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55화 (55/101)

55화. 성녀가 할 수 없는 일 (1)

대사제의 파문을 언급하는 내 선언에 접견실에는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하지만 곧, 신도들의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비페르와 빌루스는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몸을 떨고 있었다. 사제에게 파문은 인생을 부정당하는 일이었을 테니 이해가 됐다.

그런 이들을 대신해 웨르가 내게 반박했다.

“황제가 없던 죄까지 만들어 신전에 덮어씌우면 어쩌실 생각입니까?”

자신의 미래를 걱정해서 이러는 걸까?

웨르의 죄는 내가 직접 물을 텐데…….

“감수해야지요. 대신 나도 지금껏 신전이 눈감고 외면했던 모든 잘못을 샅샅이 뒤져서 밝힐 거니 각오하세요.”

나는 웨르를 향해 경고를 남기고 몸을 다시 황제에게 돌렸다.

“폐하, 나는 신전의 잘못을 깨끗이 도려내길 원합니다. 스스로 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을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신전에서 제국의 힘이 필요하다니 기꺼이 돕도록 하지.”

황제의 손짓에 친위대들이 푸토르 후작의 기사들과 두 대사제를 포박했다.

성기사들도, 나머지 대사제들도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차마 앞으로 나서지는 못했다.

주변을 감싸고 있던 신도들 사이로 그들이 끌려나가자 다시 주변은 적막에 휩싸였다.

나는 이제 노파를 비롯한 인테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인테르, 나는 당신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아요.”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다시 모였다.

“하지만 당신들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알 것 같아요.”

인테르의 생각을 인정하는 내 뜻에 작은 파문이 접견실 안에 퍼졌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막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신전도 노력할 거예요.”

“약속할 수…… 있나요?”

노파의 말투가 바뀌었다. 나는 그런 노파를 향해 조금은 따뜻하게 웃어주었다.

“그럼요.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신은 당신들을 버린 일이 없어요. 오히려 데아 님께서는 신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살길을 찾는 당신들을 언제나 대견스러워하셨는걸요.”

그날, 데아 님과의 대화에서 나는 그분의 마음을 조금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그것을 나누어주었다.

그러자 노파의 눈에 조금 눈물이 맺혔다. 평생을 집시라는 이유로 박해 아닌 박해를 받으며 살다가 아이까지 잃은 노파의 고단한 인생이 내게 전해졌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위로하는 것이 신이 내게 남긴 사명이 아닐까?

나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어 눈물을 거두어주었다.

“나는 집사들에게 덧씌워진 부정적인 이미지를 바로 잡을 거예요. 그게 신께서 내게 명한 일이거든요.”

내 다짐에 인테르를 이끌던 노파가 허리를 숙였다.

“수장의 말대로 당신을 믿어야 했군요. 당신을 죽여서는 안 된다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데아 님의 이야기였다. 아마 지난번에 이 노파가 날 두고 사라진 것도 데아 님의 뜻이었으리라.

“고맙습니다.”

“우리가 양립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만, 그래도 싸우는 것보다는 공존할 방법을 찾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돌아가도 좋아요.”

“성녀님! 이들은 신과 성녀님을 부정하는 존재입니다. 이들을 돌려보내다니요!”

당연하게도 남은 대사제들의 반발이 있었다.

심지어 내 뜻을 따라야 하는 성기사들의 눈에도 불만이 가득했다.

“언제 이들의 생각이 바뀌어 다시 성녀님의 목숨을 노릴지 알 수 없습니다. 심지어 돌아가신 성녀님을 욕보이려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나는 뜻을 꺾지 않았다.

“알아요. 그래서 나는 이번 일로 인테르에게 빚을 지운 겁니다. 그들이 신전을 부정하는 만큼, 인간의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면 목숨값을 잊지 않겠죠.”

“물론입니다. 돌아가면 지도부에 오늘의 일을 보고하여 감사를 표하겠습니다.”

“하지만…….”

“성기사는 성녀님의 뜻을 따르는 존재다.”

계속해서 반박하려는 성기사들을 아스테인이 가로막았다.

듬직하고도 묵직한 그의 말에 성기사들의 반박이 멈췄다. 하지만 표정은 영 불만스러워 보였다.

겨우 사태는 정리가 되었다. 구경하던 신도들 몇몇은 내 행동에 공감했는지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몇몇은 이해가 되지 않는지 여전히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모든 일이 정리되는 분위기가 되었다.

다시 장례를 진행할 수 있을 정도로.

“프레이아, 정말 성녀다운 모습이구나.”

내게 다가온 황제의 말투가 조금은 비틀려 있었다.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게 완벽한 조사 부탁드립니다.”

나는 다시 한번 모든 공을 황제에게 떠넘겼다. 그가 공평하지 못한 결말을 만든다면 그것 역시 황제가 감당해야 할 것이다.

특히 푸토르 후작의 일을.

“그래, 선대 성녀에게 인사를 하고 오도록 하마.”

황제는 차가운 바람을 일으키며 내 곁을 지나쳤다.

그러자 아스테인이 바로 내게 달려왔다.

