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59화 (59/101)

59화. 속이 시커먼 사람들 (2)

파미르 공녀는 아스테인에게 눈을 휘어가며 인사를 건넸다. 원래 알던 사이였을까?

“이곳에서 나는 대공이 아니라 그냥 기사입니다.”

“아, 그런가요? 그럼 단델리온 경이라고 불러드려야 하나요?”

“그편이 좋을 듯합니다.”

내가 의문이 가득 찬 눈으로 둘을 바라보자 파미르 공녀가 내게 말을 꺼냈다.

“대공님의 외조부와 저희 아버지께서 친분이 있으셔서 어릴 때 자주 교류를 했답니다.”

“아, 그렇군요.”

“제가 신성력을 지니지 못해 단델리온 경의 호위를 받을 기회를 아쉽게도 놓쳤네요.”

아무런 악의가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왜 살짝 기분이 나쁠까?

“그래도 새로운 꿈을 이룰 기회를 얻어 다행이랍니다.”

“아, 아카데미 생활은 어떤가요?”

“곧 졸업이에요. 그 이후의 일 때문에 황제 폐하의 부름을 받아 귀국했어요.”

작은 의문이 들었다. 파미르 공작가와 황제는 그다지 돈독한 사이가 아니었다.

심지어 카렌시아가 황후가 된 이후로는 더 사이가 나빠졌다고 들었다.

“앞으로 자주 뵐 것 같네요, 단델리온 경. 잘 부탁드려요.”

아스테인에게 인사를 마친 공녀는 내게도 무릎을 살짝 구부려 인사를 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좋지 않은 예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황제가 또 뭔가 시커먼 꿍꿍이를 가지고 일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불안한 마음을 숨기고 장례를 진행했다.

“……당신의 충실한 날개를 거두어 가심에…….”

조금은 지루할 수도 있는 기도가 이어졌다. 솔직히 이런 뻔한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것이 관례이고 절차라서 따르고 있었을 뿐.

그래서 마지막에는 나의 바람을 담은 인사를 건넸다.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는 성녀가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태어나 모든 행복을 누리세요.”

내 마지막 기도에 몇 명 남지도 않은 대사제들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기도문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신도들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지만 유테르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이들의 시선을 외면한 채, 나는 사파이어 팔찌를 오른손에 쥐고 마지막 축복을 기원했다.

이건 자신을 위해 신성력을 쓰지 못하는 성녀를 위해 다음 대의 성녀가 보내는 헌정이었다.

처음보다 푸른 빛이 제법 옅어진 팔찌에서는 그래도 여전히 아름다운 푸른 날개가 펼쳐졌다.

“역시, 성녀님의 기적은 아름다운 광경이네요.”

“어쩌면 저렇게 매번 아름다운 푸른 날개를 만들어내는지…….”

“이번 대의 성녀님이 역대 성녀님 중에서 가장 강하다더니, 사실인가 봅니다.”

내가 오늘 신성력을 쓴 것은 단지 성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평생을 성녀와 가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워하며 살던 분을 위한 것이었다.

데아 님께서 나를 봐서라도 용서해주시길 바라며.

“이제…… 기적은 없어요.”

팔찌의 푸른 빛이 조금 더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하며, 작게 읊조렸다.

기적이라는 것은 늘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간절하게 바라는 자에게 신이 내려주는 축복일 뿐.

나는 데아 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더는 신성력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축복까지 끝난 후, 성녀님의 시신이 들어 있는 관은 화려한 꽃 마차로 옮겨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데 아스테인이 살짝 내게 붙어왔다.

“소후작이 계속 프레이아 님을 쳐다보고 있군요.”

“늘…… 그런걸요.”

“그건 그렇지만, 눈빛이 평소와는 다릅니다.”

아스테인의 말에 나는 유테르안을 쳐다봤다. 그러자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유테르안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주 흥미롭다는 눈으로.

나도 유테르안의 시선을 좇아갔다. 그러다 파미르 공녀를 발견했다.

“소후작만이 아니네요.”

나도 모르게 불퉁한 말이 튀어나왔다. 공녀가 아스테인을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내게도 독점욕이나 질투 같은 것이 있었던 걸까? 새삼스럽게 역시 성녀도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불길한 예감이 다시 찾아왔다. 황제와 파미르 공녀 사이의 일이 도대체 뭘까?

“무슨 말씀입니까?”

하지만 내 소중한 사람은 공녀의 시선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이상한 안도감과 승리감을 주었다.

“성녀님께서 떠나십니다!”

크리세우스의 외침에 꽃마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은 마차는 쓸쓸하게도 신전 주변을 한 바퀴 천천히 돈 뒤, 하늘 정원이라 불리는 작은 언덕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역대 성녀님들의 무덤이 있었다.

“관을 옮기겠습니다.”

작은 동굴 형식으로 된 무덤은 항상 비어 있었다. 그곳에 관을 안치하자마자 늘, 관과 시신이 흙이 되어 흩어졌으니까.

