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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63화 (63/101)

63화. 아스테인의 약혼녀? (2)

나는 황제의 목소리에 잔뜩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그가 말하는 동생이 다른 두 이복동생이 아닌 아스테인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비틀린 미소와 가식적인 눈동자가 그 답을 너무나도 명백히 알려주었기에.

“프레이아.”

“네, 폐하.”

황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그의 눈동자에는 승자의 여유가 넘쳐흘렀다.

“황후의 아이는 무슨 일만 생기면 유산의 위험이 있다고 하고, 다른 대공들은 아직 혼인할 생각이 없고. 그래서 황실의 후계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나는 황제가 하는 말의 의미를 눈치챘지만, 모른 척 외면했다.

“황후 폐하의 아이는 제가 반드시 지킵니다. 분명 황후 폐하를 닮은 영민한 아이가 태어날 거예요.”

“아, 물론이지. 그런데 그런 내 아이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 같은 황족으로서 내 아이에게 충성을 맹세할 충복 말이야.”

나는 황제를 잠시 노려봤다.

그가 하는 말의 의미가 뚜렷해지자 속이 불편해졌다.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애써 참고 침착하게 그에게 답했다.

“황자님이나 황녀님이 많으면 든든하긴 하죠.”

“병약한 황후가 둘째를 가질 수나 있을지, 쯧쯧.”

황제는 카렌시아가 당연히 아이를 갖지 못하리라고 믿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의 말은 맞았다. 황제는 약 1년 뒤에 죽어 둘째를 볼 기회 같은 것은 없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면 세르펜스 대공부터 좋은 짝을 찾는 것이 좋겠네요. 아스테인 님은 성기사로 서임하여 그 업무를 충실히 따르고 있으니까요.”

못마땅함을 가득 실어 답했다. 황제를 향한 원망과 미움도 함께였다.

겨우 아스테인과 함께하고 있는데, 우리를 갈라놓으려는 꿍꿍이가 너무나도 괘씸해서.

“아아, 그런가? 하지만 내 동생을 대신해 성기사가 될 자는 많을 텐데?”

“제가 믿는 이는 하나이니까요.”

“성기사로서? 아니면…….”

황제의 눈빛에 흥미로움이 채워졌다. 그냥 단순한 호기심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악의로 똘똘 뭉친 궁금증에 더 가까웠다. 그건 그가 덧붙인 말로 확인이 가능했다.

“남자로서?”

내가 눈썹을 꿈틀하는 사이, 아스테인이 앞으로 나섰다.

“폐하. 함부로 말씀하지 마십시오. 이분은…….”

“아스테인, 네 첫정이잖아.”

황제의 말에 정적이 흘렀다.

아스테인은 잠시 미간을 좁혔다가 풀었다.

“저를 두고 어떤 말씀을 하든, 저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프레이아 님께 누가 될 수 있는 발언은 자제해주십시오.”

아스테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화를 억누르는지 살짝 끝이 붉어져 있었다.

“아차차, 미안 미안. 그래, 프레이아가 이제는 성녀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구나.”

황제는 흥미롭다는 듯이 입꼬리를 말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더니 파미르 공녀에게 손짓했다.

“공녀, 방금 내가 했던 말은 잊어. 사내란 이루어질 수 없는 첫정은 금방 잊을 테니 말이야.”

“저는 신경 쓰지 않아요.”

“그래, 역시 대공비로서 손색없는 마음가짐이구나.”

황제의 말에 나는 그만 감정을 드러낼 뻔했다.

그런데 나만 황제의 행동이 불쾌한 것일까? 아스테인은 너무나도 태연하게 그저 황제와 공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 전보다 더 가라앉은 목소리를 입 밖으로 내보냈다.

“저는 프레이아 님의 곁에서 성기사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혼인 같은 것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스테인의 입에서 나온 혼인이라는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는 신의 회초리가 끝난 후, 신전을 망치는 것들을 바로 잡기 위해 프레이아의 곁에서 보좌하겠다고 했지.”

“맞습니다.”

“그래서 내가 대공의 지위를 유지해 준 것이고.”

“대공의 지위는 폐하가 아닌 선황 폐하께서 내리신 작위입니다.”

“지금의 황제는 아버지가 아닌 나다.”

황제는 잔뜩 못마땅한 얼굴로 아스테인을 노려봤다. 하지만 아스테인은 물러섬이 없었다.

“선황 폐하의 유언을 잊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아스테인의 약간은 위협적인 마지막 말에 황제의 눈썹이 크게 꿈틀댔다.

“하, 웃기는구나. 언제는 선황께서 주신 작위를 반납해서라도 성기사가 되겠다고 하더니, 이제 성기사가 되고 나니 대공의 지위도 네 것이다? 내 명은 따를 생각도 없으면서?”

황제는 나와 아스테인의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가소롭다는 듯이 우리를 노려보는 그의 시선은 차가웠다.

