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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78화 (78/101)

78화. 환상의 파트너 (2)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여관의 식당으로 내려갔다.

여전히 우중충한 날씨에 쏟아지는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있었다.

“으아아, 이제는 비가 너무 싫어요!”

“그러게, 지겹네.”

이 여관에 온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되었다. 그 사흘 동안 내리는 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빗속에 갇힌 건, 다 크리세우스 님 탓이에요.”

셀레미온이 볼을 크게 부풀렸다.

그러자 식당으로 들어오던 크리세우스의 걸음이 뚝 멈췄다.

“제, 제가 뭘 어쨌다고 이러십니까?”

크리세우스의 얼굴은 누가 봐도 죄지은 사람의 것이었다.

“성기사를 안 하겠다고 가출하는 바람에 늦어져서 비에 발이 묶였잖아요! 원래 계획대로였으면 벌써 남부 신전에 도착했을지도 모르는데.”

셀레미온의 투덜거림에 크리세우스가 난감한지 뺨을 긁었다.

흐음, 언제 저런 모습까지 닮은 거지?

크리세우스의 뒤쪽으로 아스테인이 들어왔다. 그는 크리세우스의 등을 살짝 밀었다.

“언제까지 입구에 서 있을 거지?”

“주, 주군!”

“셀레미온 양이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죽을상을 하고 있어?”

“하지만…….”

크리세우스가 조금 불쌍한 척, 눈꼬리를 내렸다. 물론 아스테인은 그런 그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셀레미온. 크리세우스 님 때문에 늦게 출발했지만, 덕분에 내가 바라던 일은 더 잘 진행되고 있어.”

그래서 내가 크리세우스의 편을 들어줬다.

그러자 크리세우스가 환하게 웃었다. 셀레미온도 살짝 누그러졌고.

“뭐, 우리 아가씨가 용서한다면 나도 괜찮아요.”

아스테인과 크리세우스는 우리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함께 앉았다.

나는 그 모습에 눈썹을 살짝 올렸다.

“아직 식사 전이었어요?”

“바빴습니다.”

아스테인이 조금은 지친 눈으로 말했다.

여관에 온 뒤 할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관의 호위 상태를 아스테인이 챙겨야 했다. 게다가 블루 로즈가 할 일도 관리해야 했으니 피곤할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치고도 많이 지쳐 보였다.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내 질문에 아스테인이 턱을 슬쩍 매만졌다.

그 모습에 내 눈이 가늘어졌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몇 번 봤다.

아스테인이 턱을 만지는 것은 불안하거나 초조할 때 하는 습관이었다.

“황궁에 무슨 일이 생겼대요?”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 계획이 뒤틀렸어요?”

“그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아스테인은 바로 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 모습에 살짝 심술이 났다.

“그럼 절 믿지 못해서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 건가요? 눈가도 약간 침침하고 걱정이 있어 보이는데요?”

조금 빠른 속도로 몰아붙였다. 그러자 아스테인의 눈이 조금 동그랗게 커졌다.

셀레미온과 크리세우스는 내 눈치를 봤고.

둘은 동시에 조용히 숟가락을 들고 수프를 떴다.

“절대 아닙니다. 그저…… 혹시 괜한 두려움에 불편해하실까 봐 말씀드리지 않으려고 한 겁니다.”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았다.

남부 왕국의 왕녀 사건 덕분에 황제가 아스테인의 짝을 지으려던 일을 포기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스테인은 절대 직접 그 일을 내게 말하지 않았었다. 내가 마음을 쓰고 지치는 것이 싫다고 했었다.

“전 아스테인 님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아야겠어요.”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나를 배려해 숨기는 일 같은 것은 없었으면 했다.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조금 화난 얼굴을 하자 아스테인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말해주지 않는 거예요?”

“이 마을의 흉흉한 일 때문에 그랬습니다.”

“마을의 일이요?”

아스테인은 거듭된 내 질문에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가 입을 다시 다물까 봐 살짝 걱정됐다.

하지만 아스테인은 솔직해지기로 했는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강도단이 한 번씩 나타나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다고 하더군요. 여자들을 잡아가 희롱하기도 하고요.”

아스테인의 대답에 나는 바로 미간을 좁혔다.

내가 묵고 있는 마을은 그렇게 큰 곳이 아니었다. 이런 곳에서 약탈을 일삼다니.

“폭우도 계속 쏟아지고, 성기사들과 성녀님이 이곳에서 머무니 당분간은 특별한 일은 없을 겁니다.”

“그 소리는 우리가 머무는 동안에는 마을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다는 소리네요?”

아스테인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줬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가 떠나면 사람들이 또 강도의 위협을 받는다는 소리네요?”

나는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불만스럽게 말했다.

이번에도 아스테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으아, 강도라니! 얼른 이 마을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셀레미온이 조금 겁에 질렸다.

