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성기사를 타락시킨 사람
나는 무례한 집사의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만남을 미리 허락받은 것도 아니면서 신전으로 찾아와 막무가내로 말을 쏟아내는 것이 보기 좋지 않았다.
“형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절 이용해서 이렇게 무례하게 들어오다니요?”
레무스가 뒤에서 자신의 형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집사는 그런 늦둥이 동생을 강하게 뿌리쳤다.
“내가 성녀님을 어찌 모셨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추문에 휩싸이게 한단 말입니까? 이러려고 성기사가 되고, 환심을 사려고 애썼습니까?”
집사는 막무가내로 아스테인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레무스가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 반응한 것은 크리세우스였다.
“이 집사가 드디어 맛이 갔나? 후작가에 있을 때 성녀님을 위해 뭘 했다고 이래? 갈 곳을 잃어서 대공령에서 거두어줬더니 배은망덕하게!”
“성녀님께 불명예를 가져다준 인간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소!”
“불명예라니, 무슨 헛소리야?”
“귀족들이 얼마나 수군대는지 몰라서 하는 말인가?”
크리세우스와 집사가 서로 목소리를 높였다.
레무스는 자신의 형 때문에 안절부절못하고 인상을 썼고.
셀레미온은 나와 아스테인의 사이를 들켰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아스테인은 태연했다.
“귀족들이 뭐라고 말하고 다닌다는 거지?”
그는 차분하게 집사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러자 집사가 아스테인을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쳐다봤다.
“황제 폐하가 대공에게 화해를 청했다면서요? 그리고 그 증거로써 황제파 귀족의 여인과 짝지어 주려는 것을 대공께서 거부했다 들었습니다.”
아스테인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뭐가 문제지? 나는 성기사로 남기 위해 폐하의 제안을 거부하는 것이다.”
아스테인이 단호하게 이야기하자 집사가 흥하고 콧바람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이 조금은 건방져 보였다.
어쨌든 아스테인은 여전히 대공인데.
“베이트만, 자네의 가문이 예비 성녀님을 위해 희생해 온 것을 알지만, 나는 이 제국의 대공이며, 자네가 살고 있는 곳의 주인이다.”
역시 아스테인이 위엄 있는 목소리로 그를 꾸짖었다. 그러자 베이트만이 나를 돌아봤다.
내가 자신의 편을 들어줄 거라고 믿은 걸까?
“아스테인 님의 말이 옳아요. 이분은 내 성기사이기도 하지만, 신의 징벌로부터 제국민을 구한 영웅이기도 한 걸요.”
나는 신의 회초리 때의 일을 상기시키며 집사를 꾸짖었다. 그러자 집사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대공성에서도 그렇고, 이렇게 계속 대공의 편을 드니 사람들이 두 분 사이를 오해하는 것 아닙니까?”
“도대체 누가, 뭐라고 오해한다는 거죠? 그들을 불러 벌을 내려야겠군요.”
“친분이 있던 딜레이트 백작가의 집사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미 사교계에는 두 분의 관계를 의심하는 소문이 파다하다고요.”
나는 이 소리에 크리세우스를 쳐다봤다.
이런 소문을 블루 로즈가 놓쳤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음, 성녀님께서 속상해하실까 봐 전해드리지 못했습니다만…… 사실입니다.”
크리세우스의 고백에 아스테인의 눈썹이 살짝 모였다. 그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소문의 근원은…… 황제 폐하겠군요?”
유테르안을 잠시 의심하기는 했다.
하지만 최근 사교계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아닐 것 같았다. 그랬다가는 푸토르 후작가가 사교계에서 매장될 것이다.
“아닙니다.”
“그러면요?”
“황제와 짜고 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밥맛 떨어지는 대공이요.”
“세르펜스 대공이요?”
나는 오랜만에 거론된 이름에 미간을 좁혔다.
아스테인의 얼굴도 편해 보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프레이아 님의 명성에 금이 갔군요.”
아스테인이 고개를 숙여 내게 사과했다.
나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단 아스테인과 나 사이를 부정해야 하니까.
게다가 모든 것이 아스테인 탓처럼 보이는 것이 싫었다.
“형님! 그만하고 돌아가십시오!”
내 얼굴이 점점 더 굳어질 무렵, 레무스가 나섰다.
집사를 밀어내는 그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단델리온 경은 누구보다 성녀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근심이 없게 모시는 성기사입니다. 왜 쓸데없는 분란을 만들려고 하십니까?”
“이게 다, 성녀님을 위한 일이다. 우리 베이트만 가문이 지금까지 성녀님들을 어떻게 지키고 모셔왔는데!”
“그게 성녀인 나를 무시하고 설칠 이유가 되나요?”
내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고 까칠하게 튀어나왔다.
레무스와 집사가 몸싸움하던 것을 멈출 만큼.
“정말로 성녀를 위한다면, 그런 소문을 듣고 나와 아스테인 님을 찾아와 따질 일이 아니지 않나요?”
