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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77화 (77/101)

77화. 환상의 파트너 (1)

오랜만에 찾아간 대공성에는 아침 안개가 짙게 깔려 있었다.

이곳에 크리세우스가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아예 아스테인을 보지 않으려는 거면 어디론가 잠적한 것일 수도 있었다.

“제 손을 잡고 내리십시오.”

아스테인이 말에서 내리기 쉽게 손을 내밀어 줬다.

그것에 의지해 땅에 발을 디뎠다. 동시에 나는 심호흡을 했다.

“크리세우스 때문에 긴장하신 겁니까?”

“아니요. 의지를 다지는 거예요.”

아스테인에게 대답한 뒤, 다시 크게 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별것 아닌 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아가씨! 주군!”

우리를 보자마자 기사 레프렌스가 달려왔다.

“오셨습니까?”

막내 기사님은 여전히 씩씩하게 인사했다.

특히 나를 보고 많이 반가워했다.

“지난번에 보내주신 선물은 감사했습니다!”

“그때 못 받은 기사님들께 주머니가 모두 돌아갔나요?”

“네, 다들 기뻐하더군요.”

“이번에는 직접 쿠키를 구워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네요.”

레프렌스가 손사래를 쳤다. 눈도 아주 커다래졌다.

“어휴! 그랬다가 또 몸살이라도 나면 저희가 주군에게 혼납니다! 다시는 그런 일 하지 마십시오.”

아스테인을 힐끔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입꼬리 하나 움찔하지 않았다.

태연한 그를 보며 내가 살짝 웃자, 레프렌스도 어색해하며 따라 웃었다.

“또 혼나시겠네요.”

“그러게요. 요놈의 입이 문제네요.”

그러자 아스테인이 드디어 반응했다.

“흠흠. 크리세우스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어디 갔는지는 모르고?”

“갈 곳이야 블루 로즈의 거점 길드들뿐인데, 어디에도 와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아스테인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내일이면 지방으로 떠나야 했다.

그사이 황제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카렌시아의 보호를 블루 로즈에게 부탁도 해야 하고.

“멍청한 녀석.”

아스테인의 입에서 조금 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게요. 주군이 수장의 원수를 갚느라 포기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레프렌스의 말을 듣는 순간,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크리세우스 님의 부모님을 모신 무덤이 어디에 있죠?”

“아…… 거기라면 대공령의 외곽에 있습니다. 추모 공간이 제법 넓으니 거기서 숙식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나는 아스테인과 눈을 마주쳤다.

아스테인도 내 말에 동의하는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를 바로 말에 다시 태웠다.

“저희가 호위하겠습니다!”

레프렌스와 대공성의 기사들까지 합류한 채로 우리는 말을 몰았다.

말을 모는 사이 아침 해는 어느새 하늘 위로 올라와 짙은 안개를 거둬갔다.

언제 안개가 꼈냐는 듯이 푸른 하늘이 드러날 때, 우리는 크리세우스를 발견했다.

“크리세우스 님!”

아스테인이 말에서 내린 뒤, 나를 내려 주기도 전에 내가 말에서 내리려고 했다.

내가 소리를 질렀기 때문일까? 갑자기 말이 소리를 내며 앞으로 움직였다.

그 위에서 내가 살짝 비틀대는 순간, 아스테인이 말의 고삐를 잡았다. 하지만 고삐를 잡은 사람은 하나가 아니었다.

“감사해요, 크리세우스 님!”

“위험하게 굴다 다치면 우리 주군이 속상해합니다.”

장난기 많던 기사님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아스테인을 향한 마음은 충분히 전해졌다. 셀레미온이 어떤 경우에도 내 편인 것처럼, 그도 늘 아스테인의 충복이었다.

“지금도 아스테인 님은 속상해하는걸요? 가장 믿는 충신이자 친구가 마음을 다쳤으니까요.”

크리세우스의 콧구멍이 아주 잠시 커졌다가 좁아졌다.

“크리세우스. 이야기 좀 하자.”

“저는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저와 뜻이 다른데 함께할 수 있는 사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조금은 삐딱한 자세와 불퉁한 말투. 장난기 많은 기사님과 어울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묘하게 어울렸다.

내 눈에는 아스테인에게 투정하는 것으로 보였다. 결국에는 돌아올 거면서.

그러기 위해서 그에게 명분을 줘야 했다.

“크리세우스 님이 왜 화났는지 알아요.”

“화난 것 아닙니다. 예전부터 성녀님이 가려는 길과 제가 가려는 길은 맞지 않았으니까 떠나려는 겁니다. 제가 있으면 블루 로즈는 결국 암흑 길드나 다름없는 사고관을 가질 테니까요.”

몇 번 생각이 달라 충돌하기는 했다.

그래도 크리세우스는 결국 내 뜻을 따라주었다. 이번에도 내 뜻을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

“황제를 몰아내겠다면요?”

크리세우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황제가 잘못한다면, 죽길 기다리지 않고 그를 몰아내는 일에 신전에서도 힘을 보태겠다고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황후와 그 아이는…….”

