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아슬아슬한 연애 생활
여섯 명의 대사제는 나의 말이 끝난 뒤 서로를 황망한 얼굴로 쳐다봤다.
내 선언이 적지 않은 충격이었나 보았다.
나는 그런 그들의 얼굴을 유심히 지켜봤다.
그런데 레무스의 얼굴만은 다른 이들과 달리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성녀님,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고 하시는 말씀이신지요?”
레무스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웨르를 비롯한 나머지 사제들이 반발했다.
“성녀님, 신전은 지금까지 황제와 나란히 서 있던 존재입니다. 그런데 성녀님께서 황제에게 무릎을 꿇는다는 소리는 신전이 황제보다 낮은 자리에 있다고 인정하는 셈이 됩니다.”
그 말에 나는 턱을 살짝 밀어 올렸다.
그리고 레무스를 제외한 나머지 사제들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화를 내지 않는 게 성녀다운 모습일 것이다.
“그대들이 지금까지 푸토르 후작이 저지른 만행을 눈감은 대가를 내가 치르는 거 아닐까요?”
“흐으음, 그 푸토르 후작이라는 사람이 저지른 짓이 뭐가 그리 많습니까?”
레무스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이곳의 사정을 아무것도 몰랐던 그가 조금 신기했다. 정말 고행만 하고 산 걸까?
“레무스 님은 모르셨겠네요. 푸토르 후작이 성스러운 샘물로 장사를 해왔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그 말에 그의 양쪽 눈이 마치 성난 불곰처럼 올라갔다.
“뭐 그런 미친 벌레 같은 쓰레기가 다 있단 말입니까? 어디 개똥밭에라도 굴려야겠군요.”
성직자답지 못한 말투에 대사제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뒤에서 크리세우스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크리세우스.”
아스테인이 조용히 그를 부르는 소리에 겨우 숨이 넘어갈 듯한 소리를 내며 그는 웃음을 참아냈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사제들은 지난번에 선대 성녀님께서 모두 파문시켜 신전을 떠나게 했습니다.”
웨르가 다른 이들을 대신해 말했다.
“과연 그들만 이익을 취했을까요?”
나는 그들을 향해 조금은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사제들의 얼굴이 아주 살짝 얼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차가운 얼굴로 입꼬리를 내렸다.
“물론 내가 무릎을 꿇지 않을 방법은 있어요.”
“그게 뭡니까?”
“잘못한 자들이 먼저 나서서 성스러운 샘의 진실을 밝히세요.”
나는 그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런 나를 아스테인과 크리세우스가 든든하게 지키며 뒤따라왔다.
복도를 지나 성스러운 샘으로 가는 동안 우리는 그저 성녀와 성기사처럼 아무 말도 없이 걸었다.
중간에 사람이 없는 공터가 나오자 크리세우스가 아주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아니, 신전은 원래 이렇게 답답한 곳이에요? 뭔 말도 못 하겠고, 웃는 것도 마음껏 못 하겠고, 이게 뭡니까?”
그의 투정에 아스테인은 타박 어린 눈빛으로 답을 보냈다.
“아니,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다고 신전까지 끌려오냐고요!”
“그러게요. 어쩌다 크리세우스 님도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이놈의 주군이……!”
크리세우스의 불만은 아스테인의 낮은 목소리에 묻혔다.
“신전에서 네 주군은 프레이아 님이시다.”
“뭐, 내 주군의 주인이 아가씨니까 어쩔 수 없는데 말입니다.”
성 밖에서도 다투는 강아지들의 모습에 내 입가에 미소가 퍼졌다.
“아, 근데 나는 왜 끌고 왔냐고요.”
“네가 여기 있어야 내가 일하기 편하니까.”
“아니, 내가 잠입을 못해요? 얼마든지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니까요?”
크리세우스의 말에 아스테인은 그저 콧방귀를 꼈다.
나도 회귀 전과 달리 아스테인이 크리세우스를 데려온 이유가 궁금하긴 했다.
