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어두운 그림자 (1)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여전히 어렵고 긴장되는 일이었다.
데아 님의 인정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나는 여전히 신성력이 없는 성녀였다.
그런 내가 엄한 사제들의 날을 세운 시선을 감당할 수 있을까?
“별일…… 아닌 거죠?”
이런 내가 가끔은 한심하기도 했다. 이미 회귀 전의 나쁜 기억들은 충분히 딱지가 앉아 지워질 때도 됐거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럴 때마다 내가 의지할 사람은 하나였다.
나의 가장 믿음직한 기사님.
나는 불안함을 숨기며 크게 심호흡부터 했다. 그리고 아스테인의 듬직하고 커다란 손에 내 것을 맡겼다.
곧, 땅에 발이 닿았다.
그 순간 주변에 울려 퍼진 소리.
“성녀님께 인사 올립니다.”
경건하고도 존경심이 가득한 묵직한 목소리가 일제히 사제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들은 내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조금의 불만도 없었다.
레무스를 통해 전해 듣고 있던 소식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이건 회귀 전과도 너무나 달랐다.
“그만 일어들 나세요.”
울컥 쏟아지려는 감정을 수습하려니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리고 고개를 든 사제들의 모습을 보자, 숨이 막힐 뻔했다. 나쁜 의미가 아니었다.
나를 향한 존중과 경외의 마음이 그들의 눈에서 느껴진 탓이었다.
“남부 신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성녀님.”
조금, 속이 간질간질한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이들에게 인정을 받은 걸까?
회귀 전 신성력이 없음을 숨기기만 하던 시절에는 받지 못한 것을 받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대신전에 있던 욕망으로 똘똘 뭉친 자들이 내게 겁먹던 걸 보는 것과 달랐다.
진심으로 신을 위하고, 신을 위해 고행하고, 신만을 탐구하는 학자나 다름없는 사제들. 그들에게 받는 인정이니까.
“잘 부탁해요.”
내게서 꾸밈없는 미소가 저절로 나왔다.
사제들을 신전에서 더 내쫓아야겠다는 다짐은 잊었다.
결국, 남부 신전에서의 일정은 원래 계획했던 열흘을 채울 필요가 없어졌다.
이곳에 온 지 5일 만에 돌아가기로 했다.
“성녀님, 꼭 이렇게 일찍 돌아가야만 합니까?”
물론 사제들은 아쉬워했다. 내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듯했다.
특히, 데아 님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인기였다.
누가 학자들 아니랄까 봐, 신에 관한 이야기를 지겹게 들려줘야 했다.
“궁금해하던 것들은 다 이야기해줬잖아요.”
그들은 신의 분노라 일컬어지는 자연재해에 관해 관심이 많았다.
어쩌면 이것을 알려주라고 그때 데아 님이 내게 많은 말을 해 주셨나 보다.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계속 줄어들다니 슬프군요.”
“그럼 대신전으로 함께 가든가요.”
서운해하는 사제에게 의미심장한 눈으로 씽긋 웃어줬다.
대사제가 되지 않겠냐는 나의 권유에 백발의 사제가 손을 흔들며 진저리를 쳤다.
“저는 명예를 탐하는 사제가 아니라, 신의 말씀을 그저 믿고 따르려는 사람입니다. 허허허.”
백발의 사제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조금 심각한 얼굴이 됐다.
“그나저나 단델리온 경 말입니다.”
“아스테인 님이요? 왜요?”
“성기사로 썩기에는 아까운 인재로군요.”
인정이 많아 보이는 백발의 사제는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있는 아스테인을 조금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봤다. 사제의 녹색 눈은 참으로 인정 많고 차분해 보였다.
“그렇죠? 원래 이런 길을 걸을 사람이 아닌데…….”
“성녀님. 혹시 단델리온 경의 고난에 신전을 끌어들일 작정이십니까?”
나는 아스테인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두어 사제를 쳐다보았다.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비록 이들이 내게 호의적인 태도로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보수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신전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건가요?”
“그걸 말리는 것이 사제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백발의 사제는 꼿꼿한 태도로 내 눈을 바라보았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은 아니었다.
“그런데 말리지 않더라도 곧 신전과 제국이 커다란 바람에 뒤섞여 떠내려갈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백발의 사제가 눈을 휘어가며 웃었다.
“성녀님께서 알려주신 신의 뜻이 그걸 가리키고 있습니다.”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제는 마치 모든 것을 아는 할아버지라도 된 것처럼 허허 웃음소리를 냈다.
“그런데 하인델에 말입니다. 멀지 않은 시기에 태양이 사라지고 암흑이 찾아올 것 같군요.”
나는 그의 말에 한쪽 눈썹을 올렸다.
황제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걸 이 백발의 사제가 어떻게 아는 것일까?
“무슨 뜻인가요?”
“심지어 달마저 떠오르지 않는 때이니 다들 불안해하겠군요. 하지만 암흑 뒤에 찾아오는 빛은 더 찬란하게 빛나는 법이죠.”
“사제님?”
