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미친 것 같아
며칠 뒤, 오랜만에 카렌시아를 만나러 황궁으로 갔다.
“프레이아, 어서 와! 대공도 오랜만이에요.”
에너지 넘치는 목소리와는 달리 카렌시아의 움직임은 조심스러웠다. 배도 살짝 불러 있었다.
어느새 그녀는 임신 6개월 차의 임산부가 되었다.
“잘 지내셨어요?”
“그럼, 잘 지냈지. 이제 입덧은 완전히 끝났어. 그래서 살 것 같아. 네가 입덧이 진정될 거라고 권한 차가 정말 효과가 크더라?”
카렌시아는 잔뜩 우울함을 담아 보낸 편지와 달리 신나게 떠들었다.
한동안 기운이 없어 보였는데, 이제 원래의 그녀로 돌아온 것 같았다.
“다행이네요.”
“다, 네 덕이야. 그런데 프레…….”
갑자기 카렌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멈췄다.
“무슨 일이세요?”
나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편지에서 내내 불안감을 표하더니,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사실 원래라면 아이는 지금쯤 사산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당장은 내가 미래를 바꾼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언제나 불안함은 내 곁을 맴돌았다. 언제든 운명이 원래대로 되돌아가려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프레이아, 손, 손 좀 줘!”
“네? 어디가 불편하신 거예요? 제가 그러면 당장 축복을…….”
얼마 남지 않은 신성력을 카렌시아를 위해 얼마든지 쓸 생각이었다.
나는 다급히 손을 카렌시아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카렌시아가 내 손을 빠르게 낚아챘다.
그녀와 내 손은 그대로 카렌시아의 배 위로 올라갔다.
“신기하지?”
카렌시아의 말이 맞았다. 신기했다. 하지만 그녀의 물음에 답할 시간은 없었다.
그저 손끝에 전해지는 꿈틀거림에 집중할 시간만 필요했다. 심지어 그게 눈에 보이는 듯했다.
카렌시아의 얇고 편한 드레스 위로 꿈틀대는 아기의 발길질이.
“뭐야? 안 신기해?”
“이게…… 태동이라는 거예요?”
“응. 아이가 건강하게 내 배 속에서 무사히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해.”
건강하게 살아 있다.
원래라면 지금쯤 죽었어야 할 아이가 너무나도 멀쩡하게, 또 활발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게 너무 가슴 벅찼다.
“정말…… 살아 있네요?”
“응. 네가 고비 때마다 축복을 내려줬잖아. 그래서인지 누구보다 건강해.”
“그러게요. 건강해요.”
“네가 양젖을 먹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해서 그것도 철저히 지키고 있어.”
카렌시아가 아주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양젖을 먹고 큰일이 날 뻔한 다른 귀족 부인의 이야기를 해줬다.
그러면서 내게 칭찬을 퍼부었다. 덕분에 큰일을 모면했다고.
하지만 나는 그 이야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마치 아이가 나를 알아보는 듯이, 계속 발을 내 쪽으로 차서…….
“요즘 들어서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나더라.”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위대하죠. 황제보다도, 신보다도.”
조금은 불경스러운 말을 꺼냈다. 하지만 다행히도 카렌시아는 내 말에 동의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그래서 아쉬워. 어머니가 가장 필요할 때 먼저 가셨으니까.”
카렌시아가 조금은 쓸쓸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밝은 기운을 되찾았다.
“그런데 이 녀석, 나중에 망나니가 되는 거 아닐까? 왜 이렇게 날뛰는지 모르겠네.”
계속 아이가 발로 차서 그런지 카렌시아는 불만스럽게 말했다. 그 모습이 귀여웠다.
“벌써 자식 걱정하는 거예요? 태어나기도 전에요?”
“나는 내 아이가 유테르안처럼 안하무인이 되길 바라지 않아. 그렇다고 아버지가 네게 했던 것처럼 억지로 이끌지도 않을 거고.”
카렌시아는 마지막 말을 내뱉자마자 눈치를 봤다.
“네게는 정말 미안해.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할지 고민하다 보니까 네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새삼 느껴졌어.”
“전 이미 떨쳤어요. 그건 황후 폐하의 잘못도 아니었는걸요?”
“하지만 나는 방치했잖아.”
“그렇게까지 심한지 몰랐잖아요. 그리고 후작이나 소후작에게서 제대로 받지 못한 사과도 몇 번이나 해주셨고, 그들로부터 도망가게도 해줬고요. 그걸로 충분해요.”
그런데도 카렌시아는 미안한 얼굴이었다.
내게는 동정도 연민도 더는 필요 없는데.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녀의 배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열심히 발길질하던 아이가 조금 얌전해졌다.
“그리고 그런 걱정을 할 수 있는 것도 복이라고 생각해요. 부모가 되는 건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축복 중 하나니까요.”
아무 생각 없이 말했는데 카렌시아가 갑자기 눈을 찡그렸다.
