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추악한 신전의 민낯 (2)
나는 손에 쥐고 있던 팔찌에 힘을 줬다. 하지만 너무 놀랐기 때문일까? 급히 뒤돌아보며 뒷걸음질 치다가 그만 팔찌를 손에서 떨어트릴 뻔했다.
그 바람에 신성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프레이아 님!”
아스테인의 경악한 목소리와 주변 성기사들의 외침이 들렸다.
노파의 손에 들려 있던 작고 기다란 것에 불이 붙었다. 그러자 그것이 요란한 검은 연기와 불꽃을 사방으로 내뿜었다.
“신전에 버림받고 희생당한 아이들의 복수다!”
알싸한 화약 냄새. 노파가 내게 던지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예전에 아스테인을 암살하려 할 때 쓰인 물건이었다.
“프레이아 님! 이리로!”
아스테인의 목소리가 연기를 뚫고 들렸다. 날개를 펼친 아이기스의 푸른 빛도 보였다.
아스테인이 내게 뻗은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나를 끌어당겼고, 동시에 노파를 발로 찼다.
노파가 비틀대는 순간, 나는 다시 팔찌를 손에 꽉 쥐었다. 아스테인의 품에 온전하게 안기는 순간, 내 손에서 신성력이 뻗어져 나갔다.
밝은 빛을 내며 터지는 폭죽은 신성한 방패 아이기스가 막아냈다. 하지만 아이기스의 뒤에서도 폭죽의 어마어마한 폭압이 느껴졌다.
방패 밖의 사람들이나 신전은 안전한 걸까?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나는 힘을 내야 했다.
고작 할 수 있는 일은 데아 님의 힘을 빌려 쓰는 것이지만.
“성녀님의 기적이다!”
기사들의 외침과 함께 연회 때의 일이 재현되었다.
* * *
성기사들은 빠른 속도로 접견실에서 일어난 소란을 정리했다.
쓰러진 집기를 세우고, 짓밟힌 꽃을 정리하고, 성녀님이 누워 계신 관의 위치를 바로 하고.
인테르의 추종자들을 줄로 묶어 무릎 꿇리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그 광경을 아스테인의 어깨 너머로 지켜봐야만 했다. 그가 날 풀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스테인 님, 이제 얼추 정리된 것 같아요.”
나는 아스테인의 품에서 꿈틀댔다. 여전히 아스테인은 날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그저 팔에 더 힘을 줬을 뿐.
나는 얼굴을 살짝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많이 놀란 것일까?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게다가 심장 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너무나도 빠르게 뛰어서 이러다 큰일이 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아스테인 님?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어디 다치지는 않았나요?”
“네. 프레이아 님은 무사하십니까?”
“그럼요. 아스테인 님이 나를 지켜줬잖아요.”
나는 그를 위해 빙긋하고 웃어주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있는 걱정과 불안을 걷어내기에 부족했다.
“아스테인 님? 나는 진짜 무사하니까 그만 놓아줘요. 주변 정리도 다 됐는데…….”
아스테인은 요지부동이었다. 그 자세 그대로 계속 그의 품으로 나를 끌어당기려 했다.
“저기, 아스테인 님? 사람들이 보잖아요.”
아스테인의 평소보다 빠른 심장 소리를 느끼며 그를 쳐다봤지만, 그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신전에서 소란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때 황제가 접견실에 뒤늦게 나타났다.
발소리가 하나가 아니었다. 아마 황제의 친위대도 우르르 몰려온 것 같았다.
그런데 황제와 그 일행의 발소리가 어느 순간 뚝, 끊겼다.
아스테인의 품에 안겨 있었지만, 황제가 우리를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을 거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아스테인 님?”
내가 다급한 마음에 다시 그를 부르며 가슴을 치자 그가 겨우 팔에 힘을 풀었다.
마지막 순간 그의 팔이 떨렸다고 느낀 것은 내 착각이었을까?
뒤로 돌아보자 황제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조금은 묘했다.
