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81화 (81/101)

81화. 무지개가 뜬 후에

황궁이 있는 하인델에도 무지개는 떴다.

하인델의 사람들도 지긋지긋한 폭우가 끝났음을 다 함께 기뻐했다.

“황후 폐하, 그제 뜬 무지개 보셨어요?”

황후궁에서 차분히 출산 준비를 하고 있던 카렌시아도 시녀들과 무지개를 봤다.

“그래. 봤어.”

“그게 성녀님이 만드신 기적이라는 소문도 들으셨어요?”

“뭐? 정말이야?”

카렌시아는 시녀의 말에 푸르러진 하늘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이 맑아진 하늘은 평화롭기만 했다.

“그래, 그렇구나. 역시 프레이아야.”

“네. 지금 온 제국에 그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대요. 단델리온 대공과 함께요.”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왜 또 둘이 엮였을까?

최근에 들은 사교계의 소문 때문에 더 신경이 쓰였다.

[푸토르 후작이 예비 성녀님을 가짜 성녀로 만들려고 한 증거가 있습니다.]

문득 황궁 연회 때 대공과 독대하던 날, 대공이 한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프레이아는 오늘 신성력으로 기적을 일으켰잖아요. 앞으로는 그런 불행한 일이 없을 거예요.]

[압니다. 물론 그래야겠지요.]

안다고 하던 단델리온 대공의 얼굴에는 짙은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카렌시아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신성력을 되찾았다고 해서 후작이 예비 성녀님을 학대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그건 아버지가 잘못한 게 맞아요. 그러니 내가 앞으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소후작이 예비 성녀님께 이상한 집착을 보이는 것을 모르십니까?]

카렌시아는 그때의 대화들을 다시 곱씹었다.

자신도 몰랐던 프레이아가 당했던 일들을 대공은 다 알고 있었다. 그는 그걸 자신의 고통처럼 하나하나 힘을 줘가며 말했다.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 대공은 단호하게 다짐했다.

[제가 예비 성녀님을 모셔가겠습니다. 누구도 감히 그분을 괴롭힐 수 없게 지킬 겁니다.]

결국, 그의 설득에 넘어갔었다. 그때 이미 프레이아를 잠시 부탁할 생각이었기에 넘어갔다.

“역시 신성력을 찾지 못하는 쪽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네, 무슨 말씀이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서, 대공과 프레이아가 어쨌다는데?”

“성녀님께서는 비가 그치게 기적을 만드시고, 대공께서는 그 기적이 완성되게 도왔대요. 홍수 피해도 막고, 강도단도 물리치고.”

“그래?”

황후는 마음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황제와 대공을 비교했다.

특히 요즘의 황제를 떠올리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계속 불온한 생각만이 들었다. 누가 더, 황제의 자리에 어울리는 황족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그녀는 잠시 머리를 흔들어 잡생각을 떨쳤다.

“그럼 우리는 프레이아가 만들어준 날씨를 즐겨볼까?”

“네, 좋아요. 이제 산달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조금이라도 운동을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전에 프레이아가 돌아오겠지?”

살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워낙 임신 초기에 위험한 고비를 많이 맞은 탓이었다.

“성녀님께서 황후 폐하를 많이 걱정하시잖아요. 분명히 오실 거예요.”

시녀의 다독임에 마음을 놓고 정원으로 나갔다.

아직은 약간 바닥이 축축하긴 하지만 돌아다니기 힘든 정도는 아니었다.

햇살도 아직 조금 뜨거운 것 같았지만, 그늘에 들어서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기분이 좋았다. 배 속의 아기도 엄마처럼 들뜬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기분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황후, 얼굴 보기 힘들군.”

최근 점점 이상해지고 있는 남편 때문에.

“폐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제는 오늘도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짙은 술 냄새.

프레이아가 술을 제발 마시지 말라고 당부하고 갔는데도 그는 끊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의 아이는 잘 크고 있는 건가?”

황후는 자신에게 다가와 뜨거운 숨결을 내뿜는 황제를 보며 몸에 힘을 줬다. 숨도 잠시 멈췄다.

배 속의 아이에게 술 냄새 같은 걸 맡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런 못난 모습의 아버지를 보여주는 것이 싫었다.

“아이는 잘 놀고 있고?”

황제가 계속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웃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화내는 것도 아닌 이상한 얼굴이었다.

“네, 그럼요. 가끔 배를 차기도 한답니다.”

카렌시아는 경계를 풀지 않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걸 태동이라고 한다고 했던가?”

“네, 어찌나 활발한지 몰라요. 초기에 그렇게 위태했던 아이가 맞나 싶을 정도예요.”

카렌시아는 말을 그친 뒤, 숨을 잠시 멈췄다. 괜히 말했다 싶었다.

황제가 손을 뻗어 카렌시아의 배를 만지려고 했다.

그런 그의 손이 술 중독자처럼 덜덜 떨렸다. 심지어 황제가 다가오자 술 냄새도 더 짙어졌다.

