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변화는 작은 것부터 (2)
“성녀님, 옷차림이…… 뭡니까?”
회의실에 들어가자마자 대사제 웨르의 입에서 놀란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자 다른 사제들도 말을 얹었다.
“민가의 여인들 같은 그런 옷차림은 도대체…….”
저 흰머리의 대사제는 빌루스던가?
“성녀님, 혹시 본인을 흔한 귀족 영애와 같은 위치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약간 허리가 휜 늙은 대사제는 비페르.
나는 내게 불만을 표시하는 세 명의 사제들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봤다.
조금 실소가 나오려고 했다.
“성녀는 사람이 아닌가요?”
“성녀는 신의 대리자입니다.”
“대리자니까 사람 맞네요.”
조금은 눈치 없는 사람처럼 대꾸했다. 환한 미소를 곁들여가며.
그러자 웨르가 내게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한 걸음 내디뎠다.
나는 그와 눈을 맞추어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맑은 눈빛이 아니라 조금 서늘한 눈빛을 보냈다.
“웨르 님, 무슨 할 말이라도?”
“아, 아닙니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것조차 부담스럽구나? 그의 회피에 조금은 마음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참, 웨르 님. 어린 사제님들을 다른 학교로 보내는 일은 잘 진행되고 있나요? 보고해줬으면 해요.”
“그것이…….”
“성녀님, 말씀 돌리지 마십시오.”
빌루스라는 자가 나와 웨르 사이에 끼어들었다. 나는 그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죠?”
“성녀님의 옷차림을 말씀드리려 하고 있었습니다.”
“아, 그랬나요? 나는 내가 인간인지 신인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는데…….”
내 능글맞은 대답에 뒤에 있는 레무스가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늙은 대사제들이 일제히 레무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흠흠. 성녀님은 신의 날개로서 신의 말씀을 전해주러 온 대리인이지 신은 아니십니다.”
레무스가 정확하게 짚어주자 대사제들이 눈꼬리를 추켜올렸다.
“자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사람들에게 성녀는 신으로서 군림하고 신성력을 펼쳐야 하는 것을 모르는가?”
레무스를 제외한 대사제들은 그의 말을 인정하지 못하고 화를 냈다.
하지만 레무스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 딱히 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대사제들은 비난의 화살을 내게로 돌렸다.
“역대 성녀님들은 예쁜 옷을 입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맞습니다. 다 신전과 신을 위해 절제하신 겁니다.”
나는 그들의 화난 눈빛을 피해 셀레미온을 불렀다.
“셀레미온, 내가 예식용 성녀복을 당장 입을 수 있는 상황이니?”
“지금 수선하고 있어요. 옷이 너무 커서 움직이기 불편하시더라고요. 성녀복을 입고 걷다 넘어질 뻔하셔서 찢어졌어요.”
“그렇다네요?”
나는 내 탓이 아니라는 듯이 눈을 깜빡깜빡해줬다. 아주 가련하고 불쌍한 눈빛으로.
“옷을 전부 수선하고 있습니까? 오늘 당장 장례식이 있는데요?”
“죄송해요. 나머지는 제가 이미 재단해서 가위질을 다 해버렸네요.”
“사가에서 데려온 하녀가 벌써 사고를 친 겁니까?”
대사제들은 셀레미온을 잡아먹을 듯이 굴었다. 위협적인 얼굴에 겁먹은 셀레미온은 아스테인의 뒤로 숨었다.
“내가 지시했어요. 불만이 있다면 내게 말하세요.”
내 단호한 대답에 대사제들은 거친 시선을 내게로 옮겼다.
“성녀님.”
“공식적인 행사에서는 예복을 갖춰 입을 생각이에요. 하지만 평상복까지 간섭하는 건 이해하지 못하겠군요.”
“그래야 모두가 성녀님을 신의 대리인이라 믿으니까요.”
비페르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해줬다.
하지만 의문 가득한 얼굴과는 달리 내 말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데아 님께서 자신과 닮은 옷을 입어야 신의 대리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던가요?”
“그것은……!”
“단 한 번도 그런 신탁은 내려진 일이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요? 심지어 성녀님들의 입에서 그래야만 한다는 말이 나오지도 않았죠.”
성녀복은 신전이 만들어지면서 생긴 쓸모없는 관습이었을 뿐이다.
초창기 신전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자구책이었고.
“평범한 여인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서다니요! 신의 대리자로서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대신 대중들과 더 가까워지겠죠. 친근한 이미지로.”
“성녀님!”
“이건 내 생각일 뿐 아니라 신의 말씀이기도 해요.”
성녀가 신의 말씀을 들었다는데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신탁이 내려진 겁니까?”
비페르와 빌루스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내게 물었다.
“내 말을 믿지 못한다면, 내가 신전에 존재할 이유가 없네요.”