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가 접견실을 둘러봤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인테르가 신전에 찾아와 난동을 부렸어요.”
“아, 그렇군. 이런 일이 생기면 성녀는 안전한 곳으로 숨는다고 들었는데 아니었구나.”
황제의 입꼬리가 불만스럽게 비틀려 올라갔다. 그의 입에서 나온 다음 말에는 그의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뭐, 물론 내가 미리 접견실에 와 있었다면 인테르가 나와 내 기사들을 보고 겁을 먹어 난동을 피우지 못했을 텐데 말이다.”
황제의 뻔뻔함에 속으로 이를 갈았다.
하지만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황제의 비위를 맞춰가며 연기를 해줬다.
“폐하의 친위대가 밖에 있어서 그나마 외부에 있던 인테르의 추종자들이 더는 신전으로 들어오지 못했나 봅니다.”
내가 그를 추켜세워주자 황제는 대단히 만족한 얼굴을 했다.
그 모습이 보기 싫어 한마디를 덧붙여줬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인테르의 수장을 만났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인테르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인 척 굴던 그는 나의 지적에 허허 웃었다.
“나는 그들의 수장에게 인테르를 인정해 줄 수 있다고 했었단다.”
황제의 말에 대사제와 성기사들의 표정이 조금은 살벌해졌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황제는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 사고만 치지 말라고 했었는데……. 흐음, 그 여자가 말을 제대로 전하지 않은 모양이군.”
황제는 상당히 가식적인 얼굴을 하고 붙잡힌 인테르의 추종자들 앞으로 갔다.
그리고 그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래, 도대체 무슨 연유로 신전까지 쳐들어와서 난리지? 내가 너희의 수장이 한 부탁에 집시들의 거주 시설도 만들어 주겠다고 했는데?”
내 뺨이 파르르 떨렸다. 황제는 집시 출신의 인테르를 이용하기 위해 그들의 가장 가려운 곳을 이용했다.
게다가 신전을 향한 원망이 가득한 이들이었으니 움직이는 일은 쉬웠을 것이다.
“신전이 거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어제 알았다!”
내게 폭죽을 던진 노파가 소리를 질렀다.
아직 데아 님의 신성력이 그녀를 제압하고 있는지, 그녀의 몸은 조금 어색한 자세로 짓눌려 있었다.
노파는 짧은 순간, 황제에게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황제도 나도 그것을 모른 척했다.
그러자 노파가 다시 악을 썼다.
“집시 생활을 하다 병든 내 자식을 살리려 성녀를 찾아갔으나 문전박대를 당했다. 대신 신전에서 나온 이가 성스러운 물이 모든 병을 낫게 한다고 해서 전 재산을 갖다 바쳐 물을 샀다.”
고통에 울부짖는 목소리가 신전에 퍼졌다. 그 소리를 듣고 도망갔던 신도들이 하나둘 돌아왔다.
또한, 레무스와 웨르를 비롯한 대사제들도 뒤늦게 접견실로 왔다.
“하지만 그 물을 마신 직후, 아이들의 병세가 급격히 나빠져 죽었단 말이다! 배가 아프다며 뒹굴다가 피를 토하고! 그건 사람을 살리는 성수가 아니라 독약이었어!”
노파는 신성력의 속박을 이겨내고 싶은지 몸을 비틀어대며 필사적으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성기사들이 그녀를 찍어눌렀다. 그러자 노파가 불쌍하게도 고꾸라졌다.
“신전은 다 거짓말쟁이야! 신전의 힘이 없어도 우리는 잘 먹고 잘 지내왔는데! 오히려 신전의 거짓된 도움에 우리 아이들이 죽고 만 것 아니냐!”
신전을 찾은 신도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사람들의 동요가 제법 컸다.
“뭐야? 나도 그걸 사다 마셨는데?”
“우리도 큰일 나는 거 아냐?”
“설마, 신전에서 파는 것이 그럴 리가!”
불만을 표하는 사람들을 막느라 기사들이 움직여야만 했다.