“그렇게 따지면 성녀는……. 신께서는 그런 행복을 왜 성녀에게는 허락하지 않은 걸까? 성녀는 신께서 가장 아끼는 사람이라며.”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그녀의 눈은 그게 아니었다.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글쎄요? 사실 데아 님의 말씀은 시간이 지나는 동안 너무나도 많이 왜곡되고 지워졌거든요.”
나는 잠시 아스테인을 바라봤다. 내 말의 의미를 아는 아스테인이 눈을 천천히 깜박여줬다.
나를 지지한다는 그의 시선이 내게 힘을 줬다.
다시 시선을 카렌시아에게 옮긴 나는 아무런 아쉬움 없이 은은하게 웃을 수 있었다.
카렌시아의 눈이 조금 커졌다가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래. 분명 신께서는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신성력을 몰아줬다고 했는걸. 그런데 본인의 뜻과 상관없이 포기하게 했을 리가……. 어쩌면 우리가 신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
이번에는 내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이렇게나 내 말뜻을 잘 이해할지 몰랐다.
“어머, 미안. 이거 불경한 소리 아니니? 내가 인테르와 관련된 소문을 사교계 여인들에게 많이 전해 들어서 헛소리를 했나 봐.”
최근 인테르는 내게 우호적인 태도로 바뀌었다. 성스러운 샘 사건 때, 내가 단호하게 죄인들을 벌하는 것을 보고 지금까지의 성녀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은 성녀를 죽여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신성력의 도움 없이도 성녀는 기적을 만드는데, 왜 인간들은 성녀와 신전에 의존하려고 하나요?]
딱, 내가 원하는 소문을 내주고 있었다.
“이러다가 신전에서 날 파문하려 하는 거 아냐?”
카렌시아가 조금 장난스럽게 내게 물었다.
“아니에요. 신전의 주인이 저인걸요. 절대 그럴 일 없어요.”
내가 웃어주자 카렌시아도 웃었다. 엄마가 웃어서일까?
또 태동이 이어졌다. 그것에 카렌시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개구쟁이가 태어날 모양이야.”
“황후 폐하를 닮아 활발한 아이가 태어나려는 모양이죠. 그래도 초기에 속을 많이 썩였으니 이제는 말을 잘 들을 거예요.”
이번에는 카렌시아도 아픔 없이 이렇게 웃으며 부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4개월만 참으면 내가 어머니가 되는 거니까 기뻐.”
당장은 이룰 수 없는 꿈이지만, 나도 언젠가는…….
나는 다시 문가에 서 있는 아스테인을 쳐다봤다. 그도 나를 보고 있었다.
아마 지금 나와 같은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몰랐다.
손을 겹쳐 아이의 태동을 같이 느껴보고,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할지를 의논하고.
“서툴러도 잘할 수 있겠지? 나는 내 아이를 정말 훌륭한 제국의 후계자로 키우고 싶어.”
카렌시아의 말에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애써 밀어내고 외면했던 고민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아스테인 쪽으로 잠시 돌아갔다.
“아들일 것 같아요?”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카렌시아에게 물었다.
“이렇게 활발한데 딸이면, 너무 말괄량이 아닐까? 아니다. 내 딸이 너처럼 신성력을 타고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네. 너무 활발한 성녀는 별로이려나?”
나는 그 말에 얼굴을 잠시 굳혔다. 그러자 카렌시아가 조금 당황하며 웃었다.
“미안, 너무 말괄량이로는 키우지 않을게.”
그 뜻이 아닌데…….
나는 카렌시아의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 몰랐다.
어쨌든 황제에게 자식이 있다면, 황제가 죽더라도 황위 다툼은 일어나지 않는 걸까?
그럼 나의 아스테인은? 데아 님의 말씀은 뭐였지?
나는 조금 혼란스러운 마음에 눈에 초점을 잃었다.
“저기, 프레이아?”
“아, 네. 죄송해요. 그런데 폐하?”
“응?”
“보내주신 편지를 보니까 조금 우울해 보이시던데…… 괜찮으세요?”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밝았던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건 황제가 다른 여자를 만난다고 고민하던 때의 그것과 같았다.
“있잖아. 폐하께서 조금 많이 이상해지셨어.”
“왜요? 지난번처럼 여자를 만난다는 소문이라도 도는 거예요?”
내 말에 카렌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뭐라고 해야 하지……? 이게 불경스러운 말일 수도 있는데…….”
카렌시아는 아스테인의 눈치를 봤다. 그 앞에서는 말하기 힘든 일일까?
아스테인을 밖에 내보낼까 고민하는데, 카렌시아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조금 결심을 한 것 같았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빛이 났으니까.
“폐하께서…… 미친 것 같아.”
* * *
황후궁 밖으로 나온 아스테인과 나는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었다.
“아까 황후 폐하께서 말씀하신 것을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요?”
조심스럽게 아스테인에게 권했다.
“크리세우스가 파악하지 못한 것을 보면, 그저 황후 폐하의 불안함이 만든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아스테인은 황궁의 다른 사람들을 살피며 은밀하게 답했다.
