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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80화 (80/101)

80화. 너무 뜨거웠던 입술

몇 번 눈을 깜박이는 그의 아픈 모습을 보는데 왜……. 낮에 봤던 그의 젖은 몸이 떠오른 걸까?

맨살을 직접 봤을 때보다 자극이 심했던 것 같았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그 모습이 떠올랐으니.

아마, 그건 지금도 땀에 젖은 그의 잠옷 탓일 것이다.

“괜찮아요?”

나는 애써 속마음을 삼켰다.

그러자 아스테인이 조금은 나른한 목소리를 냈다.

“왜…… 여기 계십니까?”

“아프다고 해서 간호하러 왔어요.”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뻔뻔하게 손을 뗐다. 그리고 이마에 올려두었던 수건을 거두어갔다.

이상하게 심장이 콩닥거렸다. 죄지은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냥 그의 입술을 만졌을 뿐인데, 그저 그의 몸을 떠올렸을 뿐인데.

“감기가 옮을 수도 있습니다.”

“아스테인 님의 감기가 낫는다면 그래도 좋을 것 같네요.”

“그런 소리는 하지 마십시오. 프레이아 님이 아프면 제 마음이 아픕니다.”

아스테인의 눈가는 열이 몰려오는지 조금 붉어져 있었다. 그걸 보니 속이 상했다.

“아스테인 님이 아프면 제 속은 어떻고요?”

내 타박에 아스테인이 작게 웃었다.

약간 잠긴 듯한 목소리였는데도 이상하게 웃음소리가 맑게 들렸다.

내 심장을 더 설레게 할 만큼.

“그냥 가벼운 감기입니다.”

“빗속에서 저를 지켜주려다가 감기에 걸린 거잖아요.”

“자업자득인 겁니다. 신전에서도 위험한 일을 겪었으면서 또, 프레이아 님을 이런 일에 미끼가 되도록 만들었으니까요.”

그가 왜 괴로워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 말고 돈 많은 귀족 영애로 분장하고 나갈 사람이 없었다. 어린 셀레미온을 위험한 곳에 보낼 수는 없었는걸.

“나랑 아스테인 님이었으니 연기를 잘해서 그들을 속인 거죠.”

아스테인에게 그 선택이 옳았던 것임을 어필했다.

“우리가 얼마나 부유한 귀족 커플로 보였으면 그렇게 바로 낚여서 나왔겠어요?”

“감히 프레이아 님을 내놓으라고 할 때, 제일 화났습니다. 프레이아 님께 그런 모욕을 주다니요.”

구구절절 내게 그때의 심정을 이야기해주는 그의 모습이 좋았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내게 감기를 옮길까 봐 반듯한 기사의 자세를 풀지 않고 누워 있는 모습도 사랑스러웠다.

“게다가 자칫했으면 프레이아 님까지 열감기에 걸릴 뻔했습니다.”

“비가 갑자기 그렇게 다시 쏟아질 줄 몰랐잖아요. 아스테인 님 탓이 아니에요.”

하지만 아스테인은 뭔가 계속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쓰고 있었다.

“제가 맞을 비를 아스테인 님이 대신 다 맞아주셨잖아요. 아스테인 님도 다 젖어서 몸이 드러날…… 정도였는걸요.”

뒷말은 조금 부끄러워서 말이 살짝 씹혔다. 그래도 더듬거리는 위기는 넘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가 말에 태워드린다고 할 때 거부하신 겁니까?”

“네? 아니, 그게…… 눈치채셨어요?”

“네. 얼굴이 평소보다 더 붉어지셨거든요.”

알면서도 태우려고 했던 거야?

나는 심술에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자 아스테인이 살짝 고통스러운 소리를 냈다. 나는 당황한 채 아스테인을 쳐다봤다. 열이 계속 나는지 약간의 식은땀을 흘리는 그의 얼굴이 괴로워 보였다.