그래서 둘의 대화를 말리지 않고 묵묵히 들었다.
“난 신을 믿지도 않는데요?”
“신전에서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다간 파문당한다.”
“아이고, 그건 뭐, 신을 믿는 사람들이나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까 무서워하는 거죠.”
“네가 여기서 쫓겨나면 안 되니까 하는 소리다.”
“왜요? 내가 쫓겨나면 큰일 나요? 아, 이건……! 드디어 제가 주군 곁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시는 말씀인 거죠?”
감동했는지 크리세우스의 눈이 촉촉해졌다. 그가 맑은 눈동자로 아스테인을 바라보자 아스테인은 짧게 신음을 냈다.
“그렇게 착각하는 편이 낫겠지.”
“뭐예요? 그게 아니면 날 뭐 여기서 파수꾼으로 부른 거예요? 두 분 비밀연애하는 데 방해꾼을 쫓으라고?”
크리세우스의 말에 내 얼굴이 빨개졌다. 그런데 아스테인의 귀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이곳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깨달은 크리세우스도 화나서 얼굴이 붉어졌다.
“와! 진짜 내가 서러워서! 나 저기 나무 위에서 사람이 오는지 감시할 테니까, 마음껏 사랑을 나누십시오!”
크리세우스는 길 쪽에 있는 커다란 나무 쪽으로 달려갔다. 몇 번 발을 구르고 나무에 매달리자 크리세우스는 높은 곳의 나뭇잎 사이로 사라졌다.
“몸이 정말 재빠르네요.”
“블루 로즈의 수장을 맡을 만한 녀석이죠.”
블루 로즈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이제는 불편하지 않다는 것이 신기했다. 아스테인의 얼굴도 편해 보였다.
그날 밤, 내 앞에서 고통을 호소하던 때와는 달리.
“참, 그런데 성에는 들렀다가 신전으로 온 거예요?”
내 질문에 아스테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는 오른팔을 살짝 들어 소맷자락을 걷었다. 그러자 그의 손목에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하늘색에 가까운 푸른 빛이 도는 실 팔찌.
실 팔찌를 확인한 나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이걸 제게 남겨 놓고 신전에 오지 말라고 할 생각이셨습니까?”
아스테인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실 팔찌라는 것을 확인한 날부터 나도 머리카락을 모았다.
아스테인의 머릿결만큼 부드럽지는 않았지만, 팔찌를 만드는 일에는 무리가 없었다.
물론 실이 아닌 머리카락이었기에 쉽지는 않았다. 그렇게 만들어 주머니 속에 넣어둔 실 팔찌가 내 마음을 전해주어서 기뻤다.
부끄러워하는 내게 아스테인이 다가왔다. 커다란 그의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에 얽혀 들어왔다.
“조금 전, 대사제들을 다루는 모습은 정말 훌륭했습니다.”
“정말요? 사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서 혼났어요.”
“그렇게 당당하게 그들 앞에 섰으면서 긴장하셨습니까?”
“네……. 회귀 전에 있었던 일들이 떠올라서요.”
살살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있던 아스테인의 손길이 멈췄다. 그의 손은 내 정수리 위로 올라갔다.
“오늘 정말 많은 칭찬을 해드려야겠군요.”
살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간지러웠다.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는 것 같은 손길이었다.
하지만 머리끝에서 시작된 간지러움이 발끝까지 전해지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느새 발가락까지 꼼지락댔으니.
“그런데…… 정말 황제 앞에 무릎을 꿇을 겁니까?”
조금은 못마땅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우리의 계획에 그것까지는 없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해야 찔리는 자들이 열심히 움직여 줄 테니까요. 웨르 사제 같은 사람이…….”
갑자기 아까의 일이 떠올랐다.
“아, 아스테인 님. 부탁이 있어요.”
“뭡니까?”
“신전에 왜 여자 대사제는 없는지 아세요?”
“글쎄요.”
“이전에는 많았다고 했거든요.”