딱 한 걸음. 카렌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황제를 피해 뒷걸음질을 쳤다. 아이를 지키겠다는 본능이었다.

“황후……?”

그러자 황제의 눈빛이 변했다. 눈에 광기가 어렸다. 씰룩이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런데도 얼굴은 경련하는 사람처럼 조금씩 꿈틀댔다.

“황후, 내게 불만이라도 있소?”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아, 친아버지가 아니라 만지는 게 싫은 건가?”

갑작스러운 황제의 말에 카렌시아의 검은 눈이 동그래졌다.

“폐하! 무슨 말씀이신가요?”

너무나도 황당한 오해에 카렌시아는 손발이 덜덜 떨려왔다.

황제와 사랑으로 맺어진 사이는 아니었다.

특히 황제가 카렌시아를 택한 것은 호감의 문제가 아닌, 정치적인 선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지만 둘은 서로에게 충실했고, 남들이 보기에 다정한 부부 사이였다. 이런 오해를 들을 이유가 없었다.

“저는 언제나 폐하만을…….”

“아스테인을 짝사랑했다면서?”

“네? 아니, 폐하. 도대체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스티안이 그러더군. 그 녀석이 성녀가 첫정인 척하면서 황후를 노리고 후작가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다던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황후도 어릴 때는 그렇게 믿었었다. 단델리온 대공이 자신을 연모했다고.

하지만 그녀는 이제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아니에요. 그는 프…….”

하지만 진실을 말해줄 수 없었다.

프레이아는 푸토르 후작의 장녀인 자신을 용서해줬다. 심지어 그녀의 아이까지 구해줬다.

그런 이의 명예를 떨어트리는 일은 할 수 없었다. 특히 살짝 상태가 좋지 않은 황제의 앞에서는.

“왜 대답을 못 하지? 정말 그렇고 그런 사이인가?”

“폐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저와 대공이 교류를 한 건, 제 임신 이후에요. 프레이아가 그를 호위로 데리고 온 날부터 말이에요!”

황제는 그런 카렌시아를 쳐다보며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 그럼 딴 놈인가 보군.”

“폐하!”

“아아, 걱정하지 마. 그렇다고 내가 황후와 아이를 내치지는 않을 테니 말이야.”

황제는 미친 듯이 웃다가 유유히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황후 폐하!”

황후가 얼마나 비참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모른 채.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는 황망함에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뭐가…… 잘못된 걸까?”

시녀들은 황망함에 울지도 못하는 황후를 대신해 울먹이고 말았다.

황제는 그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의 시종들을 끌고 본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시종장.”

“예, 폐하.”

시종장은 잔뜩 겁을 먹은 채, 황제의 부름에 즉각 답했다.

“이제 날씨도 좋아졌는데 그 술은 들어왔나? 남부 왕국에서 들여온다던 술 말이다.”

“글쎄요…….”

그가 대답을 흐리자 황제의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다.

최근 들어 늘 이랬다. 황제는 요즘 조금만 심기를 거슬러도 화부터 냈다. 감정조절이 전혀 되지 않는 사람처럼.

“그걸 누가 황궁에 납품한다 그랬지?”

“접니다, 폐하.”

기다렸다는 듯이 세르펜스 대공이 찾아왔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황제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입 주변의 살이 약간 씰룩대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혀가 꼬이는 모양이었다.

그걸 보는 세르펜스 대공이 입꼬리를 은밀히 올렸다. 만족스럽다는 듯이.

“폐하께서 요즘 드시는 그 술 말입니다. 그 술을 운반하는 대로가 이번 폭우로 흙더미에 길이 막혔다지 뭡니까?”

“무슨 소리냐. 다들 성녀와 아스테인이 미리 폭우의 피해를 예방했다며 찬양을 하고 있던데?”

황제가 미간을 모으며 불만스럽게 대답했다.

“사람들은 구했어도 길이며 주택이며 부서진 곳은 많답니다. 그런데 웃기지 않습니까? 폐하께 미리 알렸다면 더 대비를 잘했을 텐데……. 성녀와 둘째 형님이 몰래 이런 일을 했다는 건…….”

세르펜스 대공이 말끝을 흐렸다.

그걸 보는 황제의 눈썹이 크게 올라갔다.

“역시 그것들이 날 망신시키려고 그런 건가?”

“그럼요. 아마도 둘째 형님의 인기를 높이려고 한 것 아니겠습니까?”

“왜? 그것들이 무슨 이유로?”

“그거야…….”

시종장은 대공이 황제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부추기는 광경을 지켜봤다. 이미 살짝 흥분한 황제의 눈이 더 붉어졌다.

“고얀 것들이! 감히!”

“이대로 두고 보실 겁니까?”

세르펜스 대공은 황제를 부추기면서 연신 웃고 있었다.

“당연히 가만두지 않을 거다!”

황제의 답을 듣고는 입꼬리를 더 높이 들었다.

