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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76화 (76/101)

76화. 놓칠 수 없어요

“셀레미온,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크리세우스가 신전을 나간 뒤, 셀레미온이 눈에 띄게 우울한 모습이 되었다.

가만히 있다가도 한숨을 쉬고, 밥도 잘 못 먹고, 웃음도 줄고.

그 원인이 크리세우스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냥, 웃을 일이 없어서요.”

“미안해, 나 때문에 크리세우스 님이 화났거든.”

내 사과에 나의 소중한 하녀는 손사래를 쳤다.

“그게 왜 아가씨 탓이에요! 속 좁은 그 기사님 탓이지!”

“내가 받아들이기 힘든 말을 했는걸.”

“성녀님의 말씀인데 성기사가 그걸 받들어야지, 마음에 안 든다고 신전을 나가요? 그 사람이 잘못한 거예요.”

셀레미온은 지금까지 그렇게나 속상해했으면서도 내 편을 들어주었다.

아스테인처럼 단 한 번도 변함없이.

내가 도대체 어디서 이런 복을 얻은 걸까? 이런 측근을 두는 것도 큰 행운일 거야.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네가 너무 좋아서.”

“에이, 그래도 대공님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면서.”

“그거랑 다르지. 너는 내가 이전에는 가지지 못했던 내 편이고 내 가족인걸.”

“에이, 저 같은 평민이 어떻게 고귀한 성녀님의 가족이에요. 아가씨 편인 거야 맞지만.”

셀레미온은 조금 부끄러운지 뺨을 붉혔다. 손가락으로 자신의 빨간 토마토 같은 뺨을 긁기도 했다.

그걸 보고 나는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우, 웃지 마세요.”

“셀레미온. 나는 네가 항상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웠어.”

“에이, 뭘요.”

“이번에는 행복하게 오래오래 같이 살자.”

그 아이는 내가 왜 이런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고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셀레미온이 회귀 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셀레미온만큼은 아픈 기억이 없어서.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아가씨가 제 주인이 되어주셔서 저도 감사해요.”

빙그레 웃어주는 셀레미온의 얼굴에서 우울한 기운이 조금 달아났다.

“잠깐만 손 좀 줘봐.”

“왜요?”

셀레미온은 여전히 의문 가득한 눈을 하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거. 네게 뭔가 보답을 하고 싶었어.”

나는 예쁜 날개 모양의 작은 참이 달린 백금 팔찌를 셀레미온의 손목에 채워줬다.

“아가씨! 저는 이런 거 필요 없어요!”

“크리세우스 님이 돌아왔을 때 조금이라도 예뻐 보이면 좋잖아.”

“아니, 왜 제가 그분한테 잘 보여야 해요?”

“넌, 그분한테 전혀 관심 없어?”

내가 조금 고개를 기울이며 물어보았다.

당장은 아니지만 크리세우스를 미래의 셀레미온의 짝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셀레미온이 아직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을 찾아야만 했다.

내 소중한 아이를 나보다도 아끼고 사랑해 줄 사람을.

“그럼 레무스 님이 더 나은가?”

“아니! 성기사랑 성직자를 왜 저한테 붙여요?”

“성기사는 그만두면 혼인해도 되는걸? 크리세우스 님은 게다가 성기사가 하기 싫다고 나갔으니까. 레무스 님도 뭐…….”

먼 미래에는 직장을 잃을 테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셀레미온의 눈꼬리가 축 내려갔다.

셀레미온은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인 다음에야 시무룩하게 말을 꺼냈다.

“저는 출신도 불분명한 평민인걸요. 그런 저랑 멋진 기사님이 어울리지는 않을 거잖아요.”

셀레미온의 마음이 향한 곳을 확실히 알았다.

“게다가 저는 아직 너무 어리고…….”

“이제 너도 성인인데 뭘.”

“나이 차이도 있잖아요.”

“그래서 크리세우스 님이 싫어?”

셀레미온의 답이 돌아오기까지 조금 오래 걸렸다.

“잘 모르겠어요. 그냥 곁에 있으면 재미있고, 계속 웃음은 나지만……. 그냥 아무리 생각해도 저 같은 사람은 그분의 짝이 아닌 것 같아서요.”

나는 셀레미온에게서 나의 과거를 봤다.

아스테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나를.

“그렇게 따지면 나도 빈민가 출신인걸? 그러니까 난 아스테인 님에게 어울리지 않는 거 아닐까?”

“하지만 아가씨는 성녀님이잖아요.”

내게 신성력이 없어 신전을 없앨 것이라는 암시를 줬었다.

그런데도 셀레미온에게 나는 여전히 고귀한 사람이었다.

“넌 성녀의 하나밖에 없는 측근 시녀고, 크리세우스 님도 아스테인 님의 측근인데?”

내 위로에도 셀레미온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하긴, 이런 소리는 내가 몇 번을 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크리세우스가 직접 전해줘야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방 순회 계획을 다시 세우는 며칠 동안, 셀레미온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그가 돌아오지 않아서.

