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환상의 파트너 (3)
살벌한 소리가 내 등 뒤로 펼쳐졌다. 사람들이 얻어맞는 소리와 고통에 지르는 비명까지.
소리는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가뿐히 뚫었다. 빗물이 소리를 더 찰지게 만드는 것 같기도 했다.
“뒤로 돌아보지 마십시오.”
“네…….”
아스테인이 살짝 끌어안아 그의 품에 가둔 덕에 나는 잔인한 광경을 보지 않아도 됐다.
“아가씨! 잠시만 참으십시오!”
아스테인의 기사, 레프렌스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그들은 강도들을 대상으로 하는 실전 전투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춥지 않습니까?”
아스테인은 내 상태만 열심히 살폈다.
기사들이 던져준 방수 망토를 걸치긴 했지만, 이미 몸이 젖은 탓이었다.
“아스테인 님이 안아주신 덕에 안 추워요……. 아스테인 님이야말로 추우신 거 아니에요?”
그는 하나뿐인 망토를 내게 건네주고 여전히 차가운 비를 맞고 있었다.
심지어 내게 체온을 뺏기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차가운 비를 맞고 있는데도 나는 뜨거웠으니까.
“아닙니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래도요…….”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망토 속에 숨어 있던 팔을 꺼냈다.
팔을 뻗은 뒤, 아스테인의 허리를 살짝 감았다.
그러자 아스테인의 탄탄한 몸이 내게 더 밀착됐다. 쓰고 왔던 모자의 챙도 일그러졌다.
아스테인이 예전에 뒤에서 날 끌어안았을 때보다 더 생생하게 그의 몸이 느껴졌다. 옷이 한 겹 더 늘어났는데도.
“팔이 젖습니다.”
“아스테인 님이 추운 것도 싫은걸요.”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그를 더 꽉 끌어안았다.
그래서일까? 우리의 몸은 비에 식을 생각이 없었다. 계속해서 빗물은 우리를 차갑게 식히려고 애썼지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귀에는 빗물 소리만이 남았다.
“다 처리했습니다!”
“…….”
“프레이아 님, 끝났다고 합니다.”
기사님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지만, 아스테인의 목소리는 뚜렷이 잘 들렸다.
“죄, 죄송해요.”
나는 다급히 팔을 풀고 아스테인의 몸에서 떨어졌다.
그런데 갑자기 아스테인이 내 팔을 붙잡았다. 그의 눈은 심각했다.
“왜, 왜요?”
“입술이 너무 푸르게 변했습니다. 얼른 돌아가야겠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아스테인의 입술도 파란데.
아스테인은 뒤를 돌아봤다. 나도 그의 시선을 따라 뒤쪽의 사람들을 쳐다봤다.
“다들, 잘 수습해서 여관으로 죄인들을 끌고 오도록!”
“네! 알겠습니다, 주군!”
아스테인은 그대로 나를 말에 태운 뒤 빠르게 말을 몰았다.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비는 끊임없이 쏟아졌다.
“아가씨!”
여관 입구에서 셀레미온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기사들도.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아요.”
“숲에서 강도단을 만났다.”
아스테인의 말에 성기사들이 눈을 크게 떴다.
“이 마을에 피해를 준다던 그놈들 말입니까?”
“아니, 그런 위험한 자들이 있는데 왜 두 분만 나가셨습니까?”
조금은 서운한 목소리였다.
아직 마음 깊숙한 곳에 약간의 시기와 질투가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기회를 잡자 다들 물어뜯으려고 달려들었다.
“내가 함정을 판 거예요.”
이럴 때는 내가 나서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의 말 한마디에 성기사들이 조용해졌다.
“여관에 성기사와 성녀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숨죽어 지내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그들을 끌어내려고 부유한 귀족 영애인 척 둘만 외출한 거랍니다.”
상큼한 목소리로 대답해줬다. 숨길 것이 없었다. 전부 사실이니까.
“저희를 데리고 나가시지 그랬습니까? 위험했을 것 아닙니까?”
“성기사들을 줄줄이 이끌고 나가면 잘도 강도들이 나서겠네요.”
“저희가 잠복해서…….”
“아뇨, 여관을 성기사들이 지키고 있어야 그들이 방심하고 나오죠.”
아스테인의 기사들은 우리가 신전을 떠난 날부터 근처에서 우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신들의 주인에게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블루 로즈 출신의 그들은 은신에 특화되어 있어 강도단의 시선을 피해 숨어 있기 좋았다.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 큰 역할을 했답니다. 크리세우스 님이 날 찾으러 나가지 못하게 한 이유가 있었어요.”
성기사들 속에 섞여 있던 크리세우스가 헛기침을 하며 당당하게 웃었다.
“그러니 서운한 마음을 풀어요.”
“죄송합니다.”
성기사들이 수그러들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자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회귀 전의 기억 때문인지 아직은 이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갈 수가 없었다.
성기사들과 친해지려면 조금은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았다.
“일단 마을 촌장부터 데려와요. 곧, 단델리온의 기사들이 강도단을 데리고 올 테니까.”
