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75화 (75/101)

75화. 은밀한 보상

“무슨 소리죠?”

“진심이다. 네가 신성력을 쓰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은 거라니까?”

너무나도 진지하게 말하는 황제의 모습에 질릴 것 같았다.

술에 취해도 단단히 취했다. 제정신이면 절대 할 수 없는 대화였다.

“그래서 위험을 감수하고 폐하의 아이를 다치게 하겠다고요? 황후 폐하도 위험해질 수 있는데요?”

어찌나 어이가 없는지 카렌시아의 아이가 황제의 아이가 아닌 건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신성력이라면 뭐든 해결 가능한 거 아닌가?”

“신이 정한 생명과 죽음에까지 관여할 순 없어요. 폐하의 호기심을 위해 자식을 위험에 빠트리는 짓은 하지 마세요.”

내 지적에도 황제는 전혀 자식 걱정 같은 것을 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오히려 뻔뻔한 얼굴로 내게 질문을 이어갔다.

“그래? 신성력이 없어서는 아니고?”

세르펜스 대공과 같은 의문.

이게 유테르안의 입에서 나온 말 때문인지, 인테르의 활동 때문인지 감이 오질 않았다.

“요즘 신성력을 전혀 쓰지 않는다면서?”

그걸 근거라며 내게 제시하는 걸까?

조금은 하찮게 느껴졌다. 반응하는 것도 아까울 만큼.

“신성력도 없는 성녀가 사람들을 홀리고 다니면, 그건 마녀가 아니겠어?”

황제는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스테인을 바라봤다.

“그리고 마녀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는 성기사라면, 뭐…… 다 알 만한 일 아닌가?”

황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스테인이 아이기스를 펼쳤다.

푸른 날개 모양의 방패가 펼쳐지자, 친위대의 기사들은 감탄사를 터트렸다.

기사들에게 아스테인의 방패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신전과 성녀님을 욕보이는 짓을 계속한다면 황제라도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어이쿠, 무서워라.”

“겨우 작은 호기심을 풀겠다고 자식의 목숨을 내세웁니까?”

“네가 감히 나를 훈계하려는 거냐? 더러운 자식이.”

황제는 아스테인을 향해 알 수 없는 날을 세웠다. 아스테인은 그런 황제를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정신 차리십시오. 지금 이런 모습으로 어찌 제국민의 존경을 받겠습니까?”

아스테인은 황제의 친위대를 돌아보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명을 무조건 따르는 게 기사인가?”

그의 눈빛에 제압된 것일까? 친위대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검이 없어도 너희들과 싸울 자신이 있다. 신이 내게 내리신 방패가 있으니까.”

아스테인의 여유로우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는 기사들에게 충분히 위압감을 주었다. 그들의 검 끝이 나에게서 아주 살짝 비껴갔다.

“죽도록 싸우겠다면 너희와 상대해 싸워 줄 수 있다. 하지만 내 뒤에는 나를 믿는 성녀님이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그가 아이기스를 살짝 돌렸다.

그러자 푸른 날개의 방패가 유려하게 움직였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아스테인의 손동작에 친위대 기사들의 넋이 살짝 빠졌다.

친위대는 잠시지만, 전의를 잃었다.

“다들 정신 차려!”

황제는 못마땅한 얼굴로 자신의 기사들을 돌아봤다.

하지만 10여 명의 친위대는 차마 검을 다시 잡지 못했다.

“폐하나 정신 차려야겠군요. 술을 먹고 신전의 주인인 내게 행패를 부릴 시간이 있다면 말이죠.”

내 호통에 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화를 내는 모습은 누가 봐도 주정뱅이였다. 근엄해야 할 황제가 아니라.

“빈민가 출신의 성녀 주제에 어디서 제국의 지존인 내게 명령질이야?”

친위대 중에도 신도들이 있는 것 같았다. 황제의 모습에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감거나 고개를 돌리는 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다들 놀라지는 않는 것을 보니, 이미 이런 상황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고귀한 피를 가지고도 어리석은 짓을 하는 사람보다야 현명한 빈민가 출신이 낫겠죠.”

모욕 섞인 반박에 황제가 손을 들었다.

그는 당장에라도 내 얼굴에 손을 대려는 듯이 달려들었다. 순간 아스테인이 걱정되었다.

나를 구하려다 황제의 몸에 손을 대는 순간, 온갖 꼬투리를 잡힐 테니.

“프레이아 님!”

역시나 아스테인은 내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황제에게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날개를 펼친 아이기스만이 그와 내 앞에서 황제를 가로막으려 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황제는 팔을 휘두르다 스스로 넘어졌다. 얼핏 보면 그냥 혼자 넘어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똑똑히 봤다.

황제가 아이기스의 푸른 날개에 밀려난 것을.

“아스테인 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테인도 나와 같은 것을 보고 의문을 가진 것 같았다.

“신께서는 황제 폐하의 술주정을 받아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군요.”

일단은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황제가 괜한 시비를 걸기 전에.