조금 전까지 남겨두었던 작은 가식과 친절마저 사라졌다.

“폐하…….”

나는 조금 경직된 분위기를 풀기 위해 황제를 불렀다.

나와 아스테인이 꿈꾸는 미래를 생각해 억지로라도 황제의 비위를 맞춰야 했으니까.

“폐하, 단델리온 대공께서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닐 거예요.”

하지만 내 부름은 파미르 공녀의 말에 묻혔다.

내가 먼저 황제를 부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황제를 달래는 일에 앞장섰다.

“폐하의 명을 따르지 않을 거라면, 대공의 지위를 버리고 성기사로서 신전의 명만 따랐겠죠. 저는 대공께서 신전과 황실을 잇는 다리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역시, 공녀는 대공비로서 어울리는 말만 하는구나. 아스테인, 어떠냐?”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녀석, 내가 잔소리했다고 모른 척하기는. 여기 공녀와 너의 혼인 말이다.”

황제의 말에 나와 공녀의 얼굴에 열이 동시에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 의미는 누가 봐도 극명히 달랐다.

부끄러운지 살짝 몸을 꼬는 공녀를 보면서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다.

아스테인이 내 남자라고 말할 수 없는 처지가 조금 서러웠다. 데아 님이 조금은 원망스러울 만큼.

“혼인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황권 강화를 위해서라도 공작가와 황가의 유대가 필요하다. 하지만 내게는 이미 황후가 있고, 다른 녀석들은 웅크린 채 계속 내 자리를 노리고 있으니…….”

황제는 다시 여유를 찾은 듯 묘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그는 나를 슬쩍 쳐다보더니 또 나를 없는 존재로 취급하며 아스테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니 욕심을 버리고 성기사의 길을 걷겠다는 네가 가장 적격이지. 황권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나의 충직한 동생으로서 말이다.”

황제는 아스테인의 어깨를 툭툭 몇 번 치고는 몸을 홱 돌렸다.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서늘하고 건조한 목소리에서 그의 얼굴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이건, 황명이다. 성기사는 포기하고 공녀와 결혼해.”

황제는 혼인 허가서라는 말이 적힌 서류를 내밀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스테인은 단호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황제가 비뚤게 올라간 입꼬리를 우리에게 보여주며 몸을 돌렸다.

“왜? 설마 너, 아직 첫정을 못 뗀 거야? 이런, 성녀를 향해 그런 음흉한 마음을 품은 자가 성기사로서 곁에 있어서야 쓰나?”

황제는 몹시 안됐다는 표정을 하며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안 그래? 프레이아, 아니 성녀?”

“그럼요. 폐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합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역겨움을 숨겼다.

황제가 내 마음을, 그리고 우리 사이를 아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황제가 이러는 이유는 알 것 같았다.

나와 떨어진 아스테인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려는 것.

“그러니 아스테인 님, 폐하의 말씀대로 파미르 공녀와 혼인을 준비하세요.”

“프레이아 님!”

아스테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오늘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에서 평정심이 사라졌다.

그것이 기뻤다. 그를 흔들 수 있는 존재는 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단, 성기사로서의 업무를 제대로 마무리한 후에 하는 것이 좋겠군요.”

“무슨 뜻이지?”

황제의 물음에 나는 입꼬리를 한쪽만 비스듬하게 올려주었다.

아까 황제가 그랬듯이.

“아직 신전은 수습할 일이 많거든요. 그리고 이런 유능한 성기사는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요.”

“그래서?”

“일단은 선대 성녀님의 살인범을 찾아야 한답니다. 또 이제 신전에 대사제가 달랑 하나 남아 인재를 찾으러 제국 곳곳의 신전을 다녀야 하는 데 호위가 필요하거든요.”

“아스테인이 아니더라도 호위를 설 성기사는…….”

“정보가 느리시군요. 얼마 전 무능한 성기사들 때문에 죽을 뻔한 것을 아스테인 님이 구해주었답니다.”

황제는 내 대답에 입술을 살짝 씰룩댔다.

나는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쉬지 않고 아스테인이 필요한 이유를 역설했다.

“인테르가 잠잠해지긴 했지만 언제 또 마음을 바꿀지 모르는 존재들이잖아요? 또 여전히 후작가의 사람들이 날 노리고 있고요.”

황제는 마지막 말에 살짝 눈꼬리가 흔들렸다.

이번 일의 배후에도 푸토르가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건 아무래도…….

“특히 유테르안이 언제 어떤 짓을 할지 모르니 조금이라도 더 유능한 성기사를 옆에 두고 있어야겠어요.”

“황명을 무시하겠다?”

“신전은 황실을 존중하지만, 황제의 명을 따르는 존재는 아닙니다.”

