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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71화 (71/101)

71화. 무릎 빌리러 왔습니다

신전으로 돌아온 나는 긴장감에 몸이 조금 뻣뻣해졌다.

“아가씨, 오늘 힘들었어요? 근육이 왜 이렇게 굳었어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목욕을 돕던 셀레미온이 연신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애써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손을 물에 계속 담갔다가 빼기를 반복하며.

“자, 다 됐어요.”

셀레미온까지 떠나고 혼자 방에 남았다. 너무 조용해서 내 심장 소리가 유달리 크게 느껴졌다.

진정도 할 겸 창가에 커튼을 닫으러 갔다.

“아…… 그림자!”

뒤늦게 깨달았다. 그림자가 방 안의 일을 알려줄 수 있다.

나는 다급히 방에 켜둔 마지막 등불을 껐다.

그리고 이어진 기다림.

잔뜩 긴장한 채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어둠이 얼마나 짙어졌을까? 순찰을 도는 성기사들의 발소리도 들렸다.

그것이 멀어지고 난 뒤, 방문이 슬쩍 열렸다.

“프레이아 님?”

내 이름을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에 다시 몸이 굳었다.

“벌써 주무시는 건, 아니지요?”

“아, 아니에요.”

문을 조심스럽게 닫은 아스테인이 곁으로 왔다.

침대에 앉은 나는 그대로 뻣뻣하게 굳은 채로 그를 계속 기다렸다.

“무릎 빌리러 왔습니다.”

“알고 있어요.”

달빛조차 들지 않아 아스테인의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잔뜩 긴장한 나와는 달리 그는 표정에 변함이 없을 것 같았다.

“누워도 되겠습니까?”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도 그는 알아들었다. 무릎에 그의 머리가 얹어지는 무게감이 느껴졌으니까.

“달콤한 향이 납니다.”

“아스테인 님도요.”

“정말 편하군요. 진작에 이렇게 쉴 걸 그랬습니다.”

“그러게요.”

조금 긴장된 나는 다리에 힘을 줬다.

“불편하십니까?”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제 머리를 만져주시면 안 됩니까?”

그의 말에 따라 손을 얹어줬다. 그리고 살살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보드랍고 매끄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얽히는 느낌이 좋았다. 이래서 아스테인이 종종 내 머리를 만지는구나.

그런데 어느 순간, 아스테인의 목소리가 끊겼다. 대신 고른 숨소리가 퍼졌다.

“주무세요?”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덕분에 나는 난감해졌다. 침대에 기대 앉아 있어 힘들지는 않았지만. 그가 깨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길 기다려야 할까?

한참을 기다리다 나도 깜박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결일까? 어제 빈민가에서처럼 양팔이 나를 단단히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코에는 달콤한 라일락 향이 가득 번졌고.

무엇보다, 따스하고 안락했다.

태어나서 가장 편안한 잠자리였다.

그것도 신전의 지붕 아래에서.

* * *

다음 날 아침, 신전엔 엄숙한 침묵이 흘렀다.

선대 성녀를 암살했다고 자백한 자들과 현 성녀를 암살하려고 한 자가 한곳에 모여 심문을 받아야 했으니.

나는 공녀를 엄한 눈으로 노려봤다.

“파미르 공녀, 도대체 어제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인 거죠?”

“…….”

“공녀, 누가 이런 일을 사주했는지 말해요. 그러면 당신의 죄를 용서할 수도 있어요.”

부디 유테르안을 걸고 넘어가 주길 바라며 물었다.

그녀가 잡혀가는 것을 보고도 외면한 유테르안에게 실망하길 바랐다.

“아니요. 나 혼자 한 짓이에요. 그저 아스테인 님을 연모해서 내 남자로 만들려고 한 것밖에 없어요.”

“공녀!”

공녀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공녀가 너무 안타까웠다. 유테르안은 과연 헌신과 희생을 받을 만한 인물일까?

조금 더 기다려 봤지만 끝내 공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두 명의 기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선대 성녀님이 당한 독과 푸토르 후작가에서 보유하는 독이 같은 성분인 걸 확인했어요.”

“사, 살려주십시오.”

“이미 지은 죄로 모자라 성녀님을 죽였으면서 감히 살려달라고?”

내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차분하게 말한다고 했는데도 분노로 목소리가 조금 떨리기까지 했다.

“성녀님을 암살한 죄는 네놈들만의 죄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저지른 거겠지?”

뒤에 있던 레무스가 외쳤다. 당장이라도 죄인들의 목을 조르려는 험악한 대사제를 아스테인과 크리세우스가 말려야 했다.

“이 사제님, 왜 이래요? 평소답지 않게?”

크리세우스가 레무스를 끌어안고 말리느라 고생했다.

“성녀님. 저들의 가족들까지 파문하고 검은 날개의 인장을 찍어 그 죄를 물어야 합니다!”

레무스의 말에 기사들이 고개를 들었다.

“초대 성녀님께 위해를 가하려다 잡힌 이들의 가족에게 내려졌던 형벌입니다. 그러니 파미르 공녀와 저 기사들의 가족들도 함께 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기사들의 눈이 커졌다.

