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추악한 신전의 민낯 (1)
“도대체 대낮에 복도에서 뭐 하는 겁니까?”
“으아아! 죄송해요!”
크리세우스와 셀레미온의 목소리가 기다란 복도를 가득 채웠다.
나는 민망한 마음에 바로 아스테인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러자 아스테인의 아쉬워하는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는 곧바로 으르렁대는 목소리로 크리세우스를 불렀다.
“참, 좋은 타이밍에 나타났군.”
“아니, 그게, 복도에서 이렇게 무방비하게 굴어도…… 됩니까?”
아스테인의 살기 어린 눈빛에 말대꾸를 하던 크리세우스가 살짝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곧 언제나처럼 씩씩하고 대범한 얼굴로 아스테인에게 따지고 들었다.
“아니, 조금만 더 가면 아가씨의 방인데, 거기 들어가서 애정행각을 벌이든가, 왜 사람들 다니는 길목에서 이래요?”
나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괜히 시선을 돌리는데 아직 입을 벌리고 있는 셀레미온의 얼굴이 보였다.
셀레미온의 충격이 제법 커 보였다.
“여기서 이렇게 떠드는 게 사람들의 눈에 더 잘 띌 것 같군. 얼른 안으로 들어가지.”
아스테인은 민망하지도 않은지 태연하게 대꾸했다.
크리세우스는 익숙한지 작게 콧방귀만 뀌고는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우리 쪽으로 왔다.
“내가 앞에 가면 뒤에서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차라리 제가 뒤로 가죠.”
“다른 이의 접근을 감시해 주겠다는 뜻인가?”
“아이고, 네네. 좋은 생각이네요.”
크리세우스는 정말 툴툴대면서 말했지만, 눈가에는 전혀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내게 윙크를 해줄 정도였다.
“저만 믿으십시오.”
크리세우스의 말에 나는 대답도 못 하고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대신 다급히 화제를 바꿨다.
“저기, 크리세우스 님?”
“네, 아가씨. 말씀하십시오.”
“알아보라고 한 일은 잘 끝났나요?”
“아……. 그게 말입니다.”
크리세우스는 조금 곤란한 얼굴을 했다. 주인인 아스테인의 눈치도 슬쩍 살폈다.
“보안을 위해 방으로 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아스테인의 권유에 우리는 빠른 속도로 방으로 갔다.
문을 닫은 뒤, 셀레미온에게 차를 준비해달라면서 밖으로 내보냈다. 둥근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자 크리세우스가 깊은 한숨을 쉰 다음 말을 꺼냈다.
“증거는 이미 완벽히 인멸하고 없더군요.”
“너는…… 그러고도 블루 로즈의 수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냐?”
아스테인의 살짝 비꼬는 말투에 크리세우스가 발끈하려 했다.
하지만 순종적인 수하는 억울함을 삼키며 주인에게 보고했다. 물론 입을 내밀면서.
“블루 로즈는 마법사가 아니라 없어진 증거를 되살릴 수가 없네요.”
“곤란하게 됐군.”
아스테인이 혀를 차며 대답했다. 크리세우스는 자신의 부족함 탓이라고 생각했는지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요, 크리세우스 님. 어쩔 수 없었겠죠.”
내 위로에 크리세우스는 단번에 날 향해 꼬리를 흔들었다.
“그러니까요. 역시 우리 아가씨만이 제 마음을 이해해주신다니까!”
아스테인은 크리세우스의 아부에 코웃음을 쳤다. 그걸 본 크리세우스는 움찔하면서도 내 쪽으로 더 들러붙었고.
“그 늙은이들이 말입니다. 후작이 신전에서 내쳐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증거들을 지우기 시작했더라고요? 후작도 따로 증거를 갖고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요.”
“하긴, 같이 비리를 저질러 놓고도 자신의 편을 들지 않은 자들의 약점을 후작이 놓칠 리가 없죠.”
“맞습니다. 정확히는 서로의 잘못을 알면서도 눈을 감아주는 척하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그런 증거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내 예상대로 일이 흘러간다면, 후작은 이미 황제 쪽에 합류했을 테니까.
“그리고 후작이 어젯밤에 황제를 찾아간 뒤,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크리세우스의 답은 예상대로였다.
“조금 상황이 어려워지긴 했네요.”
“으…… 죄송합니다.”
크리세우스가 조금은 미안한 얼굴로 나를 봤다.
“아니에요. 내가 너무 늦게 대응한 탓이에요.”
“아이고, 왜 자책하십니까? 계속 저희가 무능한 모습만 보여드린 것을요.”
아스테인은 그 모습을 조금 못마땅하게 지켜보다 말을 꺼냈다.
“그래서 황궁의 동태는?”