“다들 뭔가 기운이 없군요.”

대사제 레무스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특히 성기사들을 보고 있었다.

“크리세우스 님과 성기사들의 사이가 나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나 봐요.”

성기사들이 아스테인은 인정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크리세우스와는 여전히 자주 싸웠다.

“성녀님의 생각이 맞았을걸요? 제가 볼 때마다 싸우고 있었습니다.”

레무스의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애들도 아니고 싸우면서 친해지다니.

“라이벌이자 도전하고 싶었던 존재가 사라지니 맥이 빠졌나 봅니다.”

생각보다 크리세우스의 존재가 컸었구나.

“그런데 성기사들뿐만 아니라, 성녀님의 착한 시녀님도 며칠째 기운이 없더군요.”

뭔가 죄책감이 느껴졌다. 크리세우스의 존재가 이렇게나 컸는데……. 내가 그를 실망하게 했고, 신전을 떠나게 했다.

그리고 그는 아스테인의 설득에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내가 아스테인의 소중한 친구이자 측근을 잃게 만든 건 아닐까? 셀레미온의 연인이 될 수도 있었던 사람도, 성기사들의 라이벌도, 내가 쫓아냈다.

그게 내 마음을 조금 더 짓눌렀다.

* * *

모레면 호위 계획 수정이 끝나 지방 순회를 나설 수 있을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크리세우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계속된 불편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려 꽃을 보러 정원으로 나왔다.

“성녀님!”

그때 앳된 목소리가 나를 붙들었다.

“성녀님을 뵙습니다.”

회귀 전 내 수발을 들었던 어린 사제였다.

“오랜만이네요. 레이트리 양.”

“와!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시는 거예요?”

“그럼요. 예비 성녀 시절, 내가 신전에 올 때면 날 찾아와서 인사를 하고는 했잖아요.”

내가 아는 척을 해주자 레이트리 양이 기쁨에 발을 동동 굴렀다.

열 살의 꼬마 아이는 푸른 눈을 똘망똘망하게 떴다. 그러더니 치마를 잡고 옆으로 펼쳤다. 그리고 허리를 살짝 숙였다.

“아카데미에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하는 이에게 내가 주는 보상이랍니다.”

손을 뻗어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레이트리 양이 눈을 스르륵 감으며 내 손길을 즐겼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뻤다. 속에서 기분 좋은 설렘이 몽글몽글 피어오를 만큼.

“집이 가난해서 돈을 벌려고 신전에 들어왔는데, 이제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작은 소녀의 말에 웨르가 정리했던 보고서 내용을 떠올렸다.

“레이트리 남작가의 사정은 좋아졌나요? 남작이 아카데미에 가는 걸 반대했다고 들었는데요.”

내 말에 레이트리 양은 눈을 휘어가며 맑게 웃었다.

다행히 그 미소에는 어두운 기운이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희망의 빛만이 가득했다.

“처음에는 반대하셨어요. 큰돈은 아니지만, 주급이 끊기는 일이니까요. 그래도 신전에서 학비를 대주고 지원한다니까 수긍하셨어요.”

“다행이군요.”

“지금은 보석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제 꿈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세요.”

조금은 보람을 느꼈다. 내가 했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를 바꾸기 시작하면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왔다. 그 무게가 아주 살짝 날아간 기분이었다.

“나중에 어른이 돼서 꿈을 이루면 성녀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러 올게요.”

그때까지 내가 과연 성녀로 있을까? 신전도 없을 텐데.

그 말에 나는 차마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그저 어색하게 웃으면서 머리를 계속 쓰다듬었다.

“그리고 이거요.”

레이트리는 작은 손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오색 빛을 내는 조개껍질로 만든 브로치가 올려져 있었다.

“아직 돈이 없어서 보석은 못 구했어요. 대신 강에서 주운 조개로 만든 첫 작품이에요.”

장식도 금이나 은이 아닌 주석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브로치는 내게 금과 은보다 훨씬 가치가 높았다.

“만들면서 손을 다치진 않았나요?”

“살짝 데이긴 했지만, 괜찮아요.”

뒤늦게 레이트리의 상처가 보였다. 화상을 입었다가 살짝 착색된 손목의 상처가.

“이런……. 잠깐만 기다려요.”

나는 정원 주변을 돌아보다 찾던 꽃을 발견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알록달록 색색의 꽃이 피어 있는 채송화를 손으로 뜯었다.

“화상에 좋은 약초예요.”

흔한 꽃을 보고 레이트리 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효과가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손으로 즙을 짜내어 올려주고 손수건으로 묶어주는 동안 얌전히 있었다.

“길가에도 흔하게 있으니까 상처를 그냥 두지 말고 꼭 치료해요. 즙도 짜서 마시면 화상 통증이 조금 줄어드니까, 챙겨 먹어요. 알았죠?”

대공성에서 지낸 짧은 시간 동안 다시 약초학 공부를 했다.