나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께서 성녀님께 알려줬다는 지식이 참 유용하군요. 허허허.”
내게는 그저 신의 말씀일 뿐이었다.
하지만 연구를 열심히 한 학자들에게는 다르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던 걸까?
“그러니 시기를 놓치지 마십시오.”
사제의 마지막 말이 끝나는 순간, 나는 눈을 깜박였다. 손으로 눈도 비볐다.
내가 방금 잘못 본 걸까?
짧은 찰나 사제의 눈동자가 황금빛이 되었다. 그건 데아 님의 눈동자보다 더 찬란하게 빛났다.
“잠깐만요. 당신 혹시…….”
“제가 왜요?”
하지만 눈은 다시 평범한 사제의 녹색 눈으로 돌아왔다. 마치 꿈인 것처럼.
“프레이아 님.”
그때, 아스테인이 내게 다가왔다.
폭우 이후 계속 사람들에게 시달린 그는 조금 지쳐 보였다.
“이제 출발 준비를 마쳤습니다.”
“아, 네. 그럼 사제님?”
“아무리 봐도 두 분이 참, 잘 어울립니다. 허허허.”
사제는 다른 이들까지 끌고 와서 정중히 인사했다.
오히려 내가 인사를 올려야 하는데…….
“바로 돌아가기에는 하늘의 기운이 심상치 않으니, 천천히 돌아가는 것도 좋겠군요.”
백발의 사제님은 능청스럽게 윙크와 충고를 남기고 신전으로 들어갔다.
“저 사제가 하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아스테인이 염려스럽게 물었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어 차마 그에게 바로 정체를 말해줄 수는 없었다.
“우리 조금 천천히 돌아가요.”
“잘됐군요.”
지쳐 보였던 아스테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안 그래도 마을 촌장들이 찾아와 이것저것 부탁을 하는 통에 어찌해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마을 촌장들이요? 왜요?”
내 질문에 아스테인이 잠시 인상을 썼다. 하지만 그는 곧, 살짝 웃었다.
“황제가 폭우로 인한 피해 복구 명령을 내렸답니다.”
그래도 황제가 어리석은 선택을 하진 않았구나.
제국민을 생각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많은 길 중에서 하인델로 연결되는 길만 복구하라고 했답니다.”
하지만 내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네? 거기는 흙더미만 조금 치우면 사람들이 다니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스테인의 미간이 좁아지며 주름이 생겼다.
“그랬지요. 하지만 황제는 다급히 황궁으로 납품받아야 할 물건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나도 미간에 세로로 주름을 만들었다.
조금 화도 났다.
“저런……. 다급한 곳은 따로 있잖아요.”
“네. 나머지 지역은 지원도 없이 영주들에게 복구를 맡겼다는군요.”
“아…….”
황제는 여전히 생각이 모자랐다. 어리석게도.
* * *
푸른 하늘이 더 청명해진 가을의 어느 날이 되어서야 우리는 대신전으로 돌아왔다.
셀레미온은 내 방에 도착하자마자 만세를 불렀다.
“아가씨, 드디어 집이네요. 으아, 너무 힘들었어!”
“신전이 네 집이었어?”
“그럼요. 아가씨와 제가 사는 집이요.”
셀레미온은 짐을 풀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짐은 출발했을 때보다 훨씬 늘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로 받은 선물 덕분이었다.
“그래서 이제 뭐가 하고 싶은데?”
“얼른 치우고 두 다리 쭉 뻗고 제 침대에서 누워 자는 거요!”
셀레미온은 옷을 옷방에 넣다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그런 그녀의 눈 밑이 살짝 거뭇해져 있었다.
“힘들었단 말이에요. 기사님들이랑 아가씨가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혼자 여관에서 쉴 수도 없고.”
셀레미온이 왜 그러는지는 충분히 이해했다. 힘들 수밖에 없었다.
무너진 제방을 보수하고, 물에 잠긴 밭이 썩어가는 것을 막으려 죽은 작물을 걷어내고.
“우리가 했던 일들 말이에요. 황제가 제국군을 동원해서 해야 하는 일 아니에요?”
셀레미온이 갑자기 짜증을 냈다.
“그러게……. 황제가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 뭔지를 잘 모르나 봐.”
셀레미온은 한참이나 황제 욕을 했다. 세상의 욕은 모조리 다 나온 것 같았다.
그게 끝나자 아스테인의 찬양이 이어졌다.
“다들 대공님의 도움에 기뻐하는 것 같았어요. 그렇죠?”
“응.”
“대공님 덕분에 지역 특산품도 많이 받았잖아요.”
헤헤 소리를 내며 웃는 셀레미온은 행복해 보였다.
아스테인이 받은 선물은 나를 거쳐 셀레미온에게 대부분 전해졌다.
“보석 원석도 네게 주고 싶었는데.”
“어휴, 저는 그런 거 필요 없죠. 대공님께 더 요긴하게 쓰일 텐데요.”
“하긴, 유용한 자금이 되겠네.”
“네?”