“그건 제가 빠삭하게 알아놨죠. 어젯밤에 후작이 황후를 찾아간 뒤, 황후가 쓰러졌다고 합니다.”
“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얼굴에서 피가 빠지는 기분이었다.
“아, 아이는요?”
“아직은 무사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유산기가 있어 안정이 필요하답니다.”
심장이 아려왔다. 설마 카렌시아의 아이를 또 지키지 못하는 걸까?
“그래서 말인데, 이걸 이용하면 어떨까요?”
크리세우스의 말에 내가 눈을 크게 떴다.
“아가씨의 신성력으로 황후의 아이를 살리고…….”
“사람의 목숨으로는 거래하지 않아요.”
크리세우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크리세우스의 눈이 커졌다.
“어……. 그게……. 죄송합니다. 이게 제일 쉬운 길이라서…….”
크리세우스가 바로 고개를 숙였다.
“크리세우스, 너는 아직 프레이아 님의 성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아스테인이 조금은 한심하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이러니 암흑 길드 취급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거다.”
“그게…….”
“프레이아 님 밑에서 일하려면 옛날 습성은 버려라.”
“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크리세우스는 내게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그의 눈빛에 진심이 담겨 있었기에,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크리세우스가 다행이라는 듯이 웃었다. 물론 곧 난감한 얼굴이 됐지만.
“그런데 어쩌죠? 증거가 없는데……. 원래 계획대로 하려면 증거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괜찮아요. 나는 그들에게 생존의 기회를 제시했고, 그것을 거부할지 말지는 그들이 결정하겠죠.”
“정말 황제에게 무릎을 꿇으시려고요? 그건 저도 용납이 안 됩니다. 싫습니다. 우리 주군도 싫어할 겁니다.”
나는 크리세우스의 말에 그저 빙그레 웃어주었다. 그는 속 시원하게 말해주지 않는 나를 보며 조금 섭섭한 얼굴을 했다.
“곧 알게 될 거예요.”
“흐음……. 알겠습니다. 아가씨는 현명하시니,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크리세우스는 언제나 보여주는 씩씩한 얼굴로 돌아가 내게 다른 정보를 건넸다.
“참, 그 웨르라는 불결하게 생긴 인간이요.”
“혹시 알아낸 것이 있나요?”
“네. 아가씨가 말씀하신 것과 같은 일은 아니지만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것 같습니다.”
나는 크리세우스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그런 일이 신전에서 있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추문이 밝혀진다면, 신전은 바로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대로 더 상처가 곪아 터지게 내버려 둔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러면 신전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터이니.
“피해자부터 찾아주세요. 내가 만나야겠어요.”
하지만 그렇게 회피할 수는 없었다.
* * *
오후가 되자, 신전은 공식적으로 성녀님의 장례에 방문객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몰려왔다.
다수가 평민이었다. 자신들이 힘들 때 손을 내밀어 준 성녀님을 떠나보내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었다.
지금은 굳이 나설 필요가 없어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곁에 있던 아스테인에게 조용히 말을 꺼냈다.
“그래도 성녀님은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었네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성녀님의 기적과 사랑은 언제나 평민보다는 귀족과 황실을 우선시했다.
그런데도 평민들은 성녀님께 감사와 존경을 돌려주고 있었다.
아스테인은 그저 덤덤하게 내게 답했다.
“황실이나 귀족들에 비하면 성녀님이 그들을 더 챙겼으니까요.”
“그런가요. 이건 황실과 귀족이 제구실을 못 한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네요.”
“그것도 맞는 말 같습니다.”
아스테인과 나는 둘 다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쓴웃음 뒤로 살짝 생각에 빠졌다.
내가 신전에 온 것과 아스테인이 황제가 되는 일의 관계.
어쩌면 데아 님의 큰 뜻이 이것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형님께서 불만을 표하지 않았습니까?”
아스테인의 질문에 나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어쩌겠어요. 성녀인 내가 선착순이라고 말한걸요.”
황제는 조금 전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의전 서열의 정점이라는 황제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새벽부터 기다린 사람들을 또 기다리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화를 낼지도 모르겠습니다.”
“황제가 화나서 내게 해코지라도 한다면 아스테인 님이 지켜주겠죠.”
나는 내가 이런 낯 뜨거운 말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것도 신전에서.
그건 아스테인도 마찬가지일까?
우리는 살짝 귀를 붉힌 채 묵묵히 성녀님을 만나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그건 조금 슬프고도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아직 잠잠하군요.”
“그러게요. 황제가 이런 수모를 겪고도 얌전히 기다리고만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네요.”
“차라리 얼른 화내면서 날뛰어 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아스테인의 바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루어졌다.
접견실 입구 쪽에서 뭔가 소란이 일어났다.
“응? 성기사들이 왜 갑자기 바쁘게 움직일까요?”
