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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66화 (66/101)

66화. 신에게 인정받은 연인

“혹시 평소에 소후작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을 모르나요?”

“글쎄요. 워낙에 아카데미에서 지냈던 시간이 길어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그렇죠?”

조금은 실망스러운 답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블루 로즈도 애를 쓰고 있지만, 아무래도 그곳이 귀족들만 다니는 아카데미라 정보를 캐는 데 시간이 걸렸다.

“아, 그런데 한번 후작이 노발대발하며 소후작을 소환한 적이 있습니다.”

“언제요?”

나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아카데미에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은 때였죠?”

“왜죠?”

“파미르 공녀와 친분을 나누었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아스테인을 돌아봤다. 그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라버렸다.

“후작은 성녀를 배출하는 가문이라는 명예를 파미르 공작가에 뺏길까 봐 벌벌 떨었습니다. 심지어 황후 자리까지 놓고 싸웠으니 좋은 감정은 없었겠죠.”

후작의 생각이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공녀와 소후작이 어떻게 친분을 나누었죠? 아니,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죠?”

“잘은 모르겠지만 아카데미에는 소문이 났었나 보더군요. 둘이 연인이라는 헛소문이요.”

“헛소문이었나요?”

집사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글쎄요. 후작이 헛소문으로 취급한 것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소후작은…….”

“들었습니다. 성녀님께 이상한 집착을 하고 있다면서요? 더러운 푸토르의 피를 물려받은 자다운 모습이군요.”

집사는 더러운 것을 묻혀왔었다는 듯 팔을 슬쩍 털어냈다. 살짝 부르르 떨기까지 하는 것이 정말 싫었던 모양이었다.

“아, 그런데 그 공녀 말입니다. 어릴 때 후작저에 종종 찾아오고는 했습니다.”

“공녀는 어릴 때도 후작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제 외조부에게 푸토르 가에 관해 아는 것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졸랐었죠.”

아스테인의 말에 집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은 우습다는 얼굴이었다.

“당시 후작가에는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이 두 명 있었죠.”

내가 무슨 소리냐는 듯이 그를 쳐다보자, 집사가 피식 웃으면서 아스테인을 바라봤다.

“일단, 파미르 공녀 말입니다. 그 여자의 관심은 성녀님이었습니다. 당시 예비 성녀였던 아가씨를 뵙겠다며 매일같이 찾아왔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나 보군요.”

미간이 살짝 좁아진 집사는 금방 그것을 풀고 말을 이었다.

“뭐, 끼리끼리 어울리네요.”

성녀가 되지 못한 공녀를 살짝 무시하는 듯한 말투였다.

역시 나는 집사가 싫었다. 자신의 아내나 대사제 레무스와는 너무 다른 인격을 가졌다.

“또 다른 이는 대공이셨습니다. 황권 다툼에 후작의 도움이 필요한 줄 알았습니다. 성녀님께 관심이 있는 줄 모르고요.”

“어릴 때부터 성기사에 관심이 많아서 후작의 도움을 받으려 했었다.”

집사의 미심쩍은 눈을 아스테인은 차분히 밀어냈다. 그의 태연함은 본받고 싶을 정도였다.

“그랬습니까?”

“그리고 내 진심을 아는 신께서 나를 허락하셨기에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겠지.”

아스테인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우리는 데아 님께서 허락하신 연인이었다. 비록 성기사와 성녀라는 신분의 제약이 있지만, 그것은 인간들이 만든 제약일 뿐.

집사는 아스테인의 말을 듣고도 뭔가 불만스러운지 입을 살짝 달싹였다.

그런 집사의 입이 얄미워 막고 싶어졌다.

“그런데 집사님.”

“네, 성녀님.”

“후작가에서 더러운 꼴을 많이 봤을 텐데 잘도 그곳에서 버티셨네요.”

약간의 비난을 곁들였다. 성스러운 샘의 일, 독약의 문제 등등, 그가 보고도 모른 척한 것을 향한 힐난도 섞여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집사의 기세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죄송합니다.”

“내가 신성력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그런데도 나를 신전으로 보내려는 후작을 보고도 아무 말도 안 한 이유는 뭔가요?”

“진짜 성녀님을 찾으려면 푸토르 후작의 곁에 붙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짜 성녀님인 것을 알아보지 못한 제 죄입니다.”

그가 고개 숙여 반성하는 것을 보니 더는 탓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 정도라도 집사의 기세를 눌러놓으니 속이 좀 편해졌다.

하지만 그는 본인이 가장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런 바람에 소후작이 신성력을 더럽히는 마법에 손을 대는 것을 방관했습니다.”

“네? 소후작이요?”

아스테인을 암살하려 했을 때 마법의 도움을 받긴 했다. 하지만 후작가의 사람이 직접 나서서 마법을 쓰지는 않았다.

내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집사를 재촉하자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가 직접 마법을 배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마법사들과 교류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황궁 연회에서 아스테인을 죽이려던 마법은 인테르만의 것이 아니었다.

역시 유테르안의 마수가 닿아 있었다.