관을 내려놓은 뒤, 잠시 입구의 커다란 철문을 닫고 관이 사라지길 기다렸다.

사람들은 기적의 현장을 보기 위해 철문 앞에서 기다렸다. 이것이 신이 존재하는 증거라고 믿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성녀님이 하늘로 돌아간 것을 확인하겠습니다.”

대사제 레무스의 외침과 함께 성기사들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뭐야? 왜 그대로야?”

“선대 성녀님께서는 예정된 날짜보다 일찍 돌아가셨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이 아닐까?”

“이게 무슨 일이야?”

“성녀님, 이게 대체…….”

대사제들도 이번에 생긴 이변에 크게 당황했다.

신전의 비리가 드러난 상황에서 그나마 나의 대처로 한고비를 넘겼다며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했다. 그런데 또 신전에서 이변이 생겼다.

“신이 진노하신 거 아니야?”

“설마, 신전이 저지른 나쁜 짓 때문이야?”

사람들의 동요가 점점 더 커졌다.

여기서 놀라지 않은 사람은 나와 아스테인뿐이었다.

[데아 님께서 성녀님을 썩은 날개라고 칭하셨어요.]

[더는 성녀로 대우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그러니 성녀님의 시신이 사라질 일은 없었다. 시신이 썩을 기미가 없는 이유까지는 모르겠지만.

“관을 열어요.”

나의 차가운 목소리에도 성기사들은 쉽게 관을 열지 못했다. 무서운 모양이었다.

그러자 아스테인과 크리세우스가 관으로 걸어갔다.

그들이 뚜껑을 열자,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한 얼굴의 성녀님이 누워 계셨다.

나는 관 옆으로 가서 시신을 살피는 척했다.

“성녀님은 독살당했어요. 데아 님께서는 그 진실을 밝히라고 선대 성녀님을 데려가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파문이 사람들 사이에 번져나갔다.

지금까지 성녀를 죽이려던 사람은 없었다. 인테르를 제외하고는.

“인테르의 짓 아냐?”

당연하게도 사람들의 입에서 그들의 이름이 올랐다.

하지만 나는 이 소란 속에서도 표정이 바뀌지 않은 단 한 사람을 발견했다.

“유테르안……. 설마 당신이……?”

내 혼잣말이 끝나기도 전에 후작과 유테르안이 내 앞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후작은 내 앞에서 눈물을 지었다.

“프레이아, 선대 성녀님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다오.”

유테르안은 내 오른손을 덥석 잡았다.

“고모님을 해친 자가 있다면, 반드시 내가 그 목을 벨 겁니다!”

어쩐지 이것이 가증스럽게 들렸다.

* * *

마지막 장례 일정이 끝나고 사흘이 지난 날 밤. 나는 아스테인의 품에 안겨 말을 타고 있었다.

제법 후덥지근해진 밤공기를 가르며 우리가 향한 곳은 단델리온 대공성이었다.

“성에 가는 건 늘 즐겁네요.”

내 목소리가 조금은 들떠 있었다. 내 머리 위에 자신의 턱을 올려놓은 아스테인에게서도 살짝 들뜬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신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군요.”

같은 심정이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그렇다고 하면, 정말로 아스테인이 행동으로 옮겨버릴까 봐.

“너무 늦게까지 찾느라 고생하지는 마십시오. 이미 너무 피곤해 보입니다.”

그날 이후 매일같이 대공성을 찾아갔다. 그리고 새벽 해가 뜨기 전에 신전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독의 정체를 밝히지 못했다.

카이룰라 백작의 서재에 있는 수많은 독초에 관한 자료 속에는 아쉽게도 성녀님의 증상과 관계된 것이 없었다.

“오늘이면 남은 책을 다 뒤질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오늘은 어느 독인지 찾아내겠죠.”

그것만 찾는다면 그 독의 출처를 추적해나가면 된다. 그건 블루 로즈의 도움을 받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도 관련된 내용은 없었다.

“에이티스를 소량 사용하면 일시적으로 체온을 가사 상태까지 떨어트려 생체 반응을 늦출 수 있다. 하, 이게 끝이네요.”

내가 실망한 반응을 보이자 아스테인이 마주 보는 자리에서 나를 위로해줬다.

“여기 있는 자료는 독초밖에 없으니까요. 동물의 독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후작이 내게 건넸던 독약. 비페라 베루스의 독.

나는 후작의 집에 있는 독을 아스테인에게 설명했다. 바보같이 왜 이것을 놓치고 있었을까?

“하지만 뱀독은 바로 중독 현상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내장기관이 다 녹아내려 피를 토해낸다던가요.”

아스테인은 혹시 다른 정보가 없을까, 내가 내려놓은 책을 한 장씩 넘기고 있었다.

“후작이 그렇게 쉽게 발각될 독을 내게 건넸을 리가 없어요.”

