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70화 (70/101)

70화. 내가 더 참을 수 없어요

크리세우스가 셀레미온을 데리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물을 끼얹던 아스테인이 나를 발견했다. 시선이 맞부딪히는 순간, 나는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어 숙여버렸다.

“저기……! 죄송해요!”

그의 벗은 몸을 보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래도 옷으로 조금은 가려졌었다.

이렇게 완전히 벗은 것은 처음이었다.

더는 물을 끼얹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돌아가지도 못하고,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서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물론 귓가가 붉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너무 뜨거워서 물도 끓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절 데리러 오신 겁니까?”

아스테인이 내 앞으로 왔다.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데도 그의 상체가 보였다.

특히 단단하게 갈라져 있는 복근이 보송보송해져 있었다.

결국, 나는 빠른 속도로 뒤돌아서야 했다. 그러자 뒤에서 잘게 웃음이 쏟아졌다.

“큰일입니다.”

“네? 뭐가요?”

큰일이라면서 아스테인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전혀 큰일처럼 들리지 않았다.

“1년여 후에 모든 일이 해결되고, 제 부인이 되시면 그때는 어쩌려고요? 그때도 제 몸을 보지 않을 생각입니까?”

부인이라는 말에서 다시 열이 올랐다. 아스테인의 부인이라니,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다.

“부, 부인이요?”

“네. 한 침대에서 같이 아침을 맞이할 제 반려 말입니다.”

계속되는 낯선 단어들 때문에 고개가 더 숙여졌다. 빨개진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프레이아 님, 계속 절 보지 않을 생각입니까?”

“그게, 저는 그냥…… 여름이지만 우물물은 차갑잖아요. 혹시 감기에 걸리실까 봐 따뜻한 감자 수프를 가져온 거라서요.”

“프레이아 님의 손에는 감자 수프가 없는걸요?”

“셀레미온이 들고 따라왔다가 그, 아스테인 님이 버, 벗고 계시니까 크리세우스 님과 도, 돌아갔어요.”

왜 말을 이렇게 더듬는지 모르겠다.

나는 계속 꼬이는 말에 또 고개를 숙였다. 이러다가 바닥과 얼굴이 만날까 봐 걱정될 정도였다.

“그렇군요.”

잔뜩 긴장한 나와는 달리 아스테인의 목소리는 여유로웠다.

심지어…….

“아, 아스테인 님?”

뒤에서 날 끌어안기까지 했다.

돌아오는 마차에서 바른 자세로 버텼던 사람이 맞나 싶었다. 게다가 몸에 물기는 닦았어도 아직 상체는 벗은 그대로였다.

당황한 내가 살짝 버둥거리려 하자 그의 매끄러운 팔은 날 꼼짝하지 못하게 힘을 줬다.

“참느라 힘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잘 참으셨으면서…… 누가 오면 어쩌려고요.”

내가 수줍게 말하자 그가 내 빨개진 귀에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크리세우스와 셀레미온 양이 지키고 있으면 괜찮을 겁니다.”

“아까도…… 그들이 밖에 있었는걸요.”

“지금은 제가 젖지 않았고 몸에 독이 남아 있지도 않으니까요.”

“그래도…….”

“제가 이러고 있는 게 싫습니까?”

등에서 아스테인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쩌면 이건 내 심장이 뛰는 소리일 수도.

“솔직히 겁이 났습니다.”

아스테인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다. 심각한 그의 목소리에 나는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왜요? 혹시 공녀가 이상한 짓을 한 거예요?”

“크리세우스에게 들어 황제가 파미르 공녀를 이용하려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황궁에서 태연해 보였던 게 그 이유였군요?”

조금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나만 처음부터 계속 긴장하고 있었나 싶었다. 미리 알려줬으면 심란하지 않았을 텐데.

“미리 말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내 마음을 눈치챈 걸까? 아주 살짝 부풀어 오르려던 볼 옆에 그의 뺨이 닿았다.

그러자 평소와는 뭔가 다른 아스테인의 향기가 코끝에 스며들었다.

달콤한 라일락 향과는 달랐다. 조금 더 거칠지만 뭔가 내 속을 울렁이게 만드는 향.

“괜찮아요.”

빠르게 대답하고는 숨을 들이마셨다. 편하게 호흡하다가는 이곳이 언제든 사람이 들이닥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것 같아서.

내 말을 들은 아스테인은 조금 더 편하게 내게 기대어 말을 꺼냈다.

“말씀드리면 신경 쓰실까 봐 혼자 해결하려고 공작과 접촉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아스테인 님을 걱정하는 게 싫으세요?”

“아니요. 당연히 제 걱정을 해주는 건 좋지요. 다만, 다른 여자 때문에 속이 상하시는 건 싫었습니다.”

나는 아스테인의 팔에 살짝 턱을 올려놓았다. 그가 나를 걱정해주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속이 따뜻해졌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앞으로는 고민을 함께 나눠주셨으면 해요. 그러면 오늘처럼 바보같이 후작가에 가서 아스테인 님을 위기에 빠트리는 실수는 안 하잖아요.”

