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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64화 (64/101)

64화. 유테르안의 초대

아스테인은 파미르 공녀를 찾으러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찾는 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황제와 그 여자가 2층 복도를 걷고 있었으니.

그들을 놓칠세라 빠르게, 그러나 숨죽인 채 계단을 올랐다. 2층 끝에 다다랐을 때 즈음,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공녀, 네가 해야 할 일이 뭔지 잘 알고 있겠지?”

“네, 알고 있습니다.”

“제대로 해야 할 거야. 생각보다 만만치 않거든.”

“확실히 책임져 주시는 거죠?”

황제는 공녀의 말에 껄껄껄 웃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목소리는 영 서늘했다.

“네가 할 일부터 똑바로 하도록.”

“심려 놓으세요. 이 일에 더 안달이 난 건 저니까요. 빼앗긴 것들을 다 돌려받아야죠.”

멀리서 둘의 대화를 듣던 아스테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얼굴에는 잔뜩 불쾌함이 올라와 있었다. 파미르 공녀의 추악한 열등감이 아스테인의 피부에 소름을 돋게 했다.

어쩌면 히르쿠스와 웨르를 지나치게 몰아붙이게 했던 일도 다른 의도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스테인은 손등에 힘줄이 솟은 것도 모르고 황제와 공녀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더는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다시 1층으로 소리를 죽이고 내려갔다.

아스테인은 문 앞 기둥에 팔짱을 끼고 기대서서 눈을 감았다.

“단델리온 대공 아니십니까?”

때마침 건물 안으로 들어오던 시종장이 아스테인을 발견했다.

“황제 폐하를 뵈러 오신 것입니까?”

“아니다. 공녀와 할 말이 있다. 폐하와 대화하고 있는 것 같으니 잠시 기다리도록 하지.”

아스테인의 반응에 시종장은 연신 머리를 갸웃하면서도 별말 없이 그대로 2층으로 올라갔다.

힐끗 보니 시종장은 그대로 황제에게 달려가 뭔가를 보고했다.

그러자 황제가 아스테인 쪽으로 고개를 잠시 내밀었다.

곧, 황제는 자신의 수행원들을 이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연이어 작고 경쾌한 발소리가 계단을 따라 내려왔다.

“대공님!”

그리고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스테인이 얼굴을 굳힌 채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에 파미르 공녀의 얼굴에서 잠시 미소가 사라졌다.

하지만 다시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에게 친근하게 굴었다.

“지금은 성녀님이 계시지 않으니, 어릴 때처럼 불러도 되는 거죠? 아스테인…….”

“내 이름은 성녀님에게만 허락했습니다.”

단호한 그의 거절에 공녀의 얼굴에서 다시 웃음기가 사라졌다.

“죄송해요. 하지만 우리는 곧 약혼할 사이인데 이름도 못 부르면 너무 딱딱하게 느껴지잖아요.”

“아니요.”

“하긴, 호칭은 나중에 다시 정정하면 되죠. 우리가 마지막으로 교류한 일이 오래되기는 했네요.”

“내 말의 의미를 잘못 알아들었습니다.”

“네?”

말문이 막힌 공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스테인은 순수하고 맑은 녹색 눈을 노려봤다.

공녀는 아스테인의 싸늘한 기운에 들썩이던 입을 다물었다.

“내게는 약혼도, 결혼도 없습니다.”

“하지만 황명으로…… 아니, 성녀님께서도 허락하신 일이잖아요. 제국과 신전의 미래를 위해서도 우리의 약혼은 반드시…….”

“공녀, 다시 말할까?”

계속해서 매달리는 공녀의 모습에 아스테인의 말투가 바뀌었다.

“설령 황명으로 약혼을 한다고 하더라도, 내 비의 자리는 네 것이 될 수 없다. 그건 몸도,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허울 좋은 허수아비 약혼녀라도 되고 싶은 것인가?”

“……상관없어요.”

“공녀가 연모하는 이가 따로 있으면서도?”

아스테인이 정곡을 찌르자 파미르 공녀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분한 건지, 서글픈 건지, 입술까지 잘근잘근 씹어댔다.

“제가 연모하는 분은 대공님이세요. 잘 아시잖아요. 어린 시절부터 저는 대공님만 마음에 담은걸요.”

아스테인은 잘게 한숨을 내뱉었다.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떴을 때, 그의 눈에는 연민이 약간 남아 있었다.

“왜 자신을 속이는지 모르겠군. 하긴 어릴 때부터 그랬지.”

“……!”

“그런데 공작이 과연 나와 공녀의 약혼을 허락할까?”

“당연히 기뻐하시죠. 예전부터 대공님과 가족의 연을 맺고 싶다고 하신걸요.”

아스테인이 조금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그의 웃음에는 따스함이 전혀 없었다.

“아니, 공작은 불에 타는 줄도 모르고 불길을 향해 뛰어드는 공녀를 보며 후회할 거야. 가신들의 반대에도 입양한 양녀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 나길 원하지 않을 테니까.”