“아이,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입니까?”

크리세우스가 가슴을 톡톡 두드리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 모습이 잠시나마 근심을 잊게 했다. 그리고 이런 소소한 행복을 우리만 누려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아스테인 님?”

내 부름에 그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조금 전 못마땅한 목소리에서 이미 내 마음을 눈치챈 것일지도 몰랐다.

“소문에 들어갈 미담을 하나 더 늘릴 기회네요?”

“네, 그렇습니다.”

내 남자를 좀 더 영웅으로 만들어야겠다. 황제나 세르펜스 대공의 이름이 그를 넘보지 못하게.

* * *

주룩주룩 내리던 비는 오후가 되자 잠시 잦아들었다.

그러자 아스테인이 찾아왔다.

“계속 여관에 갇혀 있느라 힘들었는데 산책을 하지 않겠습니까?”

“네, 좋아요. 안 그래도 좀이 쑤시던 참인데 잘됐네요.”

셀레미온은 크리세우스에게 맡겨놓고 나는 아스테인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늘 사람들 앞에서 정중하고 반듯한 성기사인 그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슬쩍 웃었다. 저 반듯함의 절반은 그의 뜨거운 속을 숨기기 위한 반작용이었으니.

“여관 밖에 들꽃이 핀 숲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로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들꽃이요? 어머, 좋아라. 그리로 갈래요.”

나는 들뜬 마음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은 걱정됐다. 나와 아스테인을 엮은 소문이 잦아들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암암리에 퍼지고 있었으니까.

“성녀와 성기사의 외출은 사람들 눈에 안 띄었으면 좋겠는데…….”

내 말에 아스테인은 커다란 모자를 구해왔다. 장식도 많이 달린, 조금은 고급스러운 모자였다.

“아가씨, 이러면 머리카락이 거의 보이지 않아요.”

셀레미온이 내 머리를 잘 묶어서 틀어 올려줬다. 그리고 예쁘게 올려진 머리를 모자로 가리자 머리카락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모자랑 잘 어울리는 옷을 입고 나가면 되겠네요.”

셀레미온은 화려한 모자와 어울릴 연분홍색의 외출복을 꺼내왔다.

평소보다 하늘하늘하고 자잘한 보석들도 많이 달려 있었다.

“예쁘다!”

“그래?”

“네, 대공님 마음에도 들었으면 좋겠어요!”

셀레미온이 나보다 들뜬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셀레미온이 이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인지를 깨달았다.

“응. 네 덕분에 충분히 아스테인 님이 날 예뻐해 주실 거야.”

하필 이런 부끄러운 단어를 쓰는데 아스테인이 날 데리러 왔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나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접니다, 프레이아 님.”

문을 열자 복도에는 나를 데리러 온 멋진 기사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아름다우시군요.”

아스테인의 칭찬에 내 뺨은 입고 있는 옷과 같은 색이 되어버렸다.

“아스테인 님도 멋져요.”

아스테인은 한동안 열심히 입을 수밖에 없었던 성기사의 제복을 벗었다.

그리고 새하얀 셔츠와 잘 어울리는 하늘색의 크라바트를 하고 있었다. 크라바트에는 붉은 루비로 만든 부토니에도 달려 있었다.

“그럼 가 볼까요?”

“언제 다시 비가 올지 모르니까 빨리 돌아오셔야 해요.”

셀레미온이 우리에게 살짝 걱정을 덧붙였다.

하지만 비 때문에 외출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셀레미온, 다녀올게.”

인사를 마친 나는 아스테인과 함께 말을 타고 여관을 나섰다.

뒷문으로 나온 우리는 여관에 있던 성기사의 일행이 아닌 것처럼 한 바퀴 크게 마을도 돌았다.

그리고 마을을 가로지른 뒤, 마을 뒤편에 있는 숲으로 갔다.

“와! 숲이 아니라 정원인데요?”

나는 입구의 모습에 반해 살짝 목소리를 높였다.

노란 해바라기꽃 무리가 입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말을 타고 있는 우리만큼이나 큰 꽃은 햇빛이 없어서인지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런데 아쉽네요. 날이 완전히 개었다면 더 보기 좋았을 것 같은데.”

“그렇군요. 하지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더 많은 꽃이 있으니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그의 말대로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또 다른 꽃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붉은색의 나팔꽃이 주변의 나무를 타고 올라가며 피고 있었고, 입구의 해바라기를 닮은 작은 꽃도 많았다.

“이건, 달맞이꽃 아닌가요?”

“날이 흐려서 밤이라고 생각하고 꽃이 폈나 봅니다.”

말에서 내린 우리는 천천히 꽃을 돌아봤다.

나는 신전에서는 보지 못했던 작고 아기자기한 꽃들의 향연에 감탄사를 끊임없이 내뱉었다.

“꼭 화려하다고 예쁜 건 아니네요.”