다음 대의 성녀는 존재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저들이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쫓아내려 하더라도, 새로운 성녀는 구할 수 없었다.
그런 자신감으로 나는 강경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레무스가 나섰다.
“자자, 성녀님께서 공식적인 자리에서까지 이런 옷을 입겠다고 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행사 때는 예복을 입는다니 우리도 양보할 것은 양보합시다.”
조금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사의 동생이라 레무스가 다른 사제들보다 더 보수적일 줄 알았다.
“하지만……!”
“아이고, 우리 고리타분한 선배님들! 그러다가 성녀님께 미움받아서 없던 죄까지 탈탈 털리지 마시고, 그만하시죠.”
레무스의 말에 두 대사제의 눈이 흔들렸다.
그걸 본 레무스가 조금은 무서운 눈빛으로 사제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지하 감옥에 있는 이들이 걱정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저 사제,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눈치를 챈 거지? 나는 조금은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돌아봤다.
증거를 완전히 확보하지도 못했는데 저렇게 훼방을 놓다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푸토르 후작의 기사들이 우리랑 무슨 상관이라고 이럽니까?”
원래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했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무스 님, 지금의 이야기에 집중해주시죠. 레무스 님은 내가 평소에 편안한 옷을 입는 것에 찬성한다는 거죠?”
“네, 맞습니다. 하얗고 오염되기 쉬운 성녀복보다야 성녀님이 편한 옷으로 입는 것이 낫겠죠. 그것도 신의 말씀이라면요.”
“다른 분들은요?”
레무스가 다시 한번 신을 거론하자 사제들의 입이 쑥 들어갔다.
나는 만족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봤다.
“그럼 오늘 장례식의 일정을 제대로 의논해볼까요?”
* * *
“후아, 힘들었다.”
회의가 끝난 뒤,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내 방으로 향했다.
성스러운 샘으로 가는 입구를 지나 기나긴 복도를 걸었다. 그런 내 뒤를 날 든든히 지켜주는 기사와 소중한 하녀가 따르고 있었다.
“힘드셨지요?”
아스테인의 따스한 위로가 닿자 얼굴에 바로 미소가 돌아왔다.
그러자 셀레미온이 갑자기 헛기침을 시작했다.
“아가씨, 여기서부터 아가씨 방까지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이랬죠?”
“응.”
성녀의 방은 신전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다. 성스러운 샘으로 가는 길도 지났기에 내게 볼일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복도에 나타날 사람은 없었다.
“저기, 저는 잠깐 신전 구경을 하러 갈 테니까요. 두 분이 먼저 가실래요?”
셀레미온의 목소리가 살짝 높았다. 심지어 날 보고 어색하게 웃기까지 했다. 윙크도 곁들이며.
“셀레미온, 신전을 구경할 거면 내가 안내할게.”
“아이고, 아니에요. 아침부터 사제님들에게 시달렸잖아요. 대공님과 가서 쉬세요.”
셀레미온은 내게 다시 눈짓을 했다. 그 아이의 눈은 정말 열심히 아스테인을 가리키고 있었다.
무슨 의도인지 뒤늦게 눈치챘다.
조금 민망하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했다. 그래서 답을 망설이는 사이, 셀레미온은 걸어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갔다.
그것도 아주 빠른 걸음으로.
“아니, 저기……!”
내가 손을 뻗어 셀레미온을 부르자, 아스테인이 포근한 웃음을 터트렸다.
“셀레미온 양이 가련한 연인의 사정을 알고 있나 봅니다.”
“저는 말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주인의 마음을 잘 눈치챈 훌륭한 사용인이군요.”
귀가 살짝 빨개졌다.
내가 그렇게나 아스테인을 좋아하는 티를 많이 내고 다녔나 싶어서.
“셀레미온이 눈치챘으니, 곧 대사제들도 눈치채겠네요. 조심해야겠어요.”
“눈치채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면 당당히 신전 밖으로 모셔가면 되니까요.”
“안 돼요. 신전에서 할 일이 남았는걸요.”
나도 모르게 입을 살짝 삐죽인 것 같았다. 그러자 그가 다시 잔잔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에는 나를 향한 애정이 가득했다.
대사제들과 싸우느라 긴장했던 근육이 풀릴 만큼 따스하기도 했고.
“그래도 셀레미온 양이 준 기회이니, 버리기에는 아깝군요.”
아스테인은 갑자기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에스코트를 할 때처럼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언제나처럼 자연스럽게 그 위에 내 손을 얹었다.
“어……. 저기, 아스테인 님?”
그의 크고 기다란 손가락이 내 손가락 사이사이에 얽혀 들어왔다.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할 것처럼.
나는 평소와는 다른 아스테인의 행동에 조금 당황했다. 얼굴이 살짝 붉어질 만큼.
