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나는 당신의 소중한 사람
발코니의 나무 난간이 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서졌다. 사람들은 내가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당황한 탓에 몸이 굳었는지 빠르게 손을 뻗지 못했다.
발이 허공에 닿는 순간, 나는 필사적으로 팔을 저었다. 건물 아래로 떨어졌다가는 크게 다칠 테니까.
그러면 아스테인이 너무 슬퍼할 것이다.
“성녀님!”
뒤늦게 멀리서 손을 뻗은 사람들은 날 잡아주지 못했다. 순식간에 내 몸은 발코니 아래로 떨어졌다.
발코니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지. 데아 님의 신성력으로 날 구할 수 있을까?
아스테인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마지막으로 팔을 힘껏 뻗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붙잡아 주길 바라며.
“아스테인!”
나는 소중한 이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러자 화답하듯이 내 몸이 덜컹하며 떨어지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 나를 향해 고개를 내미는 나만의 기사님.
“프레이아 님!”
내 팔을 단단히 잡아주는 커다란 손이 오늘따라 더 든든했다.
아스테인이 잔뜩 인상을 쓰고 내 팔을 힘주어 잡았다. 그는 나머지 한쪽 팔도 뻗어 내 손을 잡고는 힘껏 끌어올렸다.
아스테인의 얼굴이 고통으로 조금 일그러졌다. 그게 내 무게 때문인지, 이런 상황이 화나서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그가 나의 든든한 보호자라는 것.
“이 미친놈이! 감히 우리 성녀님을 죽이려고 했어?”
아스테인의 뒤쪽에서 크리세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에는 대공성의 기사 레프렌스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와! 이런 놈이 대사제라고 있는 거예요? 신전은 신의 보금자리가 아니라 악마의 소굴이었던 거 아닙니까?”
그리고 약간의 살이 부딪히는 소리.
아스테인이 나를 끌어올려 주고 있다는 사실에 정말 안심이 된 것 같았다. 그러니 다른 소리가 귀에 들린 것이리라.
“조금만 참으십시오.”
약간의 신음과 함께 내 몸이 쑥 위로 올라갔다.
난간이 부서진 발코니 위로 올라온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 내 앞으로 아스테인이 다가왔다.
그의 이마에는 힘을 쓰느라 흘린 땀방울이 잔뜩 맺혀 있었다. 사람들만 없었어도 그의 땀을 닦아주고 감사의 키스를 해주었을 텐데.
“움직이기 불편한 곳은 없습니까?”
“네, 괜찮은 것 같아요.”
조금 아쉬운 마음을 삼키는 사이, 아스테인이 내 몸을 구석구석 살폈다. 몸을 잘 움직이는지 일일이 확인도 했다.
그런 그의 눈에는 죄책감이 가득했다.
“아스테인 님. 오늘도 구해줘서 고마워요.”
그를 달래기 위해 감사 인사를 전했다. 하지만 아스테인은 얼굴을 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런 계획은 역시 실행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우겼잖아요.”
“정확히는 파미르 공녀의 제안이었지요.”
“그녀의 말에 동의한 것은 저예요.”
“말리지 못한 것은 접니다.”
아스테인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목소리도 커지려는 것을 억지로 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화가 많이 난 걸까?
그의 반응에 내 목소리도 조금 날카로워지려고 했다.
“그래도 결국 구해주셨잖아요.”
“하마터면 죽을 뻔했습니다.”
아스테인은 인테르의 노파가 내게 폭죽을 던졌을 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건 절벽에서 떨어지던 나를 붙잡기 위해 뛰어내리던 남자의 것과도 같았다.
그때도 지금도, 당신은 나를 정말 소중하게 여겨주고 있구나.
알고 있던 것을 다시 자각한 순간, 예민해졌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죄송해요, 궁지에 몰리면 어떤 짓을 할지 예상했으면서도 방심했어요.”
나의 사과에 아스테인의 성났던 눈썹이 겨우 풀렸다. 그리고 언제나 다정한 나의 기사님으로 돌아왔다.
“화내서 죄송합니다.”
“두 분, 다 싸우셨어요?”
아스테인의 사과와 함께 크리세우스의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팔짱을 끼고 나를 공격한 대사제를 발로 밟고 있었다. 그 옆에서 다른 대사제 웨르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크리세우스는 그 상태로 주변을 한 번 쭉 둘러봤다.
“우리가 잠깐 빠졌다고 성녀님도 제대로 못 지켜?”
크리세우스의 외침에 성기사들이 고개를 차마 들지 못했다.
그들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니까.
“아무리 대사제가 성녀를 공격할 거라고 상상을 하기 힘들다지만 말이야. 성녀님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반응을 못 하면 그게 기사야?”
크리세우스는 아직 성기사들에게 반감이 남았구나. 생각보다 꽁한 성격인가 보았다.