내 대답에 옆에 있던 셀레미온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말을 한 자에게 신성 모독의 죄를 물었어야죠. 그게 정말 성녀를 위하는 대사제의 후예가 할 일 아닌가요?”
“옳습니다!”
크리세우스가 신나서 대답했다.
“제가 안 했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요. 했군요. 그런데 집사는 늘 내게 신뢰가 부족하군요.”
집사의 입술이 갑자기 정지됐다.
나는 그 모습을 조금 유쾌한 눈으로 봤다.
“참고로 내게 조언을 하고 내 부족함을 지적하고 가르치는 일을 할 사람은 여기 대사제인 레무스 님입니다. 사제가 되지 못한 집사님이 아니라요.”
나는 이제 조금 매정하다 싶은 얼굴로 집사를 끊어냈다.
집사는 내게 뭔가 항의를 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레무스가 손으로 입을 막아버려서 말을 내뱉지 못했다.
“신전은 신을 찾는 이들에게 자유로운 공간이지만, 그렇다고 아무 때나 찾아와서 행패를 부릴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에요. 베이트만, 집으로 돌아가서 자중하세요. 충직한 내 성기사를 모욕할 생각하지 말고.”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크리세우스가 신나게 집사의 팔을 붙들었다.
그리고 질질질 그를 끌고 나갔다.
레무스는 그런 자신의 형을 보며 안타까운 눈을 하면서도 항의하지 못했다. 이는 자업자득이니까.
집사가 사라진 뒤, 레무스가 내게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성녀님.”
“아니에요. 어쩔 수 없죠. 우리가 빌미를 제공했다고 생각해요.”
“하아……. 형님이 너무 맹목적으로 신을 믿다 보니…….”
“그래서 오히려 신의 진정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죠.”
레무스가 무슨 말이냐는 듯,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쳐다봤다.
나는 잠시 그를 쳐다보며 고민했다. 보통의 사제들과는 달랐던 레무스의 모습에 어쩌면 말이 통하는 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무스 님은 고행도 오래 했고, 신의 말씀을 깊이 공부했다고 들었어요.”
“네, 맞습니다.”
“그러면 신전의 여러 관행 중, 신께서 말씀하지 않은 부분들이 많다는 것을 아시겠네요?”
그가 눈을 잠시 찌푸렸다.
“예를 들면…… 성녀복 말씀입니까?”
잘 짚어낸 그의 모습에 내가 칭찬의 미소를 보냈다.
“네. 그런데 과연 그것뿐일까요?”
“글쎄요…….”
“저는 데아 님과 직접 만났었어요.”
“오오, 그런데 왜 공표하지 않은 겁니까? 이는 신전의 영광이자 성녀님의 위엄을 널리 알리는 일인 것을요.”
나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대신 그에게 데아 님의 말씀을 한 가지 전해줬다.
“데아 님은, 자신이 만들지 않은 수많은 제약을 이제 부수길 원해요.”
조금은 파격적인 내 말에 그가 눈을 빛냈다.
어디까지 내 말을 이해한 것인지, 나를 믿을지는 알 수 없었다.
“신의 말씀을 더 전해주실 수 없습니까?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데아 님과 내가 만났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믿어주고 있다는 것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슬쩍 눈꼬리를 휘어주었다.
“많죠. 심지어 이 세계에 관한 지식도 많이 알려주셨답니다.”
여기까지 말했는데, 이미 레무스의 눈이 초롱초롱 빛이 났다.
* * *
“하아, 힘들었다.”
성녀의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나는 마차를 타고 빈민가로 향했다.
마차 안에 있던 아스테인은 한숨을 쉬는 나를 조금은 안쓰럽게 바라봤다. 어쩌면 미안함 때문일 수도 있고.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제가 계속 신경 쓰일 일을 만들고 있군요.”
“황제가 아스테인 님을 내게서 떼 내려고 하는 거요?”
아스테인이 조금은 쓸쓸하게 웃었다.
사실 아스테인은 열심히 숨기고 있었지만, 셀레미온이 내게 전부 다 말해주고 있었다.
매일 신전으로 찾아와 아스테인 앞에서 쓰러지는 척하는 여자도 있었고 선물 공세를 하는 여자도 있었다.
아스테인의 숙소를 알아내 그 안에서 지키고 있었던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근처에는 늘 황제의 시종장이 있었고.
“제가 못난 탓에 이런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아니에요. 절 위해 신전에 머무르는 바람에 이런 귀찮은 일이 생긴 거잖아요. 아스테인 님과 제가 가깝지 않았다면, 황제가 이런 괴상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을 거예요.”
새삼스럽게 옹졸하고 유치한 황제가 얄미워졌다.
“일단 크리세우스에게 다른 소문을 퍼트려 이 소문을 잠재우라고 했습니다.”
“어떤 소문이요?”
“글쎄요, 그건 크리세우스가 열심히 고민할 겁니다. 좀 더 주목받을 소문이 되겠죠.”