“그리고 성녀님께서 후작가를 떠났던 날 새벽, 소후작이 다급히 마법사들에게 편지를 써서 부쳤습니다.”

“당연히 내용은 모르겠죠?”

내 질문에 집사가 조금은 소름 돋는 미소를 지었다.

“봉인을 뜯고 내용을 확인했습니다. 성녀를 배출하는 가문의 후계자가 마법사와 얽혀 불미스러운 일을 만들면 안 되니까요.”

역시, 이 사람은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래도 한 집안의 집사로 평생을 살아왔던 인물인데 신뢰와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사람이나 물건을 공간이동 시킬 수 있는 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나를…… 대공성에서 빼낼 사람을 찾았나 보군요.”

바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화답한 사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군요.”

“아마 없었을 거예요. 대륙에는 그런 능력을 가진 마법사가 없다고 들었거든요.”

하지만 작은 물건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한참 고민에 빠져 있는데 집사가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곧 돌아가신 후작 부인의 기일이군요.”

“안 그래도 소후작이 초대장을 던져줬어요.”

“가실 겁니까?”

“고민 중이에요.”

“이해합니다. 후작 부인께서는 성녀님께 잘해주셨으니까요.”

나는 돌아가신 그분을 떠올렸다.

성녀가 될 아이를 낳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후작 부인은 후작에게 핍박받기도 했다. 그런데도 언제나 온화한 품성으로 날 품으려 애썼다.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겁니다.”

“대비를 단단히 하고 가야겠죠. 그리고 아스테인 님과 함께 갈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집사의 눈썹이 잠깐 위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의심스러운 시선을 당당하게 받아 냈다.

나와 아스테인의 관계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까. 하늘 아래 신에게 허락받은 유일한 연인이 우리니까.

* * *

집사가 다녀가고 열흘이 지났다.

그사이 후작의 기사들은 성녀님의 암살과 관련해 입을 다물고 있었다. 황제의 앞에서 증언했던 것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아스테인은 오늘도 그들을 심문하고 돌아와서 작은 한숨을 쉬었다.

“이미 성스러운 샘의 일로 죽음이 예정된 탓인지 입을 열지 않는군요.”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서 그런 걸까요?”

“푸토르 소후작이 그들에게 제공한 대가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웨르와 히르쿠스가 교수형을 당하기 전에 전부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은데 안 될 것 같네요.”

아쉬운 마음에 아스테인을 쳐다보자 그가 빙그레 웃어주었다.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그래야죠. 아스테인 님과 블루 로즈가 있으니까요.”

나를 달래주려는 듯이 내 머리 위로 다가오던 아스테인의 손이 블루 로즈라는 소리에 덜컹하고 멈춰 섰다.

“또 질투하는 거예요?”

“블루 로즈 녀석들이 제대로 일을 하는 건지 갑자기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요? 그래도 그날 황제의 계획을 미리 알아냈다면서요. 그래서 아스테인 님이 차분히 대처하셨고요.”

“너무 편들어 주지 마십시오. 버릇 나빠집니다.”

아무리 봐도 질투가 맞았다. 그 일로 크리세우스가 내게 보고를 자주 하는 것이 싫었던 것은 아닐까?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을 신경 써야 했다. 그래서 아스테인 대신 크리세우스를 데리고 산책을 한다든가, 호위로 세운 일이 몇 번 있었다.

“아니, 누구 버릇이 나빠진다는 거예요?”

때마침 발끈하며 크리세우스가 들어왔다.

“너 말이다. 무슨 일로 왔지?”

“오늘 그 여자도 올 것 같답니다.”

“오늘 추모 의식은 가족 모임인데요?”

“글쎄요? 소후작 놈이랑 밀회라도 즐기려나 보죠.”

크리세우스는 조금 삐딱한 자세로 말했다.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이 일로 아스테인이 블루 로즈에게 너무 많은 일거리를 던져주긴 했다.

“그런데 두 분, 저 때문에 할 일 못 하신 거죠? 얼른 나가 드릴게요.”

“프레이아 님 앞에서 말조심해. 너는 이 신전의 성기사다.”

“어휴! 이럴 때만 성기사를 찾고 그러십니까? 암흑 길드의 수장이랑 성기사가 어울리기나 하나요?”

나는 투닥투닥 싸우는 두 남자의 모습에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몇 번이나 봤지만, 이 모습은 언제나 유쾌했다. 작은 근심을 다 내려놓을 수 있을 만큼.

“왜…… 웃으십니까?”

아스테인이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물었다.

“보기 좋아서요. 그런데 크리세우스 님?”

“예?”

“우리 셀레미온은 너무 가벼운 남자는 싫어하는 것 같아요. 유쾌한 사람은 좋아하지만.”

뜬금없지만 슬쩍 마음에 담아뒀던 충고를 건넸다.

“예? 아니던데요. 제가 뭘 하든지 웃어주던데요?”

“어머 정말요?”

저절로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자 크리세우스가 부끄러운지 머리를 긁적였다. 동시에 그의 귀가 살짝 붉어진 것이 보였다.

