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가장 신뢰받는 기사
셀레미온의 다급한 음성에 나는 살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놀란 셀레미온을 진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스테인 님이 알아서 해결하신다고 했어. 괜히 끼어들어서 내가 참견하면 곤란하실 거야.”
“하지만요. 수십 명의 성기사를 두 분이 상대해야 한다고 했는데요?”
“응?”
나는 하필 그 소리에 과거의 망령을 떠올려버렸다.
신전의 기사들과 후작의 기사들이 아스테인을 노리고 덤벼들었던 그때를.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얼굴이 하얘졌어요.”
“응. 그런데 아스테인 님은 어디에 계셔?”
입에서 조금 떨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들어도 잔뜩 겁을 먹은 목소리였다.
“성기사의 숙소 뒤편에 연무장이 있어요. 거기서 결투하신대요.”
어딘지 잘 알고 있었다.
회귀 전의 내가 아스테인이 훈련하는 모습을 몰래몰래 훔쳐보던 곳이니까.
다급히 다리를 움직여 그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치렁치렁한 성녀복이 거슬렸다.
“정말 거추장스러워.”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상황에서 옷을 갈아입을 여유는 없었다. 성녀복 때문에 걸음이 느려지자 계속 짜증은 쌓여갔다.
그러는 중에도 심장은 불안함에 이상하게도 벌렁벌렁 뛰었다.
“아가씨, 이쪽이에요.”
셀레미온이 가리킨 곳으로 뛰어가던 나는 결국 기다란 치맛자락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꺄악, 아가씨! 안 되겠어요. 일단 옷부터 갈아입어요.”
* * *
연무장에서 가까운 방에서 셀레미온이 옷을 가지고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빠르게 갈아입고 다시 뛰었다.
한참이나 시간이 걸렸기에 늦은 건 아닐까 걱정됐다.
“아가씨, 손바닥에 멍이 들었어요. 손목에도 쓸려서 상처가 났잖아요.”
뛰어가는 동안 셀레미온은 계속 속상해했다. 하지만 그런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 저긴가 봐요.”
셀레미온이 가리킨 곳에는 훈련용 더미가 한쪽에 쌓여 있는 연무장이 있었다. 그곳은 횃불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연무장의 한가운데에는 아름다운 은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아스테인이 있었다.
그리고 흉흉한 눈빛을 한 성기사들이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나머지 절반 정도 되는 기사들은 연무장 밖의 크리세우스를 둘러싸고 있었고.
“흐읍.”
갑자기 숨을 쉬는 게 버겁게 느껴졌다.
“성녀님! 오셨습니까?”
나를 발견한 크리세우스가 내 옆으로 달려왔다.
그가 큰 소리로 인사하자 모두가 나를 돌아봤다.
아스테인은 날 발견하고 눈부시게 웃었고, 성기사들은 당황했는지 조금 우왕좌왕했다.
나는 애써 숨을 고르고 태연한 척하며 대답했다.
“다들 훈련하느라 바쁜가 보네요.”
얼굴에서 불편함은 완전히 숨겼다. 대신 억지로 얼굴에 호기심을 채웠다.
“지금 아스테인 님이 하는 건 대련인가요?”
“에이, 성녀님도 참, 저게 어딜 봐서…….”
“대련의 일종입니다.”
그때 한 성기사가 크리세우스의 말을 끊어내고 대답했다.
가늘게 눈을 뜨고 그 기사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의 눈에 작은 동요가 있었다.
“뭐? 이 뻔뻔한 놈들이……!”
“크리세우스 님. 그만요.”
내가 말리자 크리세우스는 씩씩대면서도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아스테인 님이 설마 이기지 못할 것 같아요? 신께서 인정하여 글라디우스까지 하사하셨는데?”
이건 일종의 주문이었다.
오늘은 그가 지켜야 할 짐이었던 내가 없으니 그때처럼 다치지 않을 것이다.
“뭐, 물론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겠죠. 게다가 거의 매일같이 저런 식으로 저랑 애들을 굴렸었으니 익숙하기도 할 거고.”
크리세우스가 잠시 오싹한 듯이 몸을 떨었다.
아마도 아스테인에게 많이 당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크리세우스가 내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내게 빠르게 설명했다.
“문제는 저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비겁한 수를 쓸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나는 눈을 찌푸렸다. 크리세우스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도 나를 따라 눈을 찡그렸다.
“뭐, 눈에 모래를 뿌린다든가, 시야를 가리고 암기를 던진다든가 그런 거요.”
크리세우스가 성기사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자 아까 내게 말을 꺼냈던 기사가 발끈했다.
“우리는 신전을 지키는 성기사다. 그런 비열한 수를 쓰는 시정잡배가 아니다.”
“하! 웃기시네! 나랑 할 때도 그랬잖아! 내 눈에 들어온 건 뭔데?”
