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60화 (60/101)

60화. 궁지에 몰린 쥐가 물었다

성녀만을 위해 만들어진 후원에는 이제 조금은 따끔한 초여름의 햇살이 가득했다. 그래도 살랑살랑 불어오는 산들바람은 티타임을 가지기에 충분한 상쾌함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내 앞에 앉은 사람 때문에 나는 전혀 마음이 상쾌하지 못했다.

“어릴 때 와 보고 처음이네요.”

파미르 공녀는 연신 주변을 힐끗대며 신기하다는 얼굴을 했다.

“어린 사제로 먼저 신전에 들어왔었죠?”

파미르 공녀가 내 물음에 눈을 휘었다.

“네, 저도 나름 어릴 때 신비한 일을 많이 겪어 공작님께서 잔뜩 기대하고 입양하셨죠. 하지만 전혀 아니었어요.”

무덤덤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속은 편치 않을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도 그런 어린 시절을 겪었으니까.

“그래서 황후를 노렸지만, 그것도 미끄러지고……. 공작님이 그 탓에 아직 푸토르 후작가를 경계하시죠.”

양아버지를 작위로 부르는 것까지 나와 닮아 있었다. 나처럼 공작으로 인해 삶이 고달팠던 것일까?

“솔직히 저는 상관없었는데 말이에요.”

수줍게 웃는 공녀의 얼굴은 순수했다. 그걸 보는 순간 깨달았다.

나와는 다른 삶을 살았구나. 맑고 티 없이, 사랑받으면서.

“그래도 공작께서 공녀를 많이 아끼셨나 보군요.”

“네. 공작님께 매일 아침저녁으로 감사 인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부족할 만큼요.”

같은 목적으로 입양되었지만, 나와는 다르게 가족의 정을 느끼며 살았다.

회귀 전의 나였다면 그걸 부러워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었다.

비록 부모의 사랑은 받지 못하고 컸지만, 소중한 사람의 사랑을 온몸으로 받고 있으니까.

“곧 졸업한다고요?”

“네. 가을에 푸토르 소후작과 함께 졸업할 예정이에요.”

“아, 그와 같은 아카데미였나요?”

“네. 그는 정말 대단한 인재더군요. 좀 서늘한 성격이라 무섭긴 했지만요.”

공녀의 눈이 조금 반짝였다. 하지만 나는 별로 입에 담고 싶지 않은 주제를 피하고 싶어 살짝 눈을 돌렸다.

그때, 때마침 정원 주변의 보안상태를 확인하고 오겠다던 아스테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빙그레 휘어주었다.

그런데 나를 따라 고개를 돌린 파미르 공녀가 손을 들더니 아스테인을 향해 흔들었다.

“단델리온 경. 같이 차를 마셔요.”

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내가 티타임을 가져본 경험이 한정적이라 겪어 보지 못한 걸까?

손님이 다른 사람을 티타임에 초대한다고?

내가 눈을 깜박깜박 뜨고 공녀를 쳐다보자, 그녀가 얼굴을 붉혔다.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자유분방하게 커서 가끔 예절을 잊고는 하네요.”

“괜찮아요. 나도 귀족의 예법은 아직 서툴답니다.”

“이번 성녀님께서는 여러 가지로 파격적이라고 하더니 정말이네요. 감동적이에요. 공작님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찾아와 친하게 지낼 걸 그랬어요.”

내가 기억하는 파미르 공녀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꾸미지 못하고 솔직하게 말하는 건지, 눈치를 보지 않는 성격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저, 여전하죠, 대공님? 아, 아니 단델리온 경?”

아스테인은 내 뒤에 와서 서려다가 멈칫했다. 하지만 그는 파미르 공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그대로 내 뒤에 섰다.

그러자 공녀가 조금 서운한 얼굴을 했다.

“저랑 말을 섞고 싶지 않으신가 봐요.”

그 말에 아스테인이 침묵을 깨고 대답했다.

“저는 성녀님의 기사로서 이 자리에 있기에, 사적인 대화에 끼어들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스테인의 칼 같은 대답에 공녀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밝게 웃었다.

“아, 죄송해요. 그럼 나중에 끝나고 따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황제 폐하께서 전하란 말씀이 있거든요.”

“오늘 성녀님께서 외부 일정이 있어서 시간을 내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조만간 황후 폐하를 살피러 성녀님께서 황궁에 가실 예정이니, 그때 제가 폐하를 직접 뵙겠습니다.”

“알겠어요. 그리 전할게요.”

분명 공녀를 초대한 것은 나인데, 내 존재가 깔끔히 지워진 기분이 들었다.

나는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그러지 않으면 내 감정이 밖으로 그대로 드러날 것 같아서.

“그런데…… 그때의 일들을 목격했다고요?”

본론으로 들어가는 편이 좋겠지.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는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다행히 저는 공작님의 관심을 받고 있어 당하지 않았지만, 친구들이 당하는 모습을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왜 지금껏 그 사실을 밝히지 않은 거죠?”