“네, 폭군의 아내와 자식이 되겠죠. 죄인 말이에요.”

크리세우스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황제의 잘못으로 반정이 일어난다면……. 황후 폐하는 반드시 아스테인 님께 인장 반지를 건네줄 거예요.”

예전의 카렌시아의 모습만 기억했다면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카렌시아는 달랐다. 잘못된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니까.

“그분은 황제의 이상한 행동도 우리에게 먼저 알려준걸요? 아스테인 님이 여전히 황제의 견제를 받는 것을 알면서도요.”

크리세우스의 입꼬리가 잠깐 꿈틀한 것을 봤다.

심지어 침도 삼켰는지 목울대가 울렁였다.

“하지만 불행의 씨앗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요.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러진 않을 거예요.”

그녀가 정말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라면.

이유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더 중요한 이유가 남아 있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는 죄가 없잖아요. 부모의 죄 때문에 자식이 죽는 것을 크리세우스 님은 바라세요? 본인도 그런 공포를 느꼈으면서?”

조금 큰 목소리로 외쳤다.

주먹을 쥔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손톱이 살짝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다그치는 목소리에 크리세우스가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그의 주먹에도 힘이 들어갔다.

“아스테인 님을 위한다면서요? 그런데 황위 때문에 아스테인 님을 죄 없는 어린아이를 죽인 매정한 황제로 만들 생각인가요?”

이 말이 그를 자극한 것 같았다.

크리세우스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에는 새파란 하늘이 숨어들었다. 빛나는 의지를 품고.

“……정말로 황제가 잘못을 저지르면 더는 기다리지 않을 겁니까?”

“네. 아스테인 님도 내 의견에 동의했어요.”

아스테인을 쳐다봤다.

그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자신의 소중한 수하를 위한 다정한 눈빛은 덤이었다.

“선황 폐하의 유지를 어겼던 황제니, 나 역시 봐줄 이유는 없지.”

“황후가 혹시라도 뒤늦게 자신의 자식과 함께 반란을 꾀한다면요?”

아스테인은 그 말에 크리세우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툭툭 건드리는 그의 손길에 약간의 장난스러움이 들어 있었다. 늘, 싸우던 강아지들의 힘주지 않은 깨물기처럼.

“그걸 감시하고 차단하는 게 블루 로즈의 수장이 할 일 아니었나?”

크리세우스의 눈이 빛났다. 뒤쪽에 펼쳐진 푸른 하늘보다 더.

“좋아요. 두 분을 믿고 따르겠습니다.”

크리세우스가 나와 아스테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팔을 직각으로 꺾었다. 기사의 예를 다해 나에게 인사하는 모습이 듬직했다.

“고마워요. 당신이 돌아오면 셀레미온도 기뻐할 거예요. 많이 우울해하고 있거든요.”

“셀레미온 양이요?”

크리세우스의 귓가가 살짝 붉어졌다.

역시나 그는 내 소중한 하녀에게 마음이 있었다.

“내 소중한 아이를 크리세우스 님께 맡기고 싶어요. 그러니까 같이 가요.”

내가 내민 손을 크리세우스가 잡았다.

그리고 그가 조심스럽게 내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제 주군의 반려께도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아직은 반려라는 말이 낯설었다.

그래도, 크리세우스에게 제대로 인정받은 기분이 들었다. 아스테인 뿐 아니라, 나도 그의 주인이 되었구나.

* * *

우리는 예전에 레무스가 지냈던 남부 신전을 첫 번째 순회지역으로 삼았다.

우리 행렬의 선봉에는 크리세우스가 있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성실한 기사가 되어 있었다. 성기사다운 묵직함도 생겼고.

“잠시 숙소의 안전을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중간에 숙소에 들르기 위해 마차가 잠시 섰다.

오늘 마차의 내부 호위를 맡은 아스테인이 내린 뒤 나는 셀레미온을 쳐다봤다.

“셀레미온, 그만 웃어. 입에 벌레 들어가겠어.”

“윽, 너무해요!”

“크리세우스 님이 돌아온 게 그리도 좋아?”

“네? 무슨 말씀이세요?”

빨개진 얼굴을 아는지 모르는지, 셀레미온은 아닌 척,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보니 셀레미온이 어떻게 내 마음을 눈치챘던 건지 알 것 같았다.

“흐음, 역시 사랑하는 사람을 볼 때는 눈빛이 달라지는구나.”

“그, 그건! 아가씨도 마찬가지거든요?”

셀레미온의 말에 살짝 걱정됐다.

남들의 눈에도 내가 아스테인을 사랑하는 티가 많이 나면 어쩌지?

셀레미온에게 그 고민을 살짝 흘렸다.

“큰일이네. 너도 나도 이렇게 쉽게 들키는 거면…… 난리가 날 텐데…….”

“음, 저도 그렇고 아가씨도 그렇고,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아껴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런 거라면 다행이겠지만.

하지만 이미 소문이 널리 한 번 퍼졌던 것으로 봐서는 아닌 것 같았다.

