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제스티안 세르펜스. 그가 어울리지 않게 빈민가를 가로질러 나타났다.
자신의 수하들을 줄줄이 이끌고.
그중에는 지난번에 리라를 괴롭혔던 사채업자도 끼어 있었다.
“오랜만이군요, 대공.”
“소문처럼 여전히 두 분은 함께이군요.”
노골적으로 우리를 엮으려고 했다.
불과 몇 달 전의 나였다면 이런 시선이 부담스러워 조금 회피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조금 더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
“당연한 것 아닌가요? 성녀가 가장 믿는 성기사에게 호위를 맡기지 누구에게 맡기겠어요?”
상큼한 대답에 세르펜스 대공은 비릿한 웃음으로 보답했다.
“아아, 그렇던가요? 그런데 이렇게 계속 음흉한 소문이 돌아서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모르십니까?”
“누가 소문을 냈는지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묻는 건가?”
아스테인이 대공에게 엄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러자 대공이 조금 삐딱하게 웃었다.
“제 입장에서는 형님이 결혼 동맹을 맺지 않고 이대로 지내는 쪽도 나쁘지 않죠.”
“아스테인 님이 신전의 힘을 빌리게 될까 봐 무서운 건 아니고요?”
이번에는 내가 조금 거만한 미소를 만들어서 보여줬다. 물론 더 강한 공격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물론 저는 아스테인 님께서 성기사를 관둔 뒤, 제게 힘을 빌리려 한다면 얼마든지 도울 생각이랍니다.”
그러자 세르펜스 대공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아스테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대공에게서 살짝 기분 나쁜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형님께서는 성심이 깊어 신전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었군요?”
아스테인을 비웃는 소리에 내가 발끈했다.
“대공. 아스테인 님을 모욕하려고 온 건가요?”
“설마요.”
“제스티안. 네가 비뚤어진 놈이라는 것을 증명하러 온 것이 아니라면 이만 비켜라.”
아스테인이 검에 손을 올렸다. 이에 맞춰 크리세우스와 성기사들도 언제든 검을 뽑기 위해 준비했다.
상대도 싸울 준비를 했다.
그러자 갑자기 빈민가의 아이들이 우르르 내 뒤에 섰다.
“우리 성녀님을 괴롭히지 마세요!”
“우리 성녀님을 지키는 대공님도 괴롭히지 말라고요!”
“카르헨 오빠랑 리라 언니를 또 괴롭히려고 온 거죠?”
아이들의 손에는 돌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세르펜스 대공에게 언제든지 던질 준비를 하고.
“더러운 것들이 어디서…….”
“우리 이제 안 더러워! 성녀님이 찾아준 신의 열매 덕분에 귀족님들보다도 깨끗하다고요!”
“그러게! 남의 것을 욕심내는 저런 귀족보다는 우리가 깨끗하지!”
“신의 열매를 뺏으려고 욕심내는 저런 사람은 성녀님의 적이야!”
아이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서 불쾌한 것을 찾아냈다.
내가 눈썹을 세우기 전에 아스테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공을 꾸짖었다.
“설마 성녀님이 선물한 신의 열매를 갈취하러 왔나?”
하긴 이들이 돈을 뜯을 구석도 없는 빈민가에 올 이유가 없었다.
조금씩 사업을 벌이고 있는 카르헨과 리라의 특별한 열매가 아니라면. 나는 아스테인의 도움을 받아 그 나무의 위치를 철저히 숨기고 있었다. 저런 욕심 많은 이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저는 그들과 사업 협상을 하려고 온 겁니다. 오해는 하지 마시지요.”
세르펜스 대공의 목소리는 뱀의 혀가 휘젓는 것처럼 들렸다. 소름 돋게도 가식적이고 위협적이었다.
“당신의 수하가 카르헨과 리라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잊었나요? 뻔뻔하군요.”
“‘사업이란 이익이 날 수 있다면 원수랑도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가 제 철칙이라서요.”
