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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51화 (51/101)

51화. 변화는 작은 것부터 (1)

다음 날, 신전에서는 공식적으로 선대 성녀님의 장례가 시작되었다.

성녀 검증과 대관식이 모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기에, 일반인 앞에 내가 처음 나서는 행사가 될 예정이었다.

“아가씨, 긴장되세요?”

“응? 그렇게 보여?”

“조금요.”

“오늘은 폐하가 오실 거거든.”

내 머리를 빗겨주던 손길이 잠시 멈췄다.

셀레미온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면서 내게 물었다.

“그분이 대공님을 괴롭힐까 봐 그래요?”

“그것도 걱정이기는 하네.”

아스테인이 신의 회초리 문제에서 공을 세우기는 했다.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었고, 황제에게 철광산을 안겨주기도 했다.

덤으로 세르펜스 대공을 견제하는 일도 톡톡히 해냈고.

“아무리 생각해도 대공의 지위를 회수해가지 않은 게 수상하단 말이야.”

“이제는 대공님을 동생으로 인정한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런 사람이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작게 한숨을 쉬자 셀레미온은 조용히 머리를 빗겨주었다.

“아가씨, 그런데 치장은 어떻게 할까요? 너무 화려해 보이면 안 되니까 머리는 그냥 차분하게 빗어드려요?”

“그래야지. 아직 장례 중이니까.”

“음, 옷은요? 성녀복이 너무 아가씨 몸에 맞지 않던데요.”

선대 성녀님은 나보다 체격이 조금 더 컸다. 성녀복도 맞춤옷이다 보니 얻어 입은 옷이 내 체형과 맞지 않았다.

어제는 억지로 맞춰 입었지만.

“꼭 성녀복을 입고 나가야 해요?”

셀레미온은 내 눈치를 살살 살피더니 한마디를 추가했다.

“대공님께 예쁘게 보여야죠.”

솔직히 말하면 셀레미온의 말에 솔깃했다. 하지만 이걸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대신 셀레미온을 설득해야 했다.

“셀레미온. 어제도 말했지만…….”

“알아요! 아가씨는 이제 성녀가 됐고, 그러니까 사적인 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면 안 된다는 걸요.”

시무룩한 셀레미온을 보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대로 다 말하는 편이 좋을까?

하지만 나와 아스테인의 관계를 너무 많은 사람이 알게 되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았다.

말이라는 것은 언제 어디서 새어 나갈지 모르니.

혹시라도 우리 사이가 세상 밖으로 드러난다면 우리가 계획하는 일들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거랑 상관없이요! 대공님이 선물해주셨던 옷들을 제대로 입어보지도 못하고 신전으로 끌려왔잖아요!”

주먹까지 불끈 쥐면서 소리치는 셀레미온의 눈에 뭔가 억울함이 비쳤다.

“성녀복, 그거 예쁘지도 않던데! 우리 아가씨도 다른 귀족들처럼 화려하게 입고 다니면 얼마나 예쁜데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눈을 깜박였다. 뭔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생각이 있었다.

“아가씨도 예쁘게 입고 싶지 않아요?”

“딱히 그런 욕심은 없는데…….”

아스테인이 예쁘게 봐주면 좋긴 하겠지만…….

“아니, 저렇게 입으면 신처럼 보이기라도 하는 거예요? 치렁치렁하기만 하고 실용적이지도 않은데요?”

셀레미온은 성녀의 방 한쪽 벽을 가득 채운 데아 님의 초상화를 가리켰다.

나는 어제 내가 입었던 성녀복과 똑같이 생긴 데아 님의 옷을 유심히 관찰했다.

성녀복은 그림으로 보는 것보다 더 거추장스러웠다. 걷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려지고 팔을 드는 것도 조심스러워지는 마법의 옷이었다.

“성녀복을 입는 이유라…….”

유달리 대외적인 행사 때 입는 예복이 심했다.