나는 착잡한 얼굴로 나를 죽이려 한 여인을 내려다봤다.
“이런, 신전은 불행한 사람들을 돕는 곳 아니었던가? 어쩌나……? 나는 신전이 내 동생에게 잘 어울리는 곳이라 생각했는데……. 이런.”
황제는 아주 극적인 말투로 비꼬았다.
그의 얼굴에는 승자의 미소가 가득했다. 이번 일을 벌인 목적이 무엇인지 보여주듯이.
여전히 아스테인을 믿지 못하고 미워하는 황제가 옹졸하게 벌인 일이었다.
“집시도 나의 백성인 것을. 그런 자들을 신전이 괴롭혔다면 황제로서 신전에 그 죄를 묻지 않을 수가 없겠군.”
오만하게 나를 내려다보는 황제의 모습에서 그의 다른 마음이 읽혔다.
이번 기회에 신전을 자신의 발아래에 확실히 두고 싶어 하는구나.
하지만 나는 신전이 외부 요인으로 무너지게 할 수는 없었다. 그건 데아 님과의 약속이었다.
[성녀는 없어지더라도 신을 향한 믿음마저 사라지길 바라는 건 아니란다.]
정말 어려운 요구였다. 말도 안 되게 복잡하고 난해한 계시.
심지어 신전의 치부를 황제에게 넌지시 알린 것은 엘라네르의 모습을 빌린 데아 님이었다. 나는 그분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를 믿지 못해서 이런 장치를 미리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이제 그 뜻을 받들어야 했다.
“그렇군요. 신전에 큰 잘못이 있었군요.”
내가 인정하자 노파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분을 놓아주세요.”
“틈을 주면 또 성녀님을 습격할 겁니다.”
“신성력의 위력을 봤으니 또 덤비지는 못할 거예요.”
다시 성기사들에게 요구하자 그들이 노파를 풀었다. 그걸 확인한 나는 노파를 짓누르던 신성력의 속박부터 풀었다.
그러자 용을 쓰던 여자가 뒤로 넘어가려고 했다.
다급히 그 여자의 손을 잡으려 팔을 뻗었다. 그러자 인테르의 집시 여자는 내 오른쪽 손목을 낚아챘다. 그자의 손아귀에 잡힌 팔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그녀의 손톱이 손목에 파고든 탓이었다.
“프레이아 님!”
아스테인의 놀란 목소리에 나는 차분히 말했다.
“다들 다가오지 말아요.”
대사제들과 성기사들도 내게 달려오다 멈췄다.
“좋아요. 당신의 이름이 뭐죠?”
“이름은 알아서 뭐 하려고?”
소리를 지르면서도 노파는 나를 잡은 손에 힘을 주는 것 외에는 반항하지 않았다.
나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아니면 이것만이 내게 복수할 길이라고 생각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피해자의 이름이 적힌 문서로 공식적으로 고소장을 작성하고 신전에 접수해야, 사기꾼들을 잡고 벌하죠.”
“사기꾼들을 어떻게 믿어?”
“신전을 믿지 못한다면 황제 폐하께 고발해도 좋아요.”
나는 슬쩍 황제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살짝 기분 좋은 얼굴을 했다.
그걸 보며 나는 황제에게 한마디를 얹었다.
“어차피 폐하께서도 알고 오신 것 아닌가요?”
“내가? 무슨 소리지?”
“제가 푸토르 후작을 폐하께 보냈는걸요.”
이번에는 내가 황제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후작에게 증거를 다 받으시지 않았나요? 파문 당한 대사제 외에 누가 성스러운 샘에 손을 댔는지를 가리키는 명확한 증거들 말이죠.”
나는 뒤에서 흠칫 몸을 떨고 있던 대사제들을 향해 차갑게 웃어주었다.
“폐하께서는 참으로 제국민을 사랑하고 아끼시는군요.”
황제는 예상치 못한 나의 역공에 짧은 신음을 흘렸다
“후작은 내게…….”