“그렇습니까?”

“네, 야생에 사는 꽃들은 소박하지만, 그 매력이 귀족 정원의 화려한 장미 못지않은 것 같아요.”

나는 끊임 없이 꽃들을 칭찬하며 여기저기를 쫓아다녔다. 이런 나를 아스테인은 묵묵히 따라다녀 줬다.

꽃 이야기 같은 것, 그다지 재미있는 주제가 아니었을 텐데.

그런데도 아스테인은 지겨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계속해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웃어주고.

아스테인 덕분에 나는 꽃 속에서 행복한 나비가 될 수 있었다.

“어머! 아스테인 님! 여기 이 꽃이요!”

내 부름에 아스테인이 다가왔다.

그곳에는 작고 앙증맞은 방울 모양의 꽃이 잔뜩 피어 있었다.

“은방울꽃이 아직도 피어 있네요.”

“여름에는 피지 않습니까?”

“초여름에 피는 꽃이거든요.”

나는 은방울꽃의 꽃잎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그러자 예쁘게 맺혀 있던 물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이 꽃의 꽃말이 뭔지 아세요?”

“아니요. 잘 모릅니다.”

“으음, 제가 어렸을 때 아스테인 님께 들려준 말인데요?”

그에게 힌트를 줬다. 그러자 아스테인의 눈이 커지다가 슬며시 휘어졌다.

“행복해질 것이다?”

“맞았어요!”

나는 아스테인을 위해 손뼉을 쳐줬다.

내 칭찬에 아스테인이 뭔가 부끄러운지 귀를 붉혔다. 하지만 사람이 없을 때면 절제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남자답게, 나에게 슬쩍 다가왔다.

“우리는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었지요.”

“행복하세요?”

“프레이아 님이 계셔서 행복한 것 같습니다.”

그의 대답에 나는 입가에서 미소를 지울 수가 없었다.

대답은 말로 하고 싶지 않았다. 까치발을 하고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춰줘야지.

나는 발끝에 힘을 주고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시야를 높이려고 하는 순간.

투둑- 투두둑- 내가 쓰고 있는 모자 위로 비가 쏟아졌다.

“이런, 얼른 돌아가는 편이 좋겠군요.”

모자 덕분에 내 얼굴에 쏟아지는 비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아스테인은 커다란 손을 내 머리 위에 펼쳤다. 한 손은 허리를 끌어안고.

비로부터 나를 보호해주려는 듯이.

말이 있는 곳까지 달려가는 사이,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비를 맞아야 했다.

온몸이 차가운 비에 젖었다. 하지만 아스테인의 손이 닿은 곳만큼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자, 오르십시오.”

말이 있는 곳에 도착하자 아스테인이 다시 내 허리를 단단히 감고 말 위에 앉혀 주려고 했다.

평소에도 늘 하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의 손이 닿는 것을 나도 모르게 주저하며 뒤로 피했다.

“그, 저기, 제가 알아서 할……게요.”

내 몸의 상태를 깨달아 버린 것이다.

하필 셀레미온이 하늘하늘한 옷을 입힌 바람에…….

문제는 그것이 나 하나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스테인의 젖은 몸도 형태가 뚜렷이 보였다.

그건 내가 두 번 정도 본, 아스테인의 근육과 완전히 일치했다.

특히 가슴과 배 사이로 갈라진 근육.

“빗물에 안장이 미끄러워 위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요. 그러니까…….”

난감해졌다. 아스테인에게 속마음을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냥 비를 맞고 있을 수도 없고.

“뭐야, 여자가 싫다는데 내버려 둬.”

그때 숲속에서 잔뜩 불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게. 그러니 우리한테 넘겨. 네가 가진 돈과 목에 달린 보석, 그리고 여자도.”

자신들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들은 마을에 나타난다는 강도단이었다.

“목숨이 아깝거든 더러운 소리 하지 말고 조용히 물러나라.”

아스테인은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로 강도들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아스테인에게는 별다른 무기가 없었다.

“하하하, 몸은 좋다만, 무기도 없는 애송이가 하는 위협 따위는 무섭지 않단다.”

“기사 같은 놈이 있대서 긴장하고 왔는데 무기도 없네?”

“괜히 전부 데리고 나왔네. 어느 놈이 마을에 이상한 소문을 낸 거야? 여관에 기사들이 많다더니.”

“한 서넛만 데리고 왔어도 돈을 충분히 벌었겠군.”

강도들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살펴보니 강도들은 대략 50명은 넘어 보였다. 아무리 아스테인이라도 혼자 저들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무기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전혀 긴장하지 않고 그들을 쳐다봤다.

“내가 기회를 줬는데도 어리석군.”

아스테인이 그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동시에 수많은 사람의 발소리가 숲에 울렸다.

그것을 들은 아스테인과 나는 서로를 마주 보며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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