평상복도 하얀색의 불편한 디자인이었다. 예복에 비해서야 덜하지만.

“겉모습만 성녀이길 바랐던 건 아닐까?”

“무슨 소리예요?”

뭔가 머리를 찡하게 훑고 지나갔다.

순간적으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성녀의 이미지도 바꾸고, 아스테인의 선물도 마음껏 입어보고.

하지만 현실적인 생각이 나서 바로 미간을 좁혔다.

“흐음, 하지만 드레스는 전부 아스테인 님의 성에 있을 거니까 당장은…….”

“아니에요!”

내 혼잣말을 놓치지 않은 셀레미온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제가 오면서 다 가져왔어요! 아가씨의 짐이라고 하고!”

“집사가……들고 가게 했어?”

“기사님들이랑 몰래 옮겼죠.”

자랑스럽게 가슴을 내밀며 대답하는 셀레미온의 모습에 내가 빙긋 웃었다.

“잘했어! 그럼, 오늘 하나 꺼내 입을까?”

“진짜요? 진심이세요?”

나는 셀레미온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좋아하면서 성녀의 방 옆에 딸린 옷방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대사제들이 난리 나겠지?”

당황할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하자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 * *

복도로 나가자 아스테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옷은…….”

“지난번 연회 때에도 느꼈지만, 옷 고르는 감각이 남다르시네요.”

아스테인은 단정하지만 품격 있는 남색 드레스를 입은 날 보고 빙그레 웃어주었다.

그 눈빛이 어찌나 다정한지 온몸이 간질간질했다. 이곳이 신전만 아니라면 아스테인의 눈에 키스하고 싶을 만큼.

“에헴, 아가씨! 저 잘했죠?”

셀레미온의 목소리에는 정말 뿌듯함이 느껴졌다.

“고마워.”

“오늘은 오전에 대사제와 장례 절차를 확인한 후, 접견실에서 조문객을 맞이하면 된다고 합니다.”

일단은 대사제들에게 이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셀레미온, 아까 내가 말한 거 기억하지?”

“네!”

“그럼 가자.”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신전에서 일하는 성기사나 일반 사제들이 내 옷차림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길을 걸었다.

“사람들이 프레이아 님을 보느라 정신이 없군요.”

“제가 아니라 아마 옷일걸요?”

아스테인은 다시 한번 내 옷을 쳐다보다 티가 나지 않게 살짝 웃었다. 그리고 그 미소에 혼잣말을 곁들였다.

“차라리 다행이군요.”

이건 나만이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는 말.

아마 성기사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날 쳐다보는 것이 싫었나 보다.

귀가 빨개질 위기에 나는 억지로 다른 곳에 신경을 썼다. 내버려 두면 사람들 앞에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낼 것 같았다.

“숙소는 지낼 만해요?”

“나쁘지 않습니다.”

“대공성보다는 불편하죠?”

“최근에 지내던 별관과 크게 다르지 않아 불편한 것은 없습니다.”

아……. 하긴, 내가 성에 머무는 동안 아스테인은 안락한 자신의 방을 두고 불편한 곳에서 지냈다.

미안하게도…….

“다른 성기사들과는 사이가 괜찮나요? 텃세를 부리거나 하지는 않아요?”

회귀 전의 아스테인과 성기사들은 친구처럼 잘 지냈다. 나로 인해 죽은 아스테인을 보고 기사들이 화를 낼 정도였으니까.

그러니 이번에도 잘 지낼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물었다.

“네……. 잘 지냅니다.”

명확한 답이 아니었다. 뭐지? 나는 좋지 않은 예감에 그를 돌아봤다.

그러자 아스테인이 조금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솔직하게 말해주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그러자 그가 아주 작게 한숨을 쉬었다.

“성기사의 서임이야 선대 성녀님이 이미 내려주신 것이나 다름없어 절차상의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요?”