크리세우스의 말에 나는 다시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성기사는 크리세우스의 말에도 전혀 미안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싸우다 보니 바닥의 먼지가 날린 것이다. 우리는 명예로운 성기사다. 성녀님과의 친분을 이용해 우리를 모함하다니! 사과해!”
“웃겨! 누가 사과받아야 하는 건데? 그 비열한 짓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겼을 승부를 무승부로 만들어놓고 명예 좋아하시네!”
크리세우스가 잔뜩 화나서 소리를 질렀다.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블루 로즈의 수장으로서 무승부로 끝났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많이 상한 걸까?
“우리 주군의 몸에 조금이라도 위해가 되는 짓을 하기만 해 봐!”
지금 연무장 가운데에 서 있는 아스테인을 향한 걱정도 있었구나.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왠지 옆에서 살짝 겁먹은 얼굴로 기사들을 돌아보는 셀레미온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둘 다 자신의 주인을 정말 소중히 여기는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기사들은 내 미소의 의미를 오해한 것 같았다. 크리세우스를 편애하는 것으로.
“성녀님, 선대 성녀님 때부터 신과 성녀님께 충성을 다한 저희를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서운합니다.”
“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의문은 있네요. 왜 굳이 이런 식으로 훈련을 하는 거죠? 위험할 수도 있는데요?”
속이 뻔히 보이는데도 말할 수 없었다.
편애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비록 진심으로 믿고 신뢰하는 기사가 오직 아스테인 하나라고 할지라도.
“성녀님. 이번에 인테르의 습격 때도 그렇고 적이 한꺼번에 덤비는 일이 많기에, 성녀님의 측근 기사라면 누구나 이런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핑계도 좋아.”
나는 손을 들어 크리세우스가 다시 날뛰려는 것을 막아냈다.
“크리세우스 님, 잠시만요.”
그러자 크리세우스가 입을 삐죽이면서도 뒤로 물러났다.
“그럼 모래를 날리는 것도 실전을 대비하기 위해서인가요?”
“무…… 물론입니다.”
켕기는지 말을 더듬는 기사를 나는 가만히 노려보았다.
“아이고, 신을 따른다면서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잘도 말하네.”
“말조심해. 우리가 너보다 더 선배다.”
“이딴 선배는 필요 없네요. 이래서야 성녀님께서 뭘 믿고 맡기겠어? 성기사라면서 꼼수나 쓰는데?”
크리세우스는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성기사들은 내 눈치를 보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미 그들에게는 내게 총애를 받지 못한다는 박탈감이 자리 잡은 듯했다. 또는 신뢰를 잃었다고 여기거나.
“누가 뭐라 해도 신앙심으로 뭉친 우리는 성녀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된 자들이다. 너처럼 그냥 제 주인을 따라 신전에 들어온 자와는 다르단 말이다.”
그들은 이제 자기합리화를 위한 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것이 더 내 속을 거북하게 만들었다.
특히나 회귀 전, 그렇게나 나를 존경한다며 충성을 부르짖다가 돌아섰던 이들의 얼굴이 불편했다.
마음 깊은 곳에는 아직 상처가 남아 있는지도…….
“성녀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목숨을 걸 쪽은 너희가 아니라 우리 주군이거든?”
한마디도 질 생각이 없는 크리세우스 때문에 다시 싸움이 커지려고 했다.
이미 자존심 싸움이 된 탓인지 모두의 눈에 내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크리세우스.”
결국, 아스테인이 이쪽으로 걸어와서 싸움을 중재해야만 했다.
그런 아스테인의 눈동자는 차분했다. 짜증이 날 법도 한데 그에게서 그런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주군! 성녀님도 오셨는데 이런 비겁한 놈들을 상대해주지 마요. 저한테 한 것보다 더한 짓을 할지도 모르잖아요.”
“나는 차라리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한다.”
아스테인의 말에 나까지 덩달아 차분해져서 연무장에 도착한 이후 처음으로 편하게 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가씨!”
어차피 나는 신전을 없앨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성기사들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할까?
언제든 상황에 따라 내게서 등을 돌릴 사람들인데?
부담을 버리자 숨을 쉬는 게 더 편해졌다.
“아스테인 님은 황실 연회에서 나와 춤을 춘 기사인걸요. 내가 가장 신뢰하는 기사가 아스테인 님인 이유는 직접 겪고 나면 알게 될 거예요.”
아스테인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나의 신뢰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아스테인은 다시 연무장의 중앙으로 갔다. 그리고 글라디우스를 뽑았다.
“검을 떨어트린 자는 탈락이다. 바로 연무장에서 나가도록 하지.”
아스테인이 규칙을 정하고 검을 뽑는 것과 동시에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와, 아가씨! 아스테인 님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요, 너무 멋진 것 같아요!”
“그렇지?”
