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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68화 (68/101)

68화. 흔들리지 않는 나의 기사 (1)

약병 안에는 지난번 유테르안이 내게 보여줬던 것과 같은 색의 액체가 들어 있었다.

비페라 베루스의 독.

“아스테인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건가요?”

“내가 언제 이게 독이라고 했어?”

유테르안은 살랑살랑 약병을 흔들어대며 바짝 약을 올렸다.

하지만 그것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침착하게, 동요하지 않고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아스테인이 떠난 자리를 지켜봤다.

“흐음, 뭔지 궁금하지 않나 보네?”

내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유테르안은 흥미를 잃었는지 약병을 내려놓았다.

“아, 그런데 고모님을 죽인 자들의 처분은 어찌 됐어?”

너무나도 태연한 그의 목소리가 내 속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저럴수록 심증은 굳어져만 갔다.

“아직 심문 중이에요. 그런데 나는 성녀이니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내 지적에 유테르안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아주 재밌다는 눈빛이었다.

“흠, 그들이 후작가에서 훔쳐 간 독과 성녀님을 살해한 독이 같은 것이라는 사실은 밝혔습니까, 성. 녀. 님?”

마지막에 힘준 소리가 쇠 긁는 소리처럼 소름 돋았다. 나는 눈이 찌푸려지는 것을 겨우 참고 말을 이었다.

“독의 성분은 이미 알아냈어요. 그리고 그게 성녀님을 죽인 독과 같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흐음. 그렇다면 그들의 죄가 증명된 겁니까?”

“아니요.”

거친 대답에 유테르안의 눈썹이 올라갔다.

“왜죠? 이미 자백도 했고, 그들의 말대로 우리 가문의 독을 훔쳤다는 정황도 다 드러난 것 같은데요?”

“강요된 자백일 수도 있으니까요?”

“설마 푸토르 가에서 사주한 것으로 생각하는 겁니까?”

당연한 소리라 대답 없이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유테르안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유테르안의 짓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걸까? 어떻게 저렇게 뻔뻔하고 태연할 수가 있는 거지?

“우리를 미워하는 누님이 성녀가 되는 게 무슨 이득이라고 고모님을 죽였겠습니까? 신전에서 내쳐지는 시기만 당겨지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운 좋게 요리조리 철퇴를 비켜 가고 있긴 했지만, 조만간 나는 후작가를 완전히 끌어내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분명, 후작은 대책 없이 성녀님을 죽이면서까지 가문의 파멸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소후작, 당신은 어차피 집안보다 당신이 우선인 사람이잖아요.”

하지만 유테르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자신이 최우선인 사람. 자신의 기분대로 되지 않으면 제 손안의 것을 다 부숴버리는 사람.

내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그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그래서 내가 고모님을 죽인 범인이라고 말씀하시고 싶은 건가요? 증거가 있습니까?”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언제든 신성력의 속박이 필요하면 쓰려고요.”

“흐음, 그걸 정말 쓸 줄은 아는 겁니까? 아니 쓸 수나 있나요? 진짜 성녀가 아닌데?”

“하, 또 시작인가요?”

유테르안의 말에 성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성기사들에게 저 말은 나뿐만 아니라 그들이 몸담은 신전을 모욕하는 일이었다.

“푸토르 소후작, 말을 삼가시오!”

“감히 성녀님을 모욕하다니!”

성난 성기사들과는 달리 유테르안의 얼굴은 평화롭기만 했다. 그는 여유롭게 머리를 한번 쓸어올리기까지 했다.

“아, 다들 못 본 모양이네. 당신들이 모시는 성녀님께서 자신의 팔에 난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장면을 말이야.”

유테르안의 말에 흠칫 어깨를 떨 뻔했다.

언젠가는 신성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특히나 유테르안의 입에서 밝혀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무슨 헛소리야!”

“예비 성녀 시절에도 성녀님을 의심했다더니! 우리 성녀님을 욕보이지 말란 말이다.”

“인테르의 습격 때, 너희들의 성녀님은 손목에 상처를 입었던 것으로 아는데?”

역시나 그때 의심하고 있었구나.

나는 찝찝함과 불안함에 손목을 감싸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웃기지 마! 그때의 상처는 일주일을 넘긴 뒤에야 나으셨다.”

“흉도 졌었단 말이다!”

“흐으음. 다들 손톱에 긁힌 상처와 바닥에 긁힌 상처를 구별하지 못하나 보군.”

성기사들 사이에 약간의 동요가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들은 성녀를 괴롭혀온 자의 소리 따위는 믿지 않았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유테르안과 결투라도 하려는 듯이 앞으로 나왔다. 나는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했다.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당장이라도 신성력의 속박을 걸어드리죠.”

나는 조금 떨리는 마음을 숨기고 태연하게 말했다. 이럴수록 의연하게 대처해야 했다.