* * *

신전으로 돌아온 우리는 크리세우스를 불렀다. 그리고 우리가 본 황제의 모습을 이야기했다.

“와우! 제대로 미쳤네요?”

셀레미온이 가져다준 차를 마시던 그가 찻물을 살짝 내뿜었다. 눈은 놀란 듯이 동그래졌지만, 말투에 걱정은 그다지 섞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워 보였다. 황제를 향한 그의 반감이 어느 정도인지 확실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즐거운 크리세우스와 달리 나는 계속 의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원래 황제는 술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이건 회귀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딱히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재수 없는 대공이요.”

크리세우스가 갑자기 손바닥을 치면서 말했다.

모두가 크리세우스를 돌아보자 그가 가슴을 쭉 내밀었다. 아주 자부심이 넘치는 얼굴이었다.

“역시 저는 두 분의 귀염둥이군요. 이런 요긴한 것을 알아내다니.”

“헛소리 그만하고 바로 보고해.”

아스테인은 당장 크리세우스를 잡아먹을 것처럼 말했다.

그러자 크리세우스는 눈썹과 입술을 살짝 모은 채로 퉁명하게 대답했다.

“세르펜스 대공이 요즘 벌이는 사업 중 하나가 술이랍니다. 특히 북부 왕국과 남대륙에서 수입한 독주를 귀족들에게 판다더군요.”

“그 일부가 황실에 납품되었겠군.”

“네, 맞습니다.”

“그런데 남대륙이면…… 주술을 거는 흑마법사들이 득실한 곳 아닌가요?”

아스테인과 크리세우스의 대화에 끼어든 나는 불안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이기스는 물리력이 아닌 흑마법에만 반응하는 성물이었다.

“맞습니다. 아이기스에 밀려났다니, 납품하는 술에 뭔가 나쁜 저주 같은 것을 남겨두었을 가능성이 있겠군요.”

크리세우스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는 곧 자신의 주인에게 눈을 돌렸다.

“저주라면 어떤 걸까요?”

“일단 술에 중독되어 사리판별을 하기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흐음, 아무래도 우리가 만든 소문에 신나서 저지른 짓 같네요.”

나는 내가 모르는 소리가 들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문이요?”

그러자 크리세우스의 눈동자가 크게 한 바퀴 굴려졌다.

“나에 관한 소문을 덮기 위해 낸다고 했던 다른 소문을 말하는 건가요?”

“그게,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게 황제와 관련됐고요?”

“그것도 그렇습니다.”

크리세우스는 대답을 하면서도 자신의 주인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황제가 주색에 빠져 황후를 두고 바람을 피운다는 소문을 냈습니다.”

나는 눈을 찌푸렸다. 황궁에 갔을 때 카렌시아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마 그녀는 아직 소문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소문은 곧 그녀의 귀에 닿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스트레스일까?

“그래서 나와 아스테인 님의 소문이 쑥 들어간 건가요?”

“아마도……요?”

크리세우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 말해야 할지…….

카렌시아의 편을 들기에도, 크리세우스의 편을 들기에도 난감해졌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일했을지 알고 있으니까.

내가 빤히 쳐다보자 크리세우스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으음, 어차피 황제는 곧 죽을 거라면서요? 황후의 아이가 황위를 잇지 않게 하려면 황실 자체의 이미지를 떨어트려 놔야 하니까…….”

크리세우스의 말에 나는 미소를 잃었다.

카렌시아를 만난 후 생겼던 고민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녀의 아이를 살리기로 하고, 아스테인을 황제로 만들기로 다짐한 날 이후로 애써 숨겨왔던 일.

“황후 폐하와 아이를 죽일 건가요……?”

“아무래도 주군이 황제가 되려면 정적은 모조리 없애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 돼요! 그건!”

내가 어떻게 살린 아이인데 그건 싫었다. 절대로 그런 비극이 반복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내 반응에 아스테인이 나섰다.

“프레이아 님이 우려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주군!”

“제가 그분과 그분의 아이를 지키겠습니다. 물론, 그분이 제 뜻에 따를 수 있도록 설득도 하겠습니다.”

“자기 아들의 황위가 걸렸는데 쉽게 설득되겠어요? 화근은 미리 싹을 없애는 쪽이 맞아요!”

크리세우스의 반발은 컸다. 아스테인보다도 큰 목소리로 외치다 그가 나를 돌아봤다.

“주군을 사랑하신다면서 그깟 여자와 더러운 황제의 자식을 지키려는 겁니까? 분명히 주군의 앞길에 방해꾼이 될 텐데요! 진짜 우리 주군에게 마음이 있으신 거 맞아요?”

“크리세우스, 프레이아 님을 비난할 필요 없다.”

아스테인은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나를 대변했다. 언제나 제자리에서 날 지키던 듬직한 아름드리나무처럼.

그런 그의 모습을 보자 죄책감이 밀려왔다.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아스테인이라고 해놓고, 그의 앞길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보호하겠다니.

“파미르 공작가의 일을 잊었어?”