책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스테인의 손에는 잔뜩 구겨지며 찢어진 책이 한 페이지 들려 있었다.

그의 눈에 어린 살기에 내가 살짝 어깨를 떨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나 때문에 화내준 거잖아요.”

어떤 경우에라도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이 곁에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후작이 프레이아 님께 독을 건넸습니까?”

“아, 회귀 전의 일이에요. 진짜 성녀를 찾고 쓸모를 다했으니 나를 죽이려고 했던 거겠죠.”

모든 것을 고백했던 밤에 이건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독을 건넨 것입니까?”

여전히 부들부들 떠는 아스테인의 손을 보며 내가 침착하게 말했다.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태연하게.

“자연스러운 병사처럼 보이고 싶었을 거예요. 그러니 분명 뱀독에 다른 걸 섞지 않았을까요?”

절대로 그냥 뱀독이 만든 증상은 아니었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푸토르 후작의 짓이라니……. 기가 막히는군요. 성녀님이 자신들을 버렸다고 복수라도 한 것일까요?”

“글쎄요. 게다가 범인이 후작인지, 소후작인지는 알 수 없어요. 그즈음 신전에 왔다 간 건 소후작이지만 돌아가신 후니까…….”

나는 답을 하다가 말고 생각에 잠겼다. 그들이 성녀님을 죽여서 얻는 이득이 무엇이었을까?

그런데 아스테인은 아직도 종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것도 종이를 더 많이 구겨가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스테인 님,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까 그만 화 풀어요.”

나는 양손을 아스테인의 손 앞으로 보냈다. 손가락으로 아스테인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펼쳐낸 뒤, 종이를 쏙 꺼내 쥐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손이 내 손에 들려 있던 종이를 밀어냈다.

종이가 사라진 자리를 차지한 아스테인의 손이 내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왔다.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나는 아스테인과 시선을 맞췄다.

“왜 저는 그때 프레이아 님의 고통을 눈치채지 못했을까요?”

죄책감이 그를 잠식하고 있었다. 그것이 너무 속상했다.

“아닐걸요? 아마 그때도 아스테인 님은 제게 생긴 문제를 알고 말을 걸어왔었을 거예요.”

나는 나에게 무엇이든 이루어주겠다고 맹세하던 그를 떠올렸다.

그러자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저 내가 용기가 없어서 당신이 내민 손을 잡지 못했던 것뿐이에요.”

“제가 믿음을 드리지 못했었나 보군요.”

아스테인은 속상한지 나와 눈을 맞추지도 못하고 맞잡은 두 손만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째서 이렇게 사랑스럽게만 느껴질까?

“아니요. 너무 믿었으니까 나로 인해 망가지는 게 싫었던 거예요. 당신이 날 지켜주고 싶어 했던 만큼, 나도 지키고 싶었거든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스테인이 앉은 자리 앞으로 갔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숙여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눈 위에도, 그리고 코 위에도.

입술로는 내려가지 않자 그가 잠시 눈을 찡그렸다.

“그래서 지금이 행복해요. 서로에게 숨김없이 모든 것을 공유하며 서로 지켜줄 수 있는 지금이요.”

아스테인의 눈이 빙그레 휘어지는 것이 보였다.

* * *

사흘이나 잠을 줄였기에, 나는 점심때가 되어서야 잠에서 깼다.

셀레미온은 신전의 일정을 의논하러 온 레무스에게 내가 몸이 좋지 않다고 거짓말을 해줬다. 덕분에 푹 쉬고 일어나 느긋하게 점심을 즐겼다.

“아가씨, 오늘은 무슨 옷을 입을까요?”

“적당한 거로.”

“치이, 옷을 고르는 재미를 좀 느끼면 좋을 텐데요.”

아직은 그런 재미를 잘 모르겠다. 아마도 그건 뭘 입든 예쁘다고 해주는 사람 탓일지도.

“그럼, 아스테인 님이 제일 좋아할 만한 옷으로 제가 고를게요.”

셀레미온이 신난 얼굴로 옷방으로 사라졌다. 셀레미온이 골라온 옷으로 갈아입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크리세우스가 찾아왔다.

“무슨 일인가요?”

“아가씨, 그때 그만둔 어린 사제 중에서 피해자의 신원을 찾아달라 하셨지 않습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조금 애매한 얼굴을 했다.

“찾은 거예요?”

“아니요. 피해자는 아닙니다.”

“그럼요?”

“그날 신전에서 있었던 일을 목격한 사람을 찾았습니다.”

크리세우스는 잔뜩 곤란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유를 몰라서 내가 고개를 기울이자 그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 아가씨를 만나 뵙길 원합니다.”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이에요?”

그의 애매한 반응에 내가 재차 물었다. 그러자 그의 목울대가 잠시 움직였다.

“네. 그, 파미르 공작가의 막내요.”

나는 얼마 전에 만난 검은 머리의 여자를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어쩐지 계속 얽힐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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