주머니에 넣었던 손수건을 꺼내 들고.

“괜찮으십니까?”

잔뜩 울상이 된 아스테인의 모습에 나는 작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아프지 않아요.”

“손톱에 독이 묻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랬다면 벌써 부풀어 올랐을 거예요.”

“왜 그렇게 무모하십니까? 신성력으로는 자신을 치료할 수도 없는 것을요.”

걱정 가득한 그의 꾸중에 내 입가에는 미소만 피어오르려 했다.

“아스테인 님께서 치료해 주시겠죠.”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잊고 속마음을 내보였다.

아스테인은 손수건으로 상처를 동여맸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조심하세요. 황제가 보고 있습니다.”

크리세우스가 다급히 경고하며 우리를 떨어트려 놓았다.

곧, 성녀님의 관에 누구보다 화려한 꽃다발을 올린 황제는 인사를 끝내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의 눈동자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나와 아스테인을 번갈아 보기까지 했다.

나는 살짝 침을 삼키며 그가 입을 여는 것을 기다렸다.

“그런데 프레이아. 내가 참 이상한 광경을 보고 있구나.”

솜털이 살짝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들킨 것일까?

황제가 내 앞에서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었다. 그의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사냥감을 지켜보는 거미라도 된 것 같은 얼굴로.

“아스테인, 너는 참…… 희한하게 성녀를 모시는구나?”

“무슨 뜻인가요?”

아스테인을 걸고 넘어지는 황제의 모습에 내가 다급히 나섰다. 그러자 황제가 입꼬리를 축 늘어트리며 나와 아스테인의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그런 황제와 우리의 모습을 접견실 안의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황제는 천천히 한 바퀴를 돈 뒤, 다시 고개를 기울이며 나에게 들이밀었다.

“성녀가 이런 옷을 입고 다니는데 성기사가 곁에서 아무 말도 안 했나? 전혀 신성한 느낌이 들지 않는군. 그냥 흔한 귀족 영애처럼 보여서 말이야.”

나는 오전부터 내내 남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내가 본격적으로 예식을 집행할 일은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성녀이지 신이 아니라서요.”

단호한 나의 대답에 황제가 눈썹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아까 인테르와 대화를 나눈 것처럼, 이제 신처럼 군림하는 신전은 대륙에 없을 예정이라……. 굳이 제가 신처럼 보이는 옷을 입고 다닐 이유가 사라졌거든요.”

“그래, 그랬군. 나는 혹시 내 동생에게 조금이라도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그랬나 했지.”

황제의 대답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레무스가 우리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런 말씀은 성녀님의 명예를 떨어트리는 발언이니 자제를 부탁드립니다.”

“아아, 미안하네. 나는 내 동생이 이번에 공을 세웠기에, 내 밑에서 내게 충성하며 제국을 돌보라고 했었다. 그런데도 꿋꿋이 성기사가 되겠다고 하길래 그 이유가 성녀 때문인가 했지.”

이대로 황제가 입을 계속 놀리는 것은 좋지 않았다. 아직은 내가 신을 대리하는 성녀로 보여야 했기에.

나는 황제에게 반박하려 입을 떼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접견실로 황제의 친위대 한 명이 뛰어 들어왔다.

“폐하! 큰일 났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한참이나 하혈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 * *

나와 아스테인은 황제를 따라 다급히 황궁으로 갔다.

황후궁에는 신음을 연신 내뱉으며 허리를 구부린 황후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푸로트 후작과 유테르안이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염치없이 내게 소리를 질렀다.

“프레이아! 당장, 황후 폐하와 아이를 살려다오!”

“누님! 왜 이제 오신 겁니까? 큰 누님께서 얼마나 찾았는데요?”

적반하장이 따로 없었다.

황궁에서 온 전령은 신전에서 일어난 소동으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일의 원인을 제공한 자 중 하나면서, 나의 늦음을 탓하는 부자의 모습에 조금 실소가 나오려 했다.

“얼른 살려내란 말입니다!”

유테르안은 신전에서 다쳤던 내 손목을 붙들었다. 거기에는 여전히 아스테인의 손수건이 매어져 있었다.

손수건에 유테르안의 손이 닿는 것조차 소름 돋고 싫었다.

“비켜요.”

나는 낯이 두꺼운 부자를 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유테르안은 억지로 나를 끌고 가려고 했다.

“손을 치워라.”

아스테인이 사납게 으르렁대는데도 유테르안은 뒤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자존심 싸움할 시간이 어딨어?”

황제가 나선 후에야 유테르안이 내게서 손을 떨어뜨렸다. 덕분에 그가 건드린 손수건이 상처에서 흘러내렸다.

그걸 수습할 시간도 없이 카렌시아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황후 폐하, 내가 왔어요. 내 목소리가 들려요?”

“프레……이아. 제발, 제발 내 아이를…… 으윽.”

카렌시아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작게 퍼졌다. 내 손을 끌어 잡는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고통을 참으려는지 나를 쥔 손에는 힘줄이 솟아 있었다.

