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젖어버린 남자
나는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성기사들이 내 명을 받들 듯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나는 후작에게 한 걸음 다가가 섰다. 그리고 정확히 그의 눈을 노려보며 말을 꺼냈다.
“아니요. 저는 오늘 성녀로서 예비 성녀를 정성껏 키워주셨던 후작 부인을 추모하러 온 겁니다.”
후작가에서 신성력이 없다고 구박받으며 자랐던 소녀는 오늘 위엄을 갖춘 성녀가 되어 집에 돌아왔다.
회귀 전, 힘없는 성녀가 되어 후작저를 찾았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때는 내가 후작의 눈을 피했는데, 지금은 후작이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성녀님.”
후작은 몇 번이고 내게 찾아와 잘못을 비는 척했었다. 몇 번이고 이어진 내 거절에도 돌아서면 내게 친근한 척, 내 가족인 척, 다정하게 구는 모습이 이제는 지긋지긋했다.
아스테인과 나를 괴롭히려 황제나 세르펜스 대공을 찾아다니는 걸 알고 있는데, 뻔뻔하기도 하지.
“황후 폐하께서는 못 오시는 건가요?”
내 입에서는 당연히 오늘도 차가운 목소리가 나왔다.
제발 나를 향한 미련을 끊길 바라며.
“아직 요양 중이라 오기 힘들 것 같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하긴, 후작의 잘못 때문에 황후 폐하께서 큰일을 당할 뻔했으니, 사가의 일로 무리하지 않는 게 낫겠군요.”
조금은 비꼬듯이 후작의 잘못을 지적했다.
황후인 카렌시아 덕분에 구제를 받았을 뿐이라는 것을 강조하자, 후작의 입은 쉽게 닫혔다.
후작과의 대화를 끝낸 나는 후작 부인이 평소 좋아했던 온실로 걸어갔다.
매년 기일이 되면 그곳에서 다 함께 부인을 기리고는 했다.
느릿하게 걸어가는 동안, 나는 조금 이상한 점을 느꼈다.
“소후작은 어디 갔죠? 나에게 어머니의 기일이니 추모하러 오라고 그렇게 강조하더니요?”
“그 녀석이 하나부터 열까지 세심하게 준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방문한 다른 초대 손님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손님이요? 가족 모임 아니었던가요?”
유테르안의 이상한 꿍꿍이가 느껴져 단번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미 누가 오는 것인지 알고 있었지만 유쾌하지 못했다. 도대체 후작 부인과 상관도 없는 사람을 부른 이유가 뭘까?
“그렇긴 한데…… 중요한 손님이라고 하더군요.”
“얼마나 대단한 손님인지 궁금하군요.”
후작의 표정을 보니 그는 누가 왔는지를 모르는 것 같았다.
알았다면 당장 쫓아냈을지도 모르겠다.
“소후작이 언제 올지 모르니, 그냥 바로 시작하죠.”
“하지만 그 녀석은 이 집안의 후계자입니다.”
“나는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에요.”
이 집에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유테르안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모르니, 조금이라도 일찍 떠나는 편이 좋았다.
“하지만…….”
“추모식을 끝내고 바로 빈민가에 가기로 했어요. 그 아이들과의 약속을 어길 수는 없답니다.”
“이 시간에 말입니까?”
“네. 이미 늦었으니 더는 지체하고 싶지 않군요.”
내게 우선순위가 푸토르 가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무심하게 말해주었다.
뭐라 말도 못 하고 인상을 구기고 있는 후작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후작가의 사용인들도 비슷한 생각인 모양이었다.
집을 나가기 전, 저들의 눈에는 은근히 나를 무시하는 감정이 숨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사용인들은 나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참으로 우습게도.
“어머니께 기도를 드리고 바로 갈 생각이에요.”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저녁 만찬도 함께 하지 않을 생각입니까?”
“빈민가 아이들과 먹을 거랍니다.”
예전에 연을 맺었던 아이들과 감자 요리 파티를 하기로 했다.