조금은 날카롭게 질문이 나갔다. 이건 공녀를 탓하는 의미도 있었다.

하지만 내 차가운 반응에도 공녀는 인상을 쓰지 않았다. 대신 차분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신전을 믿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성녀님이 푸토르 가 출신이라서요?”

“그것도 이유 중 하나였죠. 제가 파미르의 양녀인 이상, 신전의 죄를 밝히는 것은 푸토르 가의 흠집 잡기에 불과할 수도 있으니까요.”

공녀는 조금은 슬픈 얼굴을 했다. 눈을 잠시 내리깔고는 찻잔을 한참이나 쳐다본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쨌든 제가 용기 없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네요. 그래서 친구들을 고통에서 구하지 못했어요.”

밝아만 보였던 녹색 눈동자에 짙은 어둠이 찾아왔다. 그러나 다시 내게 시선을 맞춰오는 공녀의 눈에는 아픔도 죄책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의 성녀님이라면 죄인들을 벌하고 피해자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실 거라고 믿어요.”

대신 나를 향한 믿음으로 눈을 반짝였다.

* * *

사흘 뒤, 나는 아스테인과 크리세우스와 함께 마지막 증거를 잡기 위해 외출하기로 했다.

“아가씨, 아카데미에 간다고요?”

“응. 어린 사제들이 잘 지내는지도 확인해야 하고.”

“아이들이 아카데미를 좋아해요?”

“글쎄 가보면 알겠지?”

셀레미온은 이제 날이 꽤 더워졌다면서 가벼운 옷을 가져다줬다.

“이런 하늘하늘한 옷도 괜찮겠죠?”

“시원해 보인다. 그런데 이런 옷도 있었어?”

지난번에는 보지 못한 옷이었다. 이상한 생각에 셀레미온을 쳐다보자 그 아이가 빙그레 웃었다.

“크리세우스 님이 옷방에 옷을 더 채워 넣고 가셨어요. 대공님이 주문하셨대요.”

셀레미온의 말에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런 일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데…….

“잠시 외근 나가셨다가 옷가게에 너무 예쁜 옷이 보여서 주문하셨대요. 아가씨가 입으면 나비 같을 것 같다고.”

이젠 얼굴이 완전히 붉어졌다. 이런 소리를 듣고 부끄러워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스테인 님이……. 그런 소리를 막 하고 다니지는 않으셨을 것 같은데?”

내게는 표현을 많이 하지만 그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닭살 돋게 표현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그러자 셀레미온이 눈을 빙그레 휘었다.

“에이, 아가씨는 대공님을 너무 잘 알아.”

놀리는 소리에 내가 눈을 가늘게 뜨자, 셀레미온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 쳤다.

그래놓고는 건너편에서 내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대답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의 시선이 좀 바뀐 것 같아요.”

“뭐가?”

“처음에는 아가씨가 평상복을 입고 다니면 다들 두 눈을 크게 뜨고 왜 저러냐며 쑥덕댔거든요. 그런데 요즘에는 어떤 예쁘고 편한 옷을 입나 궁금해하더라고요.”

“그래도 성녀복을 입고 나가면 다들 더 좋아하잖아.”

아무래도 그런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다.

모두에게는 여전히 하얀 옷의 성녀를 향한 기대감이 있었다.

“자, 다 됐어요.”

준비를 끝낸 나는 문을 나섰다. 그곳에는 오늘도 나의 기사님이 에스코트를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대사제들은요?”

“다들 출발할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그럼 이제 시작하면 되는 거겠죠?”

아스테인이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것이 너무나도 듬직하게 느껴졌다.

“혹시나 궁지에 몰린 자가 물 수도 있으니 언제나 조심해야 합니다.”

“자신을 조사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까요?”

“겁먹은 듯이 몸을 사리고 있었습니다.”

일단 지금까지 그와 주변 인물들의 태도를 봤을 때, 모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가볼까요?”

아스테인은 나를 마차까지 안전하게 에스코트했다.

오늘 마차 안의 호위는 크리세우스가 맡기로 했다. 너무 자주 아스테인이 마차 안으로 들어가면 오해를 받을까 봐.

물론, 내 옷차림이 자주 흐트러져서 그걸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말에 오른 아스테인이 발을 구르려 했다.

“대공 각하! 큰일 났습니다!”

그때 갑자기 아스테인을 향해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나도 아는 얼굴이었다. 대공령의 기사 레프렌스, 그가 잔뜩 얼굴이 굳은 채 찾아왔다.

“무슨 일이지?”

“대공령에 큰불이 났습니다!”

다급한 레프렌스의 말에 아스테인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그는 내 성기사이기 이전에 여전히 단델리온 대공이었으니까.

“성에 상주하는 기사들이랑 대공령에 사는 사람들을 총동원해 불을 끄고 있기는 한데, 아무래도 주군이 없어서인지 제대로 수습이 안 되고 있어요!”

나는 아직 망설이는 아스테인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그가 말을 탄 상태에서 내게 왔다. 그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아스테인 님.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크리세우스 님도 데리고요”

“하지만 성녀님의 호위는…….”