거짓 자백의 대가는 역시 가족이었구나. 크게 동요하는 것이 보였다.

“가, 가족들은 죄가 없습니다. 저희는 그저 시키는…….”

“당신들, 순간이동 스크롤을 샀었잖아요.”

말을 가로막은 쪽으로 기사들이 돌아보자 공녀가 피식 웃었다.

“아카데미에서 배운 것을 실습할 겸 다니던 공방에서 저들이 순간이동 스크롤을 사는 걸 봤어요.”

이미 크리세우스에게 정보는 들었다. 공녀가 마법에 손을 댄 것 같다고.

“그때 당신들이 떠들어 댔잖아요. 그 허접한 스크롤로 액체 한 방울만 옮기면 된다고, 아닌가요?”

공녀는 조금 전까지 침울했던 기운을 숨기고 형형한 눈빛을 한 채 대답했다.

“아닙니다. 억울합니다. 그것도 그저…….”

“증거를 보여줘요? 당신들이 그걸 사면서 받은 영수증이 있을 텐데요? 직접 서명한 영수증 말이죠.”

공녀는 이제 사납게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기사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사실인 것 같았다.

“단델리온 경, 그 증거는 파미르 공작가의 내 방 책상 첫 번째 서랍에 있답니다.”

당당한 공녀의 태도에 아스테인과 크리세우스가 눈을 마주쳤다.

그때, 신전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파미르 공작이 성녀님을 뵙습니다.”

그가 들어오자 공녀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녀는 공작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려버렸다.

내 앞으로 다가온 공작은 무릎부터 꿇었다. 그리고 봉투에 든 서류를 내밀었다.

“이 아이가 말한 증거입니다.”

내가 그것을 받고 증거를 확인하자 공작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제가 딸을 잘못 키웠습니다. 딸에게 너무 많은 부담을 지워 비뚤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 책임은 제가 모두 질 터이니 부디, 제 딸을 용서해주십시오.”

* * *

“표정이 어둡습니다.”

이제 녹음이 한층 더 푸르러진 정원을 산책하는데 아스테인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부러웠나 봐요.”

“공녀가 말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스테인이 살짝 안쓰럽다는 듯이 코를 찡그렸다.

“양녀인데도 친자식보다 더 아껴주는 공작의 모습이 부러웠던 것 같아요.”

후작과 나와는 다른 부녀지간이 부러웠다.

그래도 후작 부인께서 날 챙겼다고는 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가끔 성녀님께서 날 딸처럼 대하셨던 것과도 달랐다.

“제가 더 아껴드리는 것으로는 마음의 허전함을 채우기는 힘들겠지요?”

주변에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서 아스테인이 작게 속삭였다.

나는 눈을 빙그레 휘어줄 수밖에 없었다.

“아니에요. 충분해요. 아니, 넘칠 만큼인걸요.”

아스테인도 눈꼬리를 예쁘게 말아주었다.

“그런데 겁이 조금 나기는 해요.”

“뭐가 말입니까?”

“후작 같은 아버지의 밑에서 자란 제가 과연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지요.”

대답하고 보니 아차 싶었다. 귓가가 붉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주변에 사람이 여전히 없었다.

“제게 청혼하시는 것으로 들리는군요.”

아스테인이 저런 부끄럽고 짓궂은 말도 마음껏 할 만큼.

내가 얼굴을 잔뜩 붉힌 다음 고개를 돌리자 그가 뒤에서 작게 웃었다. 시원한 봄날의 웃음소리처럼.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 웃었다.

하지만 이내 주변에 나타난 사람들 때문에 표정을 지웠다.

“그들을 어찌 처분할 생각입니까?”

아스테인의 질문에 불길한 생각은 떨쳤다.

“기사들이요. 증거가 조작됐거나, 그들이 누군가에게 이용됐을 것 같지 않아요?”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분명 그들이 원해서 한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아스테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도 증인도 없었다. 안타깝게도 공녀는 이제 전혀 입을 열지 않았으니까.

“이대로 소후작과의 연관성을 찾지 못할까 봐 걱정이네요.”

“인테르와의 약속 때문에 저들에게 죗값을 무는 일을 마냥 미루기도 힘드니 난감하군요.”

오늘 아침, 지금까지 죄를 지은 대사제들이 단체로 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이들의 처분은 아직이라, 인테르의 새 수장이 된 노파가 찾아왔다.

사정을 설명했지만, 기다리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런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소후작의 지시와 관계없이 죄를 지은 자들이니 일단 형을 집행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내가 결심을 전하자 아스테인이 고개를 끄덕여줬다.

언제나처럼 그는 내 결정을 지지해주었다. 그게 늘 안심이 되었다.

“소후작이 이리저리 피해가고 있지만, 결국에는 또 다른 죄를 지어 꼬리를 밟힐 거라 믿습니다.”

“저도 그래서 이번에는 넘어가려고요. 언제까지 벌을 피할 수는 없겠죠.”

아스테인이 은은하게 웃어주었다. 날 칭찬이라도 하듯이.

“성녀님!”

그때 레무스가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선대 성녀님을 암살한 자들은 어찌할 생각입니까?”