계속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신전에서도 약초학책을 들여다보려는 학구열이 솟을 만큼.

“네! 소문이 맞네요. 성녀님이 약초에 관해 아카데미 교수님들보다도 더 잘 안다던데요?”

나는 처음 듣는 소리에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레이트리 양이 눈부시게 웃으면서 말해줬다. 그녀의 답을 기대하게 만들 만큼.

“가끔 신성력이 모자라서 약초를 쓰는 거 아니냐는 헛소리를 하는 애들도 있던데 그런 말 하면 다들 욕먹어요.”

“그런가요?”

“네. 성녀님은 신성력이 필요 없는 기적의 성녀님이라고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조금은 효과를 보고 있구나.

요 며칠 나는 회의감을 느꼈다. 미래를 바꾸는 일이 지겨워질 정도였고…….

하지만 이젠 그것이 얼마나 보람된 일이었는지 깨달았다. 마음속에 남아 있던 부채감을 커다란 숟가락으로 슬쩍 퍼냈다.

레이트리 양에게 보답으로 화려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레이트리 양도 다시 환하게 웃어주었다.

“참. 요즘 아카데미에서 의상을 배우는 아이들은요. 성녀님께 어울리는 의상을 디자인해 보느라 난리예요.”

“내 옷이요?”

“네. 옷도 예전의 성녀님과 달라서 친근하고 좋대요. 게다가 은혜를 갚고 싶어서 꼭, 옷을 만들어 드린다네요?”

“다들 마음이 고맙네요.”

레이트리 양은 이제 돌아가야 한다며 내 손에 브로치를 쥐여주었다.

그리고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레이트리 양을 향해 허리를 살짝 숙여주자 그녀는 내 이마에 입을 쪽 맞춰줬다. 그러고는 부끄러운지 달려갔다.

그걸 조금은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쳐다봤다.

나와 아스테인을 닮은 아이가 태어난다면, 저런 사랑스러운 아이였으면 좋겠다.

“아이가 참 예쁘군요.”

“아스테인 님.”

어느새 아스테인이 내 곁으로 왔다.

“그거, 주시면 옷에 달아드리겠습니다.”

아스테인의 청에 나는 브로치를 내어주었다.

그러자 그가 허리를 살짝 숙였다. 아스테인의 봄날 같은 라일락 향이 내 코끝을 스쳤다.

그 향에 나는 또 아스테인에게 설렘을 느꼈다.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그러다가 제가 프레이아 님의 몸에 상처를 낼 수도 있습니다.”

“죄송해요.”

그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그의 미소를 보기 위해 내가 해왔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건 오직 이 남자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를 위해서.

그것이 후회될 리가 없잖아.

“아직 아이가 만들어서인지, 핀이 조금 투박합니다. 그러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긴장되어 찌를까 봐 걱정되니까요.”

하지만 그 손은 전혀 떨리지 않고 있었다.

그걸 보니 회귀 전의 아스테인이 떠올랐다.

“아스테인 님은 언제나 절제를 잘하시네요.”

“저는 성기사니까요.”

아스테인은 여전히 나를 향해 정중한 자세를 유지했다.

지나가던 누가 보더라도 그저 성기사가 내 시중을 드는 것이라고 볼 만큼, 무표정한 얼굴로.

그리고 마지막 순간, 아스테인은 옷핀을 예쁘게 튕겨 내 가슴에 매달아 주었다.

나는 그걸 손으로 쓸었다.

“노력하고 계신 결과들이 나오는 모양이군요. 뿌듯하시겠습니다.”

“아직은 더 해야죠. 다른 이에게는 실망을 안겨주기도 했잖아요.”

“죄송합니다. 크리세우스를 아직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아스테인이 내게 잘못을 빌며 허리를 숙였다.

내 눈에는 그런 그의 모습조차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이곳은 신전의 정중앙에 있는 화단이고 나는 아직 성녀니까.

“그건 아스테인 님의 잘못이 아니에요. 제가 애초에 잘못한 거잖아요.”

“…….”

아스테인의 미간이 좁아졌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말하기로 했다.

아스테인이 도와준다면 당연히 편할 것이다.

하지만 미래를 바꾸기 시작한 것은 나였다. 그리고 바뀐 미래의 책임도 내가 지는 것이 맞았다.

그 책임을 남에게 미루는 것이 아니라.

“제가 다시 만나서 직접 설득할게요. 크리세우스 님을 놓칠 수 없어요.”

“녀석이 별나서 프레이아 님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제가 해야죠. 그때는 설득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할 거예요.”

“어떻게 말입니까?”

아스테인이 조금 미간을 좁히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답하기 전, 주변을 살폈다. 우리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가 가장 바라는 일을 선물한다면, 황후 폐하와 그 아이를 지키는 조건으로 거래를 할 수 있겠죠.”

“어떻게 말입니까?”

나는 아스테인을 향해 눈을 휘어주었다. 사랑을 듬뿍 담아.

“미래는 기다리는 게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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