뭔가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생겼다.
회귀 전, 크리세우스가 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황제의 소문 때문에.
“아스테인 님. 황제가 될 준비는 잘되고 있는 거죠?”
조금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스테인이 내 곁에 있는 것은 너무 좋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대공성의 핵심 인물 둘이 모두 신전에 있다 보니 걱정됐다.
“영지민인 척하고 사는 기사들은 착실히 힘을 쌓고 있습니다. 금전적인 부분도 블루 로즈가 잘 해결하고 있고요.”
조금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봤다. 설마 또 나쁜 짓으로 돈을 벌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걱정 마십시오. 요즘은 합법적인 용병으로서 돈을 버니까요. 게다가 블루 로즈가 운영하는 상단도 잘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블루 로즈가 하는 일이 많구나.
“본격적인 여론전은 조금 더 있다가 시작하려고 했는데…… 제스티안이 저지르는 짓을 보니 저희도 제대로 해야겠습니다.”
“조금 웃기네요. 그도 황위를 노리는 것 같은데 굳이 저와 아스테인 님을 자극하다니…….”
“일단 경쟁자는 치기 쉬울 때 쳐내야 하니까요. 그리고 제 평판을 깎는 것이 경쟁에서 앞서는 길이니까요.”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자였다.
“크리세우스 님이 반박 소문을 잘 내면 좋을 텐데 말이에요.”
“너무 그 녀석을 믿지는 마십시오.”
아스테인의 질투 아닌 질투에 작게 웃었다.
이럴 때면 표나지 않게 부풀어 오른 아스테인의 볼을 잡고 싶어졌다.
그 욕망이 너무 누적된 탓일까?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아스테인 님은 이럴 때마다 너무 귀여워요.”
그의 단단한 가슴 근육과는 달리 말랑말랑한 볼을 여러 번 쓰다듬었다.
그러자 아스테인이 약간의 신음을 냈다.
“이러면 위험합니다.”
“왜요?”
“사실 요즘 사람들이 너무 저를 주목하여 최대한 자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스테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최근 나와 마차를 타지도 않았고, 셀레미온과 크리세우스가 없으면 내 방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심지어 두 사람이 망을 봐줄 때도 마음껏 애정표현을 해주지 않았다.
“음…… 저도 많이 참았거든요?”
조금은 삐쭉거리면서 대답했다. 그리고 당당하게 외쳤다.
“밖에는 크리세우스 님이 계시고 갈 길이 머네요?”
“그래서요?”
“참지 않아도 돼요.”
나는 맑게 웃으면서 이야기했지만, 아스테인의 눈은 욕망으로 탁해졌다.
“절 유혹하시는 겁니까?”
“저 말고는 누구도 잘생긴 성기사님을 유혹해 타락시킬 사람이 없을걸요?”
조금 장난스러운 대답이 끝나자마자 아스테인이 내 쪽으로 건너왔다.
그는 마차 벽으로 날 밀어붙였다. 그러자 나는 그의 양팔에 완전히 갇혔다. 전혀 도망갈 틈 같은 것은 없었다.
단단한 그의 팔 근육은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내가 흔들리지 않게 고정해줬다. 그리고 빙그레 올라간 입꼬리는 내 숨을 삼켰다.
깊고, 길게, 달콤함이 오래가도록.
나는 이 시간이 좋았다. 나만이 이 반듯한 성기사님이 흐트러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으니까.
“남들은 모르는 프레이아 님의 모습을 저만 볼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건 아스테인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스테인에게 더 깊게 매달렸다.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모두에게 알리고 싶을 만큼.
* * *
잠시 후, 우리는 마차에서 내렸다. 물론, 겉모습은 누구보다 반듯하고 정갈한 성녀와 성기사의 모습이었다.
크리세우스는 그런 우리를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다 물었다.
“그런데 오늘 또 오자고 하신 이유가 뭔가요?”
“이제 무더위가 막바지잖아요. 전염병이 돌지 않는지 잘 점검하려고요.”
빈민가에 또 찾아온 나를 보고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다들 예전보다 훨씬 깔끔한 모습이었다.
“예전에 성녀님들은 이런 일에 직접 나서지 않았다던데요. 우리 성녀님은 역시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이 남다르다니까.”
크리세우스가 보란 듯이 나를 추켜세웠다.
빈민가에서 나를 믿는 아이들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런데 아이들이 갑자기 아스테인을 향해 돌아섰다.
“대공님! 대공님이 제국에서 제일 검을 잘 쓴다면서요?”
“글쎄, 나는 살아남기 위해 검을 휘두른 것뿐이라, 나보다 더 강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
“강한 거 맞네요? 우리 성녀님만 지키게 다른 여자랑 결혼하지 마세요.”
나는 아이들의 모습에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크리세우스도, 아스테인도 다 함께 유쾌하게 웃었다.
“그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빈민가에서 봉사는커녕, 착취하지 않으면 다행인 사람이 나타나서.
“오랜만입니다. 성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