“서운해하겠군요.”
후작은 온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에 둔 후작 부인의 초상화를 보며 애틋하게 말했다.
초상화에는 자애롭고 포근한 품을 가진 여인이 그려져 있었다.
그분이라면 내가 이렇게 행동한다고 해도 날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내게 인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충고하신 분이니까.
“아니요. 내가 성녀의 삶을 살며 낮은 곳의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을 하늘에서 지켜보며 칭찬하고 계실 거예요.”
분명히 그럴 것이다. 후작은 내 행동을 더는 말릴 수 없었다.
나는 신전의 정원에서 가져온 꽃들을 후작 부인의 초상화 아래에 예쁘게 장식하기로 했다. 그분이 생전에 좋아하던 백합과 찔레꽃을 가져왔다.
“아가씨, 여기 물이요.”
셀레미온이 꽃병과 함께 물이 가득 든 물통을 건넸다. 그녀도 나를 도와서 꽃을 장식하는 일에 열중했다.
“와, 후작 부인께서 가꾸시던 정원의 꽃보다 더 화려한 것 같아요.”
“그래?”
“좋아하실 것 같아요. 심지어 이거 전부 신전에서 가져온 꽃이잖아요. 성녀님이 신전에서 직접 가져온 꽃이라니, 얼마나 영광스러울까요?”
셀레미온은 조금 자랑스럽다는 듯이 앞가슴을 내밀었다. 장식을 끝낸 뒤, 셀레미온은 물이 남은 물통을 한쪽 옆으로 치웠다.
나는 한쪽 자리에 무릎을 꿇고 자리 잡았다. 그리고 양손을 맞잡았다.
성녀의 기도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가짜 성녀가 아닌 진짜 성녀로서 그분께 진심을 담아 기도했다.
“어릴 때 후작가에서 버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어머니였어요. 제가 미웠을 법도 한데 그래도 차별하지 않으려 한 것 감사해요.”
카렌시아의 얼굴을 닮은 후작 부인은 초상화 너머에서 웃고 계셨다.
“황후 폐하도 그분의 고귀한 아이도 제가 지킬 거니까 어머니께서는 걱정하지 마세요.”
후작가의 안녕은 빌어주지 않았다. 그건 절대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리 후작 부인이 내게 고마운 은인이라 할지라도.
“이만 돌아가요.”
“네, 프레이아 님.”
아스테인이 나를 일으켜 주기 위해 곁에 다가왔다. 그때 온실 밖에서부터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짜 누님, 오셨습니까?”
유테르안이 파미르 공녀와 함께 온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도, 아스테인도, 후작도 모두 얼굴이 굳었다. 파미르 공녀는 이곳에서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손님이었다.
“유테르안, 저 여자는 왜 데리고 온 것이냐?”
후작은 역시나 날카롭게 반응했다.
하지만 유테르안은 후작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나와 아스테인 쪽을 향해 걸어왔다.
“아, 대공이 공녀와의 약혼을 거부한다고 들었거든요. 그래서 둘의 관계를 개선 시켜볼까 하고 데려왔습니다.”
이미 끝난 문제를 굳이 끄집어내는 유테르안의 행동에 저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아스테인이 발끈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네가 참견할 문제가 아니다.”
“두 사람이 약혼을 서둘렀으면 한다고 황제 폐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둘 사이를 조금이라도 좁혀보라며 제게 중매를 맡겼지 뭡니까?”
유테르안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눈은 매섭기 짝이 없었다. 누가 봐도 가식적인 웃음이었다.
입만 웃는 그를 보고 아스테인이 마찬가지로 입술만 끌어올려 대꾸했다.
“나는 이미 공녀에게 약혼 의사가 없음을 전했다. 자네는 아카데미에서 함께 수학한 동료를 불행의 길로 밀어 넣으려나 보군.”