“혹을 달고 들어오기도 했고, 들어오자마자 성녀님의 총애를 받으니까요?”

“아…… 내 탓이네요. 그런 생각을 못 했어요.”

아스테인과 재회한 후, 나는 나의 전속 성기사로 바로 그와 크리세우스를 지목했다.

이미 황궁 연회에서도 나와 그는 함께였고, 아스테인이 여러모로 활약했으니 괜찮을 거라 믿었다.

그래도 이곳에서 아스테인과 크리세우스는 신입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간과했구나.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크리세우스 녀석이야 워낙 사람들을 구워삶는 데 재주가 있으니 금방 적응할 겁니다.”

“아스테인 님은요? 괜히 절 따라 신전으로 와서 마음고생 하는 건 아니에요? 원래 고귀한 신분이었는데…….”

내 걱정에 아스테인은 미소로 화답했다.

날 안심시키려는 무덤덤한 미소가 더 걱정스럽게 보였다. 내게 힘든 것을 표현하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아서.

“아스테인 님.”

확실하게 물어봐야 했다. 나를 위해 신전으로 왔는데 나 때문에 그가 힘이 들면 안 되니까.

하지만 방해꾼이 있었다.

“성녀님, 오셨습니까?”

어째서 이자는 나와 아스테인 사이에 계속 눈치 없이 끼어드는 걸까?

“오, 이 아가씨가 성녀님의 충직한 하녀이군요. 형님께 들었습니다. 후작의 잘못을 당당히 고할 만큼 용기 있는 아가씨라면서요?”

“아, 안녕하세요. 셀레미온입니다.”

“나는 레무스 베이트만이랍니다.”

“아, 집사님과…….”

“맞아요. 그 고리타분한 인간의 동생이랍니다.”

레무스는 셀레미온에게 매우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 일반적인 대사제들과는 달랐다. 귀족도 아닌 평민 하녀에게 저렇게 공손한 사제는 드물었다.

“대사제님들은 다 나이 드신 분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젊은 분도 계셨네요.”

셀레미온의 순수한 감탄에 레무스는 뭔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레무스의 시선은 서서히 내게로 옮겨왔다.

“아…… 성녀님, 의상이 제법 파격적이군요.”

파격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의상은 아니었다. 보통의 귀족 영애들이 입는 평범한 옷이었다.

“하지만 성녀님과 참 잘 어울립니다. 남색 옷은 그저 단정하다고만 여겼는데 화려하면서도 차분하네요. 성녀님의 우아함과 고풍스러움을 더하는 것 같습니다.”

레무스의 칭찬이 낯설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당연히 질책부터 할 줄 알았는데.

“그런데 이 옷이 오늘 공식적으로 입을 의상인가요?”

“네.”

“흠……. 뭐, 안에 있는 다섯 사제가 동의할지 모르겠군요.”

“상관없어요. 그들의 뜻은.”

“역시 화통하시군요. 대놓고 성녀님을 응원해 드릴 수는 없겠지만, 건투는 빌어드리죠.”

그는 뭔가 잔뜩 들뜬 얼굴로 먼저 사제들이 기다리는 회의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셀레미온은 약간 어리둥절한 얼굴로 섰다.

“아가씨, 저분은…….”

“신경 쓰지 마. 그것보다 아까 나랑 이야기한 거 기억하지?”

“네. 물론이죠. 잘할게요.”

셀레미온의 다짐에 이번에는 아스테인이 의문스러운 얼굴을 하고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에게 장난스럽게 윙크를 했다.

“아스테인 님이 선물한 옷을 유행이 지나기 전에 다 입어보고 사람들 앞에 선보이려고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이렇게 작은 것부터 바꿔야 큰 것도 바뀌죠.”

아스테인의 얼굴에 잔잔하고 달콤한 미소가 번졌다. 그건 나를 응원한다는 뜻이었다.

“적극적으로 돕겠습니다.”