단호한 말에 황제가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비록 신전의 문제로 황실에 머리를 숙였지만, 여전히 신전은 제국민들에게 존경받고 있었다. 신의 뜻을 어긴 자의 잘못이지 신이 잘못한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성녀의 신성력은 경배의 대상이자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기에, 아직은 누구도 나와 신전을 건드릴 수는 없었다.

그것이 황제일지라도.

“아, 영원히 아스테인 님을 내 곁에서 부려먹겠다는 뜻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세요.”

“무슨 뜻이지?”

“공녀가 기다릴 수 있다면 지금의 황명은 어디 보자…… 2년? 아니 1년 반만 지나면 따를 수 있으려나요?”

나는 상큼하게 웃어주었다.

1년 반 뒤에는 이 황명을 내린 자가 존재하지 않을 테니.

“저는…… 기다릴 수 있어요.”

공녀의 가녀린 목소리가 조금은 거슬렸다. 그녀를 향해 속으로 몇 번이고 외쳤다.

‘절대로 당신에게 내 남자를 넘겨주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래요. 그럼 기다리면 되겠네요. 폐하께서도 괜찮으시죠? 그럼 당장은 이 서류가 필요 없겠네요.”

나는 혼인 허가서라고 적힌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잘게 찢어 한쪽 벽에 있던 난로 안에 던졌다.

황제는 내가 아스테인을 내어줄 생각을 하지 않자 입맛을 쩝쩝 다셨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러면 파미르 공작에게 일러둘 테니, 약혼이라도 하는 것이 좋겠군.”

이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약혼이라는 것은 언제든 깨질 수 있으니까……. 공녀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가 아스테인을 지킬 방법은 이것이 유일했다.

아스테인에게 내가 아닌 다른 약혼녀가 생긴다는 사실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 * *

황제에게서 죄인을 넘겨받았다. 다시 신전의 지하 감옥으로 압송할 준비를 마친 우리는 마차가 오길 기다렸다.

“잠시…… 파미르 공녀를 만나고 와도 되겠습니까?”

태연했던 아스테인의 얼굴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저렇게 변한 건 내가 약혼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이후였다.

“만나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제 뜻을 확실히 밝히고 오고 싶습니다. 파미르 공녀에게 헛된 희망 같은 것은 주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황제를 달래려면…….”

“제가 명을 받들 사람도, 따를 사람도…… 그리고 제가 곁에 머물 사람도 오직 한 사람입니다.”

아스테인의 강인하고 단단한 눈빛에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죄송해요. 제 마음대로 결정해버렸네요. 심지어…… 공녀에게 큰 실수를 했어요.”

나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아스테인의 말처럼 헛된 희망으로 사람을 괴롭혀서는 안 됐다. 그것도 나를 위해서라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나는 고개를 숙여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아스테인의 목소리가 잔잔히 울렸다.

“그만큼 저를 아끼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압니다.”

다정한 말투에 이끌려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제 마음과 상황 때문에 다른 이가 상처받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스테인 님의 말이 옳아요. 다녀오세요. 기다릴게요.”

아스테인은 내 허락에 다정하게 웃으면서 다시 황궁 쪽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런 아스테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날 두고 그 여자를 만나러 가는 것이, 그 여자가 나중에 상처받는 것을 걱정하는 그의 모습이 섭섭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스테인을 향한 마음이 좀 더 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정말로 올곧고, 반듯하고,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다.

“흐음, 우리 가짜 누님 눈에서 꿀이라도 떨어지겠는데?”

갑자기 들린 파리가 앵앵거리는 듯한 거슬리는 소리에 나는 미간을 모았다.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유테르안이 서 있었다.

“아니, 이 비린내 나는 놈이 언제 나타난 거야?”

죄인들을 호송 마차에 태우고 있던 크리세우스가 당장 내게로 달려왔다.

유테르안과 나 사이에 선 크리세우스는 성기사들을 노려봤다.

“이 멍청한 성기사들은 도대체가 일을 어찌하는 거야?”

크리세우스의 외침에 성기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유테르안을 밀어내려고 했다.

“물러서라. 나는 오늘 선대 성녀님을 암살하는 데 이용된 독을 증거로 제출하려고 왔다.”

나는 유테르안의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 몰라서 들고 다니는 데아 님의 팔찌를 손에 쥐었다.

지금이라도 신성력의 속박을 걸어서 자백을 받아내면 되지 않을까?

“비페라 베루스의 독에 특별한 독버섯을 섞어 만든 독입니다.”

그가 내게 내민 독약 병은 내가 기억하는 것과 같았다.

회귀 전에 후작이 내게 내밀었던 독약.

역시, 그 독을 이용한 것일까?

크리세우스가 내 지시에 그것을 받으러 갔다.

“내놔.”

하지만 유테르안은 내밀었던 약병을 다시 수거했다.

“그냥은 못 드립니다.”

“뭐라고요?”

“증거를 제출하는 대신, 부탁할 것이 있거든요. 가짜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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