성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3층으로 올라갔다.
셀레미온이 쪼르르 쫓아왔다.
“아가씨 따뜻한 물 받아놨어요.”
비가 오는 것을 보고 셀레미온은 영특하게도 미리 목욕물을 준비했다.
“고마워. 혹시 아스테인 님의 목욕 준비도 해놨니?”
“글쎄요?”
“여관 주인에게 말해서 준비해줘. 그리고 아스테인 님께 당장 목욕하지 않으면 내가 화낼 거라고 아래로 가서 전해주고.”
“히히, 네, 알겠어요.”
셀레미온을 내려보낸 뒤, 나는 욕실로 갔다.
셀레미온이 오기 전 혼자서 낑낑대며 젖은 옷을 벗었다. 그리고 따스한 물속에 몸을 담갔다.
“신기하네? 물보다 아스테인의 품이 더 따뜻했어.”
피식 웃음이 났다.
아직 몸에 은밀하게 남은 아스테인의 온기를 떠올렸다. 그러자 몸이 조금 나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 * *
저녁 무렵에 마을 촌장이 여관으로 찾아왔다. 그는 이 영지의 관리인과 함께였다.
“성녀님을 뵙습니다.”
“저희 마을의 골칫거리를 해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내게 연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나는 그들의 인사에 손을 들었다.
“내게 감사할 필요는 없어요.”
“어휴, 어떻게 성녀님께 감사 인사를 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3년을 마을에서 약탈하며 모두를 괴롭혀온 무리입니다. 피해자만 해도 50명이 넘고 재산 피해는 얼마나 컸는지 모릅니다.”
촌장은 여러 번 내게 허리를 굽신대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늙은 촌장의 눈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옆의 영지 관리인은 조금 곤란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3년이나 강도단이 사람들을 괴롭혔는데 영지에서는 도움을 주지 않은 건가요?”
영지 관리인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그가 흠흠 하며 헛기침을 크게 했다.
“와, 여기는 영지민들이 죽어 나가도 영주가 구할 생각을 안 하나 봐요?”
아스테인과 함께 있던 크리세우스가 비꼬듯이 물었다.
그러자 영지 관리인이 고개를 숙였다.
“자작령은 규모가 작아 자체적인 기사단을 운영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제국 경비대에 도움을 청했지만, 지원군을 보내준다는 말과 달리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왜죠?”
“강도단의 규모가 작고, 피해자들이 대부분 평민이라는 이유였습니다. 기사들을 많이 데리고 온 부유한 귀족들에게는 행패를 부리지 않았거든요.”
영지 관리인의 말에 방에 있던 모두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죄송합니다. 저희 영지가 조금만 더 능력이 있었더라면 영지민들을 지켰을 텐데요.”
“다 성녀님이 찾아주신 덕분입니다.”
촌장이 다시 고개를 숙이면서 내게 감사의 인사를 하려고 했다.
나는 다급히 손을 내밀어 촌장을 말렸다.
“감사의 인사는 내게 할 필요가 없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촌장과 영지 관리인이 눈을 조금 크게 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손을 들어 한 사람을 가리켰다.
“여기, 내가 가장 믿는 충직한 성기사님이 이곳 영지민들의 처지를 듣고 안쓰러움에 모든 것을 계획했답니다. 그분이 부리는 사병을 동원해서요.”
“아, 성기사님이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역시 성녀님을 모시는 분답게 정의로운 분이시군요.”
촌장은 황족인 아스테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다시 한번 허리를 숙여 가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하지만 영지 관리인은 눈치를 챈 것 같았다.
“혹시…… 이분은 황실의…….”
“아, 알아보는군요? 제국의 2황자였던 단델리온 대공이랍니다.”
내 말에 영지 관리인과 촌장이 놀란 눈을 했다.
아마 현 황제의 미움을 받는 2황자에 관한 이야기를 모르지는 않았으리라.
“아아……. 감사합니다.”
“아스테인 님은 내 성기사이기 이전에, 제국민의 목숨을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는 훌륭한 지도자랍니다. 아스테인 님의 기사들도 모두 정의로운 자들이고요.”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아스테인의 얼굴이 아주 살짝 붉어져 있었다.
칭찬이 부끄러운 걸까? 얼굴을 붉힌 그가 이상하게도 귀여워 보였다.
사람들 앞에서 저렇게 붉은 얼굴을 드러낼 줄이야.
“아니에요. 사실…… 요즘 황실의 행동이 염려스럽긴 하죠.”
눈을 살짝 내리깔고 슬픈 듯, 우울한 목소리를 내었다. 한숨은 당연한 덤이었다.
“황제라는 자는 큰비가 내릴 테니 조심하라는 내 경고를 무시하고, 다른 대공 하나는 돈을 끌어모을 생각만 하고, 마지막 대공은 철이 없고……. 아, 제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세요.”
“성녀님께서 역대 그 어느 성녀님들보다 제국민들의 안전과 삶을 걱정한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사실, 저도 여기 옆에 있는 단델리온 대공님 덕분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답니다. 늘 가장 아래쪽 사람들부터 챙기는 사람이라 본받을 게 많거든요.”
