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달콤한 말만 하는 내 남자
내가 한 사람의 이름을 꺼내자 아스테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미르 공녀가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사람은 제가 아닌 그 사람일 겁니다.”
“저는 당연히 아스테인 님을 연모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스테인 님께 친근하게 구는 줄 알고 경계했는데…….”
나는 말을 하다가 말고 입을 다물었다.
조금 추해 보이지 않을까? 죄 없는 사람을 투기하고 경계한 옹졸한 사람으로 보일 것 같았다.
심지어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스테인과의 약혼을 입에 담았으니까.
조금 부끄러운 마음에 입을 열지 못하는데 아스테인이 빙그레 웃었다.
“그런 경계는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음, 못나 보이지 않아요?”
“아니요. 기분 좋습니다.”
“다행이네요.”
나와 아스테인은 서로를 보며 슬그머니 웃었다.
가끔은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순간이 꿈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장소가 신전이라서 더 그랬다.
늘 바라보기만 하던 사람과 속마음을 나누고, 사랑을 속삭이고.
그래서 불안하기도 했다. 이 행복을 지킬 수 있을지, 데아 님이 원한 일을 이루고 나면 아스테인과 함께 하는 미래를 밝게 꾸며나갈 수 있을지.
“아…… 미래! 아스테인 님! 잊고 있었는데 황제의 죽음 말이에요.”
“왜 그러십니까?”
“어쩌면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미래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스테인은 갑작스러운 내 말에 한쪽 눈썹을 살짝 올렸다.
“회귀 전에는 형님이 급사했다고 했던가요?”
“네……. 신전에 도움을 청할 시간도 없이 갑자기 죽었다고 했어요. 물론, 제가 제때 황궁으로 갔다고 하더라도 신성력이 없어 그를 구하지 못했겠지만요.”
나는 이제는 흐릿해져 가는 기억을 붙들었다.
그날의 일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 일어났다.
“왜 죽었는지 원인은 압니까?”
“들은 것은 있는데…… 그게 세르펜스 대공이 만든 헛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제스티안이요?”
“네……. 그즈음에 계속 황제와 관련된 이상한 추문이 돌았거든요.”
나는 그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아스테인에게 들려주었다.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황후 폐하가 유산한 이후, 황제에게 정부가 생겼다고 했어요.”
말을 꺼내는 내 목소리가 유달리 까칠했다.
“그게 한, 둘이 아니라는 소문도 있었죠. 하지만 제 기억에 후작이나 황후 폐하는 그 일에 동요한 적이 없었어요.”
얼마 전에 황제가 딴 여자를 만난다고 카렌시아가 초조해하던 것과는 달랐다.
“그럼 그저 소문이다?”
“네. 하지만 황제의 인기는 떨어졌죠. 그리고 황제의 죽음이 정부 탓이라는 소문에 황실의 이미지가 많이 추락했어요.”
아스테인은 그 말에 눈썹을 꿈틀댔다. 그는 잠시 입을 달싹이다 뒤늦게 말을 보탰다.
“어쩌면…… 그건 크리세우스의 짓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네?”
“사실 그런 여론이나 소문을 만드는 것도 그들이 하던 일이라서요.”
“아……. 그럼, 설마 아스테인 님을 신전 밖으로 끌어내려고 그랬을까요?”
“제가 그때 정말로 모든 것을 버리고 프레이아 님의 곁으로 갔다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녀석입니다.”
크리세우스에게 괜히 미안해졌다.
그의 희망과 꿈을 뺏은 사람이 나인 것 같아서.
“그리고 녀석이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폐하를 정말로 싫어하거든요.”
“왜요?”
“제 어머니가 황후가 된 일로 황제의 외가에서 반발이 컸습니다. 제 어머니가 황제의 어머니를 암살했다고 굳게 믿었으니까요.”
말을 이어나가는 아스테인의 얼굴이 밝지 않았다.
대충 황가의 비극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듣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배후에 블루 로즈가 있다고 생각하고 대대적인 척살에 들어갔었죠.”
“정말로 아스테인 님의 모후와 외가에서 저지른 짓이었나요?”
“후에 제가 밝힌 바로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렇게 믿은 자들은 그때 당시 블루 로즈를 없애는 일에 혈안이 되었죠.”
“그게 크리세우스 님과 관련된 일인가요?”
아스테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는 죄책감과 쓸쓸함이 가득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그는 그 무게를 지고 있었다.
“어쨌든 그 당시의 블루 로즈는 제 외조부의 명을 받아 나쁜 짓을 실제로 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크리세우스의 부모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어도 그 책임을 묻기 어려웠죠.”
아스테인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힘들어 보였다.
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로 인해 누군가의 삶이 불행해졌다. 차라리 내 삶이 망가지는 것이 나았다.