“흠, 신기하군요. 공작가와 혼인을 맺으면 대공에게도 좋은 일 아닙니까? 심지어 그렇게도 사이가 나빴던 황제 폐하께서 대공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거부하다니…….”
말꼬리를 흐리던 그가 양손을 올렸다.
“흐으음. 혹시 다른 꿍꿍이라도 있습니까?”
유테르안의 비꼬는 소리에도 공녀는 그저 나를 빤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약간의 원망이 섞여 있었다.
“오늘은 후작 부인을 추모하기 위해 성녀님을 초대한 것 아니었나? 이런 헛소리를 하려고 성녀님을 끌어들인 것이라면 우린 이만 가보도록 하지.”
아스테인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한 얼굴로 무심하게 답했다. 그리고 성기사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그들이 내가 지나갈 길을 만들기 위해 공녀와 유테르안을 밀어내려고 했다.
“어머, 여기 이 많은 꽃은 다 성녀님이 가지고 오신 건가요?”
그때, 파미르 공녀가 뜬금없이 해맑은 목소리로 물었다. 성기사들은 순진한 공녀의 말투에 잠시 경계를 풀었다.
공녀는 내 대답은 들을 생각도 없이 꽃을 향해 갔다.
“신전에서 가져오셨나 봐요. 그런데…… 어머, 왜 이렇게 시들었나요? 물이 부족한 모양이네요.”
공녀는 동그란 눈을 말갛게 뜨며 멀쩡한 꽃잎을 쓸었다.
“공녀, 비켜요.”
하지만 공녀는 비켜서지 않았다. 대신 유테르안을 돌아봤다.
“소후작님, 꽃이 시들어서 물을 주려고 하는데요. 물이 어디 있을까요?”
“바로 옆에 물통이 있군요, 공녀.”
너무나도 뜬금없이 행동하는 두 사람을 질린 눈으로 봤다. 유테르안이야 원래가 제 멋대로였지만, 공녀까지 그 장단에 맞춰 행동할 줄은 몰랐다.
이대로 있다가는 둘에게 휘말릴 것 같아 그들을 지나쳐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때 물통을 집어 든 공녀가 꽃을 향해 물을 뿌렸다. 하지만 물은 꽃을 향해 날아가지 않았다.
“프레이아 님!”
아스테인이 내 앞으로 쏟아진 물을 막아섰다. 결국, 아스테인이 나를 대신해 물을 뒤집어썼다.
“공녀! 이게 뭐 하는 짓이죠?”
너무나도 유치한 행동에 내 목소리가 저절로 높아졌다.
“감히, 성녀도 되지 못한 파미르의 딸이 푸토르의 성녀를 모욕하다니! 유테르안! 저 여자를 왜 데리고 온 거야? 그만 포기하고 성녀님께 사과해야 한다니까, 왜 다시 일을 벌여?”
후작은 그래도 내 눈치를 봤다. 이미 내게 미운털이 박힌 상황에서 더 멀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 걸까?
“공녀가 이럴 줄 난들 알았겠습니까? 그리고 성기사는 이런 일을 하라고 있는 거지요.”
물론, 유테르안은 내 눈치를 살피지 않았다.
아스테인은 잔뜩 젖은 상태에서 눈에 살기를 띠며 유테르안을 노려봤다.
옆에서 파미르 공녀는 정말 실수였다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죄송해요. 손이 미끄러졌네요. 소후작님? 대공님께서 옷을 갈아입을 곳이 있을까요? 제가 곁에서 시중을 들게요.”
“흐음, 글쎄? 별채로 가면 되려나?”
나는 대놓고 이상한 흉계를 꾸미는 이들을 노려봤다. 하지만 아스테인이 차분히 나를 달랬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만 돌아가시죠.”
아스테인의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물은 연신 아스테인의 뺨을 따라 그의 입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옷도 몸에 들러붙어 움직이기 힘들어 보였다.
“흐음, 그대로 돌아다니면 감기라도 걸릴 텐데…… 괜찮겠습니까, 대공?”