거짓말. 나는 그가 회귀 전에 어떤 식으로 돈을 벌었는지를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황제가 될 자격이 전혀 없었던 이 자의 만행을.
“나는 당신에게 신의 열매에 관한 일을 맡길 생각이 없으니, 그만 포기하세요.”
“성녀님께서 그리 말씀한다면야…….”
어쩐 일로 저 남자가 순순히 물러났다. 그게 이상한 불안감을 안겨줬다.
“아, 그런데 말입니다.”
무리를 이끌고 걸어가던 세르펜스 대공이 뒤를 돌아봤다.
“왜 성녀님은 신성력을 두고 매번 이상한 약초나 열매로 빈민들을 구제하십니까?”
정말 궁금하다는 눈빛이 아니었다. 어디가 급소인지 고민하는 뱀의 눈이었다.
“자립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거예요. 내가 항상 곁에 머물며 도와줄 수는 없으니까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이 빈민가 주변에는 벨라돈나라는 풀이 많다면서요?”
세르펜스 대공의 입은 분명 웃고 있는데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 풀이 다른 대륙에서는 마녀가 좋아하는 풀이라고 불리는데, 들어 보셨습니까?”
저건 분명, 봄에 있었던 일을 알고 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내가 성녀가 아니지 않냐는 의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소리였고.
“제스티안, 신성 모독으로 파문당하고 싶은 건가?”
“그냥 그렇다고요. 하하하하하하!”
세르펜스 대공은 불길한 웃음을 남기고 자신들의 수하를 데리고 사라졌다.
눈에 힘을 주고 그 모습을 노려봤다.
“와! 저 양심 없는 놈이 드디어 미쳤네요? 한동안 푸토르 후작이랑 가까이 지낸다 싶더니, 이상한 것만 배웠나?”
크리세우스가 사라진 이를 향해 손가락을 세운 뒤 내게 다가왔다.
다행히 그건 나만 본 것 같았다.
“후작과 그 이후로 접촉은 없었던 것 맞아?”
아스테인이 조금 예민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네, 맞습니다.”
나는 이게 푸토르 후작의 입에서 나온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후작은 계속 내 눈치를 살피며 기어 다녔다. 지금도 내게 잘못을 빌며 용서를 구하는 서찰을 매일같이 보내니까.
“후작이 아니라 소후작은요?”
“직접적인 만남은 없었습니다만, 대공이 후작의 저택에 몇 번 찾아간 것으로 압니다.”
“그때 헛소리를 떠들어댔나 보네요.”
“그 오징어 놈! 당장 버터를 발라 화덕에서 구워야 하는데! 그러면 비참하게 몸을 배배 꼬며 살려달라고 용서를 빌 거 아녜요!”
크리세우스가 팔을 꼬아가며 괴상한 묘사를 했다.
그러자 빈민가의 아이들이 마구 웃음을 터트렸다.
“크리세우스, 성기사의 체면이라는 것이 있다.”
“아, 네네. 죄송합니다.”
나는 이런 크리세우스가 좋았다.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라.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긍정의 기운을 줬다.
“그런데 벨라돈나 풀이 뭐야?”
“독버섯을 먹었을 때 치료해준 풀이었잖아.”
“아 맞다! 그런데 그걸 마녀가 좋아해? 성녀님이 추천한 풀인데?”
아이들의 대화가 조금 이상하게 흘러갔다.
나는 아이들을 조금 섭섭한 눈으로 봤다. 역시 내가 약초를 쓰는 일을 마녀의 짓으로 여길까?
그러면 조금 많이…… 서운할 것 같았다.
그때 아스테인이 나서줬다.
“마녀가 성녀님에게 감동해 착해졌나 보지.”
“와! 역시 성녀님이야!”
아이들이 격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응을 기다리는 동안 조금은 긴장했던 걸까? 손에서 땀이 약간 흘렀다.