아스테인은 크리세우스를 가르치듯 달랬다.

“그들이 왜요?”

“프레이아 님은 미래를 내다보고 그들에게 커다란 빚을 지웠지.”

그의 설득에 크리세우스의 얼굴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을 살려두는 건, 빚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불길한 싹을 남겨두는 일이 될 겁니다. 게다가 황제의 자식이라니, 말도 안 돼요!”

크리세우스는 그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찬바람을 남긴 채.

아스테인은 크리세우스가 나간 방향을 한참이나 쳐다봤다.

“죄송해요.”

나의 사과에는 여러 의미가 담겼다.

오로지 그를 위한 선택을 하지 못한 것도, 불안 요소를 남긴 것도, 크리세우스와 싸우게 만든 것도 다 미안했다.

특히 얼마나 서운할까? 그보다 다른 이를 먼저 위했으니.

“아닙니다. 황제의 사후, 황후 폐하가 저를 인정해 주고 황실의 인장을 넘기는 것이 가장 좋은 결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유도해 내야죠.”

“만약에 그분이 거절한다면요…….”

“설득하고 또 설득해야지요.”

자신의 아이를 황제의 후계자로 만들겠다던 카렌시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혹시라도 그녀가 계속 그런 마음을 품는다면, 그러면 나도 아스테인을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내가 애써 살린 아이인데……. 소중한 생명인데…….

게다가…….

늘 꾸밈없는 미소를 지어주는 카렌시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몇 번이고 내게 사과하던 모습도.

누군가는 날 학대 속에 방치한 사람이라 손가락질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유일하게 사과한 푸토르 가의 사람이었고, 하나뿐인 언니였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하셨는지 압니다. 황후의 아이도 바뀐 미래의 일부분일 테니 더 마음이 쓰이시겠지요. 황후 폐하와도 사이가 좋으니까요.”

내 속을 읽은 아스테인의 말에 나는 눈을 조금 부드럽게 휘었다.

그가 내 속마음을 알아준다는 것이 안심되면서도 미안했다.

“그러니 프레이아 님이 노력하신 만큼 저도 황제가 되기 위해, 그리고 프레이아 님의 소중한 이를 동시에 살리기 위해, 더 노력하겠습니다.”

아스테인의 변함없는 행동에 마음이 놓였다.

“죄송해요. 정말로요.”

“죄송하다는 말은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요…….”

“저는 프레이아 님의 뜻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황족이라서, 원수의 아들이라서 죽이는 것은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겠지요.”

내가 차마 말하지 못했던 부분을 아스테인이 말해줬다.

그걸 듣자 왠지 마음이 놓였다고 해야 할까?

아스테인이 황제가 되기 위해 그들을 죽이겠다고 말했다면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그 아이는 아직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으니까요.”

내 마음을 정확하게 짚어낸 아스테인의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앉아 있던 테이블 반대편으로 갔다.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의 얼굴을 내 가슴에 담자 심장이 콩콩 뛰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이래서 나는 아스테인이 좋았다.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다정하기만 한 남자가 아니었다.

올바르고, 반듯하고, 또 듬직했다.

“고마워요. 그리고, 사랑해요.”

“사랑한다는 소리는 오랜만에 듣는 것 같군요.”

그가 살짝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러자 그의 숨결이 내 목덜미 근처를 간질간질 괴롭혔다.

얼른 그의 숨결을 삼켜달라는 듯이.

나는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짧게 쪽 하고 그의 입술을 삼켰다. 그러자 아스테인이 조금 아쉬운지 입을 살짝 오물거렸다.

“크리세우스는 제가 다시 설득할 테니, 프레이아 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대신, 그 아이를 설득해 그분을 살리면, 제게 많은 보상을 주셔야 합니다.”

“뭘 바라는데요?”

그러자 아스테인이 조금은 은밀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내 목에 그의 입술을 잠시 대었다가 뗐다.

그 부분이 너무 화끈거렸다. 열이 마구 타올랐다.

“모든 것이 끝나고 프레이아 님과 제가 원하는 위치에 섰을 때, 그때 말입니다.”

아스테인의 숨결이 다시 목덜미 주변을 맴돌았다.

나는 문득, 회귀 전의 반듯했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은색 실 팔찌를 줬던 그는 분명 그때도 나를 좋아했는데…….

그때는 도대체 어떻게 참은 걸까? 이렇게나 참을성이 적은 사람이었는데.

“프레이아 님을 닮은 딸아이를 갖고 싶습니다.”

나는 아스테인의 말에 갑자기 몸이 굳었다.

이건, 너무……. 부끄럽고 현실감이 없었다.

하지만 아스테인은 전혀 부끄럽지 않은 것 같았다. 태연하게 모레 있을 일정을 읊었으니까.

“일단은 프레이아 님은 마음 편히 앞으로 있을 지방 신전 순회에 집중하십시오.”

하지만 충직한 성기사 하나가 신전을 나가버려 지방 신전 방문은 며칠 뒤로 미뤄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