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56화 (56/101)

56. 성녀가 할 수 없는 일 (2)

황제는 프레이아와 아스테인이 떠난 뒤, 푸토르 부자를 두고 인상을 쓰며 사납게 말했다.

“후작, 프레이아의 경고를 들었겠지?”

“죄송합니다…….”

후작은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연신 용서를 빌었다. 그 모습에 황제는 혀를 끌끌 찼다.

도움이 안 되는 부자의 모습에 신물이 났다.

“그러니 당분간 황후 앞에 나타날 생각은 하지도 말도록.”

“알겠습니다. 그런데 신전에서의 일은…….”

“프레이아는 아주 현명하고도 대담하더군.”

프레이아에게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에 후작이 고개를 들었다.

황제는 신전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설명했다. 황제의 얼굴에는 호기심과 불쾌함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덕분에 공이 내게 다 넘어왔지. 다들 성녀의 객관적인 대처에 감동한 모양이더군.”

“……그렇습니까?”

“그래, 그래서 내가 공정하게 벌을 주지 않으면 안 되게 생겼어.”

황실이 신전보다 우위에 있는 듯 보였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더 엄격하고 공명정대한 처리를 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공격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샘의 관리자였던 자네를 처벌하지 않고 넘어가기 애매하게 됐지 뭔가? 그렇다고 황후에게 또 충격을 줄 수도 없고.”

느릿하지만 잔뜩 비꼼을 실은 황제의 말에 후작의 눈꼬리가 꿈틀댔다. 황제는 그걸 지켜보다 혀를 찼다.

“황후가 몸을 천천히 회복하길 바라게. 그래야 처벌을 미루며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황제의 입에서 다시 쯧쯧 소리가 나왔다. 그는 살짝 짜증 섞인 신음을 섞어냈다.

“덕분에 신전을 내 발밑에 두지도 못했고, 거슬리는 내 동생에게 망신을 주지도 못했군. 좋은 건수를 하나 잡았었는데 말이야.”

황제는 자신이 신전에서 봤던 광경을 생각하며 인상을 구겼다.

그러자 갑자기 유테르안이 앞으로 나섰다.

“가짜 성녀를 따르는 어리석은 자라고 망신을 줄 수는 있을 겁니다.”

황제는 또 그 헛소리냐는 눈빛을 보냈다. 듣자 하니 그 일로 유테르안이 망신을 당했다고 했었다.

그런데도 유테르안의 눈빛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황제는 말해보라는 듯 턱을 살짝 움직여줬다. 그러자 유테르안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제 작은 누이는 성녀가 할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뭐라고?”

“자신의 상처를 치료했습니다.”

유테르안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의 눈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역시 예전부터 그가 했던 추측이 옳았다.

프레이아는 성녀가 아니었다. 선대 성녀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신성력을 얻어오지도 못했을 텐데, 힘을 쓰는 것은 여전히 의문이지만.

“그렇게나 큰 힘을 지녔는데 자신을 치료하지 못한다고?”

“신성력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힘이 아닙니다. 그렇게나 막강한 존재였다면 성기사도 필요 없었겠죠.”

다른 이에게 공격받은 자들을 구하기 위해서 신성력을 쓸 수는 있어도 자신을 죽이려는 이에게 신성력으로 위해를 가하지 못한다.

그건 유테르안이 두 눈으로 목격했다. 심지어 성녀는 자신의 몸에 스며든 독도 치료하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러니 작은 누님이 지닌 신성력은 절대 자신의 것이 아닐 겁니다.”

“유테르안! 그만하거라!”

“아버지, 작은 누님이 가짜라는 사실을 밝히고 진짜 성녀를 우리가 데리고 가면 가문의 명예도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유테르안은 후작에게 당당히 맞섰다. 후작은 아들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다행이지만, 또 잘못 짚은 것이라면 이번에는 정말 회복할 길이 없을 것이다.

후작이 말을 망설이자 황제가 대신 답했다.

“요 며칠 본 프레이아의 행동이 성녀답지 않긴 했지. 그런데 그랬다가 또 아니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유테르안의 눈에 다시 집착이 차올랐다. 황제는 그런 유테르안을 보며 기묘한 웃음을 지었다.

“참, 프레이아에게는 푸토르의 피가 한 방울도 흐르지 않지?”

“푸토르의 이름과 은혜를 얻었으면서도 후작가를 버린 가문의 수치입니다.”

유테르안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황제는 그것을 흐뭇하게 쳐다봤다.

“그래, 그렇군. 그래서 가짜인 걸 밝히고 나서는 어쩌려고?”

“후작가에서 파양부터 해야죠.”

“그래. 성녀를 사칭한 마녀는 화형이던가?”

그 질문에 유테르안이 답을 망설였다. 그러자 황제가 우습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기 전에 내 동생 녀석이 그 아이를 빼돌려 도망치려 하겠지만.”

“그건 절대 안 됩니다!”