유테르안은 마치 아스테인을 대단히 걱정하듯 말을 꺼냈다.
우리는 그것을 무시하고 그저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몸에서 계속 물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밖으로 나가자 해 질 녘, 서늘한 초여름 바람이 불어왔다.
“흠, 저녁 날씨가 꽤 서늘하군요?”
유테르안의 목소리가 들떴다. 그는 이 상황이 대단히 즐거운 모양이었다.
아스테인이 정말로 감기에라도 걸리길 바라는 사람처럼.
나는 신나 있는 유테르안이 보기 싫어 빠른 속도로 마차에 올랐다. 곧바로 아스테인이 나를 따라 마차에 타려고 했다.
“흠, 그렇게 젖은 채로 가짜 누이와 같은 마차에 타려는 건가요, 대공? 아니지, 성기사 단델리온?”
그걸 막아선 것은 유테르안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옆에서 이상하게 비꼬는 말로 맞장구치는 것은 파미르 공녀였고.
“설마 마차 안에서 옷을 갈아입으려는 것은 아니죠? 성녀님과 두 분이 좁은 공간에 있어야 하는데요?”
공녀는 양손으로 입을 막아가며 정말 놀랐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셀레미온도 함께 마차에 탈 거예요. 그러니 헛소리하지 말아요.”
그 모습이 너무 가소로웠다. 우리는 애써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다.
아스테인이 다시 마차에 오르려 발을 내미는 순간, 유테르안이 추잡한 말을 던졌다.
“뭐, 신전에서 이미 그런 것에 익숙해져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 괜찮겠지…….”
아스테인을 말릴 틈이 없었다. 그의 손이 유테르안의 멱살을 잡았기에.
“닥쳐. 프레이아 님을 모욕하지 말라고 했다.”
조금은 흥분한 모습의 아스테인을 보자 내 심장이 벌렁댔다.
“감히, 어디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그런 오해를 받기 싫으면 그 꼴로 마차를 타지 말든가.”
“뭐라고?”
“사내가 옷이 젖은 상태로 여인의 마차를 탄다는 것 자체가 남들에게 불순한 상상을 일으킬 여지를 주는 것 아닌가?”
아스테인은 유테르안을 놓고 검에 손을 댔다. 글라디우스를 뽑으려는 그의 손등에 잔뜩 힘줄이 솟았다.
그때, 옆에서 이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후작이 아스테인의 앞을 막아섰다.
“대공 각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인 공녀가 한 일은 공작가에 책임을 묻겠습니다. 그리고 내 아들이 준 모욕은 내가 대신 사과하겠습니다.”
“내가 아니라 성녀님께 해야 할 사과이다.”
아스테인은 검을 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당장이라도 뽑을 듯이 기세가 흉흉해졌다.
그 모습에 성기사들도 싸울 준비를 했다. 후작가의 기사들도 우르르 몰려나올 분위기가 되었다.
“내가 책임지고 유테르안을 혼낼 테니, 너그러이 이해하시지요.”
아스테인은 후작의 거듭된 사과와 만류에 손에서 힘을 풀었다.
“쳇.”
유테르안은 기분 나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사과는 없었다.
“어쨌든 옷은 갈아입는 편이 성녀님을 위해서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스테인은 잠시 나를 돌아봤다.
“다녀오겠습니다.”
“함정일 수도 있어요.”
내 말에 아스테인이 은밀하게 속삭였다.
“압니다. 하지만 함정이란 발을 담가 줘야 정체를 드러내는 법이지요.”
아스테인의 자신만만한 모습에 나는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후작과 아스테인이 잠시 자리를 떴다. 그가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보려니 이상하게 마음이 울렁댔다.
그때, 유테르안이 내 곁에 다가왔다.
“가짜 누님.”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죠?”
“나와 피를 나누지 않은 사이니까 그렇게 부르죠.”
어이없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유테르안이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이걸 지금 대공에게 보내면 어떨까?”
유테르안의 눈이 사악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