내가 의아한 눈빛을 보내자 아스테인도 그쪽을 유심히 지켜봤다.
그의 눈빛에 약간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는 나를 자신의 등 뒤에 세운 뒤, 글라디우스에 손을 올렸다.
“인테르다! 선대 성녀님의 시신을 지켜라!”
나는 아스테인의 어깨 너머에서 들려온 소리에 얼굴을 구겼다.
“황제가 단단히 화났나 보네요.”
내 말에 아스테인도 얼굴을 굳혔다.
“일단은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는 글라디우스를 뽑아 경계하는 자세를 취했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성기사들,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비명.
“신전은 성스러운 샘의 물을 성수라고 속이고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파는 행위를 중단하라!”
나와 아스테인은 순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스테인 님.”
“들어가시겠습니까?”
“네. 어차피 저들이 노리는 건 저일 테니까요.”
“제 뒤에 바짝 붙어 계셔야 합니다.”
나는 그의 등에 더 가까이 붙어선 뒤, 고개를 끄덕였다.
어수선함을 넘어선 혼란에도 나는 무섭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아스테인의 넓은 어깨가 눈앞에 펼쳐진 탓일 것이다.
나와 아스테인이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가자 내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 있었다.
“오오, 프레이아 님! 신이시여! 성녀님이 왔어요.”
“성녀님이 오셨다.”
다들 기대에 찬 목소리였다.
나는 만약을 대비해 손목에 차고 있던 사파이어 팔찌를 풀어 손에 쥐었다.
그건 성녀님의 관 앞에서 시위하고 있던 인테르의 무리와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저기 성녀다!”
“신의 이름을 팔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마녀!”
“잡아라!”
마녀라는 소리에 눈이 찡그려졌다. 회귀 전에 듣던 소리를 또 들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반응에 조금은 쓴웃음이 몰려왔다.
“감히 누구더러 마녀라는 거냐?”
“프레이아 님은 우리의 위대한 성녀시다.”
그래도 내게는 내 심정을 이해해주는 나만의 기사가 곁에 있었다.
“저들의 말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아스테인의 따스한 눈빛에 조금은 불쾌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런데 갑자기 침입자들이 나를 노리고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들의 손에는 단검이나 창이 쥐어져 있었다.
성기사들은 인테르를 막기 위해 대오를 맞춰 아스테인의 앞에 일렬로 섰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거친 인테르의 공격을 쳐냈다.
그런 그들을 보자 미안한 마음이 조금 들었다.
이미 사라졌던 과거를 가지고 그들을 원망한 것만 같아서.
“성녀님, 위험합니다!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 자리를 피하십시오!”
인테르의 공격은 제법 매서웠다. 성기사들은 그래도 그들의 공격을 잘 받아쳤다.
아무래도 훈련을 제대로 받은 성기사들과 인테르의 수준 차이가 컸다. 무모함이 이상하게 보일 만큼.
“아스테인 경! 이 상황에 성녀님을 모시고 오면 어쩌자는 겁니까?”
어느 정도 제압이 되자, 성기사들 중에서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가 아스테인을 타박했다.
“성녀님께서 인테르를 만나고자 하신다.”
아스테인의 대답에 입을 꾹 다물었지만, 성기사들의 표정이 곱지는 않았다.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등장에 당황스러웠을 수는 있지만, 인테르는 성기사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할 만큼 약한 상대였다.
“맞아요. 내가 저들을 만나기 위해 온 거랍니다.”
내가 나섰는데도 기사들의 눈빛에는 불만이 남아 있었다.
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들보다 인테르와 대화하는 것이 먼저였다.
“당신들의 대표와 이야기하고 싶군요.”
“우리는 사기꾼과 대화하지 않는다.”
“그래요? 당신들의 수장이 떠나기 전에 당부한 것들이 있을 텐데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백발의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을 따르는 척하며 거짓을 외치는 벌레 같은 것들!”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 이 중성적인 목소리는 대공령에서 들었다.
“성수라고 속여 판 물을 마시고 우리의 아이들이 죽었다고! 퉤!”
그녀는 나를 향해 침을 뱉었다. 많은 기사 중에서 아스테인만이 나를 향해 날아오는 더러운 침을 막아주었다.
“아스테인 님, 괜찮아요?”
손으로 침을 막은 그는 묵묵히 품에서 내가 수놓아준 손수건을 꺼냈다. 그는 그것으로 손을 닦으려다 멈칫했다.
아스테인은 다시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는 망토에 손을 닦았다.
기사들은 아스테인의 행동을 이상하게 보다가 백발의 노파를 다시 억지로 무릎 꿇게 했다.
하지만 그녀는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법이라도 쓴 듯이.
“너도 우리 아이들처럼 죽어!”
그리고 내 뒤에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