나는 손을 들어 아스테인의 팔을 쓰다듬었다. 매끈한 피부가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이 좋았다. 계속 만져보고 싶을 만큼.

“함정에 발을 담가야 잡을 수 있다고 한 것은 저였습니다.”

아스테인은 단 한 번도 내 탓을 하지 않았다.

“공녀가 뿌렸던 물이 독이라는 것을 자각한 순간부터 무서웠습니다. 제가 잠깐이라도 움직이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아스테인 님같이 용감한 사람도 무서운 게 있나요?”

내 질문에 아스테인이 봄바람같이 웃었다.

“이대로 죽어서 프레이아 님이 또 슬퍼하면 어쩌나. 혹시라도 공녀의 계획에 넘어가 프레이아 님께 오해받으면 어쩌나 너무 괴로웠습니다.”

태연해 보였던, 늘 흔들리지 않을 건 같았던 나의 기사님도 약할 때가 있었다.

나는 아스테인의 팔을 느릿하게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하지만 아스테인 님은 버텨냈잖아요.”

“제가 힘없는 사람이라 도움이 되지 못하고 짐이 되고 마는 건가, 잠시 고민도 했습니다.”

“저랑 같은 고민을 하셨네요.”

그게 조금은 반가워서 웃었다.

그랬더니 아스테인의 팔에 힘줄이 솟는 게 토닥이던 손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조금은 편해진 나와 달리 지금은 아스테인이 긴장한 걸까?

“무엇보다 오늘 힘들었던 건, 프레이아 님이 제게 어깨를 빌려주는 데도 마음껏 기댈 수 없었던 겁니다.”

“편하게 기대라고 했었잖아요.”

그 말에 아스테인의 맞닿은 뺨이 살짝 떨렸다. 웃음을 터트린 아스테인이 탄식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하지만 참아야 하니까요. 남들 앞에서 우리는 성녀와 성기사니까요.”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어도 힘들었나 보다. 나는 늘 우리를 의심하는 사람들을 능청스럽게 밀어내는 아스테인을 존경했는데.

그래도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아스테인이 싫지 않았다. 나와 닮은 구석이 많아서 이렇게 우리가 잘 통하는 거겠지?

“그래도 우리는 신이 허락한 사이잖아요.”

나는 내가 얻었던 깨달음을 그에게 전했다.

그렇기에 신이 머물고 계신 신전에서는 오히려 참지 않아도 됐다. 사람들만 없다면 마음껏 애정 표현을 할 수 있었고,

“그러니 사람들이 어떤 시선으로 보든 우리 힘들어하지 말아요.”

“음…….”

아스테인이 약간의 신음을 흘렸다. 그는 힘을 주고 있던 팔을 풀고 내 앞으로 왔다.

나는 적응되지 않는 그의 상체에 얼굴을 슬쩍 돌렸다.

“제가 참을 수 없이 괴로웠던 건…… 프레이아 님이 기대어 쉬라고 했을 때 무릎에 눕지 못한 겁니다.”

“네?”

“옷이 젖을까 봐, 혹시라도 잠든 제가 도착할 때까지 깨지 못할까 봐 걱정됐습니다. 그런 저 때문에 프레이아 님이 괜한 구설에 휘말릴까 두려웠습니다.”

나는 돌아갔던 고개를 제자리로 돌렸다. 이제는 내가 참을 수가 없었으니까.

내가 눈을 맞추자 아스테인은 보름달 속에서 환히 웃어 보였다. 달빛은 사랑하는 사람의 미소를 더욱 찬란하게 만들어줬다.

“상을 준다 약속하지 않으셨다면, 당장 사고를 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용케…… 잘 참으셨네요.”

“그래서 말입니다. 주기로 하셨던 상, 오늘 밤에 받으러 가도 됩니까?”

나는 아스테인의 미소에 홀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요?”

뭐든 들어주고 싶었다. 아니, 그가 원하는 것이 없더라도 다 해주고 싶었다.

그에게 먼지보다 작은 욕망이 있다면 그것을 찾아서라도 다 이루어주고 싶었다.

“오늘 밤에 프레이아 님의 무릎에서 잠들어도 됩니까?”

“아스테인 님, 이러면 내가 참을 수가 없어지잖아요.”

이번에는 내가 아스테인을 끌어안을 차례였다.

* * *

깨끗한 옷을 다시 갖춰 입은 아스테인과 나는 다시 빈민가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만난 셀레미온이 아스테인에게 아직 따뜻한 감자 수프를 전해줬다. 그는 그것을 기분 좋게 한 그릇 뚝딱 먹어 치웠다.

“대공님께서 배가 고프셨나 봐요.”

“기분이 좋아서 그런 거란다.”

“왜요?”

셀레미온이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나는 작게 헛기침을 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셀레미온 양, 눈치가 없네.”

“네?”

크리세우스의 타박에 셀레미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밤에 젊은 남녀가 단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면서 뭘 했을 것 같아요? 배도 고플 만큼?”

“글쎄요, 술래잡기?”

“푸하하! 진짜 순진하네, 이 아가씨.”