옆에서 셀레미온이 순수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군더더기 없는 검의 궤적과 몸의 유연함.
그때도 지금도, 아스테인은 여전히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검사였다. 그래서 황제가 더 질투하는 것일지도.
“으아, 아가씨 방금 보셨어요?”
셀레미온의 말과 동시에 나는 눈을 찌푸렸다.
비겁하게도 쓰러진 성기사 중 하나가 아스테인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자 아스테인이 비틀댔다.
“아스테인!”
그 틈을 타 다른 성기사의 검이 아스테인의 팔을 노리고 날아왔다.
하지만 그건 아스테인에게 닿지 못했다.
아스테인은 유려한 몸놀림으로 허리를 꺾으며 공격을 피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발목을 잡은 이를 발로 차서 멀리 보냈다. 또 자신의 팔을 노린 자의 검도 글라디우스로 쳐냈고.
그런 식의 비겁한 공격을 여러 번 피하면서 한 명 한 명 성기사들을 제압해 나갔다.
그러자 어느새 연무장에는 오직 아스테인 한 명만이 남았다. 물론 여전히 검을 들고 있었다.
“으아, 아가씨 드디어 끝났네요.”
“역시 우리 주군이라니까.”
나는 가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스테인이 내게 당당히 걸어오자 불만 가득했던 성기사들은 고개를 숙였다.
“이겼습니다.”
“그러게요. 잘하셨어요.”
아스테인은 뭔가 아쉬운 얼굴이었다.
내 칭찬이 부족했던 것일까?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가장 신뢰하는 기사다운 모습이었어요. 비겁한 수를 쓰지 않고도 이겼네요.”
아스테인이 눈꼬리를 동그랗게 말았다.
“다시는 저와 크리세우스의 실력에 관하여 시비 거는 이들이 없겠군요.”
“이번에도 인정하지 못한다면, 옹졸한 자라는 소문만 나겠죠.”
기사들의 귀가 빨개졌지만 반박은 없었다.
이렇게 서열정리는 끝이 났다.
* * *
“우와! 속이 시원하다!”
“아쉬워요. 크리세우스 님의 활약도 봤어야 했는데.”
“어휴, 아닙니다. 저는 우리 주군 발톱의 때 정도랄까요?”
크리세우스와 셀레미온은 우리 뒤를 따르며 재잘댔다.
명분은 우리 둘의 데이트를 보장하기 위해서.
“다친 곳은 없어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프레이아 님, 연무장에 오실 때 얼굴이 하얗게 질려 계시던데,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아스테인이 이럴 때면 깜짝깜짝 놀랐다. 도대체 언제 본 걸까?
“아스테인 님은 그런 상황에서도 나부터 관찰한 거예요?”
“그게 제 역할인 것을요.”
별거 아닌 말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두근 설레었다.
“어머나, 우리 아가씨 귀 빨개진 것 봐.”
“아, 진짜. 적당히 좀 하시죠.”
뒤에서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자 얼굴이 더 빨개졌다.
내가 걸음을 빠르게 하자 아스테인도 덩달아 걸음이 빨라졌다.
“넘어지겠습니다.”
“괜찮아요.”
“에스코트해 드리겠습니다.”
아스테인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을 겹쳤다.
그러자 아스테인이 만족하는 얼굴을 했다.
“와, 손도 잡으셨어. 낭만적이다.”
“부러우면 내가 에스코트해 줘요?”
뒤에서 계속 저러니까 얼굴의 열이 식을 틈이 없었다.
다행히 아스테인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날 위해 망을 봐주러 온 것 아니었나?”
“알았어요! 에이, 우리가 뒤로 빠져줄 테니까 마음껏 대화 나누세요.”
성스러운 샘물로 가는 길을 지났기에, 이제 복도에는 사람이 없을 참이었다.
약간 과장된 몸짓을 보인 둘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망을 본다며 사라졌다.
그러자 우리만 남았다.
아스테인과 나는 손가락을 얽은 다음 천천히 걸었다.
“아까 사실은…… 회귀 전이 생각나서 힘들었어요.”
“왜인가요?”
“날 지키려다가 아스테인 님이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공격받던 회귀 전의 일이 떠올라서요.”
내 말에 아스테인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제는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그렇겠죠?”
아스테인은 내 손을 그의 입으로 가져가 살짝 입을 맞췄다. 입술을 떼어내던 그는 미간을 좁혔다.
“손목에 또 상처를 입었군요.”
“연무장으로 뛰어가다가 넘어졌어요. 성녀복을 입고 뛰는 바람에……. 방에 가서 약만 바르면 돼요.”
“하필 아까 그 자리군요.”
그는 속상한지 몇 번이나 손을 들고 가서 손목에 입을 맞추고 어루만져 줬다.
그게 참 좋아서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성녀님? 단델리온 경?”
방 앞에서 사람이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