아스테인도 잔뜩 화난 얼굴로 성기사들을 돌아봤다.
“두 번의 기회는 없다. 다시 성녀님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순간이 온다면 성기사의 직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듬직한 아스테인의 목소리가 나를 지켜주었다. 다시는 위험한 일이 생기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처럼 느껴졌다.
“신전으로 돌아가면 제가 기사가 뭔지 제대로 가르칠게요. 괜찮죠, 성녀님?”
성기사들은 전혀 거부하지 못했다. 크리세우스가 조금은 오만해 보였는데도.
나는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차라리 저렇게 부딪치다 보면 관계가 나아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성녀님, 이 더러운 범죄자는 어떡할까요? 성녀를 살해하려 한 죄부터 물어요?”
“아니요. 그것보다 더 추악한 짓을 저지른 죗값부터 받아야죠.”
내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눈빛은 가라앉지 않았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가 전부 눈으로 간 것 같았다. 매서운 내 눈길에 옆에서 웨르가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히르쿠스의 잘못을 알고도 덮어준 죄를 용서하십시오!”
웨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그 모습이 경멸스러웠다. 가식적으로 보였고.
“히르쿠스 대사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거죠?”
“그는…… 그는…….”
“히르쿠스, 당신이 직접 말해요. 뭐가 드러나는 것이 무서워 날 죽이려고 했는지를요.”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크리세우스와 레프렌스가 히르쿠스를 내 앞쪽 바닥에 내팽개쳤다.
하지만 이 사제는 쉽게 입을 열지 않으려고 했다.
그저 겁에 질린 눈으로 바닥에 떨어진 펜던트만 쳐다보고 있었다.
“큰 죄를 지었다는 건 아나 보네요. 이렇게 벌벌 떨면서 어떻게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거죠?”
“저는…… 저는……!”
“당신으로 인해 고통받은 아이들에게 어떻게 보상할 참이죠?”
날카롭게 외치던 나는 파미르 공녀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 * *
“그날 뭘 봤다는 거죠?”
“대사제 중에서 유달리 아이들을 예뻐하던 사람이 있었어요. 어린 사제들을 관리하던 사람이었죠.”
파미르 공녀는 테이블보를 살짝 잡았다. 그런 그녀의 손이 조금은 떨렸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떠올린 듯했다.
“어린 사제들을 관리하던 사람이면 대사제 웨르를 말하는 건가요?”
“아니요. 그런 이름은 아니었어요. 오래된 일이라 얼굴도, 이름도 가물가물하긴 해요. 하지만 절대 그런 짧은 이름은 아니었어요.”
단호하게 말하는 공녀의 목소리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안쓰러울 정도로 자신을 질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제 친구를 억지로 어떤 방으로 끌고 가더군요.”
공녀는 과거를 회상하는지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에서 쥐어짜듯 나온 소리는 충격적이었다.
“겨우 열 몇 살이었는데……. 그런 아이를…….”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둘 다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다시는 웃지 못할 사람들처럼.
파미르 공녀의 묵묵한 과거 회상이 끝나자 나는 손으로 입을 잠시 막았다. 그녀에게 질문하는 내 목소리가 떨렸다.
“어떻게…… 그런 일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거죠?”
“잘 모르겠어요. 선대 성녀님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신 것 같았어요. 제가 그때 바로 용기를 내서 고백했다면 좋았을 텐데요.”
공녀는 죄책감으로 한없이 어두워졌다.
지금껏 이 어두운 과거를 마음속에 묻느라 밝은 가면을 억지로 쓰고 살았구나.
“지금이라도 증언해줘서 다행이네요.”
“너무 무서워서 그날의 기억을 지우고 싶었나 봐요. 그저 도망치는 게 상책이라 생각했어요.”
파미르 공녀도 그때는 어렸으니까.
나만 해도 얼마 전까지 후작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해서 피하려고만 했었다.
“그러면 그 상황은 기억하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모르겠다는 뜻이군요?”
“네. 하지만 이거…….”
그녀는 내게 작은 펜던트를 내밀었다.
“그 아이는 자신의 어릴 때 얼굴을 새긴 펜던트를 가지고 있었어요. 나중에 부모님이 자신을 찾을 때 필요할 거라면서요.”
나는 공녀가 내미는 것을 보면서 기억을 되살렸다.
회귀 전에 내가 대사제 웨르를 인지하게 됐던 사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푸토르 후작이 어린 사제의 목숨으로 날 협박하고 본보기로 아이들을 죽였을 때의 일이었다.
[그들의 부모님께 연락해주세요.]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네?]
[좋은 일로 죽은 것도 아니고, 대부분이 고아인 것을요. 불미스러운 일은 덮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그래서 웨르가 나쁜 일을 저질렀다고 굳게 믿어왔다.
블루 로즈가 조사한 증거도 아직은 웨르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뭔가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일단 범인이 누군지 특정해야 하는데…….”