“혹시…… 아까 그 눈 밑이 검던 음흉하게 생긴 사제 탓입니까?”
그는 역시나 내가 보고 있던 것을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내가 부탁하려는 것까지 예상하고 있었다.
“그를 한번 털어 보면 될까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도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 모습이 너무 듬직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나를 보며 심각한 얼굴을 했다.
“왜 그래요?”
“제 연인이 너무나도 유능해 바빠질 것을 생각하니 속상해서 그럽니다.”
아스테인은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살그머니 나를 그의 가슴으로 끌어들였다.
“저만 보고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아스테인의 심장이 콩콩 뛰는 소리가 오늘따라 유달리 크게 들렸다.
내 심장만 뛰는 것이 아니라서 좋아.
“데이트할 시간도 이제 없겠군요.”
“만들면 되죠. 크리세우스 님이 저렇게 열심히 감시해주는데 설마 시간이 없겠어요?”
그의 가슴에 기대 대답하자 기분 좋은 울림이 귓가에 전해졌다.
“하긴 맞는 말입니다.”
나는 아스테인의 품에 조금 더 매달리고 싶어 얼굴을 비비려고 했다.
그런데 어디서 갑자기 까마귀 소리가 들렸다. 소리에 맞춰 아스테인이 스르륵 내게서 멀어졌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모습에 아쉬워할 시간도 없었다.
“아, 성녀님. 아직 여기 계셨군요.”
우리 앞에 대사제 레무스가 나타났다. 그자는 아스테인을 지나쳐 내 옆에 바짝 붙었다. 아스테인과 나 사이에 정확히.
“성스러운 샘으로 가시던 길입니까?”
“네, 맞아요.”
“생각보다 걸음이 느리시군요. 아직 여기라니.”
별말 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괜히 혼자 뜨끔했다.
힐끔 보니 아스테인은 잔뜩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사제는 나와 같은 속도로 걸었다. 아스테인이 가까이 올 틈을 주지 않고.
“오늘 성녀님의 말씀에 감화되었습니다.”
“어떤 부분이요?”
“누군가의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이는 그만큼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는 소리 아닙니까?”
“그런가요?”
“그런 사람이 새로운 성녀라니 영광스럽군요. 신의 축복입니다.”
뭔가 레무스의 찬양이 거북해졌다.
내가 신전을 무너트리러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도 이럴까?
“참, 사가의 하녀분을 데리고 오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네 그런데요.”
“사가의 사용인 중에 베이트만 가문의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네, 어떻게 아시나요?”
“하하, 제가 그분의 막냇동생입니다.”
나는 뭔가 불길한 예감에 코끝을 찡그렸다. 어쩐지 그 형에 그 동생일 것 같아서.
* * *
성스러운 샘은 아직 푸토르 가의 기사들이 점거하고 있었다.
아스테인은 그들을 보자마자 글라디우스를 꺼내 들었다.
“성스러운 샘을 더럽힌 죄인들은 당장 무릎을 꿇어라.”
어쩐지 아스테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까칠했다.
물론 상대가 상대인지라 기를 누르기 위해 그랬겠지만…….
뭔가 알 것 같았다.
여기 오는 내내 레무스가 우리 사이에 끼어 있어서 눈길 한번 제대로 맞추지 못했으니까.
“저희는 선대 성녀님으로부터 성스러운 샘을 보호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비록 푸토르 가의 사병이지만, 성기사들과 협력하여 성스러운 샘을 잘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푸토르 가의 기사 중 하나가 억울함을 호소했다.
나는 그런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봤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회귀 전에도, 회귀 후에도.
“그런 자들이 성스러운 샘물을 빼돌렸나요?”
“아닙니다. 오해이십니다.”
“당신들이 후작가에 매일같이 약병에 담은 성스러운 샘물을 날랐던 것을 내가 봤는데도요?”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성스러운 샘물을 성수라며 팔았다.
신의 사랑을 받는 물은 만병통치약으로 쓰였다. 말도 안 되게 비싼 값으로.