유테르안이 발끈하는 모습에 황제가 큰 소리로 웃었다. 황제의 기분이 대단히 좋아졌다.

“그래, 그래. 황후의 동생인 너를 위해 내가 선물을 하나 할까 하는데.”

“무슨 말씀입니까?”

“프레이아가 가짜라는 증거를 제대로 찾아와. 그리고 진짜 성녀, 아니 안 되면 우리의 꼭두각시가 될 가짜 성녀라도 좋으니 데려오도록.”

황제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기대하며 눈을 휘었다. 그 미소가 제법 매서웠다.

“나는 프레이아에게서 아스테인 녀석을 완전히 떼어 놓아줄 테니.”

사실 황제는 신전을 자신의 발아래에 두는 것보다, 이복동생에게 상처입히는 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

* * *

신전에 도착할 무렵이 되어서야 아스테인이 내게서 떨어졌다.

조금 걱정이 될 정도였다. 입술이 붓지는 않았을까? 머리나 다른 곳이 너무 흐트러지지는 않았을까?

열기로 뜨거워진 마차 안의 공기는 어쩌지?

밖에 있는 성기사들이 우리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을 눈치채면 어떡해?

“무슨 생각을 그리도 하십니까?”

아스테인의 부름에야 사방으로 날뛰던 눈동자가 멈췄다.

지금까지 입을 맞췄던 남자가 맞나 싶을 만큼 태연했다. 그게 조금은 자존심이 상했다.

“이러다가 밖의 기사들이 눈치채면 다 아스테인 님 탓이에요.”

“차라리 들키면 이렇게 아쉽게 떨어져야 할 일도 없겠지요.”

아스테인이 손을 뻗어 입술을 어루만졌다.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솜털 하나하나가 곤두서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건 싫어서가 아니었다. 너무 그가 입술을 오래 자극해 예민해진 탓이었다.

“제가 인내심이 없는 사람인 걸 요즘 너무 느낍니다.”

“1년 반만…… 참으면 될 거예요.”

“프레이아 님이 신전을 변화시키는 모습을 보면 정말 1년 반이면 될 것 같습니다.”

빙그레 웃던 그는 굵고 듬직한 손을 내 머리 뒤로 보냈다. 머리카락 속에 들어간 손가락이 헝클어진 내 머릿결을 하나하나 풀어주었다.

그 손길조차 예민하게 나를 자극했다. 가끔 그의 손가락이 두피나 어깨를 스칠 때면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스테인은 한참을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일에 공을 들였다.

“이제…… 괜찮은 것 같아요.”

“조금만 더 해드리겠습니다.”

“아니, 그게요. 아스테인 님의 손이 닿을 때마다…….”

“움찔하는 게 보기 좋아서 그럽니다.”

아스테인이 귓가에 속삭인 소리에 귀가 바로 반응했다. 그러자 뜨거워진 귓가를 손으로 어루만지는 아스테인의 잔잔한 웃음이 들렸다.

그게 너무 달콤했다. 그래서 마음이 놓일 만큼.

“드레스는 다행히 구겨지지 않았군요.”

아스테인은 옷까지 점검해준 뒤, 맞은편으로 멀찌감치 떨어졌다.

그는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심지어 허리까지 꼿꼿이 세우고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그러자 정말 무뚝뚝한 기사가 내 앞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이 안에서 그저 나를 지키고 있었던 사람처럼.

“가끔은 밖에서 호위하세요. 혹시나 오해받을지도 모르니까요.”

“그건…… 싫습니다. 내부 호위를 절대 다른 이에게 맡기지 않겠습니다.”

“아스테인 님? 하지만…….”

하지만 그는 더는 대답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마차가 신전에 도착해 버린 덕분에.

그는 마차가 서고 밖의 성기사들이 문을 열어주고 난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반듯하게 앉아 있던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마차 밖으로 나가 무덤덤한 얼굴로 손을 내미는 것을 애써 무표정한 얼굴로 맞잡았다.

“다녀오셨습니까?”

레무스가 마차 앞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괜히 혼자 찔린 나는 사제를 의식하다가 발을 삐끗하며 마차에서 떨어지려 했다. 아스테인은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고 내 허리를 잡아 넘어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괜찮으십니까?”

“그, 괜찮아요.”

얼굴에 피가 몰렸다. 당황하느라 말도 더듬더듬 나왔다.

그러자 레무스가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나를 마치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고 있는 강아지로 보는 듯했다.

“낮에는 그렇게 위엄이 넘치던 성녀님께서도 실수하시는군요.”

아스테인은 레무스를 살짝 노려본 뒤, 다시 내 상태를 확인했다. 레무스는 그런 아스테인을 신기하다는 듯이 관찰했다.

“레무스 님. 무슨 일이 있나요?”

굳이 나를 마중 나올 일이 없는 대사제의 모습에 내가 조금 경계를 하며 물었다.

“오늘 저녁, 선대 성녀님을 위한 기도는 비공개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낮에 있었던 소란 때문인 것 같았다.