내게 소중한 사람이라면 더욱 부채감이 컸으리라.
“그 뒤, 어머니가 마차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그건 사고가 아니었다고 들었어요.”
“네, 선황제 폐하의 사생아를 낳은 제스티안의 어미가 저지른 짓이었죠. 그리고 그건 크리세우스의 부모를 죽인 자들이 뒤에서 부추겨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아…….”
복잡한 황가의 비밀을 듣고 있자니 눈이 찌푸려졌다.
분명 아스테인의 외가도 욕심을 부렸다. 블루 로즈를 동원해 더러운 짓도 했고.
그렇게 쌓아온 이미지는 오해를 불러왔고, 서로에게 상처와 불행만을 남겼다.
“크리세우스 님의 복수를 위해서 황태자가 되는 걸 포기한 거였어요?”
안타까운 마음에 나는 아스테인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가 하던 것처럼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내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그가 손에 힘을 줬다. 그리고 빙그레 웃었다.
“제 가족의 복수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걸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안 그랬으면 그 녀석의 아픔을 달래주지 못했겠죠.”
“잘했어요.”
나는 그의 손을 가져와 입을 쪽 맞춰주었다.
그러자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지난 아픔들이 내 키스에 사라진 것처럼.
“아무튼 황제가 죽은 일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겁니다.”
“어쩌죠? 미래가 바뀌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죽음이 예정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모든 게 수포가 될 텐데요……. 미래를 겪고 왔는데도 저는 전혀 도움이 안 되네요.”
내가 조금은 한심하게 느껴졌다.
데아 님이 준 신성력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미래를 안다는 장점마저 없었다.
이런 나는 너무 쓸모없는 존재가 아닐까?
“아닙니다. 그래도 그 시기에 이상한 동향이 발생한다면 미래를 아는 프레이아 님이 파악하기 좋지 않을까요?”
“그럴까요?”
“네. 그리고…….”
그가 말을 하다가 멈췄다.
아스테인은 눈을 살짝 휘었다. 그리고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프레이아 님의 존재 자체가 제게는 도움이 됩니다. 세상의 모든 용기와 희망을 가져다주는 분이니까요.”
아스테인의 달콤한 말에 나는 자제력을 조금 잃었다.
신이 내려다보는 신전에서 그의 입술을 훔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 * *
다음 날 아침, 대사제 레무스는 잠에서 깨자마자 나를 찾아왔다.
“성녀님! 선대 성녀님의 암살범이 밝혀졌다면서요?”
조금은 호들갑스러운 모습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이제 신전에 남은 유일한 대사제는 언제 봐도 남달랐다. 심지어 그의 형과도 너무 다른 느낌이라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었다.
“밝혀졌다고 말하기는 애매하네요. 일단 심문 중이랍니다.”
“누굽니까?”
“성스러운 샘을 지키던 기사들이요.”
“네? 도대체 그놈들은 왜 까도 까도 죄가 나오는 겁니까?”
레무스가 잔뜩 흥분해 소리를 질렀다.
평소의 유쾌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얼굴을 붉히며 험악한 얼굴을 하고 콧바람을 씩씩 뿜어댔다.
“그러게요. 베이트만 가문이 지금까지 충성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푸토르 후작가가 썩어가고 있었네요.”
“아니, 형님은 그런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밑에서 일하고 있었답니까?”
“글……쎄요?”
생각해보니 집사 베이트만이라면 후작가의 비밀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 있지 않을까?
비페라 베루스의 독을 둔 위치라든가, 그 독의 효과라든가.
덤으로 유테르안이 아카데미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도.
“오랜만에 집사를 신전에 불러야겠어요. 그러고 보니 감사 인사도 제대로 못 했군요.”
“굳이…… 불러야 합니까?”
레무스는 잔뜩 인상을 구기고 거부했다.
“왜요?”
“잔소리쟁이에 시건방진 인간이라 밥맛이라서요.”
나는 대사제답지 않은 그의 말투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에서는 제어되지 못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하하하. 레무스 님, 당신은 정말 특별한 사제인 것 같네요.”
“더 특별한 성녀님을 본받으려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설마요. 셀레미온은 당신을 처음 봤을 때부터 사제 같지 않다고 한걸요?”
내 말에 레무스가 눈을 모았다. 그는 잔뜩 풀이 죽은 얼굴이 됐다.
“그래서 제가 이상하답니까?”
“아니요. 편하다고 했었어요. 다른 사제들은 무섭다고 했었거든요.”
“다행이군요.”
레무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나는 그 모습을 조금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설마……?
“레무스 님이 보기에 우리 셀레미온은 어떤 아이 같나요?”
이상한 예감이 들어 슬쩍 그를 떠봤다.