* * *

벌써 가을이라도 된 듯한 날씨에 남부 신전으로 향하는 길은 쾌적해졌다.

“아가씨, 하늘이 너무 파랗고 예뻐요.”

“그러게.”

“그렇게나 비가 많이 왔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네요.”

하늘은 비가 내렸던 흔적을 지웠다. 푸른 비단에 하얀 솜을 매달아 놓은 것처럼. 하늘만 보면 평화로운 하루였다.

하지만 땅에는 엄청난 비가 쏟아졌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나마 주거지라도 지켜서 다행이겠죠?”

셀레미온은 엉망이 된 들판을 보며 말했다. 나도 수마가 할퀸 들판을 쳐다보았다.

“아니, 밀도 지켰어.”

나는 빙그레 웃었다.

회귀 전에는 한창 수확 중이었던 밀을 폭우에 상당수 잃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은밀히 신전을 통해 이른 수확을 독려했었다. 아스테인의 기사들이 도움을 줬다.

워낙에 농사도 잘 짓는 분들이라, 일손 부족에 큰 도움을 줬다고 들었다.

“우와! 이거 아가씨가 한 일이라고 널리 알리셨어요? 우리 아가씨, 또 사람들에게 찬양받겠네요!”

셀레미온이 기쁘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하지만 그 아이는 곧 얼굴을 굳혔다.

“이러다가 나중에 신전에서 아가씨를 놓아주지 않는다고 하면 어째요? 너무 완벽한 성녀라고…….”

그러더니 금세 울상을 지었다.

나는 귀여운 하녀의 볼을 살짝 잡으며 웃어주었다.

“내가 한 일이라고 소문내지 않았어. 성기사 아스테인 단델리온이 그저 농민들을 돕기 위해 대공성의 사병을 동원한 거라고 알렸어.”

“아! 그래서 사람들이 지금 대공님만 보면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거예요?”

나는 조금 전, 마차 밖으로 나가 열심히 우리를 호위하는 일을 점검하고 있는 기사의 등을 쳐다봤다.

넓게 딱 벌어진 어깨의 그는 사람들 속에서도 빛이 났다.

“하긴, 지난번에는 사람들을 착취하는 세금 관리인도 혼내주셨죠?”

“응. 게다가 강도단도 잡았잖아. 지나오는 마을마다 전부.”

셀레미온이 눈을 휘며 웃었다. 작은 웃음소리도 곁들여 가며.

“아니, 대공님은 진짜 어디서 그렇게나 많은 강도단을 찾아냈대요? 그걸 찾는 게 더 힘들겠어요.”

“그거야 크리세우스 님이 한 일이지.”

셀레미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턱에 괴었다.

“수상해.”

“뭐가?”

“그분 도대체 뭐 하는 분이에요? 분명히 우리랑 같이 있었는데 언제 그런 걸 알아낸 거래요?”

나는 살짝 식은땀을 흘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직은 사람들에게 블루 로즈는 암흑 길드로 통했다.

그래서 셀레미온에게 말하기 꺼려졌다.

“음, 아스테인 님의 최측근이잖아. 능력자겠지, 뭐.”

셀레미온의 시선을 피하면서 말했다. 다행히 셀레미온은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아가씨, 이제 남부 신전이래요.”

나는 남부 신전의 모습을 확인했다.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높은 담과 허름한 건물.

대신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레무스가 이곳에서 열심히 고행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여기서 대사제를 새로 골라갈 거예요?”

“글쎄?”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대사제가 늘어봤자 나중에 신전을 없애는 일에 방해가 될 뿐이었다.

게다가 남부 신전의 사제들은 지금 내게 반발이 심하다고 들었다.

성녀복을 입기를 거부한 것, 신전을 위해 봉사한 자들을 내친 것, 거기에 황실에 고개를 숙이고 신전의 문제를 맡긴 일.

전부 불만이라고 들었다. 거기에는 인테르와의 관계도 한몫했다.

“여기 사람들은 레무스 님이랑 다르다면서요?”

“레무스 님은 아마 어느 사제들과 비교해도 다를걸? 누구보다 개방적이니까.”

“반대로 말하면 여기 사람들은 고리타분하다는 소리네요?”

“그것보다는 보수적이란 단어가 더 잘 어울리지?”

말을 하고 보니 회귀 전의 남부 신전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 시절에야 다들 나를 싫어했으니까, 좋은 기억은 당연히 없었다.

조금은 긴장하며 아스테인이 마차 문을 열어주길 기다렸다.

마차 밖에는 이미 신전의 사람들이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프레이아 님.”

문을 열어준 아스테인의 목소리가 조금 이상했다. 뭔가 울컥하는 것을 참는 느낌이었다.

“왜 그래요? 생각한 것보다도 제게 적대적인가요?”

아스테인의 평소와 다른 모습에 살짝 겁을 먹었다. 그러자 그가 눈을 빙그레 휘었다.

“직접 확인해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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