아스테인이라면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뭐, 다들 아니라고 믿으니 제 착각이었나 봅니다.”

“웃기는군! 성녀님! 이 자를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유테르안이 비릿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속이 꽉 막힌 느낌이었다. 역시나 이곳에 오는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냥 신전에서 조용히 혼자 후작 부인을 추모하는 것이 좋을 뻔했다.

“아스테인 님이 오면 바로 돌아가야겠군요. 다시는 푸토르 가를 찾아올 일이 없을 테니, 그리 알아요.”

“흐음, 단델리온 대공이 과연 신전에 돌아갈 수 있을까요?”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정말로 아스테인에게 독을 쓴 걸까?

아스테인을 적셨던 물이 그의 입으로 흘러가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파미르 공녀? 당신 설마……?”

나는 뒤늦게 공녀를 찾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 자리에 없었다.

이 자리에 있던 누구도 그녀가 사라진 것을 몰랐다.

“공녀는 어디로 간 거죠?”

“글쎄요?”

“아까 뿌린 물은 원래 내게 뿌리려던 거예요. 그 물에 아스테인 님이 해를 입는다면 공녀도, 푸토르 후작가도 모두 성녀 살해와 신성모독의 죗값을 받을 겁니다!”

내 말에 유테르안은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오를 만큼.

그는 아까 들고 있던 약병을 여유롭게 다시 흔들었다.

“글쎄요? 공녀는 아마도 대공이 성녀님의 앞을 막아설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을까요?”

그 소리는 명백히 아스테인을 노렸다는 소리였다.

“아스테인은 어디에 있죠?”

“별채에 있겠죠?”

내가 징벌을 받던 다락방이 있는 별채.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아스테인이 위험하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야 했다. 데아 님이 남긴 팔찌의 신성력을 모두 쏟아부어서라도 그를 구해야 했다.

“다들, 당장 아스테인 님을 찾아야 해요.”

나는 성기사들과 함께 아스테인을 찾아가려고 마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또 다른 방해꾼이 나를 막아섰다.

“프레이아, 너도 왔구나.”

황제가 자신의 기사들을 이끌고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하필 지금이라니.

누가 봐도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황제는 유테르안보다도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저는 바빠서…….”

“황후가 아파서 못 오니 내가 대신 왔지. 임신해서인지 죽은 어머니를 많이 그리워하더라고. 여인들은 다 그런가?”

묻지도 않은 것을 황제는 내 앞에서 줄줄이 이야기했다. 그 의도가 눈에 보였다.

시간 끌기. 내가 아스테인을 찾아가지 못하게 막으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황후 폐하께서 기뻐하시겠군요. 저는 이만 제 기사를 찾으러…….”

“아스테인이 파미르 공녀에게 약혼도 절대 해줄 수 없다고 했다는데 말이야. 프레이아, 네 뜻인가?”

황제는 심지어 내 말을 잘라먹으면서까지 말을 이어갔다.

내 말을 듣고 싶은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요, 아스테인 님의 뜻이에요. 궁금하면 직접 확인하시죠.”

내 말에 황제가 어깨를 살짝 올렸다. 황제는 유테르안을 쳐다봤다.

그러자 유테르안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나는 저들의 모습에 불안함을 느꼈다.

“유테르안, 아스테인은 어디에 있지?”

“별채에 있을 겁니다.”

“혼자 있나?”

“글쎄요? 아까부터 파미르 공녀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함께 있지 않을까요?”

내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들의 최종목표가 뭔지 알 것 같았다.

“흐음, 아스테인의 말과 다르게 둘에게 진척이라도 있는 것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황제도 유테르안도 입꼬리가 내려갈 생각이 없었다. 벌써 원하는 것을 얻었다는 듯이.

“이번 기회에 둘이 잘 되면 약혼과 결혼을 강행해야겠어.”

“성기사는 결혼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아스테인 님은 신전을 위해 당분간 더 성기사의 직을 맡아야 한다고도 분명히 말했습니다.”

내가 발끈하자 황제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 미소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성기사가 여인과 염문을 일으키면 신전에서 나가야 한다고 아는데?”

황제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프레이아, 같이 아스테인을 찾으러 가 볼까?”

아스테인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곳으로.

* * *

아스테인은 후작을 따라 작은 별채로 향했다.

그 별채는 겨우 1층짜리 건물이었다. 헛간 같아 보일 정도로 허름한 건물.

아스테인은 옛 기억 속에서 이 건물을 떠올렸다. 그의 눈은 기억을 떠올리자마자 잔뜩 찌푸려졌다. 깨끗한 망토와 제복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했다.

“이곳에서 옷을 갈아입으십시오.”

정중한 후작의 모습이 아스테인의 눈에는 낯설게만 느껴졌다.