“알겠어요. 다른 문제는 없나요?”

“신도들이 동요하고는 있습니다. 선대 성녀님의 급작스러운 서거도, 성스러운 샘물도, 모든 면에서 불신이 자라고 있긴 합니다.”

“그래요…….”

“다른 사제들도 너무 급작스러운 변화를 불안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레무스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런 의미를 담고 그를 빤히 쳐다보자, 그가 빙그레 웃었다.

“물론 저는 마음에 듭니다. 더러운 것은 찌들어버리기 전에 깨끗이 씻어내야 합니다.”

나는 레무스의 모습에 조금 괴리감을 느꼈다. 아마 그 괴리감의 원인은 그의 형일 것이다.

“집사가 들었으면 난리가 나겠네요.”

“하하, 안 그래도 제게 미친놈이라고 늘 말합니다. 괜히 사제를 시켰다고요. 대사제가 되면 신전을 말아먹을까 봐 저기 구석에 보낸 건데 말입니다.”

실없는 소리에 나는 그저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 그러자 그가 미소를 지우고 아스테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참, 단델리온 경. 같이 들어온 로세틴 경 말입니다.”

“크리세우스가 사고라도 쳤습니까?”

심각한 레무스의 얼굴에 아스테인도 덩달아 얼굴이 굳었다.

“그분이 사고를 치려는 것 같지는 않고, 다른 성기사들이 칠 것 같습니다. 로세틴 경이 참으면 넘어가겠지만……. 글쎄요?”

레무스의 말에 아스테인이 다급하게 자리를 뜨려고 했다.

“내가 따라갈까요?”

아스테인은 내 의견에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알아서 정리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날 돕기 위해서 신전에 왔다가 이런 거잖아요.”

“어느 정도의 텃세는 각오했습니다.”

아스테인의 말에 마차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아주 살짝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아마 크리세우스를 괴롭히는 것에 이들도 동참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혹시라도 걱정하느라 저희를 찾아오지는 마십시오.”

뭔가 단단한 각오가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의 말대로 내가 나설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이 내게 총애를 받는 두 사람을 시기하여 벌인 일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기사인 이상, 비겁한 수는 쓰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아스테인이 다급히 기사들의 숙소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자 레무스가 조용히 옆에서 말을 꺼냈다.

“단델리온 경은 성녀님께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군요.”

“늘 성실한 분이니까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형님의 말씀대로 참, 헌신적인 사람입니다. 오직 성녀님 한정이겠지만요.”

레무스의 말투가 뭔가 묘하게 느껴졌다. 뭔가 불길한 느낌도 들었다.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나와 아스테인을 이상하게 보는 건 아니겠지?

“셀레미온 양이 성녀복의 수선을 하나 끝냈다고 합니다. 비공개이지만, 신께 드리는 예식이니 성녀복을 입고 기도해주시겠습니까?”

“알겠어요.”

내 방으로 돌아가자 셀레미온이 옷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셀레미온은 입술을 살짝 내민 채 말없이 내게 옷을 입혀줬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시중을 받아 가며 옷을 갈아입었다.

옷을 다 입을 때까지도 셀레미온은 입을 꾹 다물었다. 평소 같으면 쫑알쫑알 많은 말을 했을 텐데.

“셀레미온, 나한테 서운한 거야?”

“아니에요.”

“아니긴. 내가 아스테인 님과의 관계를 말하지 않아서 실망한 거잖아.”

“그런 거 아니에요. 이해해요. 아가씨는 성녀니까 다른 사람에게 그런 마음을 들키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제게도 말하지 않았겠죠.”

의젓하게 말하던 아이는 이내 얼굴을 구겼다. 그건 서운한 아이의 투정이 아니었다. 서글픈 얼굴이었다.

“두 분이 그렇게 사랑하시는데……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라니요. 정말 잘 어울리는데…….”

나는 셀레미온의 대답에 그 아이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어린 동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어쩌면 나보다 더 의젓하게 다른 사람을 걱정해주는 넓은 마음을 가졌을지도.

나는 셀레미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귓가에 속삭여줬다.

“괜찮아. 우리는 꼭 이루어질 거거든.”

“정말요?”

“응. 네가 걱정해주고 응원해주니까 꼭, 그렇게 될 거야.”

우리의 계획을 간단하게 일러주고 다른 이들에게 절대 비밀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여러 번 강조했다.

그러자 셀레미온이 고개를 끄덕여줬다.

“저도 크리세우스 님처럼 열심히 도울게요.”

그 다짐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그 아이는 내게 권했다.

“아가씨가 기도하는 동안에 저는 대공님을 보고 올게요. 오늘 다른 성기사들의 분위기가 좋지 않더라고요.”

기쁜 얼굴로 뛰쳐나간 아이는 내가 성녀님을 위한 기도를 끝낼 무렵이 되어서 나타났다.

얼굴이 검은빛이 되어서.

“아가씨! 큰일 났어요! 크리세우스 님이랑 대공님이요, 성기사들과 결투한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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