“아…….”
촌장의 얼굴에 나를 향한 경외심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시선은 아스테인을 돌아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감사합니다. 대공 각하!”
“황족으로서 제국민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아도 된다.”
아스테인의 말이 촌장과 영지 관리인에게 조금 더 감동을 준 것 같았다.
아스테인과 내가 제법 합을 잘 맞춘 것 같았다.
* * *
“으아, 아가씨. 진짜 비가 그칠 생각을 안 하네요.”
낮에 잠깐 그쳤던 것이 꿈만 같게도 비는 또 끝없이 이어졌다.
“게다가 여름비인데도 왜 이렇게 으슬으슬 춥대요?”
셀레미온의 말처럼 쌀쌀했다. 아직은 여름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그러게, 대공성의 기사님들은 괜찮을까?”
그들은 때려잡은 강도단을 인근에 있는 영주의 성으로 압송하는 일을 맡았다.
비도 많이 오는데 죄인까지 끌고 가야 한다니,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분들은 방수가 되는 옷을 입기도 하셨고, 하루만 말을 타고 가면 영주성에서 지낼 테니 괜찮지 않을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 관리인이 아스테인의 기사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하며 극진히 모시겠다고 다짐도 했으니…….
“그리고 그분들보다는 대공님을 걱정하셔야 할걸요?”
무슨 소리냐는 듯이 셀레미온을 쳐다봤다.
그러자 셀레미온이 조금 당황한 듯이 헛기침을 했다.
“말씀드리면 대공님한테 제가 혼날지도 몰라요.”
셀레미온이 몸을 살짝 배배 꼬았다.
그럴수록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눈에 힘을 더 줬다.
내가 했던 말들을 다들 잊어버린 것 같았다.
“아, 알았어요. 말씀드릴게요! 대공님에 관한 건 다 알아야 한다고 하셨으니까요.”
셀레미온이 졌다며 양손을 들었다.
나는 만족스럽게 눈에서 힘을 뺐다. 그러자 셀레미온은 약간 볼을 부풀렸다.
“대공님이 콜록대며 기침을 하셨어요.”
“기침?”
“약간 콧물도 있으신 것 같고, 목소리도 조금 잠기셨더라고요?”
“감기에 걸린 거야?”
셀레미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촌장과 만날 때의 아스테인을 떠올렸다. 얼굴이 살짝 상기된 것을 나는 내 칭찬 때문에 부끄러워한다고만 여겼다.
열이 나서 아픈 것이었는데…….
“아스테인 님은 돌아오고서 바로 따뜻한 물에 목욕을 안 하셨던 거야? 따뜻한 밀크티도 안 드셨고?”
셀레미온은 내가 욕조에서 나오자마자 먹을 수 있게 따뜻하게 데운 밀크티를 줬었다. 꿀까지 들어가 몸을 데우는 데 좋았다.
“크리세우스 님께 전해드렸는데……. 바쁘셨던 것 같아요.”
나는 살짝 눈썹을 모았다. 아스테인에게 살짝 화도 났다.
내가 조금이라도 아플 것 같으면 그렇게 난리면서…….
“어디 계셔?”
“지금은 방에 계신 것 같아요.”
나는 당장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맞은편에 있는 아스테인의 방으로 갔다.
“앗, 아가씨?”
마침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약을 들고 들어가려던 크리세우스를 만났다.
“그거, 주세요. 감기약이죠?”
“그게…….”
크리세우스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하지만 곧 그는 쟁반을 그대로 건넸다.
“저는 오늘 야간 호위 담당이라, 새벽에나 자러 올 겁니다!”
그리고 찡긋 윙크했다.
“우리 주군을 잘 부탁드립니다!”
크리세우스는 그길로 사라졌다.
나는 크리세우스에게 건네받은 약을 들고 방문을 열었다.
“아스테인 님?”
하지만 아스테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침대 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약간의 식은땀을 흘려가며.
발소리를 죽이며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이런, 많이 아픈가 봐.”
나는 크리세우스가 이미 놓아둔 세숫대야의 물을 발견했다. 옆에 놓인 수건도.
수건에 물을 적신 뒤, 아스테인의 이마에 올려주었다.
“바보같이 왜 아프고 그래요?”
약을 먹여야 하는데…….
깨울까 하다가 곤히 잠든 아스테인의 모습을 들여다봤다.
자는 모습이 너무 예뻤다. 기다란 눈썹이 만든 그림자도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자는 동안에도 반듯한 그의 모습이 신기했다.
“곧 잠시 이별이겠지?”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며 아쉬움을 삼켰다.
대신 그의 도톰한 입술 위에 손가락을 슬쩍 올렸다. 안 그러면 키스하고 싶은 유혹을 이기지 못할까 봐.
그때 아스테인의 눈꺼풀이 스르륵 위로 올라갔다.
그의 나른한 보라색 눈동자가 이상하게도 내 심장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