그녀의 손아귀 힘이 어찌나 센지, 조금 신음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으, 황후 폐하, 힘을 빼야 해요. 내가 폐하도, 아이도 구해줄 테니까 긴장하지 말아요.”

나는 신전에서부터 곱게 들고 온 사파이어 팔찌를 잠시 쳐다봤다.

평소라면 느리더라도 서서히 푸른 기운이 차올라야 하는 사파이어의 색이 조금 흐렸다. 회복되는 속도가 예전만큼 빠르지 않았다.

분명 당분간은 마음껏 신성력을 써도 된다고 했는데……. 조심해야 하는 걸까?

“갈아입을 옷이랑 따뜻한 물을 준비해주세요.”

말을 끝낸 나는 데아 님께 내 바람을 전할 준비를 끝냈다.

다시 한번 신의 기적을 불러오자 푸른 날개가 내 손끝에서 만들어졌다.

제발 카렌시아를, 나의 하나뿐인 언니를 살려줘요. 이번만큼은 죄 없는 순수한 아이가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길…….

나의 바람이 날개에 전해졌을까?

푸른 날개는 카렌시아를 향해 날아가 그녀 주변을 계속해서 맴돌았다.

그러자 카렌시아의 아래쪽에서 흐르는 피의 양이 점차 줄었다. 그녀의 손에 들어갔던 힘도 조금씩 줄어들었고, 고통스러웠던 숨소리도 점차 잦아들었다.

“프레……이아.”

“네, 저 여기 있어요. 괜찮아요?”

카렌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확인한 뒤, 남자들을 다 내보냈다.

옷을 갈아입히고 따뜻한 물로 몸을 데워주고. 정신이 희미하게 돌아온 카렌시아에게 약까지 먹여 재운 뒤에야 밖으로 나왔다.

“프레이아, 황후 폐하는 괜찮은 것이냐? 아이는?”

후작이 내게 달려와 질문을 퍼부었다. 그 모습이 너무 질리게만 느껴졌다.

유테르안은 더했다.

“폐하의 말로는 이미 축복을 내렸다면서요? 그런데도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성녀로서 힘이 부족한 것 아닙니까?”

“소후작, 은혜를 몰라서야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황후 폐하가 쓰러진 것이 누구 탓인지 몰라서 뻔뻔하게 구는 것인가?”

이번에도 아스테인이 푸른 망토를 휘날리며 나를 위해 그들을 막아내 줬다.

“잊지 말았으면 한다. 선대 성녀님도, 지금의 성녀님도 당신들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스테인은 후작과 유테르안을 위협해 내게서 멀리 떨어트렸다.

그걸 작게 한숨을 쉬며 바라보다 황제를 찾았다.

“황후 폐하가 정신적인 충격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그래, 그래야겠구나.”

황제의 눈이 잠시 불만스럽게 후작 부자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빛이 대단히 못마땅해 보였다.

하지만 유테르안은 황제의 눈길을 무시하고 내 팔만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이었다.

그것이 너무 찝찝해 최대한 빠른 속도로 황궁을 벗어났다.

마차에 오른 뒤, 아스테인은 조금 안타까운 눈으로 내게 말을 꺼냈다.

“고생하셨습니다.”

“황후 폐하의 일이잖아요. 우리에게는 은인인걸요.”

마차가 출발하자 아스테인은 마차의 커튼을 닫았다.

그러고는 아까 상처를 입었던 팔을 가져갔다. 그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상처가 다 나았군요.”

“데아 님이 저까지 치료하셨나 보네요.”

아까 유테르안이 본 것이 이걸까? 조금 찝찝해졌다.

“다시는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마십시오.”

손수건을 풀어내는 그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는 팔을 끌어다가 그의 얼굴 앞으로 가져갔다.

“인테르의 노파가 프레이아 님을 해치는 줄 알고 심장이 떨어질 뻔했었습니다.”

“아스테인 님이 그렇게 놀라실 줄 몰랐어요. 늘 대범하고 듬직한 사람이었는데요.”

“회귀 전에도 프레이아 님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아스테인 님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절 지켜냈는걸요?”

“제가 먼저 죽는 바람에 결국에는 프레이아 님마저 희생된 것 아닙니까?”

그는 기억하지도 못하는 과거의 일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미 아물고 없는 상처에도 저렇게 불안해하며 눈동자를 떨고 있을 만큼.

“아니요. 그때도 지금도, 당신은 날 지켜냈어요. 언제나 듬직하게요.”

아스테인은 눈을 감더니 상처가 있었던 자리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정신없는 상황과 주변 사람들 때문에 제대로 전하지 못했던 진심을 내게 전해줬다.

“다시는 서로를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 여린 살갗 위에서 움직이는 입술이 이상하게도 뜨겁게만 느껴졌다.

피부가 간질간질해야 하는데 왜 심장이 이렇게도 간지러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겹쳐졌다.

밖에는 다른 성기사들이 마차를 둘러싸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그들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했다. 그들을 잊어버렸다.

그저 아스테인의 걱정을 달래주기 위해.

나를 향한 그의 마음을 느끼기 위해.

성녀와 성기사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렇게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