“신전에 다른 성기사들도 많잖아요. 그리고 대사제들과 함께 가는 거니까 전혀 걱정하지 말아요. 대공령의 사람들이 우선이니까 얼른 가요.”

나의 거듭된 설득에 아스테인은 결국 대공령을 향해 출발했다. 크리세우스까지 데리고…….

그는 몇 번이고 내게 작은 목소리로 당부했다.

“혹시 위험한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하십시오.”

“설마요. 사람들을 이렇게나 많이 데리고 가는데요.”

“알 수 없습니다.”

“증거를 하나라도 더 확보하러 가는 길이잖아요. 그래도 조심할게요.”

그 탓에 내 출발은 예정보다 좀 늦어졌다.

* * *

아카데미에 도착한 뒤, 계속 내 뒤에서 작은 투정이 들렸다.

“성녀님, 굳이…… 함께 시찰하려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그건 대사제의 입에서 들린 소리였다.

물론 여럿이 아니었다. 그중에서 한 명이 끊임없이 내는 불만 가득한 소리였다.

“웨르 님은 본인이 보살피던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나는 정성껏 빙그레 웃어주었지만, 웨르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뭐가 그리도 켕기는지, 저렇게 티를 내어서야 없는 죄도 의심받을 것 같았다.

“궁금……합니다.”

말과는 달리 아이들을 절대 보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만.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이 훤히 보이는 발코니에 섰다.

“아이들이 신전에 있을 때보다 더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다들 행복해 보이고요.”

“그런 것 같습니다. 역시 꿈을 꾸는 아이들이 행복을 제일 많이 느끼는군요.”

대사제 레무스가 매사 부정적인 웨르를 제치고 대신 답해줬다.

나는 그 말에 크게 공감했다.

나도 아스테인과 함께 하는 삶을 꿈꾸기 시작하면서부터 빛을 찾았으니까.

“여기에 온 아이들은 대부분 고아라고 들었습니다.”

레무스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그는 나와 웨르를 번갈아 보다 말을 이었다.

“그런 아이들이 제대로 된 지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걱정스럽군요.”

그의 질문에 대사제들의 얼굴이 찌그러지는 것을 보니 속이 시원해졌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레무스에게 협력했다.

“그렇죠? 게다가 가문의 뜻을 거부하고 자신을 꿈을 좇은 아이들도 가문의 지원을 받기는 힘들다면서요?”

“대사제가 되면 사리사욕을 채울 기회가 많다 보니 부모들이 강요하나 봅니다.”

레무스가 입술을 슬쩍 끌어올리며 서늘하게 말했다.

하지만 자신은 아니라며 나와 레무스의 눈을 똑바로 볼 용기 있는 자는 여기에 없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그들을 잠시 노려봤다.

“아이들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하도록 해요. 기술을 배우고, 자신의 일자리를 찾을 때까지요.”

“네, 알겠습니다.”

다시 네 사제들 중에서 레무스만이 씩씩하게 큰 소리로 대답했다. 나머지의 대답은 듣고 싶어도 들을 수가 없었다.

너무 가증스럽고 역겨웠지만, 최선을 다해 감정을 숨겼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감정이 드러난 모양이었다. 레무스가 곤란해하면서 물었으니까.

“저기, 성녀님? 혹시 저희의 얼굴에 무엇이 묻었습니까?”

“네. 더러운 검댕이 잔뜩 묻어 있네요.”

나의 무심한 듯 건조한 목소리에 레무스는 손을 들어 얼굴을 뻑뻑 문질렀다. 하지만 당연히 지워지는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볼일은 다 봤으니, 그만 돌아갈까요?”

조금은 싱거운 시찰에 레무스가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아니, 이러고 돌아갈 거면 왜 데리고 나오신 겁니까? 혹시 아카데미에서 아이들을 괴롭히고 있을지 모르니 탈탈 털고 가셔야죠.”

“안 그래도 그럴 참이라서요.”

나는 아이들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3층 발코니 앞에 서서 서늘하게 웃었다.

그리고 한 사람을 정확하게 노려봤다.

“이제 털어볼까요? 얼마나 더러운 짓을 했는지 확인해야죠.”

나는 주머니에 넣어뒀던 펜던트를 하나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속에 그려진 작은 초상화를 사람들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웨르 님, 이 아이를 아나요?”

웨르가 불안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는 내게 고개를 내밀었다. 그의 눈은 순식간에 커졌다.

“아니, 이 아이는! 클로이?!”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옆에 있던 대사제 하나가 달려들었다.

“으아아아!”

그 남자는 방심하고 있던 성기사들을 밀쳐내고 내 앞에 왔다. 그리고 나를 있는 힘껏, 뒤로 밀었다.

“꺄악!”

궁지에 몰린다 해도 이런 짓을 할 줄은 몰랐다. 그만큼 자신의 죄가 무겁다는 것을 아는 걸까?

나는 그대로 발코니 난간에 걸려 뒤로 넘어갔다. 건물 아래를 향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