셀레미온이 날 조금은 안타깝다는 눈으로 봤다. 내가 바보 같은 소리를 한 걸까?
“왜?”
“아니에요. 눈치 못 채는 게 낫죠, 호호.”
나는 셀레미온을 조금 이상한 눈으로 봤다. 그러자 그 아이는 헛기침을 했다.
“그것보다 아가씨, 큰일인데요?”
왜 말을 돌리지?
“대공님이 멋져서 지난번보다 여자들이 더 많이 찾아올 거 아니에요.”
셀레미온의 말에 나도 모르게 눈썹이 꿈틀댔다.
그건 내가 계획한 범위 밖의 일이었다.
“설……마…….”
“그런 사람이 또 나타나면 제가 막을게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소리를 내며 웃고 말았다.
“왜요? 저 못 믿어요?”
“아니야, 믿어. 고마워.”
셀레미온과 나는 서로 마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프레이아 님. 접니다.”
아스테인이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피로가 남아 있었다.
“아스테인 님, 피곤할 텐데 왜 오셨어요? 오늘은 푹 쉬라고 했잖아요.”
돌아오는 길에 워낙에 고생을 많이 했다.
성기사들이 잘 협력해줬다지만, 아스테인의 기사들도 합류해야 할 정도였다.
“데이트 신청하러 왔습니다.”
셀레미온이 데이트란 소리에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쪼르르 옷방으로 달려갔다.
“네? 갑자기요? 피곤하지 않으세요?”
“제 피로는 프레이아 님과 함께하는 것으로 사라지니까요.”
그의 데이트 신청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 * *
아스테인과 나는 오랜만에 루크데린 거리로 나왔다.
“그런데 왜 머리카락을 숨기자고 한 거예요?”
“프레이아 님은 너무 눈에 띄니까요.”
하지만 나만 머리를 가린 것은 아니었다. 아스테인도 가발을 쓰고 있었다.
나는 평범한 갈색의 가발을, 아스테인은 검은색의 가발을.
“사람들의 시선을 받지 않아도 돼서 좋네요.”
“그러려고 나온 겁니다. 사람들 속에서 지내느라 둘만의 시간을 제대로 보내지 못했지 않습니까?”
아스테인의 시선이 달콤했다.
그는 내게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목에는 파란 실 팔찌가 있었다.
나는 왼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았다. 그러자 은색 실 팔찌가 아스테인의 것과 닿았다.
그러자 하나가 된 느낌이 들었다.
“어디 갈 거예요?”
“저녁부터 드실까요?”
아스테인이 이끄는 곳으로 따라갔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북적대고 있었다.
유달리 우리 같은 연인이 많았다.
“여기 앉으십시오.”
아스테인이 데리고 간 곳은 테라스에 마련된 예약석이었다.
음식도 미리 준비해 뒀는지 금방 나왔다.
아스테인은 커다란 생선구이를 먼저 잘라 내 접시에 올려주었다. 레몬즙을 짜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그가 내민 음식을 맛있게 입에 집어넣었다. 아스테인은 내 접시가 빌 때를 맞춰 새로운 음식을 올려주었다.
하지만 그의 입으로 음식이 들어가는 것은 자주 보지 못했다.
“아스테인 님은 안 드세요?”
“먹고 있습니다.”
그는 뭔가 긴장되어 보였다. 계속 자신의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도 보았고.
“저만 먹는 것 같은데요?”
“여행하느라 피로가 많이 쌓이셨을 테니 많이 드십시오.”
그 말에 나는 눈을 슬쩍 찌푸렸다.
접시 위에 있는 커다란 고기 한 점을 포크로 집었다.
“아, 하세요.”
내 요구에 아스테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곧 웃음을 터트린 그는 입을 예쁘게 벌렸다. 그곳에 나는 고기를 밀어 넣었다.
아스테인이 그걸 오물오물 씹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래서 아스테인 님이 저한테 계속 음식을 건넨 거구나.”
나는 아스테인이 고기를 삼키자마자 다시 포크를 내밀었다.
그러자 휘어지는 아스테인의 눈을 보고 있자니 다시 봄이 된 것 같았다.
“그런데 황궁의 분위기는 어때요? 황제는 여전히 이성적인 판단을 못 하는 거예요?”
내 물음에 아스테인의 눈이 조금 어두워졌다.
“오늘 새로운 보고를 받았습니다. 황제가 황후 폐하의 부정을 의심한다고 하더군요.”
“네?”
어이없는 소리에 포크를 그만 놓쳤다. 그러자 아스테인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황후 폐하의 아이가 제 아이가 아닌지 의심한다고 합니다.”
이건, 좀 심했다. 너무나 어이없고 불쾌한 소리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술을 아직 못 끊은 건가요? 그렇게 경고했는데도요?”
“안타깝지만 제스티안이 뭔가 또 간계를 꾸미고 있는 모양이더군요.”
아스테인의 말을 확인하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식당 안쪽에서 거슬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문 들었어?”
“뭐?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아니, 이번 폭우가 내린 이유 말이야. 신께서 지금 성녀님께 단단히 화가 나셨다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