이 건물을 보는 순간, 바로 후작의 멱살을 잡아 내팽개치고 싶은 것을 참느라 힘들었다.

“후작. 요즘 제스티안과 만남을 갖는다면서?”

아스테인은 조금 분한 마음을 감추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머리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그대로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업적으로 겹치는 부분이 많아 친분을 나누고 있습니다.”

“황후 폐하께 곤란한 일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프레이아 님도 그를 꺼리니 조심하게.”

후작은 불쾌한 감정을 애써 누르는 듯했다. 평소 같으면 아스테인에게 잔뜩 날을 세웠을 후작이지만, 오늘은 제법 자제했다.

“그런데 대공께서는 제 딸, 아니 성녀님의 힘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후작의 말투에 약간의 주저함이 느껴졌다.

“신께서 인정한 유일한 파랑새가 프레이아 님이다. 내가 신께 직접 받은 글라디우스가 그 증명이고.”

“역시……. 유테르안 그 녀석을…….”

“무슨 뜻이지?”

“아, 아닙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후작이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한참이나 노려보던 아스테인은 입속에 들어온 물을 퉤 하고 뱉었다.

그는 들고 온 옷을 잠시 바라보다 그것을 들고 방 밖으로 나갔다. 그가 바라본 곳에는 계단이 있었다.

“저기였던가?”

아스테인은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걸음이 다급했다. 호흡은 평소보다 가빴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던 걸음은 작은 문 앞에서 멈췄다.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모든 창을 막아 만들어진 짙은 어둠이었다.

못마땅한 소리가 입에서 번졌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이 공간을 망가트리고 싶었다.

안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자 갑자기 머리가 핑 돌며 손발이 저릿해졌다.

“이건…….”

낯익은 감각이었다. 몇 번이고 그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의 손에 먹어봤으니.

죽음을 부르는 정도의 양은 아니었다. 하지만 잠시 몸이 마비될 정도는 되는 독이었다.

아스테인은 이 불쾌한 감각에 눈을 잠시 찌푸렸다.

“어느 틈에 넣은 거지?”

아스테인은 잠시 어지러움에 계단에 기대앉았다. 점차 몸의 감각이 둔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별채 안으로 들어오는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아스테인 님? 어디 계시나요?”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잔뜩 들뜬 채, 그를 찾았다.

“제가 왔어요. 당신의 약혼녀가요.”

마치 사냥감을 모는 여우 같은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우리 잘 지내봐요. 기왕 이리된 거 제 아버지의 힘을 빌려 황위를 찬탈하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우리 협력하는 거 어때요?”

협상이라도 할 것 같이 굴었지만, 거기에는 전혀 진심이 없었다.

아스테인은 공녀를 무시한 채 계단 옆,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그가 지금 간절히 닿길 바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보다 살짝 먼 곳에, 황제가 프레이아와 성기사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때 파미르 공녀가 자신이 있었어야 할 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이었다. 그녀를 피할 시간은.

아스테인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어두운 다락방 안으로 몸을 피했다.

곧바로 손끝이 점점 마비되는 느낌이 들었다. 어지러움도 조금 더 심해졌고.

아스테인은 잠시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 * *

“폐하, 언제 오셨습니까?”

별채의 입구와 살짝 떨어진 곳에서 후작을 만났다.

후작은 황제를 보고 조금 의아한 눈을 하고 있었다. 이번 일은 순전히 황제와 유테르안이 저지른 일인 것 같았다.

“내 동생은 어디 있지?”

“별채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을 겁니다.”

“그렇군. 공녀는 못 봤나?”

“잘 모르겠습니다. 폐하. 그런데 그 집안의 여인을 정말 측근으로 두려고 하십니까? 파미르 공작은 절대 폐하께 충성할 작자가 아닙니다.”

후작은 둘과 다르게 공녀를 여전히 경계하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내 눈치를 살폈다. 황제와 유테르안을 보는 눈빛도 안절부절못하고 불안해 보였다.

“공작은 모르겠지만, 공녀는 바라는 것이 확실해서 말이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곁에 있는데도 황제는 그 사실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신 황제는 조금 신난 얼굴로 별채 안으로 들어갔다.

“이 방이 맞던가?”

“네, 맞습니다.”

황제가 문손잡이에 손을 직접 올렸다.

그것을 지켜보는 내 가슴이 이상하게 울렁거렸다. 아스테인을 믿는데, 어째서 이렇게나 불안할까?

황제는 신년제의 선물을 기대하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손잡이를 돌렸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허탈한 얼굴을 했다.

“아무도 없는데?”

“글……쎄요. 어디로 간 걸까요?”

유테르안도 당황한 듯 보였다.

그때 위쪽에서 우당탕하는 조금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그곳은 내가 자주 갇히던 다락방이었다.

복도로 나가자, 다락방 계단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있는 공녀가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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