“아니…… 저희는 지시에 따랐을 뿐입니다.”
“누구요? 말해 보세요.”
“그것이……. 대사제 웨르 님을 비롯하여 여러 신전 사람들입니다.”
후작은 언제든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수하들을 교육해 놓은 모양이었다.
그가 대사제 핑계를 드는 이유는 뻔했다. 그래야 신전 전체를 옭아매니까.
“그래서 본인들은 죄가 없다는 것인가?”
아스테인이 힘을 줬는지 검이 우아한 울림을 만들어냈다. 그 소리에 후작의 기사들이 움찔했다.
나는 그런 아스테인을 내 앞에 세운 뒤, 강한 어조로 말했다.
“누구의 죄인지는 조사를 하면 나오겠죠. 신성력의 속박 앞에서 거짓을 고할 간 큰 자가 없다면.”
내 협박까지 곁들여지자, 후작의 기사들은 어쩔 수 없이 투항해야 했다.
크리세우스가 데려온 성기사들이 죄인들을 묶어 데려가는 모습을 나는 조금 쓸쓸한 눈으로 봐야 했다.
“신전이 정말 안에서부터 많이 썩어 있었네요.”
“그 썩어 문드러진 곳을 정리하기 위해 프레이아 님께서 여기에 오신 것 아닙니까?”
아스테인이 나를 보며 다정하게도 웃어주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갈 수가 없었다.
중간에 끼어 있던 레무스 때문에.
“와! 대단하십니다. 성녀와 성기사의 호흡, 정말 환상적이군요.”
대사제 레무스는 맑게 웃으며 손뼉까지 쳤다.
그것이 어쩐지 무섭게 다가왔다.
“이래서 형님이 두 분 사이를 잘 지켜보라고 했군요.”
레무스의 말 때문이라도.
* * *
그날 저녁, 셀레미온은 잔뜩 기대에 부푼 얼굴로 신전으로 왔다.
그 아이는 방에 있던 나를 발견하자마자 달려와 내 품에 안겼다.
“으아아앙, 아가씨, 그날 그렇게 나가서 걱정했어요.”
“응.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이제 다 해결됐어.”
“정말요?”
고개를 빼꼼 들고 내게 물어보는 셀레미온을 보자 마음속에 따스한 기운이 맴돌았다.
날 걱정해주는 가족 같은 존재.
내게 셀레미온은 어느새 그렇게 다가왔다.
“그런데 이러면……. 힝, 대공님과는 이루어지지 못하는 거잖아요.”
아무도 없는데도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셀레미온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말요? 매일 대공님이 곁에서 호위하고 있는 걸 보면서 마음 아프지 않을 자신이 있으세요?”
나는 차마 셀레미온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응, 괜찮아. 그리고 헤어지는 것보다는 곁에 있는 것이 더 좋은걸?”
“아가씨가 머리카락으로 애써 팔찌도 만드셨는데…….”
“알았어?”
“그럼요.”
하긴, 머리카락을 모아 달라는 이유가 그것밖에 더 있었을까 싶었다.
“그걸 전해주지도 못하고 이렇게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된 거잖아요.”
말하는 게 나을까?
결정을 못 하고 내가 어색하게 웃고 있는데 갑자기 셀레미온이 손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맞다! 아가씨 손에 찬 팔찌도 알고 보면 대공님의 머리카락 아니에요?”
예리한 셀레미온의 지적에 나는 또 말문이 막혔다.
“응? 그런데 시기가 좀 이상한데?”
혼자 고민을 몇 번이고 하던 아이는 갑자기 내 손을 꽉 잡았다.
“아가씨, 제가 대공님에게 아가씨의 마음을 전하는 데 도움을 드릴게요.”
“응?”
“저에게 맡겨주세요. 저, 이래 봬도 제 손으로 짝을 지어준 커플들이 많다고요!”
나의 소중한 하녀는 내가 성녀라는 신분으로 여기 신전에 왔다는 사실을 잠시 잊은 것 같았다.