나도 그 말에 조금은 동의했다.
아직 카렌시아의 정서적인 상태가 좋지 않은 걸 수도 있었다. 그녀의 불안한 심리 상태 때문에 착각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만약에 말이에요. 제가 알고 있는 그 일의 전조 증상이면…….”
“아스테인, 프레이아. 황궁에 왔었군.”
그때 소름 돋는 목소리가 아스테인과 나 사이를 갈랐다.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알싸한 술 냄새도 함께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인사를 올린 아스테인과 달리, 나는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황제와 성녀. 둘은 대등한 존재니까.
“오랜만입니다.”
이런 나를 황제는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봤다.
이미 술기운으로 붉어진 얼굴은 나를 향한 적개심으로 더 붉어졌다.
“그래, 내 일을 사사건건 방해하는 성녀님이시여, 어쩐 일로 내 집을 다 찾아오셨나?”
비꼬는 말투에 나는 입을 꾹 다물고 황제를 쳐다봤다.
또박또박 말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으면 발음이 뭉개져 있었다.
이건 술기운 탓일까?
“또 내 동생의 앞길을 방해하려고?”
“저는 그런 일을 했던 기억이 전혀 없답니다.”
“하, 그래? 그럼 이번에는 절대 반대하지 않겠지.”
황제의 미소가 불안하게 느껴졌다.
왜 이렇게까지 나와 아스테인을 갈라놓는 일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뭘 말인가요?”
“남부 왕국의 왕녀가 제국의 아카데미에 온다고 하더군. 유학 시절이 외롭지 않게 아스테인과 짝지어 주려는데 말이야. 황족인 아스테인에게도 왕족 정도는 되어야 급이 맞을 테고.”
내가 뭔가를 말하려는 찰나, 갑자기 아스테인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왕녀가 제스티안과 벌써 인연을 맺었다고 하던데 모르셨나 봅니다.”
“뭐라고?”
“그런데 제스티안이 뭔가 큰 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아스테인의 얼굴이 조금 짓궂어 보였다. 만족스러운 표정인 것 같기도 했다.
“실수라니?”
“왕녀를 사창가의 여인으로 오해했다고 하더군요. 왕녀가 더는 제국의 아카데미에서 공부하지 않겠다고 난리랍니다.”
“뭐라고?”
“제스티안을 한번 불러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국에 해가 되는 짓을 한 것 같으니까요. 제 측근들의 전언에 의하면 남부 왕국의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노발대발했다더군요.”
아스테인의 말에 황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외교 문제가 조금 크게 부각될 모양이었다.
“제스티안을 당장 불러들여!”
황제는 근처에 있던 자신의 시종장에게 큰 소리로 명했다.
조금은 분주해진 황제와 측근들의 모습을 나는 여유롭게 지켜봤다.
황제는 카렌시아의 말과는 달리 대응을 빠르고 정확하게 하고 있었다. 이건 미친 사람의 행동은 아니었다.
“그래, 아스테인. 제스티안이 친 사고를 알려줘서 고맙구나.”
“아닙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아스테인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황제의 얼굴에 거만한 미소가 돌았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곧, 내게 닿았다.
“그런데 프레이아.”
“말씀하세요.”
“황후의 아이는 건강하던가?”
“네. 다행히 초기의 고비를 잘 넘기셨네요. 제 당부도 잘 따르고 계셔서 무사히 순산할 것 같아요.”
황제는 내 대답에도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뭔가 못마땅한지 눈썹을 슬쩍 올렸다.
“그래, 그렇군. 역시 뭐든 할 수 있는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야.”
평범한 말인데 이상하게 비꼬는 것으로 들렸다.
그런데 갑자기 황제의 친위대 중 하나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 검이 겨누는 것은…… 나였다.
“이게 무슨 짓이죠?”
“폐하!”
“아아, 내가 프레이아를 죽이겠다는 뜻은 아니고 말이야.”
황제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냥 순수한 호기심이란 말이지. 성녀는 정말 자신을 치료할 수 있는지 없는지 말이야.”
이건, 유테르안의 수작일까?
“폐하!”
잔뜩 화난 아스테인은 방어구라 황궁 안에 반입이 가능했던 아이기스를 꺼내 들었다.
그건 비록 물리력을 막아내지는 못하지만, 황궁에서 검을 지닐 수 없었던 아스테인에게는 훌륭한 무기였다.
“성녀의 몸에 검 끝이라도 대는 자는, 데아 님의 저주를 받는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아스테인에게서 용기를 얻었다. 나는 목소리를 최대한 낮게 깔고 기사들을 노려봤다.
그러자 이번에는 황제가 미친 듯이 낄낄댔다.
“그래도 성녀의 몸에 직접 손을 대는 것은 불쌍한 내 친위대가 할 일은 아니겠지?”
이제야 술에서 깬 걸까?
“그러니 황후의 아이를 다치게 하는 건 어때? 네가 신성력을 쓰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어서 말이야.”
카렌시아의 말이 맞았다.
황제는 미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