나는 아스테인과 의논한 결과를 알려줬다.

“공녀는요?”

“애매하네요. 사실 그녀가 노린 건 내가 아니라 옆에 있는 아스테인 님이라서요.”

조금은 난감해져 눈을 찡그린 채, 후작가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해줬다.

그러자 레무스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치정 사건이었습니까? 성녀님에게서 단델리온 경을 뺏기 위해서요?”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러자 뒤에서 아스테인이 헛기침을 했다.

“대사제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성녀님께서 치정 사건에 연루된 당사자가 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네요.”

“아스테인 님보다는 푸토르 소후작을 위해 움직인 것 같아요.”

공작은 내게 파미르 공녀의 일기장을 보여줬다.

예비 성녀가 되지 못한 뒤, 열등감으로 마법에 손을 댄 일.

연모하게 된 이가 내게 집착하는 모습에 또 한 번 열등감이 폭발한 일.

그걸 교묘히 건드린 황제의 요구까지.

그걸 듣는 레무스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런…….”

“공녀가 밉긴 하지만, 공작의 태도 때문에 조금 난감하네요.”

“공작의 부성이 남다르긴 하더군요.”

파미르 공작은 공녀를 위해 모든 재산을 신전에 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공녀를 용서할 생각입니까?”

“그건 아스테인 님이 결정할 일인 것 같아요.”

나는 피해를 본 당사자가 아니니까.

“저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제가 막아서는 것이 늦었다면 프레이아 님께서 화를 입었을 겁니다.”

아스테인의 눈에서 잠깐 불이 튀는 느낌이었다. 그걸 지켜보는 내 마음에는 따뜻한 기운이 채워졌다.

헛헛했던 마음은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파미르 공작에게 빚을 지우고 싶어요.”

아스테인을 보고 말했다. 이건 신전을 위한 결정이 아니었다.

머지않은 미래의 아스테인을 위한 결심이었다.

“프레이아 님.”

“공작의 재산보다 가치 있는 것들을 얻어내요.”

이번에도 아스테인은 내 뜻을 따라주었다.

공녀는 지방에 있는 신전의 탑에 유폐되었다. 공작 이외의 사람과는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공작은 지속적으로 그녀를 교육하기로 했다.

이것이 잘 지켜지는지는 블루 로즈가 은밀히 감시하기로 했다.

* * *

그 이후로 몇 달은 평화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일단 후작가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사라졌다. 푸토르 후작가의 기사가 선대 성녀를 죽였다는 사실은 가문의 불명예였다.

“남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는데도 그 죄를 벗어나지 못했네요.”

크리세우스가 고소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번에는 자숙할 수밖에 없겠죠. 계속 날 찾아와서 용서를 비는 척, 괴롭혔다가는 또 엄청난 소문이 날 테니까요.”

내 말에 크리세우스의 어깨가 살짝 올라갔다.

나는 그걸 보고 작게 웃으면서 칭찬해줬다.

“다, 블루 로즈가 여론을 만들어준 덕분이에요.”

“그렇게 칭찬해주시니 이 녀석의 콧대가 높아지는 겁니다.”

아스테인이 타박했다.

하지만 크리세우스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제 주인을 놀렸다.

“황제가 계속 주군에게 여자를 붙이려고 하는 건 괜찮아요?”

아스테인은 애써 그 사실을 숨기려 했다. 내가 마음을 쓸까 봐.

하지만 모를 수가 없었다.

빈민가에조차 잘생긴 성기사에게 반한 아가씨들이 신전을 드나든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으니.

“아 진짜, 그 황제는 왜 그런대요? 우리 대공님은 아가씨 외의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는데!”

셀레미온이 찻잔을 내려주면서 신경질적으로 이야기했다.

그게 부끄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여기 있는 사람들만큼은 내 사랑을 인정해주니까.

“크리세우스 님! 황제 폐하의 약점은 못 잡았어요? 그런 일에서는 대륙 최고라면서요!”

셀레미온이 날카롭게 묻자, 크리세우스가 뒤로 물러섰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지만…….”

“그럼 빨리 말해 봐요!”

“황궁의 상황은 어떻지?”

마침 아스테인이 궁금했는지 크리세우스에게 물었다.

“황후 폐하는 그때 이후로 별 탈 없이 태교에 전념하고 있다고 합니다.”

크리세우스의 말투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황제는 뭐, 여기저기 귀족들과 어울려 술이나 먹으면서 연회를 즐긴다더군요. 그런데 평소보다 화도 잘 내고, 괜한 의심으로 죽이겠다며 시비를 걸고 그런다고는 합니다만, 원래 그러던 사람이라…….”

“어머, 제국 최고의 정보원이라더니 별로 신통찮네요.”

셀레미온이 살짝 비꼬듯이 말하자 크리세우스가 반발하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때, 방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성녀님! 접니다.”

레무스의 목소리였다.

“들어와요.”

그런데 밀고 들어온 것은 레무스가 아닌 집사였다.

인사를 마친 그는 아스테인을 노려보며 외쳤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소리입니까? 성기사와 성녀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 성기사가 황제의 중매를 거부한다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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