“여기서 비밀 연애를 하는 사람은 나와 프레이아 님으로 족하다.”

아스테인의 단호한 말에 크리세우스가 약간의 콧바람 소리를 냈다.

“아, 예. 저는 그래서 앞으로 대놓고 하려고요.”

그는 뻐기는 듯이 가슴을 내밀었다. 마치 약이라도 올리는 것 같았다.

“성기사가 염문을 뿌리고 다니면 파문당하고 신전에서 쫓겨난다. 나는 네가 아직 여기 있길 바라고.”

“음, 제가 필요하시다니 자제하죠. 그런 의미에서 주군도 자제하시죠?”

크리세우스는 아스테인이 더 인상을 쓰기 전에 밖으로 쏙 나가버렸다.

그가 나간 뒤, 셀레미온이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아가씨, 대공님. 차 좀 드세요. 후작가에 가서는 마음 편히 뭔가를 마시지도 못할 거잖아요.”

“응. 고마워. 아스테인 님, 잠시 앉아요.”

셀레미온은 약간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나와 아스테인에게 차를 나누어주었다. 차를 나누어주는 것을 마친 셀레미온은 우리를 보며 순하게 웃어주었다.

“요즘 자주 웃네. 좋은 일 있나 봐?”

셀레미온에게 직접 소식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이 조금 서운했다. 그래서 운을 띄워봤다.

“아가씨가 행복하니까 저도 행복해서요.”

“그게 다야?”

“네, 그럼요.”

볼에 바람이 살짝 들어갔다.

내 서운한 기색을 눈치챈 아스테인이 이번에는 대신 물어봐 주었다.

“크리세우스와 가깝게 지내는 것 같던데?”

“네. 그분 너무 재밌어서 좋아요!”

“좋아? 크리세우스 님이 너한테 잘해줘?”

“친절하시잖아요. 신전에서 그분이 제일 편해요.”

“그게…… 다야?”

“네. 왜요? 그분은 저 불편하대요? 제가 너무 귀찮게 했어요? 흐음, 그럼 다른 분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게 나으려나?”

셀레미온의 반응에 아스테인이 갑자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은 즐거워 보였다.

“크리세우스가 짝사랑 중인가 봅니다.”

“네? 그분이요? 성기사가 그래도 돼요? 와! 그런데 상대가 누군데요? 어머, 멋지다.”

셀레미온의 반응을 보니, 크리세우스가 갈 길이 멀어 보였다.

* * *

그날 저녁, 해가 질 무렵이 되어 나와 아스테인은 후작의 저택으로 향했다.

가는 길이 편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후작 부자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다 보니, 오늘 마차 안에는 낯선 성기사와 셀레미온이 함께였다.

“저도 가야 해요?”

“아무래도? 너도 어머니께 많은 귀염을 받았잖아.”

후작에게는 나오지 않는 아버지란 소리였지만, 그분께는 어머니라 부를 수 있었다.

“그건 그런데…… 후작님이랑 도련님이 절 죽이려고 들지 않을까요?”

“그래서 신전의 기사님들과 동행하는걸. 다들 안전하게 지켜줄 거야.”

“그러면 다행이지만…….”

불안해하는 셀레미온을 데리고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 앞에서 아스테인이 나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고마워요, 아스테인 님.”

“별말씀을.”

은밀하게 시선을 나눈 우리는 저택의 문지기를 향해 섰다.

“성녀님께서 오셨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것은 솔라르 경이었다. 그때 기사로서의 신념을 버렸던 기사는 후작가에서도 버림받은 듯했다.

한낱 문지기가 되어 버린 그의 모습이 조금 씁쓸했다. 양심을 버리고 선택한 결과가 과연 만족스러웠을까?

“도련님과 후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요.”

나는 아스테인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가씨, 예전보다 저택이 더 삭막해진 것 같아요.”

셀레미온이 뒤에서 작게 속삭였다.

사실 딱히 변한 것은 없었다. 그저 질 때가 되어서 떨어지고 있는 장미 꽃잎들이 쓸쓸하게 보일 뿐.

그때도 지금도 온기는 없었던 곳이니까.

“그분이 돌아가신 이후로는 늘 이랬지. 그나마 네가 있어서 이 끔찍한 곳이 집이라고 느껴졌던 거고.”

셀레미온에게 하는 대답인데 반응은 아스테인이 보여주었다. 에스코트를 하던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정원을 지나쳐 추모 의식을 준비하고 있는 온실 쪽으로 갔다. 온실로 가는 길, 본관의 정문 앞에서 후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프레이아, 어서 오너라.”

“후작은 성녀님께 예를 갖추시오.”

우리 뒤쪽에 있던 성기사들이 후작과 나 사이를 막았다.

아카데미에서의 사고 이후, 성기사들의 태도가 더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크리세우스와 아스테인의 노력이 컸다. 징계의 의미로 거의 매일같이 성기사들을 굴렸으니까.

“성녀이기 이전에 내게는 딸이다.”

후작은 여전히 내게 미련을 가졌다. 너무나도 어리석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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