 계속 주변을 힐끔거리며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만둬요. 피부가 다 벗겨지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면.”

내가 원래의 말투로 점원을 말렸다.

점원의 얼굴에서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느껴졌다. 안심과 당혹스러움.

그는 어쩔 줄 모르고 나와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을 쳐다봤다.

“이 가게의 주인은 어딨죠?”

“당장 세르펜스 대공을 데려와라.”

아스테인의 불호령에 점원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뛰어다녔다.

세르펜스 대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 사이로 당당하게 걸어왔다.

그는 용케 가발을 쓰고 있는 나를 알아보고 잠시 눈을 찡그렸다.

하지만 곧, 밝은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성녀님.”

뻔뻔한 얼굴로 내게 인사를 건네는 대공을 보자 속이 살짝 뒤틀리려고 했다.

나는 조용히 가발을 벗겨냈다.

그러자 내 푸른 머리카락이 찰랑이며 어깨로 떨어졌다.

“어머, 성녀님과 소문의 성기사군요.”

손님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그게 거슬렸지만 나는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대공 앞에 섰다.

“세르펜스 대공. 내가 언제 이 열매를 신의 열매라고 했죠? 나는 당신에게 이 열매의 판매를 허락한 적이 없는데요?”

“아……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 저는 신의 열매와 비슷한 효과를 내는 열매라고 알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낮부터 판매를 시작해 직원교육에 소홀함이 있었나 봅니다.”

대공은 매끄러운 뱀처럼 혀를 굴렸다. 이번에도 빠져나가려는 그의 속셈이 보여 속이 거북했다.

“비슷하다? 전혀 비슷하지 않은데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속의 씨앗이 전혀 다른 것을 몰랐나요? 신의 열매에는 뾰족한 씨앗이 들어 있지만, 이건 둥근 씨앗이 들었어요.”

“아…… 그렇군요. 하지만 효능은…….”

블루 로즈가 정말 잘 속인 것 같았다. 정말로 같다고 믿은 걸까?

“직원은 아는 일을 주인은 몰랐나 보군요. 피부를 좋아지게 하는 게 아니라 각종 피부병을 유발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 악마의 열매인데……. 이렇게 많은 양의 열매를 한꺼번에 사용하면 너무 독해서 피부가 모조리 벗겨지는 것을요.”

이번에는 간사한 혓바닥을 굴리지 못했다.

나는 그걸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아, 그런데 이거 벌써 팔렸나요? 설마 귀족가나 황실에 납품한 건 아니겠죠?”

적절한 타이밍에 가게에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

나를 돕기 위한 지원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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