“성에 계실 때 연인으로서 더 많은 것을 해드리고 싶었는데, 할 수 있는 것이 지금은 고작 이거밖에 없군요.”
아스테인이 내 옆에 나란히 서서 나와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따라 한 걸음 내디뎠다. 아스테인은 그런 내 걸음에 보폭을 맞춰 주었다.
“뒤에서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면 어떡해요?”
나는 불안함에 뒤를 힐끗힐끗 쳐다봤다.
“제 망토에 가려서 손이 보이지 않을 겁니다.”
대답을 마친 그는 내 손을 더 힘껏 잡고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푸른색 실 팔찌와 나의 은색 실 팔찌가 스쳤다.
심장이 두근두근 존재를 알려왔다.
“계속 이렇게 걷고 싶습니다.”
아스테인의 달콤한 말에 심장은 더 열심히 뛰었다.
이런 행복한 광경을 누가 보면 어쩌지? 불안한 마음에 내가 몇 번 더 고개를 뒤로 돌렸다.
“망토를 더 크고 넓게 만들어 와야겠습니다. 그러면 프레이아 님이 덜 불안해하실 것 아닙니까?”
그 말이 조금 민망하게 들려 고개를 앞으로 고정했다. 그러자 또 옆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웃지…… 마세요.”
“대사제들 앞에서는 너무나도 용기 있던 분이 갑자기 이렇게 소심해지니 낯설어서 그럽니다.”
“아스테인 님께서 선물해준 옷을 제대로 입어보지 못했잖아요. 다 입어보고 싶었어요.”
“그게 오늘 싸운 이유의 전부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역시나 아스테인은 언제나처럼 내 마음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
그것이 기분 좋아 그를 보며 웃어줬다.
“네, 일단은 작은 것부터 바꾸고 싶었어요. 성녀가 신격화된 것부터가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지나치게 성녀의 기적이 신의 힘처럼 받들어지기는 했지요.”
아스테인은 진지한 얼굴로 내 말을 들어줬다. 그러자 조금 자신감이 생겼다.
“그렇죠? 제가 쓸데없는 짓을 한 건 아니겠죠?”
“네, 아닙니다. 정말 사소한 곳에서부터 쌓아 만들어진 이미지는 고정 관념이 되기도 하니까요.”
“그렇죠? 그래서 성녀가 신성한 존재로 보이는 이유 중 하나를 깨부수고 싶었어요.”
“그래서 가장 사소한 옷에서부터 시작한 거군요. 잘하셨습니다.”
나는 내게 공감해주는 아스테인의 마음이 정말 고마웠다.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고민도 했었기에 더 그랬다.
“성의 기사분들이 늘 말해줬잖아요. 성녀도 인간일 뿐이라고.”
그들이 보여줬던 마음이 내게 큰 용기를 준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대하던 태도가 신전과 성녀를 대하는 내 마음가짐을 바꿔주기도 했다.
“전부 기사님들 덕분이에요.”
그러자 아스테인의 걸음이 약간 느릿해졌다. 약간은 불만스러운 얼굴과 함께.
그가 왜 이러는지 눈치챈 내가 이번에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럴 때면 아스테인 님이 너무 귀여워요.”
“제가…… 말입니까?”
“네, 질투하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거든요.”
나의 고백에 아스테인의 걸음이 완전히 멎었다.
그는 나를 향해 돌아섰다. 그런 그의 눈빛이 조금은 위험해 보였다.
얽혀 있던 손을 푼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서는 어쩐지 뜨거운 욕망이 느껴졌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분이 다른 녀석들 생각을 하는데 제가 어찌 질투하지 않겠습니까?”
아스테인의 뜨거운 고백과 함께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묘한 기대감과 죄책감이 동시에 지나갔다.
신전에서 과연 이래도 되는 걸까? 혹시라도 누가 나타나면 어쩌지?
나의 불안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스테인의 얼굴은 더 가까워졌다.
“그날 이후 제가 너무 참은 것 같습니다.”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는 아스테인의 목소리가 조금은 낮게 깔렸다.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는 아스테인의 눈빛이 조금 짙어졌다. 그것이 너무 매혹적이기도 했지만, 장소가 장소인지라 긴장됐다.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들릴 정도였다.
“가까이 있어도 닿을 수 없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지 미처 몰랐습니다.”
우리의 목표를 위해서 선택한 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스테인을 괴롭게 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미안해졌다.
“미안한 얼굴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인내하는 것만큼은 평생 자신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말과 다르게 그는 더는 참지 못하고 내 입술을 향해 다가왔다. 그의 입술에는 인내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눈을 스르르 감고 그가 참아왔던 마음을 느끼려고 했다.
신전에서 사람들 눈을 속여가며 사랑을 나눌 거라는 기대감이 커질수록 심장은 쿵쾅쿵쾅 큰 소리를 냈다.
걸어오는 사람의 발소리를 놓칠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