아스테인은 나를 위해 회의실의 문을 열어주었다.

* * *

황제는 잠이 든 황후의 곁에서 침통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다. 부들부들 떠는 후작은 무릎을 꿇고 있었다.

“푸토르 후작, 자네가 무슨 짓을 할 뻔했는지 아는가?”

서늘하게 깔린 황제의 목소리가 조용한 방을 채웠다.

“사정이 급하여 황후 폐하께 도움을 청하려…….”

“그래서 자네는 작은딸을 괴롭히다 신전에서 쫓겨난 것으로 모자라 큰딸에게 이렇게 폐를 끼친 것인가?”

후작은 창백한 얼굴의 황후를 돌아봤다.

자신과 대화를 나누다가 황후가 쓰러졌다.

[뭐라고요? 그런 것을 덮어 달라고요?]

[다 황후 폐하와 미래의 제 손자를 위해서 하다 보니…….]

[그만 하세요!]

분을 참지 못한 황후는 결국 소리를 지르다 쓰러졌다.

그리고 유산기가 있으니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의 소견을 들었다.

“연회 때도 아스테인을 죽여야 한다고 먼저 설치다가 엉망으로 만들더니……. 쯧쯧. 자네는 누이가 성녀였었다는 것 빼고는 장점이라고는 없군.”

그건 혼자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황제가 밀어주고 은닉해주지 않았다면 시도도 해보지 못했을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그것은 모두 후작의 책임이 되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후작은 고개를 숙인 채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상대가 황제이기에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황후가 출산하기 전에는 내세울 것이라고는 없으니.

“입으로 죄송하다고 말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지? 황후의 배 속에 들어 있는 내 후계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네도 황후도 다시는 이 황궁에 발을 붙이지 못할 줄 알게.”

황제의 진노가 황후에게까지 닿았다.

프레이아가 말한 것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후계자를 가지고도 황후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었다.

후작의 마음이 급해졌다.

“황후 폐하께는 죄가 없습니다.”

“황후가 쓰러진 이유를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고 하는 말인가?”

황제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황태자 시절, 황제는 제 자리를 위협하는 아스테인을 경계하려 후작의 딸을 반려로 택했다. 성녀 가문의 딸을 황태자비로 맞이하여 신전을 등에 업으려고…….

하지만 그 끈이 떨어지자마자 자신도, 자신의 딸도 버리려 하고 있었다.

“신전을, 신전을 폐하의 발아래에 오게 할 자신이 있습니다.”

후작의 다급한 목소리에 황제는 무심한 척 황후만 쳐다봤다. 하지만 입꼬리는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뭔가 착각하나 본데, 나는 어차피 신전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황제다.”

“하지만 단델리온 대공이 신전에 있지 않습니까? 이번에 신전의 이미지를 바닥으로 추락시키면 대공이 그들의 힘을 얻지 못할 겁니다. 또, 폐하의 모후께서 당한 수모를 갚을 수 있을 테지요.”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동생과 화해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그자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자의 어미와 외조부가 얼마나 음험한 사람인지 기억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흐음.”

여전히 황제는 무심한 얼굴이었지만 속은 아니라는 것이 오묘한 신음을 통해 느껴졌다. 후작은 다급히 말을 더했다.

“저에게는 말 안 듣는 제 양녀를 혼낼 기회이기도 하니 저를 희생해서라도 돕겠습니다.”

“그래. 그거 좋지.”

황제의 얼굴이 오늘 처음으로 빛났다.

“하지만 새 성녀가 그 비리를 전부 자네 잘못으로 취급하고 꼬리를 자를 텐데 어쩌려고?”

“비리를 저지른 것이 어찌 저뿐이겠습니까?”

“내가 가진 정보에 따르면, 자네와 함께 비리를 저지른 이들은 이미 파문되었다던데?”

“세상에 완벽히 깨끗한 인간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후작은 자신을 구할 구명줄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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