조금은 안심해도 되는 거겠지? 나는 다시 손에 힘을 준 채,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얘들아…… 혹시 말이야.”
다시 긴장감이 찾아왔다.
“내가 신성력을 혹시라도 잃으면 말이야. 그래도 너희는 내가 필요할까?”
“물론이죠! 이미 신성력 없이도 저희를 잘살게 해주고 계시잖아요.”
“성녀님께서 신성력을 잃어서 혹시라도 신전에서 쫓겨나면 저희가 지켜드릴게요.”
“우리에게 성녀님은 성녀님뿐인걸요.”
나는 그 모습에 조금 울컥했다. 눈에 열감이 몰려왔다.
양쪽 눈동자에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
“울지 마세요.”
“저희는 성녀님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셨으니, 성녀님도 행복하셔야죠.”
“울면 저희도 슬퍼요.”
내가 잘해오고 있다는 확인을 이곳에서 받았다.
그리고 작은 응원은 덤이었다.
“대공님, 아니 잘생긴 성기사님을 뺏기지 말고 오래오래 함께 행복하게 사세요!”
* * *
빈민가를 다녀온 뒤, 아스테인은 성기사의 일을 하루 쉬겠다고 하고는 자신의 성으로 갔다.
말을 모는 그의 얼굴이 편치 않았다.
“이랴!”
평소보다 거칠게 말을 대하는 것이 낯설 정도였다.
“주군!”
그를 호위하기 위해 대공성에서 마중 나온 레프렌스는 아스테인을 따라잡는 것이 버거울 정도였다.
겨우 성에 도착하자마자 아스테인은 훌쩍 성안으로 들어갔다.
“주군! 오셨습니까?”
“어서 오십시오.”
다들 아스테인을 반겼지만, 아스테인의 얼굴에는 반가움이라고는 없었다.
프레이아 앞에서 불던 향기로운 봄바람은 어느새 거친 겨울바람이 되어 있었다.
그걸 보고 다들 슬쩍 발을 뒤로 뺐다.
“다들 모였나?”
“네, 주군.”
아스테인은 기사들을 확인한 후, 조금 날카롭게 물었다.
“프레이아 님과 내 관계에 관한 소문은 어찌 됐지?”
“일단은 다른 추문으로 덮었습니다.”
“그게 뭔데?”
“황제가 요즘 주색을 즐긴다는 소문으로 대처했습니다.”
아스테인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황후를 좋아하는 프레이아가 알면 불편해할 것 같았다.
“그거밖에 방법이 없었어?”
“그게 제일 효과가 빠른걸요? 분노 조절을 잘못해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다며 위협한다는 것보다 관심 끌기에도 좋습니다.”
누가 이 아이디어를 냈는지는 뻔했다.
크리세우스가 이 기회에 황제에게 작은 원한을 갚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소문은 잦아들었나?”
“네, 일단은요. 거기에 황제가 충실한 성기사를 신전에서 뺏어오려고 한다는 소문을 슬쩍 끼워 넣었습니다.”
“나중에 프레이아 님이 원할 때, 우리의 관계를 드러낼 수 있게 소문의 끈은 놓지 말도록.”
아스테인은 신이 뭐라고 했든 당장이라도 프레이아를 신전에서 빼내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비로 앉혀 놓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그녀를 원하고, 그녀 역시 신의 뜻을 받들고 싶어 하기에 아직은 참아야 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주 밑바닥에서부터 은밀히 흘리고 있으니까요.”
“황제의 건강에 이상은 없어?”
차라리 프레이아가 말했던 일이 빨리 이루어지길 바랐다.
그러면 모든 것이 빨리 끝나지 않을까?
“네, 아주 건강하답니다. 뭐, 가끔 술이 덜 깨서인지 걸음을 휘청일 때는 있다고 하네요. 얼굴은 늘 일그러져 있고요.”
“제스티안은?”