크리세우스가 준 약이 눈에 띄었다. 나는 몸을 살짝 숙이고 아스테인을 일으키려 했다.

“목 아파요? 여기 감기에 좋은 약이 있으니까……”

문득 그를 보니 아스테인의 눈이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갑자기 아스테인이 손을 뻗었다. 그의 큰 손은 내 목 뒤로 갔다.

아스테인의 손은 내 얼굴을 끌어당겼다.

“아스테인 님?”

“계속 그러면 못 참겠습니다.”

“뭘요?”

“그런데 못 참으면 프레이아 님께서 감기에 걸릴 테니 참아야겠죠?”

그의 입술이 코앞에 있는 내 입술을 무시하고 지나쳤다.

대신 내 뺨에 흔적을 남겼다. 그의 입술은 평소에 비해 너무 뜨거웠다. 확실히 열이 많이 나고 있었다. 그냥 움직임도 없이 그저 내 뺨에 힘없이 기대고 있었고.

이건 그저 그의 절제력과 인내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큰일이 나기 전에 얼른 쉬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약부터 먹고 푹 자요.”

그의 옆에 자리를 잡은 다음 커다란 컵에 든 약을 입으로 후후 불었다.

“자, 조금씩 마셔요. 천천히요.”

그의 몸을 내게 기대게 한 뒤, 약을 먹이는 것은 아이를 돌보는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아스테인이 아픈데도.

“다 먹었다. 그럼 이제 잘까요?”

억지로 다시 아스테인을 눕혔다. 쌀쌀하다고는 해도 여전히 여름인데, 그의 입에서 뜨거운 바람이 새어 나왔다.

“이러다가 진짜 큰일 나겠어.”

나는 다시 수건에 물을 적셨다. 그리고 누운 아스테인의 이마에 차가운 물수건을 올렸다.

그러자 아스테인이 기운 없이 웃었다.

“그만 가서 쉬십시오.”

“싫어요.”

“프레이아 님.”

“내가 쓰러졌을 때, 아스테인 님도 밤새 내 곁에 있어 줬잖아요. 나도 곁에 있을 거예요.”

내가 고집을 피우자 아스테인도 포기했다. 기운이 없어서인 것 같았다.

아스테인은 기운이 없어서인지, 그냥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도 내 손은 놓치지 않고 잡고 있었다.

그의 옆에서 그에게 손을 잡힌 채로 그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기를 반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스테인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밤을 새워가며 아스테인을 지키던 나도 눈에서 힘이 빠졌다.

나는 그대로 아스테인의 넓은 가슴 위로 얼굴을 묻고 잠이 들었다.

* * *

확실히 아스테인은 젊고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틀 만에 감기를 털고 일어났다. 나도 이틀을 꼬박 간호했지만 다행히 감기가 옮지 않았다.

“프레이아 님 덕분에 더 빨리 나은 것 같습니다.”

아스테인의 감사에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약을 먹이고 땀을 닦아준 것밖에 없었다.

내가 약을 먹은 것도 아니면서 아스테인이 잠들면 그의 가슴 위에 누워 함께 잤는걸.

“그러게나 말입니다. 우리 주군이 다른 건 몰라도 감기는 한 번 걸리면 열흘씩 고생하는데, 이번에는 이틀 만에 나았네요. 약 먹기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약을 잘 먹여주신 덕분입니다.”

크리세우스가 옆에서 놀리듯 말했다.

무슨 소리냐며 아스테인을 돌아봤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턱을 만지작거렸다.

“주군이 턱을 만지는 건 초조하다는 뜻이에요. 지금 약 먹기 싫어하는 어린…… 으아악!”

언제나처럼 1절을 끝마치지 못하는 크리세우스의 귀는 아스테인의 차지였다.

셀레미온은 차를 들고 들어오다 그 광경을 목격하고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차마 아스테인에게 뭐라고 하지는 못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닐 텐데?”

아스테인이 크리세우스의 귀를 풀어주며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으으…….”

크리세우스가 벌게진 귀를 문질렀다.