“대공님!”

“욕심 때문에 본인과 가문을 망치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아스테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공녀는 다시 입술을 물어뜯었다.

그리고 조용히 읊조렸다.

“이미…… 늦었어요. 이젠 성녀의 흉내도 낼 수 없다는 내게 그가 실망했다고 말한 순간, 나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요.”

* * *

나는 아스테인이 들어간 건물 쪽으로 눈동자를 힐끗 돌렸다.

유테르안이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 몰라 불안했다.

그나마 크리세우스가 있어서 그가 더 다가오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부탁할 게 뭐죠?”

“가까이에서 말하고 싶은데요.”

“잊었나요? 당신과 당신 아버지는 죄인이라는 걸?”

유테르안은 내 비꼼에도 당당하게 웃고 있었다. 조금은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흐음, 죄인이라. 죄인이 제출하는 증거는 더 믿지 못하겠군요. 필요 없는 증거는 버리도록 하죠.”

유테르안은 살짝 비꼬듯이 말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약병을 바닥에 던질 듯이 위협했다.

“아, 진짜. 어이가 없네. 어디서 협박이야?”

그 모습에 잔뜩 약이 오른 크리세우스가 유테르안의 팔을 붙들려고 했다.

하지만 유테르안이 빨랐다.

그는 바닥에 힘껏 약병을 던져버렸다.

약병은 힘없이 산산조각이 났고, 그 안에서 새어 나온 검푸른 액체가 흙으로 스며들었다.

“뭐야! 이게 증거라고 해놓고는!”

크리세우스는 바닥에 떨어진 병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독인데 만져도 되는지 망설이며 손을 뻗었다 거두어들이기를 반복했다.

어차피 액체는 한 번 쏟아지면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을.

“아, 진짜 이게 뭔 짓이냐고!”

크리세우스는 잔뜩 짜증이 난 채 발을 동동 굴렀다.

나는 그걸 지켜보다 시선을 돌렸다. 유테르안을 쳐다보는 눈은 저절로 가늘어졌다.

“소후작, 당신…….”

“집에 마지막 한 병이 더 있습니다.”

유테르안은 기묘한 웃음을 지었다.

눈은 뱀처럼 뜨고 한쪽 입꼬리만 올리는 꼴이라니.

비틀린 욕망은 그가 입 밖으로 내보이지 않아도 훤히 보였다.

“그래서 그걸 가지고 나와 협상이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선대 성녀님을 죽인 독이 무엇인지는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증인을 확보했다면서요?”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걸 들고 나타난 거죠?”

“그냥, 누님이 오늘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황제가 계획하고 있는 일이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건지를 알게 되었다.

“생각보다 편해 보이네요?”

“내가 어떤 얼굴이길 바랐는데요?”

“연인을 잃고 애달파 울상인 얼굴?”

“안 됐네요. 그럴 일은 내게 없으니까.”

코웃음을 쳐줬다. 그러자 유테르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그놈이 연인이라는 걸 인정한다는 뜻이야?”

소름 돋는 그의 목소리와 시선에 나는 진저리를 쳤다.

그가 갑자기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더러운 손을 뻗어 내 팔을 잡으려고 했다.

불결한 집착이 가득한 눈을 하고서.

크리세우스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유테르안의 팔을 잡았다.

“네 팔을 베어버리면 그만둘 텐가?”

그와 동시에 때마침 밖으로 나온 아스테인이 빠른 속도로 내 앞을 막아섰다.

언제나처럼 듬직한 그의 등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놓였다.

“연인의 등장인가?”

“입 다물어.”

“뭐, 상관없지. 이거나 받아.”

유테르안은 아스테인에게 무언가가 담긴 작은 봉투를 집어 던졌다.

아스테인은 그것을 가볍게 한 손으로 받아냈다.

“어머니의 기일이 돌아온 거 잊지 않았겠죠, 누님?”

나는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눈을 모았다.

“누님이 신성력을 찾고 진짜 성녀가 된 모습을 생전에 봤다면, 어머니께서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후작 부인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5년째가 되었다.

유테르안이 대놓고 날 괴롭히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어머니가 누님께 어찌 대했는지를 잊지 않았다면, 오실 거라고 믿습니다.”

유테르안은 가식적인 미소와 정중한 인사를 남기고는 유유히 갈 길을 가버렸다.

남은 우리에게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남긴 채.

유테르안이 완전히 사라진 뒤, 아스테인은 수하부터 찾았다.

“크리세우스.”

“네, 주군.”

“파미르 공녀의 움직임에 관해 조사하던 것, 마무리했어?”

“거의 다 됐습니다.”

“내일까지 마무리해서 가져와.”

나는 조금 의아한 눈으로 둘을 쳐다봤다. 언제부터 조사하고 있었던 거지?

내 눈빛을 느낀 아스테인이 잠시 눈을 찡그렸다.