“신전에서 고리대금이 신의 뜻을 거스른 악이라고 발표한 뒤, 자금을 마련하는 일이 조금 힘에 부치나 보더라고요.”
“그들이 다른 사업에 손을 댈 때마다 방해해야 한다.”
아스테인의 말에 레프렌스가 조금은 비열하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요즘은 무역에 손대려고 하더군요.”
아스테인이 그 말에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
“큰 거래인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곧 윤곽이 드러나는 대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프레이아 님이 신경 쓰지 않도록 제대로 처리해.”
“네! 물론이죠. 그런데 아가씨는 참, 주군에게 잘 어울리는 분 같아요.”
레프렌스가 들떠서 웃었다. 그걸 보고 아스테인이 오늘 처음으로 웃었다.
“프레이아 님을 위한 소문은 잘 퍼지고 있어?”
“그때 신전에서의 일로 인테르의 위세가 많이 꺾이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그들이 잘 해내고 있습니다.”
아스테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인테르는 그들의 적이었다. 하지만 프레이아와 데아의 뜻을 누구보다 잘 전한 사람이 어쩌면 그들이었다.
그러니 신도 그들을 이용했던 것이고.
“좋아. 제대로 해. 그리고…… 황제가 내 짝이라며 들이미는 새로운 여자는 누구지?”
“어, 이번에는 저기 남부 왕국의 왕녀라던데요?”
아스테인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상대가 다른 나라의 왕녀라니, 조금 난감하게 되었다.
대공의 신분을 이용해 저지했던 귀족 영애들과는 달랐다. 왕녀만 나선다면 어찌 되겠지만, 만약 상대국의 왕까지 나선다면 일이 복잡해질지도 몰랐다.
“세르펜스 대공을 만나게 하는 건 어때요?”
“제스티안을?”
“네. 그 인간을 주군인 척 꼬여내서 만나게 만드는 거예요. 어차피 주군의 얼굴도 모르잖아요.”
“그러다 둘이 눈이라도 맞아서 왕국이 나중에 황위 다툼에 영향력을 행사하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냐는 듯한 아스테인의 말에 레프렌스가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게 나쁜 의견은 아니었다.
“뭐, 둘을 원수로 만든다면 나쁘지는 않겠군.”
아스테인이 조금은 잔인하게 웃었다.
저런 표정은 아스테인이 복수극을 벌이던 어린 시절 이후로 처음이었다.
레프렌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잘, 작업하겠습니다!”
잔뜩 예민한 얼굴의 아스테인은 다시 신전으로 돌아갔다.
하루 휴무로 빼달라고 했지만, 프레이아를 다른 이에게 마냥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껏 손을 잡을 수도 없고, 쳐다보고 웃어 줄 수도 없는 현실이 답답하기는 했다. 처음 신전에 왔을 때보다 더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어 가고 있으니까.
그래도 곁에서 그녀의 향을 독식하고 싶었다. 다른 기사가 아닌 그만이 그 향을 누릴 자격이 있었다.
“대공님, 처음 뵙습니다. 저는 딜레이트 백작가의…….”
“비켜.”
아스테인은 어제도 왔던 여인을 밀어내야 했다.
처음에는 그도 정중하게 여인들을 거절해왔다. 하지만 아스테인도 이제는 조금 한계에 부딪혔다.
특히나 지금처럼 바로 너머에 자신의 여인이 있을 때는.
“황제 폐하께 전해. 아무리 애를 써도 날 이곳 신전에서 밀어낼 수 없다고.”
암살자를 대하듯 조금은 살벌하게 내뱉었다.
그러자 영애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를 보냈다.
“아스테인 님!”
딜레이트 영애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목표를 쫓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자신에게 살벌했던 대공은 사라지고 순하고 정직한 성기사만 남아 있었다.
“아스테인 님, 황후 폐하께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요.”
프레이아의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
아스테인은 약간의 죄책감을 숨겨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