많이 아플 것 같았다. 하지만 크리세우스의 얼굴에 짜증 같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즐거워 보였다.

잠깐 떠났던 시기가 있어서 그럴까? 더 가까운 사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네, 문제는 그쪽이 아니라 하늘이죠.”

어느새 여관에 온 지 이미 7일째가 되었다. 폭우도 7일째였다.

“제국 곳곳에 물난리가 시작됐다고 합니다.”

크리세우스가 보고했다.

“최소 세 군데 이상이 강이 범람할 위기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무사한가요?”

“아가씨가 특히 위험하다고 알려준 곳에서는 미리 모래주머니를 쌓고, 물길을 내어두어 아직은 버틸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나는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전히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했다.

간간이 비가 멎기는 했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비가 언제 그치는지가 이제 관건이네요.”

크리세우스가 내 시선을 따라오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 얼굴에는 불안함 같은 것은 없었다.

이제는 약간의 자신감 같은 것도 생겼다.

“데아 님을 믿어도 될 거예요.”

내가 바꾸는 미래와 바뀌지 않을 미래.

어떤 차이인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인간의 미래는 사람의 행동에 따라 바뀔 수 있었다.

하지만 대자연은 내 몫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데아 님께서 바꿀 생각이 없으셨다.

“내일이면 그칠 테니까 우리도 모레 떠날 준비를 할까요?”

“정말요? 진짜 비가 그쳐요?”

셀레미온이 차를 다 따라주고는 내 옆으로 왔다.

“응. 그칠 거야.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하늘을 만날 수 있을걸?”

나는 셀레미온을 향해 밝게 웃어줬다.

“그러니까 내일 크리세우스 님과 꼭 같이 봐. 나는 아스테인 님과 함께 볼게.”

* * *

다음 날 아침, 성기사들은 내 말에 따라 짐을 일부 정리했다.

“성녀님. 과연 비가 그치겠습니까?”

“그럼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심지어 햇볕이 다시 뜨겁게 비춰서 내일 오후 우리가 출발할 때가 되면 길도 다니기 편해질걸요?”

성기사들의 얼굴에는 믿음이 반, 불신이 반이었다.

크리세우스가 지나가다가 이 광경을 봤다.

“너희는 이래서 안 된다니까. 성녀님을 무조건 믿고 따라야지. 쯧쯧.”

욱한 성기사들과 크리세우스가 티격태격 장난스럽게 싸우는 모습을 나는 즐겁게 구경했다.

저것조차 이들이 친해지는 과정이라 생각하니 불편한 광경은 아니었다.

크리세우스와 성기사들이 당장에라도 결투를 할 것처럼 험악해지려는 찰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프레이아 님.”

아스테인이 내 곁으로 왔다.

그는 기사들이 싸울 듯이 노려보고 있는 것을 보고 미간을 살짝 좁혔다.

“주, 주군.”

“다들 하던 일을 끝내도록 하지.”

아스테인의 말에는 가끔 뭔가 커다란 힘이 느껴졌다. 그의 말에 다들 제자리로 돌아갔으니.

“무슨 일이세요?”

“비가 그치면 볼 수 있는 것이 있다고 함께하자고 하셨지 않습니까?”

“아, 맞다. 그랬죠? 잠깐만요. 원래라면 하늘에 태양이 저기쯤 있어야 하니까……. 제 방 발코니에서 제일 잘 보일 것 같아요!”

내 방 발코니는 서쪽을 향해 있었다.

그걸 보고 아스테인이 잠깐 의문스러운 눈을 했다. 하지만 그는 금방 그 기색을 지웠다.

“프레이아 님의 말이라면 다 옳은 소리겠지요.”

아스테인의 미소에 나는 환하게 웃었다.

나는 아스테인과 함께 방으로 올라가기 전에 기사들에게 말했다.

“곧, 비가 그칠 테니 다들 밖에 나가서 구경하세요. 특히 서쪽 하늘을 보면 신의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거랍니다.”