“아, 물론 폐하께서 후작에게 증거를 받지 못하셨어도 상관없어요. 신성력의 속박으로 얼마든지 거짓을 고하는 가짜 신의 사제들을 추려낼 수 있으니.”
황제의 말을 가볍게 끊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내가 준 기회를 걷어차고 뻔뻔하게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조금은 무서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대사제 무리에서 레무스만이 그런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아냈다.
나는 차마 나와 시선조차 맞추지 못하는 죄인을 뒤로하고 노파를 바라보았다.
“신전의 잘못은 내가 어떤 수를 써서라도 밝히겠어요. 당신의 아이들을 살릴 수는 없겠지만, 그 죄만큼은 확실하게 물을 거랍니다.”
“정말인가?”
노파의 손에 힘이 풀렸다.
“물론이에요. 신성법에 따라 파문되는 것은 물론이고, 제국법에 따라 죄 없는 이의 목숨을 앗아간 죄인은 사형을 면치 못할 거랍니다. 안 그런가요, 폐하?”
“그, 그래야지. 당연한 소리를 하는구나.”
“그러면 바로 데려가시죠. 크리세우스 경.”
내 부름에 이 순간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크리세우스가 지하 감옥에 가두어 두었던 푸토르의 기사들을 데려왔다.
“이 자들이 성스러운 샘물을 외부로 내보낸 자들입니다. 푸토르 후작의 기사들이죠.”
황제의 눈가에 잠깐 주름이 잡혔다. 나는 그걸 무시하고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
“당신들은 성스러운 샘물에 독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몰랐나요? 적은 양일 때는 괜찮지만, 다량으로 마시면 중독될 수도 있다는 것을요.”
“모, 몰랐습니다. 저희도 가끔 마셨습니다만, 오히려 활력이 넘치기에 정말 성수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고인 상태로 오래 두어도 물이 썩지도 않고 늘 신선했기에…….”
그건 물속에 있는 비소라는 독 때문이었다. 그래서 성녀가 정화를 시킬 때만 성수로써 효과가 있었다. 아무도 몰랐겠지만.
“저희도 성수가 비싼 것이기에 아껴 먹어서…… 문제가 있는 것인 줄 몰랐습니다.”
사실 그래서 지금까지 큰 문제가 없었다. 죽어가는 이에게 썼을 때는 성수의 사용이 너무 늦었다고만 여겨졌을 뿐이고.
아마 떠돌이 생활을 하느라 의학적인 상식이 많은 집시가 아니었다면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좋아요. 그럼 그걸 성수라며 마셔도 좋다고 말한 자가 누구죠?”
이 물음에는 답을 하리라고 생각했다. 충성심 때문에 후작의 잘못을 불지는 않더라도 다른 이들의 죄는 그들이 상관하지 않을 테니.
역시나 그들은 조용히 대사제들을 돌아봤다.
나는 후작의 기사들이 눈으로 가리킨 쪽으로 걸어갔다.
“비페르, 빌루스 대사제님?”
그냥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도 뒤가 구린 자들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두 분은 아는 게 없나요? 내가 분명 기회를 줬었잖아요?”
“저는…….”
“저는 모릅니다.”
“그래요? 데아 님의 이름 앞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알아볼까요?”
나는 그들의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대신 황제를 향해 몸을 돌렸다.
“폐하, 이들을 데려가 문초하세요.”
나의 냉정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신전의 공기를 얼렸다. 짧은 침묵 후, 바로 반발이 이어졌다.
“성녀님!”
“신전은 황실의 아래에 있지 않은데 어찌 대사제의 죄를 황궁에서 묻는단 말입니까?”
이래서 끼리끼리라고 하는 걸까?
대사제 웨르가 나서서 반박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아까 내가 한 말을 듣지 못했나요? 파문 당한 사제는 신전의 사람이 아니며, 신전이 보호할 가치가 없습니다. 당장 데려가세요.”
나는 비페르와 빌루스의 파문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