“일단은 신전으로 돌아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확실히 황궁에는 우리를 지켜보는 눈이 많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에 오르자 크리세우스가 함께 마차에 탔다.

“조심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하시네요.”

“그래야죠.”

마차가 출발한 뒤 밖을 내다보았다.

아스테인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도 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조금은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턱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신전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 번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으니.

* * *

“아가씨! 황제 폐하가 대공님이랑 파미르 공녀의 약혼을 추진했다면서요?”

신전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는 동안 셀레미온이 호들갑을 떨었다.

“누구한테 그런 소리를 들었어?”

“크리세우스 님이요.”

언제 둘이 저렇게 가까워진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눈이 찌푸려졌다.

“아니, 그게…… 아스테인 님의 얼굴이 심각하길래 물어봤어요.”

“뭐, 그거야 언젠가는 알려질 사실이니까 상관없어. 그런데 크리세우스 님과 친해? 요즘 자주 어울리는 것 같다?”

“팍팍한 신전 생활에 지쳐서 같이 한탄을 하는 사이인 거죠.”

장난스럽게 웃는 셀레미온의 모습에 나도 웃음이 나왔다.

셀레미온이 나름 즐겁게 신전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비결이 크리세우스였구나.

“아무튼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요. 대공님이 다른 여자랑 약혼하면 어떡해요?”

“그럴 일 없을 거야.”

“진짜요?”

“일단은 약혼만 하고 결혼은 1년쯤 뒤로 미루면서 시간을 끌려고 했는데 아스테인 님이 절대로 안 된다고 못 박고 왔어.”

“네?”

셀레미온이 펄쩍 뛰었다. 그 아이는 어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며 눈을 크게 떴다.

순간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서 눈을 깜박였다.

“약혼이라는 소리에 아스테인 님이 화내지 않으셨어요?”

“화를 내지는 않으셨지만……. 잠깐의 약혼도 안 된다며 공녀와 결판을 내러 가셨지?”

“아이참, 아가씨도. 그래서 아스테인 님이 기분이 저조한 거잖아요.”

“그런……가?”

조금 긴가민가한 기분이 들었다.

그 부분은 나와 이야기를 잘하고 넘어갔다. 그런데도 서운함이 남은 걸까?

“그럼요. 끝까지 무조건 안 된다고 했어야죠! 나중에 그대로 결혼하면 어떡해요?”

“그야, 그때가 되면 그 명이 아무 의미가 없을 테니까.”

“왜요? 그때는 황명을 거둬 주신대요?”

“아니, 그 황명을 집행할 사람이…….”

갑자기 머리를 때리는 생각이 있었다.

회귀 전에 황제가 죽었던 이유. 그것이 과연 이번 삶에서도 적용될까?

이미 미래가 이렇게 바뀌고 있는데?

“아스테인 님은 어디 있어?”

“아가씨가 준비되면 같이 저녁 식사를 하자고 하셨어요.”

“당장 갈까?”

“네.”

식당에는 이미 아스테인이 와 있었다.

그는 크리세우스와 뭔가 심각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나타나자 입을 다물었다.

아스테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의자를 빼주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어요?”

“아까 소후작이 버린 독약 말입니다.”

“네, 그게 왜요?”

“그걸 받으러 후작가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의자 앞으로 가자 아스테인은 내가 앉기 좋게 의자를 밀어주고 자리로 돌아갔다.

“두 분 대화 나누십시오. 저는 셀레미온 양과 함께 앞에서 지키고 있겠습니다.”

우리를 위해 두 사람이 자리를 피해주었다.

둘만 남자 나는 아스테인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그가 눈을 깜박였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저 때문에 오늘 화나셨죠?”

“네? 제가 왜…….”

“황제를 만난 이후로 계속 심각한 얼굴을 하고 제대로 저를 봐주지도 않았는걸요?”

“제가 그랬습니까?”

“네.”

내 대답에 아스테인이 머리를 살짝 긁적였다. 그러더니 턱도 한번 쓸었다.

“제가 프레이아 님께 그랬다니…… 단단히 정신이 나갔군요.”

약간은 자책하는 듯한 모습에 오히려 내가 당황했다.

“아니! 그 뜻이 아니에요. 제가 잘못한 게 있었잖아요.”

“아닙니다. 생각해보니 프레이아 님의 말씀이 옳았습니다. 심지어 제가 사람을 잘못 봤더군요.”

아스테인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러자 그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커다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쓸어내렸다.

눈동자가 조금은 가늘어지는 것이 그러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계속 뭔가 답답해 보였던 그의 눈이 느긋해졌다.

그게 기분이 좋았다. 내가 그의 달콤한 밀크티가 된 기분이 들어서.

“황제와 거래를 했더군요. 블루 로즈가 대충 눈치를 채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 깊은 거래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럴 것 같았어요. 저랑 아스테인 님을 갈라놓는 조건으로 뭘 받는 걸까요?”

“그것도 있지만, 프레이아 님도 아는 사람을 위해서 일하는 모양입니다.”

나는 그의 말에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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