크리세우스가 신나게 웃자 셀레미온이 볼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었다. 그가 또 뭔가 한마디를 하려고 하자 아스테인이 근엄하게 이름을 불렀다.

“크리세우스.”

“흡. 죄송합니다.”

아스테인의 잔소리가 듣기 싫었던 기사는 빠르게 아이들 쪽으로 뛰어갔다.

“성녀님! 저희가 보여드릴 게 있어요!”

아이들은 내가 다시 보이자 애타게 나를 불렀다. 몇몇은 달려와서 내 팔을 끌어 데려갔다.

“뭔데?”

“여기 봐주세요.”

그들이 날 데리고 간 곳은 작은 밭이었다. 그리고 그 밭에 심어진 것은 식량이 아니었다.

“약초들이네?”

“네! 성녀님께서 예전에 알려주신 상비약을 만들려고 저희가 산에서 캐서 다 옮겨 심었어요!”

나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성녀라면서 도와줄 것이 고작 이런 것밖에 없었는데……. 아이들은 이런 나를 너무 좋아해 줬다.

“아이, 저희 더러운데 그렇게 예쁜 옷을 입고 머리 만지다가 더러워지세요.”

“야, 네 입으로 더럽다고 말하기 그렇지 않아?”

“내 눈에는 너희가 전혀 더러워 보이지 않는데? 그리고 더러우면 씻으면 되지.”

내 말에 아이들이 까르르 웃었다. 눈에는 여전히 칭찬의 쓰다듬을 받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정말 자신들이 더럽다고 생각해서인지 선뜻 내게 다가오지 않으려고 했다.

성기사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 그들이 아까 냄새 때문에 코를 찡그린 것을 본 모양이었다.

“저희는 귀족님들이 쓰는 향유 같은 것이 없어서요. 깨끗이 씻을 수가 없는걸요?”

“옷이야 양잿물로 씻지만, 그걸로 몸을 씻으면 피부가 상한댔어요.”

나는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 하긴, 빈민가나 평민 아이들이 귀족보다 더러운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음, 흔한 나무는 아니지만…… 이 근처에서 봤던 나무가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나는 예전에 데아 님이 내게 화살을 쐈던 장소로 갔다.

화살이 박혔던 나무에는 초록색의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이 열매를 깨서 물에 풀면 거품이 날 거야.”

“거품요?”

“그래, 그걸로 씻으면 더러운 것이 잘 빠지고, 피부에도 좋아. 상처 났을 때 이걸로 씻으면 곪는 것도 막는단다.”

아이들은 내 말에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들을 따라온 리라도 신기하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성녀님께서는 모르는 것이 없어요. 다 데아 님께서 일러 주신 건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랍니다.”

“신성력이 없어도 그런 게 다 가능하다니. 대단한데요?”

리라의 눈빛에는 나를 향한 존경심이 가득했다. 그 옆에 선 그녀의 약혼자도 마찬가지였고.

그는 아스테인의 도움을 받아 고리대금 업자에게서 벗어난 뒤, 우리를 조금 우러러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사업을 하려던 카르헨을 보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걸로 장사해보는 거 어떨까요?”

“장사요?”

“내가 알려준 거라고 하고 팔아 봐요. 대신 수익은 빈민가 사람들을 위해서 대부분 사용한다고 약속해야 해요.”

나는 이 열매의 효과를 여러 가지 일러주었다. 그러자 카르헨의 눈이 반짝였다. 사업성이 있는 아이템이었을까?

“해보겠습니다!”

카르헨이 고개를 끄덕이자, 갑자기 크리세우스가 나섰다.

“역시 우리 성녀님이야. 신성력 같은 것이 없어도 많은 기적을 만들어 낸다니까?”

그의 말에 다들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신성력을 쓰지 않고도 기적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성녀님밖에 없는 것 같아요.”

크리세우스를 보는 아스테인의 눈이 흐뭇해 보였다.

왜 그가 이렇게 나선 것인지 눈치를 챈 나는 약간의 추임새를 넣기로 했다.

“신성력이 누군가의 특권이 된다면 나는 쓰지 않을 생각입니다. 신성력과 신전이 없어도 모두가 노력하는 것에 따라서 다 잘 살 수 있는걸요?”

성기사들은 내가 인테르가 주장하는 바와 비슷한 말을 하자 약간 심기가 불편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크리세우스가 다시 내 자랑을 늘어놓자 그 불편함을 다들 집어넣었다.

“예비 성녀님 시절이었던 신의 회초리 때 말입니다! 그때도 신성력 하나 쓰지 않고 리디안힐의 사람들을 다 구하셨지 않습니까?”

크리세우스가 성기사들과 빈민가의 아이들에게 내 활약상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읊기 시작했다. 심지어 신전의 비리를 밝힌 사연들까지 말하며 나를 영웅으로 만들어줬다.

“우리 성녀님 덕분에 다들 신성력에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될 거라니까?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말이야!”

크리세우스의 말에 동의하는 빈민가 사람들의 모습에서 나는 작은 희망을 찾았다.

데아 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는 빛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