내가 고민에 잠기자, 파미르 공녀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최근에 성녀님께서 후작가 사람들을 처리할 때도, 성스러운 샘물의 일을 처리할 때도, 단호하고 힘 있는 대처를 했다고 들었어요.”
파미르 공녀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나를 보는 눈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그 점을 이용하는 것이 어떨까요?”
* * *
공녀의 제안대로 내가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밀히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게 했다. 특히나 사라진 어린 사제를 찾는다는 말을 흘렸다.
웨르의 귀를 노리고 한 일이었다.
그리고 범인을 찾기 위해 한 가지를 더 그들의 주변에 풀었다.
“겨우 열다섯도 넘기지 못한 아이에게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하나요? 당신은 신이 두렵지도 않나요?”
히르쿠스를 쳐다보는 내 눈에 담긴 감정은 경멸 말고는 없었다.
끔찍하고 더럽게만 느껴졌다.
“아니, 죽은 클로이가 당신을 용서할 거라고 믿었나요?”
펜던트를 다시 들이밀었다. 그러자 갑자기 히르쿠스가 발작하듯 몸을 떨었다. 그는 펜던트에 그려져 있던 작고 가녀린 소녀를 손으로 밀어냈다.
“으아악! 잘못했어! 그러니까 그만 찾아와!”
히르쿠스의 발악에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웨르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내게 죄를 고했다.
“다 제 잘못입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피해자들에게 돈을 쥐여주고 사건을 은폐했습니다. 그게 신전을 위하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건 전혀 신전을 위하는 일이 아니었다. 썩은 물은 오히려 상처를 곪게 했다.
“더는 히르쿠스가 손댈 아이를 남기지 않으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신전에서 나가게도 했는데…….”
“하지만 그것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은 클로이가 어찌 됐는지 모르나요?”
“으아아, 미안해! 그렇게 노려보지 말아줘! 내가 죽을게 차라리!”
피해자의 이름을 듣자 히르쿠스가 또다시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것을 지켜보다가 웨르를 돌아봤다.
그 역시 요즘 부쩍, 예민해져 있었다.
“클로이의 유령을 봤군요?”
서늘하게 내뱉은 말에 히르쿠스는 다시 몸을 떨었고, 웨르는 약간 겁먹은 얼굴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 전략이 통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은 클로이와 닮은 아이를 그들의 주변에 맴돌게 했었다.
나는 속마음을 숨긴 채 두 사람을 엄히 꾸짖었다.
“그동안 마음 편히 발 뻗고 잤던 사람에게 너무나도 짧은 고통이네요. 물론, 이제부터 받을 진짜 고통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이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파문 이상의 벌을 내릴 생각이었다.
“두 대사제에게 파문과 함께 검은 날개의 인장을 찍겠어요.”
이것은 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파문보다도 끔찍한 벌이었다.
이마에 검은 날개의 인장을 찍은 뒤, 발에 족쇄를 차고 신전 주변을 돌며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형벌이 끝난 뒤에는 제국법의 집행을 받을 겁니다.”
신전에서 신성법으로 줄 수 있는 형벌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남은 공을 황제에게 넘기기로 했다.
그렇게 한 달간 검은 날개의 형벌이 이어졌다. 그들이 벌을 받는 동안, 나는 피해를 조금이나마 보상하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건 돈으로만 되는 일은 아니었다.
마음을 다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이제 대사제는 둘만 남았군요.”
오늘도 피해자를 만나고 돌아오는 마차에서 아스테인이 내게 말을 건넸다.
“그러게요. 이러다가 신전보다 먼저 대사제들이 사라지겠네요.”
“그것을 의도한 것 아닙니까?”
“글쎄요.”
내가 너무 서슬이 퍼렇게 날뛰어서인지, 대사제를 하겠다고 나서는 사제들이 없었다.
심지어 남은 둘 중 하나는 그만 은퇴하고 쉬고 싶다는 의사까지 내비쳤다.
그는 그나마 깨끗한 사제였는데도…….
“겉으로만 높았던 성녀의 위상을 찾은 것도 같군요.”
“그건 더 바란 게 아닌데요.”
어색하게 웃자 아스테인이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래도 잘하고 계신 겁니다.”
“다, 곁에 아스테인 님이 계신 탓이에요. 늘 내 편이라서요.”
내 말에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아스테인의 눈이 휘어졌다. 나도 그의 칭찬에 눈이 반달이 됐다.
“내일부터는 다시 성녀님을 죽인 범인을 추적해야겠군요.”
아스테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는 아직 그 일이 남았다.
어쩌면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후작의 집에서 증거를 찾아야만 하니까.
그 방법을 의논하며 마차에서 내리는데 황궁의 기사 하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황제의 메시지라며 우리에게 양피지 하나를 건넸다.
『선대 성녀를 살해한 자를 알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