우리의 마음을 어느 정도 눈치챘으면서 모른 척하고 있는 걸지도.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

“왜요? 전 여행이 처음이라서 너무 좋은데.”

셀레미온은 잔뜩 들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여행이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 여행이 끝난 뒤에는…….

“성녀님, 내리십시오.”

제법 크고 깨끗한 여관의 모습에 셀레미온은 신난 채로 마차 문을 열었다.

그러자 크리세우스가 셀레미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에 셀레미온의 뺨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셀레미온, 너 그러다가 크리세우스 님과 염문이라도 나면 큰일 난다? 둘 중 하나는 신전에서 쫓겨나야 해.”

그 모습이 귀여워 살짝 더 놀려주었다.

그러자 셀레미온이 정색했다. 눈썹에 힘을 주고 입술을 힘껏 다물자 화난 얼굴이 되었다.

“성녀님, 이런 식으로 놀리시면 곤란합니다.”

크리세우스가 살짝 퉁명한 목소리로 내게 대답했다.

“아가씨!”

“거짓말은 아니니 조심하거라.”

아스테인이 셀레미온을 달래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성녀님과 셀레미온 양은 안전을 위해 3층 안쪽 방을 쓰시면 됩니다. 짐은 저희가 올려드리겠습니다.”

크리세우스의 친절한 설명을 셀레미온이 경청했다.

“크리세우스 님과 아스테인 님의 방은 어디예요?”

셀레미온의 질문에 크리세우스가 찡긋 웃었다.

“바로 맞은편이요.”

“우와! 든든해요!”

나와 아스테인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잘 어울리는 한 쌍 같군요.”

“그렇죠?”

아스테인은 잠시 성기사들을 통솔해 건물의 보안에 힘썼다. 그사이 나와 셀레미온은 3층으로 갔다.

“아가씨, 그런데 남부 신전으로는 왜 가는 거예요?”

“신전에 별일이 없는지 감시하러 가는 거랬잖아.”

“정말 그게 다예요?”

물론 그게 다는 아니었다.

세르펜스 대공과 황제가 내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설칠 기회를 주려고 나왔다.

그리고…… 기왕이면 유테르안도 움직여주면 좋고.

“가는 길에 있는 마을들도 살펴볼 거야. 전염병은 여름이 끝나갈 무렵에 가장 위험하거든.”

게다가 회귀 전에 본 것이 있었다.

“곧, 큰비도 한 번 내릴 거니까.”

내 말이 예언이라도 된 걸까? 그날 밤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많은 비는 아니었지만, 마차가 다니기에는 좋지 않은 날씨였다.

“길의 흙이 전부 진흙이라 마르기 전에는 이동이 힘들 것 같습니다.”

아스테인이 상황을 전하러 왔다.

“성기사들이 뭐라고 안 해요? 신성력으로 비를 멎게 하거나 길을 보완하면 되지 않겠냐 등이요.”

“물론 몇몇이 그러는 모양이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비도 신의 뜻이라는 말로 막았습니다.”

아스테인의 말에 빙긋 웃었다.

하지만 내 가벼운 웃음과는 달리 비는 심각하게 퍼부었다.

여름이 끝나가는 것을 아쉬워하기라도 하듯이.

“아가씨, 괜찮을까요?”

셀레미온도 하늘을 보고 걱정스레 물었다.

“가능한 많은 곳에 미리 대비하라고 방법을 알려주고 왔잖아. 괜찮을 거야.”

이번 폭우를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지역이 큰 피해를 보는지도.

“이번에도 아가씨의 활약이 널리 알려지면 찬양이 끊이지 않겠어요. 다들 아가씨더러 데아 님의 재림이라고 할 거야.”

“그런 건 전혀 바라지 않아.”

“에이, 크리세우스 님과 대화하는 걸 들었어요. 이번 활약도 멋지게 포장해서 소문내기로 한 것을요.”

물론 그러기로 했다.

하지만 그건 셀레미온의 생각대로 나를 찬양하는 여론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니, 이번에는 내 활약만 전해지는 게 아닌걸.”

“그럼요?”

셀레미온의 질문에 대답하러 온 것은 크리세우스였다.

“아가씨가 큰비를 예언하긴 했지만, 그 대비책을 세운 건 우리 주군이라니까요?”

크리세우스가 뻐기듯이 고개를 살짝 들고 들어왔다. 그 모습에 셀레미온이 살짝 삐죽했다.

“그래서 대공님이 우리 아가씨보다 활약했으니 더 잘났다, 이건 아니죠?”

약간 날카롭게 묻는 셀레미온의 모습에 크리세우스가 뒷걸음질을 쳤다.

나는 웃으면서 셀레미온을 달랬다.

“그러니까 나와 아스테인 님 모두의 활약을 널리 알리는 거야. 환상의 파트너로 말이지.”

특히 이 소문은 두 사람에게 자세히 전해질 것이다.

황제와 세르펜스 대공의 귀에 잘 들리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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