조금은 과장되게 말했다. 그러자 크리세우스가 어디론가 슬쩍 빠져나갔다.

어디로 가는 건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잔잔하게 웃으면서 나는 아스테인과 함께 3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내 방 발코니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겠군요.”

아스테인이 옆에서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프렌스 님과 다른 기사님들은요?”

“영주성에서 프레이아 님과 제가 하는 일들을 열심히 떠들어댔다고 합니다.”

“이곳 영주의 아내가 사교계 곳곳을 누빈다는데 제대로 활약해주면 좋겠네요.”

작은 바람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아스테인이 다정하게 웃어줬다.

“자작부인이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블루 로즈가 암암리에 소문을 퍼트릴 겁니다.”

“황제가 반응할까요?”

제일 중요한 건 그쪽이었다. 그쪽이 반응한다면 아스테인이 내 곁에 머무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뜻이었다.

질투에 눈먼 황제를 몰아내러 가야 하니까. 예정된 황제의 죽음 전에.

“솔직히 황제 폐하가 반응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아스테인은 나와 같은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게 참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제가 아는 황제라면 그럴 리가 없겠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신전을 떠나기 전, 황제에게 경고의 편지도 보냈다.

술을 조심하라고. 술에는 어두운 기운이 많아서 멀리하는 것이 좋다고 주의하라고 했다.

그런데도 그는 세르펜스 대공이 납품하는 술을 끊지 못했다.

“점점 광기도 늘어난다는 것 같던데요?”

아스테인이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크리세우스가 전해준 정보에 따르면 황제는 점점 몸이 망가지는 것 같았다.

눈이나 입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씰룩이고, 매일 머리가 아프다고 하고. 작은 일에도 쉽게 흥분하여 주변에 있는 것을 부수고.

“황후 폐하는 황궁에 잠입한 제 수하들이 잘 지키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언제나처럼 아스테인은 내 속마음을 읽어주고 배려해주었다.

이럴 때면 마음을 잔뜩 표현해주고 싶었다.

“사람들에게 괜히 알려줬네요.”

발코니 아래에 사람들이 모여들지만 않았어도, 그럴 수 있었을 텐데.

하늘에서는 아직도 비가 마구 쏟아졌다. 비가 그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아래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렸다. 잘 들리지 않았지만 무슨 소리를 하고 있을지 충분히 예상되었다.

“이제 시작이네요.”

나는 손을 발코니 밖으로 뻗었다.

그 순간, 하늘의 정중앙에서부터 빛이 내 손으로 쏟아졌다.

구름은 그 빛을 피해 흩어졌다. 가운데에서부터 둥글게 둥글게.

그러자 나와 아스테인은 어두운 구름 아래에서 빛나는 두 사람이 되었다.

“신비한 모습이군요.”

“그때도 이랬어요. 하지만 그때는 제가 이 빛을 받지 못했죠.”

가짜 성녀였던 나를 신이 벌하려고 비를 내린다고 생각해서 신전에 숨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빛의 중심에 서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아까의 웅성거림은 이제 감탄사로 바뀌기 시작했다.

“신이 비를 내리지 않겠다는 증거를 보냈네요.”

내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크고 선명한 무지개가 떴다.

오후에 비가 올 거라는 상징인 아침 무지개. 하지만 오늘의 무지개는 더는 비를 내리지 않겠다는 데아 님의 약속이었다.

그걸 한참이나 아스테인과 구경했다.

흐린 하늘이 개듯이, 우리의 미래도 이젠 먹구름이 없길 기대하며.

“이제 내려갈까요?”

아스테인과 나는 1층으로 내려갔다. 여관 밖으로 나가 아름다운 하늘을 배경으로 산책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산책을 포기해야 했다.

“성녀님, 단델리온 대공님!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감사 인사를 하러 몰려든 마을 주민들 때문에.

나는 그것을 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냈다.

계획대로 되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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