“음, 글쎄요. 현명하고 밝은 성격의 착한 하녀님이요?”
그게 끝인가? 조금 긴가민가한 기분에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빙그레 웃었다.
“제가 늦둥이라 동생이 없지 않습니까? 제게도 동생이 있다면 그런 아가씨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쉽게도 그에게서 다른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셀레미온 양은 계속 신전에서 성녀님만을 모시고 살게 할 겁니까?”
“아니요, 좋은 짝이 생기면 보내줘야죠.”
“이렇게 삭막한 곳에서 짝이 생기겠습니까?”
“음…… 나중에 서임을 마치고 신전을 나갈 성기사들 중에서 고를까 하는데요?”
나는 크리세우스를 염두에 두고 말했다.
크리세우스라면 능력도 있고, 아스테인의 충복이기도 했다. 그러니 둘을 맺어주면 셀레미온을 곁에 둘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지어 둘이 부쩍 가까워진 것 같아서 둘만 좋다면 적극적으로 밀어줄 생각이었다.
“그렇군요…….”
레무스의 말꼬리가 조금 흐려졌다.
하지만 그는 금방 언제나처럼 밝은 얼굴을 하고는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일단은 형님을 불러서 후작가를 더 털어보죠.”
“그래야죠. 그럼 베이트만을 부르는 일은 레무스 님께 맡겨도 될까요?”
“네. 알겠습니다.”
* * *
그날 오후, 집사 베이트만이 신전을 찾아왔다.
오랜만에 찾은 신전을 보는 그의 눈빛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잔뜩 설렌 표정의 그는 접견실에 그려진 데아 님의 벽화를 천천히 훑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성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집사는 나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던 그는 내 뒤에 서 있는 아스테인을 발견했다.
아스테인을 향하던 시선은 잠시 뒤 내게로 넘어왔다. 반감을 가득 담은 채.
“내 옷차림에 관해 할 말이 있나요?”
“제가 아는 성녀님들의 일반적인 모습과는 너무 다르군요.”
“큰 행사가 있을 때는 성녀복을 입는걸요.”
“혹시 신도들을 만날 때도 이런 옷차림입니까?”
“공식행사가 아닐 때라면요.”
내 말이 끝나자 집사가 혀를 약간 찼다. 그 탄식은 나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레무스 녀석, 도대체 성녀님을 어떻게 모시는 거야?”
동생을 향해 불만을 쏟아낸 그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 옷은 단델리온 대공이 선물했던 옷이군요.”
“기억하는군요?”
집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내 뒤에 선 아스테인을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봤다.
“뭔가 불만이라도 있습니까?”
아스테인은 그 눈빛을 태연히 맞받아쳤다.
나는 늘 사람들이 우리 사이를 눈치챌까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아스테인은 늘 대범했다.
“아닙니다. 그런데 절 부르신 이유가 있다 들었습니다.”
“푸토르 후작가에서 집사 생활을 오래 했으니, 후작가의 비밀을 잘 알고 있을 것 같아서요.”
“후작은 교활한 사람이라 저를 온전히 신뢰하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숨기고 혼자 처리한 일도 많았습니다.”
조금은 실망스러운 마음에 눈꼬리가 내려갔다.
하지만 실망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작은 단서라도 찾아야 했다.
“후작가에서 보관하는 뱀독에 대해 아나요?”
“비페라 베루스의 독 말입니까?”
“맞아요. 거기에 독버섯을 섞었다더군요.”
“맞습니다. 베이트만 가문의 비기지요. 그걸 푸토르가에서 얻어갔습니다.”
나는 원하던 정보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집사는 내게 그 독에 관해 한참 동안 자세히 말했다.
“……그래서 중독되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려 독을 먹은 시간을 특징 짓기 힘듭니다. 게다가 사후 반응이 느려진다고 했습니다.”
아스테인과 나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대공성에서 찾았던 정보와도 통했다.
은밀히 서로 칭찬의 미소를 주고받는데 갑자기 앞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급히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선대 성녀님이 당했다는 독이 그것입니까?”
“그런 것 같아요.”
“천벌을 받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족속들이군요.”
집사는 화를 내며 손을 떨었다.
그가 진정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런 자들의 밑에서 일을 했다는 사실이 새삼 분하고 억울한 모양이었다.
“후우, 제가 한심하군요.”
“당신도 속은 거죠. 대놓고 내게 그 독을 보여줬던 걸 보면,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둔 걸 거예요.”
“소후작은 성녀님이 돌아가신 뒤에 나타났다고 하니 빠져나갈 구멍이 많군요.”
아스테인이 맞장구쳤다.
일단 독 문제는 이 이상 밝힐 구석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이제 알아야 할 것은 유테르안의 사생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